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09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빌라도가 주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 질문은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 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있는 진리를 우리 뜻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가 무엇이라고 했는가를 보아야 한다.

'진리'라는 명사는 헬라어로는 '절대적 진실'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이치'가 아닌 '참'요,'실제'이다. (헬라어로는 '이치'에 해당하는 어구가 없다.) 우리는 많은 진실한 일들에서 그 이치는 알 수 없어도 그 사실과 실제는 만질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17절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점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어떠한 태도가 아니요 하나님의 역사의 일종이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역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피를 흘리시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줄 수 없다. 하나님은 모세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십자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한 구절의 말씀에서 한면으로는 은혜를 볼 수 있고 또 한면으로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은혜는 예수로 말미암아 왔고, 진리 역시 예수로 말미암아 왔다. 또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주시어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진리를 성취하신 것이 은헤를 성취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아들의 역사로 인하여 은혜가 있고, 그 아들의 역사로 인하여 진리가 있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 은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은혜를 만들어 놓으셔야 사람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믿는 바이다. 이와 같이 주 예수님께서 진리를 만들어 놓으셔야 사람들에게 진리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 21절의 말씀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라고 했다. (원문에는 하나님이 "주 예수로 말미암아 진리를 성취하셨다"로 달리 번역된다.) 진리는 그 안에 있으며 진리는 그의 역사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곧 진리요" ( 14:6)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가운데서의 '진리'는 곧 실제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이 실제인가? 그것은 곧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역사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실존하는 그것이 곧 진리요, 그것이 곧 실제이다. 주 예수께서 흘린 피는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다 구속해 왔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나는 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속죄를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곧 나 자신이 주 예수로 인하여 성취된 사실인 것이다. 또한 내 속의 진실한 그것이 곧 진리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이미 이 역사를 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진리가 있다. 만일 주 예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근본 진리가 없고 실제도 없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죽은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지위가 없었다. 설 곳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주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가 진실로 실제인 것을 얻었고 또 하나님 앞에 실제가 있는 것이다. 그 실제는 바로 나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성경 가운데 말하는 진리는 강대상에서 말하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의 하나의 사실이다. 이론은 사람이 땅에서 전하는 것이요 진리는 주 예수께서 성취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람으로 변했는가? 주 예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나를 젼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그것이 진리요, 그것이 실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한 그것이 곧 진리요, 이 진리는 곧 주 예수 자신이다. 그러므로 모든 실제는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많은 사실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이다.

1. 진리가 우리를 해방함
우리에게는 분명히 진리가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여기에 즉시 뒤따르는 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찾아 보기로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상태와, 우리가 땅에 있는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십자가의 역사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멀었다. 주 예수께서 변하게 하신 ''와 땅에 있는 ''와는 아주 다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곧 우리 자신의 상태와 하나님 앞에 있는 진리와는 젼혀 상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기의 느낌과 경험을 힘입어 나아가고 하나님의 진리를 힘입어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느낌에 반대되고 우리의 경험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곧 무엇이 참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그것이 참인가, 아니면 우리의 느낌과 경험이 참인가? 과연 그 무엇이 참인가?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허다한 경우, 우리는 무엇이 참인가를 보지 못하고 무엇이 실제인가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발견할 때 진리는 반드시 우리를 자유케 하고 우리를 해방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일을 들어 진리가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자.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것으로부터 말하기로 한다. 어떤 사람이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그의 죄가 사함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죄를 대속한 것을 믿고 주님을 영접했다. 또 누구든 그에게 "당신은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 때 그의 속에는 정말 기쁨이 충만했다.

그러나 삼 개월, 오 개월이 지난 후 그의 몸이 불편했고 가정의 어려움도 많아 기쁨은 멀리멀리 떠난 느낌이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구원받지 않은 것같이 느껴졌고 하나님의 자녀같지도 않게 느껴졌다. 이때 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읍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대답하기 난처한 심정입니다. 지금 나에게서는 전의 그 기쁨은 사라졌고 주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나는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말해 주겠는가?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느낌으로는 구원받은 것 같지 않아도 당신이 구원 받은 것은 사실이요,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다. 느낌으로는 구원받은 것 같지 않아도 주님의 역사를 바라 볼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형제여, 결코 변치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느낌이 뜨거워도 구원받은 것이고 당신의 느낌이 뜨겁지 않다 해도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당신의 느낌은 변할지라도 주 예수께서 당신을 위하여 이루어 놓은 역사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주신 그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편에서 보고 계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 눈이 열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 예수의 역사로 말미암아 얻은 그것이 곧 실제요 곧 진리라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해방을 받고 자유케 된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서 해방받는 것이 아니요, 해방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실제이다.

한 형제가 있었다. 그는 확실히 회개한 사람이었고, 확실히 주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확실히 거듭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의 속의 느낌이 변하여 몹시 고통스럽게 되었고 꼭 멸망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때 어느 한 형제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멸망할 것 같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제가 전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속은 식어졌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성경을 읽어도 빛이 없습니다." "그 말은 당신 편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몇 가지를 봅시다. 주님의 역사에 에누리가 있읍니까?" "없읍니다." "그러면 주님의 역사에는 변함이 있읍니까?" "없읍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역사가 무효가 되어 버렸읍니까? 주님의 피로 세운 언약은 해약되어 버렸읍니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실제에 있어서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당신의 느낌에 변함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느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해도, 또 안 받았다 해도 관계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당신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읍니다. 이것이 변할 리 있읍니까?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 받은 것은 진리에 있는 것이요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형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내 생각으로 구원받았다 해도, 내 말로 구원받았다 해도, 내 느낌으로 구원받았다 해도 다 소용 없군요,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면 구원받은 것을..."

이것이 바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가 우리를 어떻게 해방시키는가에 대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거듭남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또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 놓으셨으며 우리의 옛사람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단체의 죽음이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도 그 안에서 같이 죽은 것이다. 그가 성취하신 것은 우리가 이미 죽은 자 됨이다. 이것이 진리요, 이것이 실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묶여 있게 된다. 곧 우리가 자신을 살펴 볼 때 우리에게는 여전히 혈기가 있고, 내 자신에게 부딪혀 볼 때 나는 여전히 약하고,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은 것이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 되는 것은 내 자신의 경험과 느낌이 실제냐, 아니면 주님의 역사가 실제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자신에게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그 묶여 있는 상태가 가장 실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 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만이 실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들이 하신 일이다. 우리 옛사람은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이 진리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혈기의 종이 되고, 경험에 묶이게 되고, 감정에 묶이게 된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능히 해방시킬 수 있을까?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우리의 느낌을 중시하고 우리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계속 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해방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또 한 가지 일, 곧 주님의 승리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과거에 어떤 형제가 몇 개월 동안 심신 양면으로 사탄의 시험에 걸려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아는 것을 다 동원하여 그것을 막고 기도하기를 삼 개월 동안 계속했다. 막을 대로 막아 보고, 기도할대로 기도해 보았으나 사탄의 침투는 계속될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주님께 말했다. "저는 사탄을 막지 못하겠읍니다. 제겐 막을 힘이 없읍니다. 저는 기도할 수 없읍니다. 제게는 막을 힘이 없읍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보게 하소서, 저의 병이 어디에 있는가를, 주여. 왜 이렇습니까?" 그 때 하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에게 한 마디를 주셨다. 그 한 마디는 그가 과거에 희미하게 보았던 것이지만 지금은 뚜렷이 보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곧 나는 사탄을 이렇게 막아서는 안 되다는 것이었다. 그 때 그는 실제를 보았다. 그 실제는 무엇이었던가?

이는 곧 주 예수님이 이미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님이 승리하실 것이니 내가 그 뒤를 따라가서 같이 승리하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승리하셨다는 것이다. 또 사탄이 실패하리라는 것이나, 내가 주님 앞에 기도하여 사탄이 실패하게 해 주십사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는 것은 사탄은 이미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래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이다. 그가 이 사실을 본 순간 그에게서 사탄의 시험은 끝났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도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이것이 곧 실제가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2. 진리와 빛
진리를 볼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빛이 온다. 시편 43 3절에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했다. 하나님은 무엇을 비추시는가? 하나님은 자기의 진리를 비추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빛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는 설교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반드시 빛이 옴으로써 알게 된다.

오늘 형제 자매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는가?"를 물어보면 대부분이 다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죽음은 도무지 효력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론만을 들은 것이요 실제로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실제를 볼 때 그는 그 빛을 얻을 수 있다.

어느 형제는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게 하시어 로마서 6장의 말씀과 에베소서 6장의 말씀을 보게 하셨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본 것은 하나의 사실이었다. 또 그가 주님의 승리에 참여한 것도 한 사실이었다. 과거에 그는 계속 얻기를 바래왔지만 현재에는 이미 얻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거에는 주님의 승리를 바랬으나 현재에는 주님이 이미 승리하신 것을 찬미하게 되었다. 그는 또 말했다. "나의 이러한 생활은 이전 생활과는 전혀 다르다. 과거의 모든 것이 다 환상과 사모함과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다 실제이다. 과거에는 내 손으로 붙잡으려 했으나 현재에는 이미 내 손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올 때 우리는 기뻐 뛰며 말할 것이다. 이미 이루어졌다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빛을 본 사람이다. 적어도 '구원받을 때 한번' 이라도 빛을 본 것이다. 구원받은 것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요 장래 얻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성취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 빛으로 실제를 볼 때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빛으로 이 사실을 본 사람이다. 모든 영적 경험은 다 빛으로 진리를 보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전할 때 빛이 없으면 그것은 이론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나 진리를 전할 때 하나님의 빛이 그 위에 비취면 그 진리를 곧 계시다. 또 이 계시를 얻을 때 진리를 얻게 된다. 이론을 얻은 자는 다만 머리에 충만한 것이 이상이요, 오직 진리를 얻는 사람만이 실제와 생명을 얻는다.

3. 진리의 영과 진리의 말씀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볼 때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영적 실제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다. 우리가 알 것은 보혜사가 곧 진리의 영이라는 것과 성경이 곧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또한 진리의 일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 모든 진리의 사실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을 믿을 때 성령은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신다. 곧 영적 사실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곧 그 실제이다.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하여 실제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이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고 또는 내 느낌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경험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실안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계시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우리가 계시를 얻을 때에는 우리의 경험을 생각지 않고 우리의 느낌도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사실만을 확신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옛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계시가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은 그의 옛사람이 죽은 것이 절대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령의 계시가 있는 자만이 능히 그 실제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로 계시를 얻게하여 그 사실을 보게 한 후에야 우리는 감히 옛사람이 죽은 그것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것은 "하나님이 성취하신 것을 우리는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영적 경험이다. 하나님이 이미 성취하신 사실을 보았다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이며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때야말로 나는 참된 경험을 한 것이며 주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사 우리가 무엇이 진리인지를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참으로 이 진리를 볼 때, 진리가 반드시 우리를 해방시킨다. 진리로부터 오는 것은 다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또 진리로부터 오는 것은 우리로 진리를 구하게 한다. 이 뜻은 바로 이 진리는 실제를 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사 우리로 실제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시기를 구하는 바이다.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양들은 아침 이슬을 먹고 산다


양들은 광야에 살기 때문에 시냇물을 마시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양들은 어떻게 어디에서 물을 마실까? 광야에는 비록 비가 내리지 않지만 수많은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슬을 먹고 산다. 광야에는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많은 이슬이 내린다.

목자는 양들에게 바로 이 이슬을 마시게 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양들을 데리고 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이슬이 다 말라버려 양들은 하루 종일 목말라하게 된다. 양들은 아침 이슬만 먹어도 하루를 사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양들은 이슬을 먹고 산다.

또 매일 밤새 내리는 이슬 때문에 풀들이 자란다. 양들은 바로 이 풀을 뜯어 먹고 산다. 이슬이 내리기 때문에 양들이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슬은 양들에게 생명이나 마찬가지다이스라엘에는 4월부터 시작해서 10월까지 과실수가 자라는 동안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에서 나는 과일은 달기로 유명하다. 당도가 엄청 높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포도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는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 열매들이 맺히는 것일까? 바로 이슬 때문이다. 이슬 먹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성경에서 비와 이슬은 축복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한편 이스라엘을 벌하실 때는 비만 안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슬도 내려주지 않으셨다(삼하 1:21, 왕상 17:1).

보통 우리는 “비와 이슬”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사무엘하 1:21에서는 “이슬과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슬이 비보다 먼저 언급되어 있다.

열왕기상 17:1에도 우리 성경에는 “비도 이슬도”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이슬도 비도”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슬이 먼저 나오고 비는 뒤에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비 못지않게 이슬이 중요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실 때 이슬과 비를 모두 내려주지 않으시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만 내려주지 않으시면 겨울철과 봄철에 짓는 곡식 농사만 망한다. 그러나 여름 농사에는 별로 지장이 없다. 여름 농사(과일)는 비가 아니라 이슬로 짓기 때문이다. 이슬과 비를 모두 내려주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말씀은 곡식 농사와 과일 농사 모두 망하게 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부흥회 같은 때에 장마비 같이 쏟아부어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 큰 비가 와 줘야 나무나 식물들이 부쩍부쩍 자라게 된다. 그러나 한두 번 큰 비가 내렸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산천초목이 비가 내리지 않는 계절에도 푸르른 것은 이슬 때문이다. 매일 매일 내리는 이슬을 먹고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매일 매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서, 새벽 기도를 통해서, 주일마다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슬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매일 내려주신다. 그 은혜의 이슬을 먹고 우리 영혼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우리에게 임한다. 이슬은 밤에만 내린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슬 같은 은혜를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의 캄캄한 밤을 잘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린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마찬가지다. 장마 비처럼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임하는 은혜와 축복도 있고, 이슬처럼 아무도 모르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다.

비는 요란하게 내린다. 그러나 이슬은 소리 없이 내린다. 고요한 밤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중에 내린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슬과 같아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살며시 임한다.

이슬은 매일 내린다. 일 년에 한 두 번 내리고 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다. 1 365일 매일같이 은혜를 내려주신다. 변함없이 은혜를 내려주신다.

이슬이 내릴 때는 모르지만, 아침에 보면 이슬이 흠뻑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때 우리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될 때가 많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어둔 밤이 지나고 인생의 새아침이 밝아오면 우리가 이슬처럼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장마 비 같이 내리는 은혜만 구하지 말고, 이슬비같이 내리는 은혜를 소중히 여기라. 밤이슬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도 매일 받다 보면 온 몸이 은혜 속에 젖게 된다.

<출처:뉴스코리아 - 김은아>

계 1-5장 일곱 교회에 나타난 신약 시대 역사 연구


1. 계시록의 서론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계획

   1) 1:1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계시록 전체의 목적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모든 것이 일순간에 다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들이 빠른 속도로 성취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계시록의 성취는 이미 요한의 시대에 시작되고 있으며, 신약 시대를 살고있는 교회는 모두 계시록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특별하게 사랑으로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전체 인류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의 엄청난 반대와 핍박에 직면하고 있고, 이러한 반대와 핍박과 미움은 세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며, 세상의 전투 못지 않게 영적인 전쟁도 대단히 치열하지만,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가 있다. 자신의 계획 전체를 자기의 사랑하는 종들에게 미리 다 알려 주셔서 다가오는 환난을 흔들림 없이 이기게 하시는 것은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계시록을 기록한 보다 포괄적인 목적과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탄의 유혹과 핍박에 맞서 거룩함을 유지하고 고난을 이겨내며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모든 교회와 종들을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다.

   2)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 말씀을 볼 때 계시록이 쓰여진 분명한 내용과 계시록의 범위, 그리고 이 계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나타나고 있다. "네 본 것"은 즉 교회에 관한 계시이다(1:20). 따라서 계시록은 교회에 주시는 현재와 미래에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질 일에 관한 책이다.

   2.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나타난 전체 교회 시대의 역사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신약 시대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특정 교회에 제한적으로 계시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에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때문에 계 1:3에서 구체적으로 특정 교회 특정인에게 제한하지 않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고 한 것이다.

   1) 일곱 교회는 1차적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상징과 대표성때문에 전체 교회에 대한 특징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특징보다도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사자를 일곱 별로, 교회를 일곱 금 촛대로 표현한 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표현한 것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이다. 완전수 7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계시의 대상은 모든 교회의 사자들과 모든 주님의 교회들이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종이나 교회도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호와 통치를 받지 않는 교회란 없다.

   2) 일곱 교회 각각에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의 모습을 종합하면 전체적인 주님의 모습을 보여준다.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2:1),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2:8),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2: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2:18),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3:1),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3:14)

   3) 위 아래와 마찬가지로 일곱 교회 중 각각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위험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며, 교회가 직면할 수 있는 문제들의 일반적으로 다룬 것이다. 거짓 사도들의 유혹(2:3), 처음 사랑을 버림(2:4), 궁핍(2:9),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 즉 사단의 무리의 훼방(2:9), 고난과 옥에 갇힘(2:10), 순교와 생명에 대한 위험(2:13), 발람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행하는 자들 교회에 존재함(2:14),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에 존재함(2:15),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을 교회가 용납하여 교회를음행과 우상의 제물로 더럽힘(2:20),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여 명목상 살아있는 교회(3:1,2), 세상의부를 축적하여 교만에 빠져 자신의 부끄럽고 가난하고 눈 먼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교회(3:15-18),

   4) 반대로 각 교회가 세상과 마귀의 유혹과 도전을 승리하며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는 모습은 전체 신약 시대 교회의 모습이다. 주님을 위한 행위와 수고와 인내(2:2, 3),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의 거짓됨을 드러냄(2:2-3),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2:6), 받는 훼방과 환난, 궁핍을 승리하고 죽도록 충성함(2:9-10), 순교를 생명에 대한 위험을 이기고 믿음을 지킴(2:13), 주님을 위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2:19),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소수(3:3),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함(3:9). 주님은 교회의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그 근본부터 하나도 빠짐 없이 알고 계시는 분이시며, 행한 대로 징계하시며 상주시는 의로우신 분이시다.

   5) 주님이 범죄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어느 시대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징계가 내려질 수 있다. 일곱 교회를 통해서 각각의 범죄한 교회에 대한 책망과 징계에 대한 경고는 전체가 하나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김(2:5), 회개하지 않으면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싸울 것(2:16), 행위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사망으로 자녀를 죽일 것(2:22, 23), 회개하여 일깨지 않으면 도적 같이 올 것(3:3),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3:19, 20)

   6) 각각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은 편지를 쓰는 교회 전체를 향해 주시는 것아니라 그 교회 안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각각의 약속들은 승리한 전체 또는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전체적인 보상이다.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2:10).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2:17).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27, 28).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4-5).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로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7) 각각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는 모든 교회에게 보내는 일반적인 메시지를 하나 같이 곁들이고 있다(2:7, 11, 17, 29; 3:6, 13, 22).

   8)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대부분의 교회 편지에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현재 어려움과 문제과 고난을 겪고 있는 교회들에게 종말론적인 약속을 하고 있다. 간접적으로는 두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전체 교회에 종말론적인 경고와 약속을 하나씩 하고 있다."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3:3)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0-11)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일곱 편지에 대한 의의
전체 신약 교회 시대에서 각 시대마다 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대주의자들처럼 일곱 교회를 신약 시대의 7 세대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한 세대의 모든 교회가 100% 칭찬만 받거나 100% 책망만 받는 교회는 없다. 또 범죄하고 타락해 가는 교회에 대한 책망과 징계는 대부분 세대주의자들의 논리에 반하는 것으로 특정한 세대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 볼 수 없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유혹과 도전은 신약 시대 전반에 걸쳐서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항상 현재적인 명령이지만, 또한 종말론적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기도 하다. 일곱 교회로 나타나지만, 결국에는 주님의 몸된 한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각각의 교회에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종합하면 전체의 주님의 모습이라는 점과 승리한 각각의 성도들이 받게 되는 상급도 특별한 시대의 교회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승리한 성도들 누구에게나 주시는 상급이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지만,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전체 교회가 아닌 특별한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들이 있는가 하면, 각 편지에서 모든 교회에게 성령이 하시는 음성을 들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결국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각 교회와 성도들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고, 회개할 것은 고치고 위로와 격려와 약속을 통해 더욱 분발하여 주님을 믿으며,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함으로써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계시록 4-5장과 일곱 교회와의 관계

첫째, 4-5장은 계 2-3의 일곱 교회와 교회의 사자들이 승리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어서 각 교회의 승리한 자들에게 약속한 대로 상급을 받은 승리한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의도적인 것이다. 주님을 위한 수고하며 인내하고(2:2, 3), 악한 자와 자칭 사도의 거짓된 유혹과 싸우고(2:2-3), 교회를 혼잡케 하는 니골라당과 싸우고(2:6), 궁핍과 훼방과 환난을 견뎌내고(2:9-10),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2:13), 주님을 위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나타내고(2:19), 교회의 많은 무리가 세상과 타협함에도 불구하고 비록 소수이지만 외롭게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3:3),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며(3:9) 죽도록 충성한 자들에게 약속된 것은 흰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승리하신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고 있다. 4:4 일곱 교회와 일곱 사자가 모든 교회와 모든 종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24장로는 대표성을 띠고 있다.

둘째, 4-5장은 계 20:4-6에 나타난 천년왕국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4:1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은 계 1:1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이시려고" 와 계 1:19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22:6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들을 보내셨도다" 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또 이것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는 말씀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주님은 장차 오실 분이지만 이미 승리하여 보좌에 앉아계시는 분이시다( 4:2-3, 10-11; 5:5, 9-10, 13).

주님은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주님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이며, 주님의 미래는 교회의 미래이다. "이제도 계신" 주님은 승리한 주님이시다. 4-5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주님이 현재 승리한 영광의 상태로 찬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승리한 주님이 교회를 향하여 승리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이미 승리를 하여 만물을 그 발아래복종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의 몸된 교회는 당연히 만물 위에 존재한다( 1:19-22).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혀졌다( 2:6).

4:1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승리에 관한 말씀이다. 물론 위에 언급된 관련 구절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는 교회가 환난을 받을 것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16:33). 세상에서 교회가 여전히 환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고, 보좌에 앉혀졌으며, 왕노릇을 하고 있다. 승리하신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도 또한 주님과 함께 심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장차 속히 될 일" '장차 오실 분"은 동일하게 주님과 교회의 최종적인 승리를 의도하고 있다.

5:9-10은 분명히 계 20:4-6과 동일한 내용이다.
5:9-10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기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5:9-10은 계 7:9-13에 나타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승리하여 흰 옷을 입은 자들이지만, "큰 환난 가운데서 나오는 자들"이다. 이것은 계 20:4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다. 대신에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 14:1).
  
모든 관련 구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라, 즉 왕국을 이루어 하나님의 앞에서 제사장이 되어 왕노릇한다.
  
20:4, 5절에서 "살아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엡 2:5, 6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또 함께 일으키사"와 동일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고 하늘에 올려지고 보좌에 앉혀져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을 하고 있지만, 20:4-6은 특별히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의 천상의 승리의 상태를 제한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들이야 말로 확실하게 첫째 부활의 완전한 성취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만일 천년왕국이 신약 시대 전체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확실하다면, 소위 666과 관련된 짐승의 표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한 시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약 교회 시대 전반에 걸쳐서 성취되고 있는 사건이며, 또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는 보다 강력하게 나타날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계 13장에 나타나는 두 짐승과도 깊은 관련이 있고, 짐승이 활동하는 시기와도 관련이 있다. 동일한 관점에서 이 두 짐승은 신약 시대의 특정 기간(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고자 한다.

하나님의 뜻...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13)

예수님의 이 엄격한 선언은 우리의 신앙속에 조금은 고민되고 걱정스럽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우리가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가지 못 한다고 한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다는 얘기다. 그 날에(심판의 날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날에 내가 저희(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 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씀인가?
분명히 저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귀신도 쫓아 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 하며 쫓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 날에 가서 만약 우리가 저런 수모를 격게 된다면 참으로 불행하고 슬픈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우리가 예수를 믿다가 천국에 들어 가느냐 마느냐는  영벌이냐 영생이냐의 사할이 걸린 문제나 다름없다그러나 주여! 주여하는 자라고 다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 뜻을 행하는 자만 간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아버지 뜻이 뭔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서라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는 (34:16) 말씀을 무심코 흘려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 하시는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필히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잘 못 된 성경 지식에 빠져 말씀을 섯불리 해석 해 버리기가 십다. 인본적인 관점에서 사람의 지혜나, 자기 생각과 관념, 자기 주장으로 풀이 해석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을 요구하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예수님도 친히 말씀 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6:38-39)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자신의 뜻을 행하려 온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자기 뜻대로 한 일들이 아니였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린 일 뿐이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7)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떤 뜻을 행하셨는가?
위에 말씀으로 풀이 해 보아 하나님은 구원 얻을 천국 백성들을 예수님 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그들을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이 예수님에게 원하신 아버지(하나님)의 뜻이였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구원받을 자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들을 예수님에게 주시면서 하나도 그들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내게 오는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한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로 부터 구원 받을 자(천국백성)를 받았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한다. 예수님은 이 뜻(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신 뜻)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 하나를 발견한다. 예수님은 마7:21-13 에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었다. 그런데 지금 요6:37-40 에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시고 있다.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다 가는 것이 아니다고 하시고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가 내게로 올것이다 하신다. 그리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않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지금 이 두 말씀들 속에서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한다. 우리는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는 천국에 간다. 문제는 주여 주여 한 모든 자가 아닌 예수님에게 주신자다! 다시말해 예수님에게 가는 자가 중요 하다는 것이다!

이말을 바꾸어 말해서 예수님에게 가는 자는 곧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자다! 오직 예수님은 이런 자들은 내어 쫓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했다 하여 다 천국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오직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이끄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그 자는 예수님에게만 가는 자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에게만 가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지 않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내어 쫓기는 일만 있는 것이다. 예수가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기에, 예수에게만 가야 하는데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7-13)

예수님은 양(아버지가 주신 자)의 문이시다. 예수님이 문이시니 누구든지 예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일용할 양식도 얻는다. 예수님은 자기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시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뜻의 행하기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하신 분이시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예수님은 다음 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22:42-43)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이였다. 그리스도께서(예수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1:4) , 바로 그 십자가 죽음을 행하라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친히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5:30) 고 말씀 하셨고 십자가를 지시며 죽어야 하는 그 앞에서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4)는 아버지 뜻대로만 행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가서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 드리기 위한 것이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우리를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 바로 그것을 행라고 명을 받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하에 우리를 대신 해 죽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죄의 삯을 당신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고 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 드린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자기 뜻을 행하셨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십자가는 절대 지지 못 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6:47-51)

우리는 믿으면 영생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분이 양의 문이 되고 목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늘에서 내린 영원한 양식되는 산 떡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분 안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면 된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된다. 이 뜻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다. 이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뜻이 되는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와서 우리에게 영적 양식이 되신 것이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그 예수라는 영적양식을 먹는자가 된 것이다.

예수외엔 다른 것이 우리를 살리게 못한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않는 다 하셨다. 우리는 예수께로 가야 산다. 예수께로 가면 예수님은 절대로 내어 쫓지 않으신다. 예수 안에만 우리의 생명이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딛후1:1)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1-4)

주여 주여 하면서도 예수께로 가지 않고 자기 힘, 자기 의, 자기 자랑, 을 하는 자는 심판날에 내어쫓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예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2:2-3)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께로 가는 것이다. 예수께로 간다는 뜻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만 믿겠다는 것이 예수께로 가는 뜻이다.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를 배반하면 안된다. 예수가 아닌 그 어떤 다른 이름행위, 열심 으로 천국 간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오직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간다는 복음이 변질 되선 안된다.

구원은 어렵게 얻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들을 여기저기서 뒤져가며 찾아봐야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구원을 얻는 길은 세상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신 예수를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붙들고 살면 되는 것이다. 십자가로 1차 구원을 얻고, 다른 것으로 2차 구원을 완성 한다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시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완성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를 향하신 하님의 구원 방식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선이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 그길 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예수께로 가는 길이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예수께로 가야만이 예수님이 받아 주시는 것이다.

그 어떤 죄질이 강한 죄인이라하여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누구에게라도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미 세상 죄는 2000년전에 예수께서 다 사하셨다! 아담 한 사람으로 온 인류에게 사망이 온 것 같이 공의로운 하나님은 예수 한 분 만으로 온 인류가 살길을 만들어 논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 하기만 되는 것이다. 믿음이 구원이다. 구원은 믿음 안에만 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복음 하나 만이 온 세상이 믿음으로 지켜가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온 교회 위에 회복이 되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간절히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절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을 붙들고, 이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 하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증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이순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 하신다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12:50)

<출처: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십자가' 중심의 복음


복음적이 아니면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교회를 복음적인 것으로 바뀌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항상 복음 뿐이다는 말이다. 복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은 스스로 복음적인 교회를 낳기 때문에 교회를 일단 만들어 놓고 그것을 복음적 교회를 바꿀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 더나아가서 기존 교회를 복음적 교회로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복음적이다.

복음의 발생처는 하늘이다.
하늘 나라에 복음이 나온다는 말은 이미 세상 모두가 종결 체비에 돌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늘은 지상에서 볼 때 감추어진 세상이다. 그런데 그 감추어진 하늘 세상의 비밀에 땅까지 전달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완전한 거룩의 차원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작업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롬 16:25-27) 즉 하늘 나라나 이 세상 나라는 비상 세태에 벌써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 정죄의 신호탄은 십자가 사건이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영광의 주'를 못 알아보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지혜이며 이런 지혜에 대해서 하나님은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단체의 일종으로서의 교회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며 진정 중요한 것은 복음에 관한 관심사 유무이다.

십자가가 하늘의 감취었던 비밀이라면, 그 비밀은 하나님 입장에서 봐서도 가장 심오한 내용의 위치에 있다. 즉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한 통달했음의 증거는 오로지 십자가에 관해서 바른 이해를 하고 있느냐로 판정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어떤 식으로도 이 '하나님의 깊은 곳'을 통달될 수 없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11) 사람은 자기 지혜로 산다. 갖추어놓은 지혜로 무엇이든지 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지혜가 엉터리 지혜라는 것이 판명이 났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뒤 이은 그 분의 부활로 근거로 하여 인간 지혜의 무용성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폭로당했다. 인간은 자기 영 안에 갇혀 지내며 자기 지혜 안에 포로잡혀 있다. 부활도 알지 못하고 십자가의 지혜도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지혜라고 품고 다닌다. 이러한 인간들의 교만함을 향하여 하나님은 반()지혜적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인간의 지혜로움의 차원에서 봤을 때, 십자가는 아예 어리석음의 범주에 있기를 자청했다. 지혜로움에서 출발하여 지혜로움으로 대화하겠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리석음으로 마중 나간다. 접속이 될 리가 없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남기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자력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소경으로 판정 받는다. 십자가에 관한 내용도 동일하게 이것과 이어져 있다. 인간의 어떤 지혜도 십자가와 연속되는 지혜는 없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십자가 지혜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지혜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 십자가는 본래의 십자가가 아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임의로 창안해 낸 멋진(?) 십자가이다. 인류의 역사가 이끌어낸 총지혜의 집합체로서 가짜 십자가이다. 사람은 어리석음을 겁낸다. 어리석음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혜로서 극복하려든다. 그러나 이런 노력 또한 소경의 지혜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서 출발하므로 필히 십자가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인간들의 종교적, 철학적 지혜와 접촉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도 허락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를 고수하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지혜, 즉 십자가의 지혜는 계속해서 어리석음으로 일관하는 그 속성으로 인해 인간 쪽에서 싫어지도록 만든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만의 능력으로 실시하겠끔 하는 원리원칙이다. 세상에서 기대하는 지혜와 기적과는 의도적으로 고리를 끊는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이 본문의 취지는 인간의 전도 행위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 행위 자체가 십자가의 도의 어리석음과 하나님만의 능력에 기초한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다는데 있다. 즉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능력에 기초한 전도는 전도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데"( 15:14)

참된 전도란 계속해서 어리석음을 견지해 주어야 한다. 인간의 지혜로 접속이 가능한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허락해서는 아니된다. 소경이기에 소경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만 나서야 한다. 그래서 인간들로부터 '어리석음의 극치', '어리석음의 폭발'이라는 소리가 절로 듣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세상에서 간주하는 그 어리석음을 구원의 도로 확실하게 다지셨다. 십자가의 도의 기능은 모든 인간을 소경 되게 하는데 있다. 소경이었노라고 고백하는 자를 비로소 보는 자로 간주하고, 제대로 봐왔다고 하는 자를 소경으로 규정짓는 기능이다.

인간은 자기 지혜를 버려야 한다. 그것을 고수해서는 아니된다. 인간의 그 어떠한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바로 죄로 인하여 '알 수 없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체로서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을 알 수 있는 발판인 것처럼 여겨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인간들의 상상 속의 신 개념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모습이기에 두말 하지 않고 내동댕이치고 싶은 인물이요 어리석음의 대변자와 상대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어리석음의 신학이 예수님 입에서 쏟아져 나왔으며 어리석은 미래상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한 자가 사람들 등살에 못 이겨 세상에서 쫓김 당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된다는 이 시나리오가 얼마나 통째로 어리석음의 덩어리인가!

바로 이 어리석음을 배후를 알아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부정하고 철폐하시기 위해 이런 작전을 펼치시는 것이다. 인간의 죄악된 지혜를 지혜라고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죄라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의 어리석음 앞에서 판정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십자가에 나오는 모든 것과 비교가 된다. 즉 살아있는 인간과 십자가 달려서 죄인으로 죽게 되신 예수님과 모든 것에서 빠짐없이 하나 하나 비교된다. 인간의 하소연과 희망과 포부 같은 것이 모두 자기 지혜를 근거로 해서 터져 나오는 가증한 것들이다.

자신의 소경 됨과 어리석음은 인정치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불성실성과 무능함을 비난하게 되어 있다. 나름대로 신학이라는 이름의 지혜와 종교성이라는 지혜를 확보하고 있으니 이런 지혜들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 합당한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믿음조차도 사람의 지혜에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인간들이 소지하고 있는 신학이라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그 죄악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인간이 구축한 신론은 그 어떤 식으로도 십자가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대신할 처지에 있지 않다.

구원론도 마찬가지요 종말론이나 기독론이나 계시론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다 십자가를 대신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을 정죄하는 차원에서 종말 때에 말씀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종말 때에는(오늘날에는) 이미 말씀이 성취 차원에 놓인 상황이 되어 있다. 말씀의 전파는 그 임무를 이미 완료하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0:18) 이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 말씀은 땅 끝까지 이미 전파된 상태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이 전파된 말씀대로 움직여 나가는 현상만이 시시각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 예가 그 다음 구절에 바로 이어진다"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슬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10:19-21)

즉 이사야 65:1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 들어서서 그 완성도를 충분히 표출하게 되는데 그 확실한 증거로서 이방인들이 주께서 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동시에 유대인들은 시기나 있다. 이것도 또한 말씀이 이미 완성된 현상들이다. 그러니까 말씀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취력을 발휘하는데 그 장이 바로 오늘날의 현 세상이다 는 말이다. 이러한 말씀의 스스로 됨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이성을 철저히 공박하고 배제하기 원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유감없이 이 말씀 안에서 완성태로서 작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신학, 철학, 과학, 종교성이 결코 말씀을 손톱만큼도 성취시키기 못한다. 이것들은 되레 말씀의 성취성을 모독하려 들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했다.

이제부터의 전도는, 십자가의 도가 곧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임을 증거 하는 전도이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무엇을 요청하는 전도가 아니요 하나님의 일에 협조와 지혜를 구하는 전도가 아니라 도리어 이미 완성된 구원의 능력이 자기 백성을 임의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실행해 옮기기 위한 전도이다. 고린도전서 1:26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하셨다.

문벌이 좋아서 불러주신 것도 아니라 반대로 문벌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의 지혜를 초월해서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으로만 부름을 받는 자만이 참 성도가 된다. 그만한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는 이유는, 십자가 능력만이 구원의 능력으로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여기서 '주 안에서', 기존 세계와 대비된 세계의 존재를 근거로 하는 말씀인데 기존 세계는 하나님께서 아예 저주를 퍼붓기 위해 '율법 안'의 세계로 규정지어 놓은 상태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율법에 의해서 철저히 정죄당한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5)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이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될 능력이 있는가 탐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확인되면 후속 구원 처방을 새로 장만하기 위해 그냥 철수해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공격용이다. 철저히 인간을 분쇄하기 위해 찾아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 '자랑하는' 행위는 가증된 행위이며 저주를 부르는 행위이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 자랑'은 끝났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3:21) 오직 주님만 자랑거리로 남는다.

'자랑'에 관한 문제 뿐만 아니라 낙담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나 실패 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허용이 안된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자신의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인간은 자기 지혜와 더불어 노을 속에 지고 같이 무덤에 묻힌다. 그런데 무덤의 진정한 의미는 각자가 판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이 시대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심판 앞에서 인간들이 그 동안 절제하며 통제하며 조절하며 관리해 왔던 모든 것들이 소용없는 짓이었음이 드러난다. 귀한 생명의 사라지는 그 면전에서 느끼는 허무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의 저주받은 생명으로 출생하게 된 연유를 그 동안 미처 몰랐다는데서 오는 쇼크이다. 십자가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 오늘도 전파된다. 진노의 그릇을 긍휼의 그릇으로 바뀌게 하기 위해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되어 버린 십자가의 성취성이 이 시대에 맞는 확인절차를 나타내는 것이다.

누가 구원이 되었던 누가 구원이 아니되었던 십자가의 위력은 실수가 없고 빈틈이 없다"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느니라"(고후1 1:20)

결 론
사도는 우주의 본질을 보았고 우주의 비밀을 알았다. 복음을 알게 된 자는 더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누가 되었던 마찬가지이다.

신에 관심있어 매달려 기도하고, 교회에 관심두고, 기독교에 관심있고, 신학에 관심을 두고 매진하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인간들의 자기 지혜를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다. 일종의 자기 과시욕과 자랑거리 만들기와 관련있다.

복음이란, 십자가만을 하늘의 지혜의 근원으로 삼고 거기서 부활과 재림과 모든 성령의 사역을 유발시킨다. 따라서 참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 여부를 알자면, 부활과 예수님 재림과 모든 성령의 사역과 결과와 열매들을 논하면서 결국에는 십자가의 스스로의 능력에만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가를 확인하면 된다. 만약 인간들의 자질이나 양심이나 능력이나 교회의 능력에 기대를 건다면 이것은 복음을 빠트린 유사 교회에 해당된다.

눈에 보이는 인간이나 교회의 존재 가치를 무시한다면 이 땅의 세계에서는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더욱 복음을 복음이게 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하늘의 감추인 비밀'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움직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복음의 가치만을 드높이게 위한 정죄의 심판의 대상으로 우리 눈앞에 꾸준히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이 점을 믿자!

<출처: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 >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은총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한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회들 지붕 지붕마다 십자가를 달게 되었고, 심지어는 십자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수호의 상징으로 달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그 진정한 구속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입으로만 찬송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어떻게 대신 지실 수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실 수가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죄의 결과를 우리 대신 경험하실 수가 있었을까?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이해하여야 할 문제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사랑하고 찬송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몸으로 죄를 지셨다는 의미>
우리는 베드로 전서 2: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몸으로 남의 죄를 질 수 있을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되는가?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묘한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 땀이 몸을 적시게 된다. 그리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 죄를 우리의 몸으로 지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들을 당신의 몸에 대신 지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통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 자신의 잘못이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 대신 전가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부채를 은행의 구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대가를 다시 치루어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 40장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데 충분하다. 시편 40: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짖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라.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려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인 것이다. 조금 전에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느끼는 죄책감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에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들의 모든 죄를 지금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시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과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 그리고 뼈아픈 죄책감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갑자기 마음에 그리고 당신의 몸에 느끼기 시작하신 것이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당하심>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다. 어느 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어가면서 그러한 외침을 한 적이 있었는가? 순교자들은 모두 다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 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지 아니했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경험이 없이 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십자가에서 갑자기 하늘 아버지와 절연되는 느낌을 느끼신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예수님을 깜깜한 지옥 같은 절망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

이 말씀에도 우리가 받을 죄의 값을 예수께서 대신, 실제적으로 경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 죄를 지신 것은 그 죄의 고통을 대신 경험하여 주신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대신 책임지기 위하여 전가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또한 이사야서 53:12절 중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중에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자신이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이해 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이다.

이 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다. 이것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죄 그 자체가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 되셔서 형벌을 받아 주신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을 느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를 대신 몸에 지시는 경험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탄원하시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하나님과 아니 하늘 그 자체와 영원히 분리되어 죽어 버릴 가능성을 내다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 고뇌의 아픔을 과연 누가 이해 할 수 있었겠는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죄의 고통>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억해 보자. 예수께서는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서서히 돌아가시지 아니하셨다. 십자가의 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아니했기 때문에 속히 죽게 하기 위하여 다리를 꺽었지만 예수께서는 벌써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성경은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갑자기 파열되어 돌아가신 증거이다. 로마 군인이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심장이 터져서 파열되었기 때문에 혈구와 혈청이 나뉘어져서 물과 피가 따로 흘러 내린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지시면서 그 괴로움과 죄 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셔서 예수님의 심장은 그만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못박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죄가 찌르는 아픔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죄악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 40 12절은 예수의 고통의 장면을 그린 예언에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그러므로 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어 예수께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린 표현의 감각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자기 개인의 마음 속으로 믿고, 정말로 감사하며 눈물겹게 받아드리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죄를 주께서 실제로 대신 지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심판 당하시는 것으로 느끼셨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리고 있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위하여 죄를 대신 지시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를 포기하고 아름답고 고통이 없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 버려야 할지를 선택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마귀는 예수의 곁에서 그를 몹시 괴롭혔다. 감사치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인류들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일이 될 것이요, 이제 이 대속의 죽음은 그를 영원히 멸망당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들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을 하셔야 하였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율법을 만드신 그분만이 인류를 대속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의 죽음을 영원한 것으로 느끼셨다. 다시는 무덤 속에서 나와 부활하지 못할 것처럼 느끼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도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고 계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자신의 영생과의 사이의 선택에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다.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다. 그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다.

선택은 이루어 졌다. 주님의 너무나도 큰 사랑이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차라리 당신이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와 나를 구하여 내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부터 결정해 놓으신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삼일만에 부활해 내시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과연 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 할 수가 있을까?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그 사랑을 다 기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드려 감격해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 그 훨씬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해 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출처: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