11/20/2009

원죄 사함과 허물의 사함을 구별합시다 (2)

예수의 피와 물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출40;12, 레8:6). 제사장들은 물로 씻어야 하나님 앞에 들어가도 죽임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신약시대부터 누구든지 예수의 피로 허물이 씻기지 아니하면 거듭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어서 42달 동안 짓밟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성정바깥 뜰에서만 경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바깥 뜰에서만 경배하는 원인은 진설상이 있는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은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육신만을 위하여 세상에 쌓기에만 급급하고 하나님을 위해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의를 도적질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11:4~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20:5)

여기서‘탐욕’그리고‘ㅡ도’라는 두 가지 단어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이 탐욕입니다. 어떤 서클에 휩쓸리는 ‘편승(便乘)’이‘-도’입니다. 민수기 기자는 탐욕을 ‘애바’라 하였는데, 이는 헬라어 프레오네시아(πλεογεξα)와 같인 ‘부당한 욕심, 지나친 욕심, 강요’ 등입니다.

민수기서 에서 말하는 탐욕이 지나친 욕심이나 부당한 욕심이라면 주제파악을 못하는 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성전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자들, 곧 물두멍에서부터 믿음생활을 시작하는 그들도 주제파악을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자신의 존재인식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히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물두멍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승이라는 ‘래카브’는 보조사(補助詞)입니다.‘ㅡ도’는 주격에서‘누구ㅡ도 좋은 사람이다’ 감탄사에서는‘과연 좋기ㅡ도 하구나’또 양보면에서‘오늘 안 되면 내일ㅡ좋소.’이러한 편승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 편승이 얼마나 나쁜지를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서를 보면 혼혈된 사람들이 불평할 때 그들의 불평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편승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동에 합류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렇게 편승한 것도 탐욕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편승하는 사람역시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자기 의지가 약해서 남이 끌어가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왜 씻기만 하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원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선물로 그 아들을 주셨다는 뜻이지, 육신의 권세이거나 죄의 현존(現存)에서 씻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현존이라는 뜻은 살아있는 육신이 허물이라는 죄와 함께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육신을 떠나서는 살수 없기에 어두움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욕심을 이용하여 마귀가 죄를 범하도록 미혹하기 때문에 성결함이 요구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리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믿음의 기초를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으므로 주님의 십자가 의로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짓는 허물이라는 죄까지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착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성전안으로 들어가서 감사와 기쁨으로 진설상을 배설해야 됩니다. 또한 감사와 기쁨으로 등대의 삶으로 어두움을 밝혀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인식하고 말하는 죄 사함은 허구일 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육신을 대신하여 물질을 아낌없이 풍성하게 드려도 기쁘기만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 자기가 드리는 예물로서 스스로가 성전안에서 경배하느냐, 바깥에서 경배하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는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느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범에 굴복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입으로 하신 말씀대로 거짓 없이 준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법대로 준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성전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선지는“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는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한다.”(말3:16~18)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은 어떤 날이며, 특별한 소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니라.”(딛3:9)

가정이나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은 바깥에서 경배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발생합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없고 기뻐함이 없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매사에 자기 뜻대로 하려합니다. 가정은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라는 가정법이 있습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질서를 위한 하나남의 법이 있습니다. 이법을 무시하고 질서를 파괴할 때 생기는 문제가 되는 네 가지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족보(ενεαλοα):‘게너아로기아’로 발음되는 족보는 조상들의 역사를 통한‘혈통자랑, 가문자랑’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족보 자랑은 자신의 부족함을 은폐시키게 위해 조상들의 업적을 부각시킵니다.

율법(νομιs):‘노미코스’로 발음되는 율법은‘율법[성경]해석, 법전’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영혼이 타락된 것을 숨기려고 ‘특정한 구절의 내용에 관한 말씀을 한쪽으로 치우침만을 모아서 세계적으로 변증[론]합니다’그런 일은 하나님이 주신 시내산 율법과 서기관들이 만들어 놓은 국법과 비교하면서 다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교단이 정해놓은 교단 법(-도그마)은 항상 상충되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변론(ζτσιs):‘지테시스’로 발음되는 변론은‘조사, 토론, 논쟁’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어떤 이유일지라도 변론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논쟁의 원인은 자기 믿음이 온전치 못한 것을 가리우기 위해 족보자랑이나 세상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변론하려 합니다.

분쟁(ριs):‘에리스’로 발음되는 분쟁은‘다툼, 논쟁, 불화’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물두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나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납니다. 자기족보 자랑이나 율법에 대한 다툼은 교단들이 만들어놓은 교법은 자신들의 사상에서 기인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이런 일은 어두운 세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구약에서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율법에 대한 다툼입니다. 왜 그러한 해석을 합니까?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탐욕 때문입니다.

잘 믿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6)

항상 잘 믿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이유는 그들의 욕심은 육신문제에 있고, 다음은 눈으로 보는 문제인데, 잘못 보는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본질을 떠나 지엽적인 일을 볼 때 그렇게 됩니다. 또한 사물을 볼 때도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데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이생(βοs-비오스)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생이라는 βοs는‘생활, 생활방편, 재산’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육신을 위하여 재산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생활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물두멍에서 씻기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의와 내 의
신앙생활을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ㅡ그리스도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로운 구세주가 되셨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구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로 나도 의로워졌다 ㅡ 합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자기는 행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그분의 의를 도적질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인식할까요? 생을 소유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는 움직이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은 두 가지 다른 길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생활로‘삶'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한 면은 사탄의 사주에 미혹 되는 생활로‘소유'로 살아갑니다.

삶(Life):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얻고 사랑을 공유하고 자기를 성화시켜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소유(possess):는 양식(良試)이라는 좋은 식견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합니다. 이러한 쟁취를 위하여 분석하게 되는데, 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서 그를 정복하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소유를‘크테마(κτμα)'라 하였는데, 뜻은‘재산, 토지, 밭, 짐승'까지 포함되는 소유물을 말합니다. 따라서 재산을 증식시키려고 모든 지식(idea)을 동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7~28)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ㅡ봐라!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롭게 되셨고, 나도 의롭게 되었다ㅡ는 논리를 세우면서,‘나는 예수를 믿으니 의롭게 되었다’그렇게 인식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성경을 자기 뜻에 맞추는 경우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탓입니다. 헬라어 로마서 3장27절에는‘국가(Χρα-초라)’를 생략하고 다만‘법(νμοs-노모스)’으로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국법의 행위(Χωρs ρων νμου)’로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국법의 행위(Χωρs ρων)’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율법(νμου)’자만을 표기해 놓았습니다. 이것을’율법‘으로 번역되었기에 그래서 오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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