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2010

'만약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한다면.

브루킹스硏 시뮬레이션


레바논 헤즈볼라도 개입, 이란은 사우디 유전 공격… 미국 전면개입후 전쟁끝나
'만약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한다면.'

이 질문은 중동 문제를 들여다보는 정책당국과 학자, 전문가들에겐 언제든 닥칠 수 있는 현실적 이슈가 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국의 핵시설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1981년 오시라크에 있는 이라크의 원자로를 파괴했고, 지난 2007년에는 북한이 시리아에 건설한 원자로를 제거했다. 이듬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기 위해 부시 행정부에 비밀스럽게 재가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했지만, 이 사실 자체만으로 이스라엘의 공격 시나리오는 현실성을 부여받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공격이 초래할 상황을 '전쟁 게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놓고 대비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시뮬레이션은 비밀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중동정책을 연구하는 사반센터는 지난해 12월 독자적인 전쟁게임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냈다. 뉴욕타임스는 28일 워싱턴 고위 당국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이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소개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다. 미국에 알리지 않은 채 이스라엘은 이란의 6개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도 이번 기회를 통해 이란정부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양국에 자제를 요청하면서 미국은 이란의 보복공격에 대한 사전 경고의 의미로 이지스함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방어 부대를 증강한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무기복합단지 등을 타깃삼아 미사일 보복 공격에 나서지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한다. 이슬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 하마스도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이란은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을 견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란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도 삼간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공모했다고 믿는 이란은 사우디 원유 수출 가공센터가 있는 압콰이크를 미사일로 공격한다. 또 이란은 유럽 국가에 대한 테러공격을 감행해 이들이 이스라엘 및 미국에 등을 돌리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공격은 삼간다.

이스라엘 정부는 선제공격으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충분히 뒤로 돌려놓았다고 판단하고, 이란의 공격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쪽에 100기의 로켓을 퍼붓는다. 이스라엘 경제는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개입을 촉구한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미국의 재가를 얻어 헤즈볼라에 대한 보복공격에 나서 48시간 동안 레바논을 공습하고, 대규모 공중 및 지상전을 시작한다.

그러자 이란은 마침내 오일 카드를 꺼내 든다. 사우디의 다란 원유산업센터를 재래식 미사일로 공격하고, 호르무즈 해협에 기뢰를 설치한다. 파나마 선적의 미국 유조선 한척이 파괴되고 미군 소해정이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오일 가격이 치솟는다. 결국 미국은 걸프지역의 군사력을 대폭 강화한다. 전쟁 게임은 이스라엘이 기습한 지 8일 만에 끝난다. 하지만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 주변에 있는 이란의 공중 지상 해상 목표물을 모두 제거하는 쪽으로 기울고, 이란은 큰 타격을 입는 패배에 직면한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는 이란의 핵개발 능력을 불과 몇년 뒤로 후퇴시키기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천국을 얻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을 받을 것임이요...(5:7)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내재적인 의식보다는 자비로 이루어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의식이 긍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 중에서 ‘나는 자비를 입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 율법에 “눈에는 ,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으려면 둔한 사람의 정신에 주어지는 겉치레로 말하는 형식이 아닙니다. 용서를 받기위해 염소의 수컷이나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거나, 푼을 헌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항상 마음의 바탕에는 탐욕과 교만이라는 가지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탐욕은 제물을 위해 쓰는 비용으로 벌을 받는 절차였습니다. 그리고 교만의 의식은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제물을 바칩니다’하고 대중 앞에서의 고백함으로써 벌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차는 오는 시대와 세대에게 예표로 예고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피의 표징으로 짐승의 피로서 대납(代納)시켜왔습니다.

그러므로 굶주리고 헐벗고 없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울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헐벗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성격을 바꾸어서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하심을 얻으려면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함을 받으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동정을 받으려면 동정해야 합니다. 영을 죽음에서 구해야 합니다. 올바른 진리로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는 아니하고 자신은 수정 탑에 들어박혀서 ‘나는 깨끗하다. 나는 죄인들이 있는 데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말과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부자이므로 행복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간여하거나 듣고 싶지도 않다’고 하는 말이나 행동은 잘못입니다. 스스로의 재산과 건강과 가정의 안락이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보다도 빨리 사라질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정 탑은 돋보기 구실을 해서 스스로가 대중 속에 섞여있으면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 따로 떨어져 있으면 사방으로 노출됩니다. 수정 탑에 들어 있으면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은밀하고 계속적이고 거룩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자비를 얻기 위해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것임이요”(5: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함 자체이십니다. 천국은 깨끗함의 나라입니다. 불결하면 누구도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에 들어갈 없습니다. 따라서 스스로가 불결하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고 미리 맛보게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세상에서부터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보시고, 땅에서도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고 보게 하시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정적인 인간은 사랑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황홀경에 이르기까지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은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린양을 신랑으로 차지할 것이기에 영은 어린양의 신부가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혜롭게 하여서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도 어떻게 설명할 없을 만큼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의 입에서는 말의 꽃이 피어나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피조물에게서 오는 것을 물리치고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의 행위는 아름답고 선하며 의로움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의 생활은 어떻게 다릅니까? 진정한 복된 생활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불결하게 생활해서 이러한 선물을 포기하려고 하면 됩니다.
                                
출처:찬양의교회 http://thechurchofpraise.net/main/

생 명(ζωή)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없느니라.(14: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요단강을 끼고 있는 에브라임 지역에 것은 니고데모의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사로의 농토가 있었으며 농토를 관리하는 농부들과 채의 건물이 있었기에 안성맞춤이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심부름으로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였다. 나사로는 베드로에게 니고데모를 예수님께 은밀히 안내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밤중에 기드론 골짜기에서 기다리던 요한의 안내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3:2-10). 가르침을 받은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총회에서 예수를 체포하려함으로 안전한 나사로의 집으로 피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주님은 악당들의 핍박이 친구인 나사로에게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에브라임으로 옮긴 때에 말씀을 강론하셨다.

나사로 데오빌로(Λάζαροs Θεόφιλε) 아버지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나사로의 아버지는 헤롯이 유대 왕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유대총독부 집정관으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시리아 총독 ‘디오빌로(Θεόφιλε-1:3,1:1)’  가 나사로의 아버지다. 그의 가문은 로마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받았음을 말한다. 이것이 니고데모가 나사로의 집이 안전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이란 가지 용어를 적용할 때에 잘못 생각한다.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먹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는 때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쉬고 먹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일하지 못하게 감각이 없는 육체가 되어서 무덤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때를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셨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존재가 생명은 아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생명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들판에서 울고 있는 양도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생명은 존재와 더불어 시작되지 않을 뿐더러 육체와 함께 끝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라한다. 생명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육체 안에 살도록 만들어진 영혼으로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태어날 때에 시작된다고 하신다. 이것은 죄가 그것을 죽일 끝나게 된다. 처음에 사람은 발육하는 씨에 지나지 않았다. 씨는 밀이나 과실의 씨가 그런 것처럼 부질(麩質)이나 골수가 아니라 살로 씨다.

처음에는 그것이 양의 태속에서 자라나는 태아와 다를 바가 없었던 동물의 태아로 형성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신된 인간 안에 형체가 없으면서도 인간을 높여주는 보이지 않는 속에서 강력한 부분이 들어간다. 그때부터는 동물적 태아가 심장과 박동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대로 살도록 하나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미래에 하나님의 시민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되어야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이란 형체는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된다. 이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분해되고 무덤이 되어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존재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다”(1:5). 그러므로 생명은 육체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 생명은 끝이 없다.

생명이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어있으나 그의 운명은 죽지만 그의 받을 벌을 위해서는 살아남는다. 생명이란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순간에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과 저주라는 운명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운명에 대한 죽음이라는 신체의 조직 일부분이 기능이 소멸상태에 걸려있는 생명은 영원한 세월을 두고 영벌과 고통 속에서 연장된다. 이것은 신체조직의 일부분이 생활력을 읽게 됨으로 인하여 기능이 소멸되는 것이다. 반대로 창조된 그대로 보존된 생명은 창조주와 같이 영원하고 완전하고 행복하게 때에 온전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여러분은 생명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어떤 것이든지 정성을 들여서 쓰고 보존해야 된다.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만큼이나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왕의 선물을 마구 쓰겠습니까? 그럴 없다. 왕의 선물은 집안의 영광으로 대대로 물러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냉대합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어떻게 것이며 어떻게 보존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여야 천국의 같이 영혼의 꽃을 생생하게 가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존시킬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늘을 위하여 그리고 존재를 넘어서 ‘살게’ 됩니까?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은 분명한 계율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모범과 말을 주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교훈이다. 세상에는 의인들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되지만, 잘못생각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결점들과 사방에서 불어나는 죽은 정신들을 보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우리의 영혼의 문을 열라고 하신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이라 하신다. 변함없는 율법을 지키고, 자신의 안에서 타락되고 지쳐버린 ‘생명’을 튼튼하게 살려야 된다고 하신다.

만일 생명이 벌써 죽었으면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된다. 모두가 자기 죄를 한탄해야 된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어야 된다. 그리고 일어나야 된다. 내일 영원한 고통에 넘어져서 산송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다시 찾거나 보존하는 방법 외에 다른 말씀은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회개하고, 음란이나, 부정한 행위와, 자신의 죄를 없애고 깨끗하여라.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목소리를 들어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마음에 내려오기 바랍니다.’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간구하라 하였다. 죽은 영은 추운 겨울에 잎이 떨어진 수풀보다 초라하다. 겸손과 의지와 회개와 믿음이 안으로 스며들어가면, 봄이 되어 숲이 살아난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야 된다. 하나님을 위해 활짝 피어나는 생명으로 영원한 열매를 맺어야 된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는 ‘길’이시다. 우리에게 선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참 선생’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빛’이시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가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예수 앞으로 나아와야 된다. 이상 존재하기만 하는 것을 그만두고 ‘살기를’ 바라야 된다. 그렇게 하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황혼이 보이는 하루의 시작, 권태도 없고 한계도 없는 기쁨의 시작이다. 죽음의 육체이전부터 살고 있는 것의 승리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도록 부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생명을 원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하나님의 약속으로 살아야 된다.육신이 건강치못한 사람이 그런 이유에 속한다. 건강에는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이 있다. 영적이거나 육적이거나 어떠한 병에도 사탄의 침투를 막지 못해서 병이 생긴다. 사탄은 육체의 고통 때문에 반항과 실망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육체에 병을 만들어낸다. 사탄이 정신적이나 혼에까지 병을 만드는 것은 영벌로 끌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병은 사탄을 통하여 들어왔다. 질병과 죽음도 세상에 들어왔다. 타락도 함께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병과 고통의 근원을 분명히 깨달아야 된다. 그가 사탄을 통해서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는 불행이 되는 원인이 사람이 사탄의 도구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서도 된다.

병은 무질서 때문이다병은 자기 몸이 질서를 지키지 않는데서 생긴다. 하나님은 사람을 건강하고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 사탄이 가져온 무질서가 육체의 약함이 병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나 치명적인 유전들을 가져왔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원죄를 물려받았다. 사람의 원죄라는 홈이 점점 커지면서 가지 분야로 사람에게 침투된다.

첫째는: 점점 타락하고 그로 인하여 약해져서 병든 ‘육체’로 고통을 당한다.
둘째는: 점점 교만하고 교만으로 인하여 타락해져서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완고한 ‘마음’으로 변한다.
셋째는: 점점 우상숭배적인 것이 되는 ‘정신’으로 변해진다.

이러한 가지는 절대적으로 순결치 못한데서 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진짜 죄는 교만이라 한다. 이유는 교만에서 모든 죄가 생기기 때문이란 것이다.

번째는: 창세기에서 천사장이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으려는 ‘교만’이 죄의 근원이 시작이다.
번째는: 같은 창기에서 아담이 죄를 지을 , 하와가 자기 위치를 떠남으로서 인류에 죄가 들어온다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의 시작이다.

교만은 죄의 근원이 되고, 교만으로 불순종이라는 무질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병들지 않으려면 순결해야 된다. 순결하지 못하면 입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지만 질서 안에 있는 사랑이 나타날 없다. 순결하지 못하면 결코 순종하려는 자세가 나타날 없다. 순결하지 못하면 겸손이 나타날 없다. 그것은 교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죄의 근원까지 도달하게 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병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정신과 마음에 새기고 내재적 자아에 소유권을 나타내는 인침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하면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사탄이 도망간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나 마음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것의 질서가 무질서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육신에서의 무질서 - 육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육체의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성병이 생기는가? 성적질서를 지키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마약 , 모든 것이 육체의 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서 인간의 육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보약이다 병원이다 찾아다니지만 끝내는 죽게 된다.

마음에서의 무질서  - 육체가 병들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 육신적인 질서를 지키지 않음과 같이, 사람이 타락하는 것은 마음의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이라는 생각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지배하는 질서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된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며 모시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향하여 반항이 일어나면서 하나님과 멀리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데서 알려준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렸을 ,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5:8) 한데서 알게 된다. 그리고는 마음이 타락되는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을 죽이는 행위다. 이것을 마음에 화인 맞았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죄를 은폐하려고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거짓증거하고, 기만하고, 자기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의 질서를 지키지 않은데 있다. 하나님께서 시기 하지마라, 거짓증거 하지마라, 속이지 말라, 등이 하나님의 법이요 이법을 지켜야 ‘질서’다.

정신에서의 무질서  - 정신병이나 정신장애는 정신의 질서를 지키지 않음에서 일어난다. 정신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영혼이다. 자기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자리를 만들어 놓으면 그런 사람 안에는 성령이 계시면서 순결한 마음으로 살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탐심과 유혹에 끌리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있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자리에 무엇이 앉아야 되는가? 사탄이다. 사탄이 자리 잡게 되면 항상 더러운 생각만을 넣어주고 타락하는 쪽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병드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문제를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을 누구를 모시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의 정신은 하나님이 창조했던 때와 같이 온전히 보호해 주신다. 그러나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므로 사탄이 마구잡이로 쓰기 때문에 혼탁한 병이 생긴다. 사탄이 인간의 영혼에 침투하는데 쓰는 가지 무기는 본능적인 ‘유혹’과 ‘탐심’이다.

마귀는 항상 인간을 물질적인 면으로부터 유혹한다. 그리고 물질문제가 끝난 다음에는 윗부분으로 침투한다. 먼저 도덕적면을 공격한다. 그것은 교만과 탐욕으로 생각나게 만든다. 다음에는 정신을 공격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각까지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탄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인간적인 사랑들을 마음속에 심어버린다.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다만 향락과 자신의 욕구만 채우려고 한다. 이런 데를 점점 몰두하게 되면 송두리째 사탄에게 빠지고 정신은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럴 정신병이 일어나고 또는 정신장애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무질서가 아니다 - 개인의 육체와 마음, 그리고 정신에 문제가 일어나는 일이 그것에 대한 질서가 지켜지지 않음으로서 육신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드는 것처럼, 모든 공동생활에서도 같은 원리입니다. 문제에 대하여는 여러 말했었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용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항상 말하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질서’를 말해 왔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법을 떠난 자신의 욕구만’을 말해 왔었다. 질서를 지키려는 사랑과,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랑은 분명히 다르다. 생명을 살리려고 질서를 지키는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랑은 사탄이 가져다주는 멸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질서를 지키려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게 하지만,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랑은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죄의 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이것은 개인의 육체나 마음, 그리고 정신에 사탄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출처:찬양의교회 http://thechurchofpraise.net/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