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2011

달콤한 복음....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으리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정직히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16:33)

처음부터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순종하려면 불편과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율법에 비추어 문제가 없는 정당한 것들까지 많이 포기해야 했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는 길을 거칠고 가파르다. 그 길을 처음부처 끝까지 폭풍우가 몰아친다. 고난의 산과 굴욕의 골짜기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말하는 십자가는 내 제자들에게 닥칠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 나는 너희가 나에게 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를 따를 때 치러야 할 비용을 계산해보아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를 위한 '다른 복음'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성경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이 시대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단 한 번의 상담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주는 '우주의 심리학자'로 제시한다. 오늘날의 복음은 그리스도쎄거 요구하시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전하지 않는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특수기도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야훼 앞에 섰던 날에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4:10)

여러분에게 신속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은 기도로써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이때에는 특수 기도를 해야 하는데 특수 기도란 바로 금식 기도를 말합니다.


유대 민족들이 파사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적이 있습니다파사나라의 아하수에로 왕이 국무충리 하만의 모략에 넘어가 하만에게 유대 민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유대 민족은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온 유대 민족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올라 앉아 금식하며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그때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는 유대인 에스더였습니다에스더는 사촌 오빠 모르드개와 의논하여 전국의 유대인들에게 사흘 동안 금식하여 주께 부르짖게 하고왕비는 왕에게 가서 자기 민족을 위해서 간청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왕실의 법도로서는 왕이 왕비를 부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왕 앞으로 나갔다가 왕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비는 사형을 당했습니다그러나 유대 민족을 위해서 에스더는 자신이 사흘 동안 금식하고 유대 민족들에게도 사흘을 금식하게 한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며 왕 앞으로 나갔습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갔을 때 아하수에로 왕은 한달 동안 못 보던 에스더를 보니 너무 아름다운지라 마음에 감동되어 선뜻 금홀을 내밀었습니다왕이 금홀을 내밀면 왕비를 받아들인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금식 기도가 효과를 본 것입니다에스더는 죽음을 면했습니다왕은 에스더가 너무 사랑스러워 "원한다면 나라의 반이라도 줄테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다정하게 말했습니다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왕을 잔치에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한 왕에게 유대 민족의 슬픔을 호소하고 총리대신 하만의 불법을 고발하여 하만과 그 가족을 몰살토록 하고 온 유대민족이 전멸당하게 될 위기에서 구출하였던 것입니다이는 희생이 따르는 금식기도를 하나님께서 속히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일반적인 기도로써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지 않을 때에는 금식기도를 하여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머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

아바드(일하다) - 일과 예배는 하나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ybd)"는 "일하다"는 뜻이다. 동시에 "섬기다, 예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사형 "에베드(ybd)"는 "종, 노예, 일군"이라는 뜻과 아울러 "예배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른 명사형 "아보다"는 "노동, 일"이라는 뜻과 "예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하는 것이 어떻게 예배한다는 개념을 함께 갖게 되었을까? 일하는 것이 곧 예배인 이 오묘한 일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대시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면 아마도 당시에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왕족과 귀족들은 일하지 않았을 테고 대부분 직접 일하는 사람들은 왕과 귀족을 섬기는 노예, 하인들이었을 것이다. 자영농이 있었다고 해도 오늘날과 같은 동등한 자유로운 신분보다는 왕과 귀족들에게 자신들의 안녕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무척이나 종속적인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왕이나 귀족을 섬기는 일이 된다. 그러기에 일하는 것은 곧 섬기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일게다. 나아가 그 섬김이 왕을 위한 것이라면 왕을 신의 대리자로 여기던 시대에 왕을 섬기는 것은 곧 신을 섬기는 것, 예배하는 행위가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이 신은 하나님이었고, 나아가 결국 일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행위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구분한다.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불렀던 찬송이 기억난다. "월화수목금토 엿새동안에는 나를 위해 일하고, 복주시는 주일 하나님의 날은 주를 위해 일하세."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구분했다. 그리고 열심히 구별된 날들 동안 주를 섬겼다. 그러나 이 성과 속의 구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행하는 우리의 일을 "거룩"으로부터 구별시켰다. 나아가 어떤 경우 이 일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해도 괜챦은 세속의 일로까지 여겨졌다.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론은 바로 성경 속의 일과 예배의 일치됨을 재발견한 중대한 사건이다. 세속의 일과 성직을 구분하던 시대에 루터는 모든 사람들이 성직자임을 천명하였다. 모든 사람이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그 일 자체가 예배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직업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vocation은 "부르심(부르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보카치오(vocacio)"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통로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업은 "소명"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을 가졌던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말에 "천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내린 직업이란 뜻인데, 소명, 부르심의 개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일과 예배의 하나됨, 일치, 천직 개념의 회복, 부르심의 재발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직업은 돈버는 방법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선택에 있어서, 혹은 직업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우리 시대에 회복해야 할 개념은 바로 직장에서 일하는 것, 장사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이며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가족들과의 관계,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 형제에게 대하는 태도 모두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요 교회의 일을 거룩하게 여겨 기쁘게 짐을 지는 태도와 다르지 않음을 공감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하나되는 "하나됨"의 영성, "일치"의 영성이 성경의 히브리어 단어 "예배"가 주는 하나님의 메세지인 듯 하다.

바라크(무릎꿇다) - 무릎꿇는 것이 축복

히브리어 동사에는 강화형이라는 형태의 동사가 있다. 일반적인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면 보다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때리다"라는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면 "쳐부수다, 산산조각내다" 정도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어 보다 강화된, 강력한 행동 양식을 표현한다.

히브리어로 무릎꿇다는 뜻의 동사를 바라크 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릎꿇다"는 뜻의 동사를 강화형으로 만들면 어떤 뜻이 될까? 놀랍게도 "축복하다"라는 뜻이 된다. 어떻게 무릎을 꿇는 것이 축복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까? 무릎꿇는 것과 축복하는 것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고대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 복종,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을 의미했다. 일례로 한 나라의 왕이 타국의 왕앞에서 무릎을 꿇는 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했다는 뜻이며, 나아가 종이나 신하로서 새 왕을 섬기겠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나의 나라를 당신에게 모두 바친다는 온전한 헌사이기도 했다. 결국 항복은 정복당한 왕의 모든 소유를 새 왕에게 바치는 행위로 연결된다. 무릎꿇는 행위의 결국은 완전한 헌신, 봉사, 충성을 의미했다. 완전한 항복은 결국 정복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이 되는 셈이다.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헌신이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은 그 분 앞에 무릎꿇는 것임을 "바라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무릎꿇는 것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무릎꿇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행위이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흔히들 하나님께 나 자신을 희생하면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보상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축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지 우리의 헌신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물은 결코 아니다. 무릎꿇음으로, 헌신함으로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드릴 합당한 경배와 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