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2010

무엇을 위해 부르짖어야 하는가 – 코리 러설

영적 리더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임재를 위해 분투하며 애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로 지금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잠언 2장의 사명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영적 리더이다. 오늘날의 교회와 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주를 경외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만! –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그분에 대한 살아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영적 리더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할을 하게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레오나드 라벤힐(Loenard Revenhill) 그의 [부흥의 때가 미루어지는 이유(Why Revival Tarries)]에서 다름과 같이 말했다. “ 세대의 설교자들은 세대의 죄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백성이 혹은 민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기준 하나는 영적 리더들의 태만한 행위에 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시대에 이처럼 말씀하셨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하는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8-9).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씀의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스라엘의 영적 리더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차지 않으며, 심지어 그분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조차 감각할 없었던 것일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나를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마치 희생제사 기계를 매일같이 작동시켜 놓은 같았다. 성전에서의 사역은 사업적인 운명이었을 , 누구도 하나님께서 장소를 떠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 제사장들조차 하나님의 떠나가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교회 리더들은 또한 어떠한가? 종교 활동의 기계가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기계 소리는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여 시간씩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기만하여 속삭이고 있다. 그래, 과연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해 계시는가? 수많은 설교, 주일학교, 교육 프로그램, 예배 곡들, 교회 성장 모델, 컨퍼런스와 훈련 세미나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교회가 해야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라면, 것도 없이 우리는 너무나 알고 있다. ,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 우리에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식과 경외를 갖기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가 속한 교회와 도시 그리고 가정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신학교를 가지고 있느냐는 중요치 않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사역을 하고 있는지도 내가 말하려 하는 이것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로 향해있지 않는 우리의 도시들은 사실상 그분과 대적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죽어가고, 병들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 상처입고, 중독에 빠져있고, 학대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을 도울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에겐 치유와 구원의 능력이 없다. 우리에겐 그들을 보호하고 위로할 있는 능력이 없다. ?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는 전부는 그들을 안아주고, 교회 모임에 등록시키고,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해부는 것뿐이다. 우리가 최신의 전도 기술이나 훌륭한 기독교 라디오 광고를 만들어 내는 것에만 몰두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만이 영원히 영향을 발휘하게 것이기 때문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와 비슷한 시대를 경험했다. 시대의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했고, 예물을 드리는 그들의 마음은 차가웠으며, 그들의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2:10) 호세아를 통해 하셨던 말씀도 한번 들어보라. “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하는 것을 원하노라.”(6:6).

나는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그만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지속되지 않는 우리의 사역은 계속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지금이 성공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울 때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뿌리내리고 머무르는 일에 사람들을 일깨우고 불러내야 때이다. 이러한 소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아마도 사람들과 재정을 잃게 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하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당신 앞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 앞에 있는 신자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서 이야기해야 날이 오게 것이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야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비축하게 지도, 그러지 못할지도 모른다. 모두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그날, “ 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지 모른다.

부디 멈춰 서서 교회라고 불리는 종교 활동의 기계에서 생산되는 허무한 추구를 버리고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는 길로 돌아서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도록 불러내자. 영원한 날을 위한 추수를 준비하는 일에 우리의 수고를 쏟아내자.

<거룩을 추구하다/코리 러셀/드보라하우스>

하나님의 깊이에 대한 계시 – 코리 러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  성령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더욱 더 깊이 그리고 더 친밀하게 알아가는 여정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그의 영, 즉 상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성령은 인격체이시다. 우리는 성령께 초대받고, 불려지고, 더불어 사귀게 됨으로써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계속적으로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더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을 가르칠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성령이 제자들을 진리의 바다로 이끌어 예수께서 이 땅의 사역기간 동안 가르치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아직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지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12-15)

예수님은 계시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더 위대한 지식 속으로 우리를 이끄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알리셨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비시키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했던 그날, 성령께서 완전한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안에 좌정하셨다. 그분은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에 관한 모든 진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목적을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최초로 지불된 계약금처럼 우리에게 보내졌다. 성령은, 지금 우리 안에 살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는 아들 예수님에 대한 계시적인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9-12절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9절에 보면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 나와 있다. 우리가 이 말씀구절을 읽을 때에는, 때로 9절에서 잠시 멈춰 하나님과 만나게 될 영광스런 날에 대해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이 대목에서 멈추도록 의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9절의 말씀을 지나쳐 바울은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기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바울이 언급한 앞선 예언자들과 고대 성인(saints)들의 마음속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의 모습과 소리였으며 또한 하나님 그분과 직접 만나는 일이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을 알되 아무런 거리감도 없이 실제로 만질 듯이 생생하게 그리고 친밀한 방법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깊이를 탐구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듣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대화하시는 장면을 그려본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대화 중에 듣게 되신 것을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알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알리신다.

예레미야 31 34절에서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알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기 원하신다는 것과 또한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그가 가진 영과, 곧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연합하는 영광에 이르도록 불러야 할 때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와 같이 주께 간구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거룩을 추구하다/코리 러셀/드보라하우스>

하나님의 아는 지식은 무엇인가? – 코리 러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평생 동안 그분에 대해 말해왔던 것은 지적인 차원에서 동의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평생을 변화시킬 만큼 훨씬 더 깊은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스스로를 무엇이라 계시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분이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빠져들도록 우리를 유혹하여, 결국 우리가 입을 다물고 우리 눈이 인도할 것이다. 이 질문들은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끌면서 그 과정 중에 우리의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낼 것이다. 이 질문들을 참으로 진흙인 우리의 상태와, 참으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지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던 욥에게 110개에 달하는 질문을 던지셨다(39-41). 그 질문을 대면한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들어서는 방법은 그분에 대하여 당신이 생각하고 또한 알고 있는 것이 그분의 실체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세월 동안 그분에 대해 오만하고 경솔하게 행동하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욥의 친구 엘리후의 선포로 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36:26). A.W 토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존엄의 완전히 밑바닥에 위치한 것이라고 한다.(A.W. Tozer, The knowledge of the Holy)

하나님은 범접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오직 한 분이시다. 비록 세상에 있는 그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배웠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분의 속삭임만을 들은 것뿐이며, 그분의 행하시는 길의 가장 말단만을 본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또한 우리의 영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성이라는 그분의 실체에 비한 우리의 인성을 깨닫고는 마음이 상한다. 그분의 신성은 우리를 의기 소침하게 만들고, 우리의 자존심을 위협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낙담케 하신다. 우리는 그분을 정의할 수도, 그분을 우리 마음대로 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내린 모든 정의를 무시해 버리신다. 하나님은 도저히 정의될 수 없는 분이며, 그 사실에 우리는 안달하게 된다. 그분은 우리가 속한 작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다. 시편 113 6절은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시기 위해 스스로 얼마나 낮추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분은 신비하고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분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없다. 신비를 대하는 일은 우리를 철저히 두렵게 만든다. 우리는 다룰 수 있고 정의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갇히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 역시 우리를 낙담시킨다. 우리는 영원함의 길이 앞에 주눅들 수밖에 없는 짧은 인생이며, 영원함이라는 속성처럼 늘 한결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함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조되어 있다.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가 알고 또한 보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분을 구별시킨다.

잠시 재미있는 상상을 한번 해보자. 눈을 감고 당시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라. 그 다음엔 당신의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고 나서 당신의 증조할아버지를 생각해 보고, 그 다음에는 당신의 고조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떠올려 보라. 아담까지 이를 즈음에 당신은 한 가지 질문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다. “아담의 아버지를 누구라고 해야 하지답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 동의했기를 바란다.

이제 이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라. “누가 하나님의 아버지인가? 누가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였는가?” 창세기11절을 떠올려 보라. ‘태초에 하나님이......” 태초가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는 것은 그분이 태초의 이전에도 계셨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분이 태초의 전부터 계셨다면 도대체 그분의 시작은 언제란 말인가?

창세기 1장의 신령한 장면에서 영원의 차원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문이 바로 이 물음 안에 있다. 당신은 이 문을 통해 요한복음 17 5절과 17 24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세상이 기초가 생기기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하게 될 것이다. 모세와 함께 부르짖어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1”(90:2)  당신을 영원한 과거 속으로 가라 앉혀보라. 당신의 마음이 닿을 수 있는 만큼 더 깊이 내려가 보라. 그리고 당신의 삶이 시작된 시점과 그 끝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달아 보라.

지금쯤 당신의 뇌가 타 들어가고 있을 것이 상상되지만, 여기서 그치지 말고 바로 다음 목적지인 미래로 떠나보자.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그가 천년 동안 이 땅에서 다스리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영원한 존재가 남자와 여자라는 인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그들의 삶에 파고드시는 일을 생각해보라. 영원한 낙원과 영원한 지옥에 대해 묵상해보라. 당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주를 경외함이 당신의 심장을  움켜잡기 시작할 것이다.

토저는 프레드릭 파버(Frederik Faber)의 찬송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저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해보라. 그 분의 생각을 생각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호흡하는 것, , 그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이 땅에는 이 보다 더 높은 하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없도다!”. 토저가 권한 이 일이 우리의 유업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 것을 시간낭비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깊고 친밀하게 알기 위해 지어졌으며 바로 이와 같은 신령한 만남을 풍요 가운데 살기 위해 창조되었다.

영원으로의 여행은 우리의 마음을 탐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경험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허무한 기쁨으로 좌우되는 우리 자신이 아니, 영원과 영원이 가진 가치에 더 매료되는 사람으로 거듭하는 방법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른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6, 8).

우리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는 영원한 공간에 선한 행위를 쌓아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윗처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145:3). 다윗은 우리가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과 그분에 대한 지식을 찾아낼 수 있는 영원한 특권과 임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이를 탐구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자식을 만지는 것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며, 또한 우리로 살게 하는 그 무엇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이 비로소 가장 높은 고지에 놓이게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목적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그동안 잃어왔다.

<거룩을 추구하다/코리 러설/드보라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