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회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은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 오랜 삶을 마치고 무서운 심판대 위에 섰는데, 자신이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성육신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복음서의 이야기가 납득 가지 않는 사람들,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을 이해살 수 없다는 사람들, 구속 사상과 의인이나 성화나 중생이니 하는 용어들이 낯설기만 하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사상들이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그들과 사뭇 다르게 시종 죄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인간은 털끝만치의 소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당신은 과연 이러한 기쁨에 대해 압니까?"
"영혼을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신합니까?"
이처럼 간단한 질문을 통해 다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예"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회개중에서.../마틴 로이드존스>
4/21/2011
자기 연민을 벗어나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상처 받고 고통을 느끼고 슬퍼하는 것은 정상이며, 심지어 필요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만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사라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슬픔은 사랑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내 남편이 죽은 이후로 내 인생에 빈 공간이 생겼다고 나는 종종 말해왔다. 예수님은 내가 그 빈 공간 위로 다리를 놓고 건너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그러나 분명히 내 인생에는 그 빈 공간이 있다. 최근에 나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에게서 편지를 한 통을 받았다.
내 남편이 죽은 이후로 내 인생에 빈 공간이 생겼다고 나는 종종 말해왔다. 예수님은 내가 그 빈 공간 위로 다리를 놓고 건너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그러나 분명히 내 인생에는 그 빈 공간이 있다. 최근에 나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에게서 편지를 한 통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떠난 자리에 빈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모시면 그 빈 공간이 채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40년 전,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즈음에 나는 하늘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 그 후 나는 하늘 아버지의 무릎에 오르지 않고는 단 하루의 삶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분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나는 30년 동안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 슬픔 자체를 제거해주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분은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있게 도우셨다.
건강한 슬픔과 건강하지 못한 자기 연민은 다른 것이다.
만일 나의 친구가 사별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나는 슬픔을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 자신의 사별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낀다.
이럴 때 내가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치 내 친구의 고통을 보면서 슬퍼하듯이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건강한 슬픔이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슬픔은 슬픔의 웅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도 나처럼 고통 당하지 않는데, 나만 혼자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만일 나의 친구가 사별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나는 슬픔을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 자신의 사별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낀다.
이럴 때 내가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치 내 친구의 고통을 보면서 슬퍼하듯이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건강한 슬픔이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슬픔은 슬픔의 웅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도 나처럼 고통 당하지 않는데, 나만 혼자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을 극복하는 일곱 가지 방법
첫째, 슬픔과 자기 연민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라.
큰 상처가 생겼을 때 그것을 붕대로 감아서 감추려고 하지 말라.
약으로써 억지로 병을 이기려다가 오히려 더 큰 해를 부를 수도 있다.
우리의 감정적 고통도 열병과 같다.
고통을 감추지 말고 그저 당하다보면 때가 되어 그것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감정은 점점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둘째, 몸을 돌보아라.
슬플 때일수록 건강을 잃지 않도록 충분히 먹고 마시고 쉬어야 한다.
엘리야가 우울증과 자기 연민에 빠져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
그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잘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하셨다.
그는 다시 잠들었으며, 천사가 그를 다시 깨워서 먹고 마시게 했다.
이렇게 음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는 먼 여행길을 견뎌내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를 수 있었다(왕상19:8 ).
셋째,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라.
우리를 사랑하는 친구들, 즉 우리가 전화를 하면 달려와서 우리를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줄 친구들이
필요하다. 유머도 치유에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에게 짓궂은 농담도 해줄 사람, 우리가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웃겨주는 사람,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잊도록 도와줄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냉정하게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자기 연민의 극복에 도움이 된다.
넷째, 하나님께 우리를 도우실 기회를 드려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그분의 약속의 말씀들에 밑줄을 그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그 말씀들을 의지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돕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을 담은 보물상자를 만들어놓고 필요에 따라 그 보물을
꺼내어 사용한다.
다섯째, 지혜롭게 스트레스를 푸는 법을 배워라.
절제의 훈련이 아주 잘된 청교도들조차 “네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하루의 스케줄을 짤 때 나는 꼭 30분의 자축 시간을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그 시간이 되면 나는 선반에서 가장 좋은 컵을 꺼내고 뜨거운 차를 끓인다.
그리고 나의 일과 관련 없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거나 나 자신이 직접 스케치를 해본다.
여섯째, 자긍심을 키워라.
집이 엉망이라면 청소를 시작하라. 책상 서랍이든 선반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하나부터 시작하라.
내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 문제부터 처리하라.
작은 발걸음이라 해도 그것이 내 목적지에 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연민을 자긍심으로 바꾸어가라.
일곱째, 지금 이대로 계속 버텨라.
우리는 ‘왜 내가 따돌림을 당하나?’라고 고민하기 쉽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나 이혼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허감이나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꾸짖어서 자기 연민을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보좌에서 종교적 영웅심을 쫓아내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더 이상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내’가 핀란드 말로는 ‘시수’(sisu)라고 한다.
이것의 본래 의미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지금 이대로 계속 버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현재 괴롭고 슬퍼도 그 괴로움과 슬픔까지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첫째, 슬픔과 자기 연민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라.
큰 상처가 생겼을 때 그것을 붕대로 감아서 감추려고 하지 말라.
약으로써 억지로 병을 이기려다가 오히려 더 큰 해를 부를 수도 있다.
우리의 감정적 고통도 열병과 같다.
고통을 감추지 말고 그저 당하다보면 때가 되어 그것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감정은 점점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둘째, 몸을 돌보아라.
슬플 때일수록 건강을 잃지 않도록 충분히 먹고 마시고 쉬어야 한다.
엘리야가 우울증과 자기 연민에 빠져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
그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잘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하셨다.
그는 다시 잠들었으며, 천사가 그를 다시 깨워서 먹고 마시게 했다.
이렇게 음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는 먼 여행길을 견뎌내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를 수 있었다(왕상
셋째,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라.
우리를 사랑하는 친구들, 즉 우리가 전화를 하면 달려와서 우리를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줄 친구들이
필요하다. 유머도 치유에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에게 짓궂은 농담도 해줄 사람, 우리가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웃겨주는 사람,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잊도록 도와줄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냉정하게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자기 연민의 극복에 도움이 된다.
넷째, 하나님께 우리를 도우실 기회를 드려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그분의 약속의 말씀들에 밑줄을 그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그 말씀들을 의지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돕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을 담은 보물상자를 만들어놓고 필요에 따라 그 보물을
꺼내어 사용한다.
다섯째, 지혜롭게 스트레스를 푸는 법을 배워라.
절제의 훈련이 아주 잘된 청교도들조차 “네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하루의 스케줄을 짤 때 나는 꼭 30분의 자축 시간을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그 시간이 되면 나는 선반에서 가장 좋은 컵을 꺼내고 뜨거운 차를 끓인다.
그리고 나의 일과 관련 없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거나 나 자신이 직접 스케치를 해본다.
여섯째, 자긍심을 키워라.
집이 엉망이라면 청소를 시작하라. 책상 서랍이든 선반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하나부터 시작하라.
내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 문제부터 처리하라.
작은 발걸음이라 해도 그것이 내 목적지에 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연민을 자긍심으로 바꾸어가라.
일곱째, 지금 이대로 계속 버텨라.
우리는 ‘왜 내가 따돌림을 당하나?’라고 고민하기 쉽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나 이혼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허감이나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꾸짖어서 자기 연민을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보좌에서 종교적 영웅심을 쫓아내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더 이상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내’가 핀란드 말로는 ‘시수’(sisu)라고 한다.
이것의 본래 의미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지금 이대로 계속 버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현재 괴롭고 슬퍼도 그 괴로움과 슬픔까지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인격이란 우리가 어떻게 보이느냐와 비교해서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이냐를 말한다.사람은 마음으로는 인색해도 겉으로는 후해 보일 수 있다.
인격과 경건은 다르다.
내가 경건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다.
반면에, 내가 인격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한 사람의 품성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격에 관심이 꽤 많으시며, 경건한 사람이 좋은 도덕적 인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격을 갖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 사실, 이 둘은 너무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런 말은 넌센스이다. “그 사람은 착한 일은 전혀 하지 않지만 마음은 착한 사람이야!” 우리는 기념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박애주의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 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게 선한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선한 인격을 갖고도 때로는 나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한 인격이 완벽한 인격은 아니다. 선한 인격자는 정기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속에는 선한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따금 운이 좋아서 선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상황에서 선을 행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 12:33-37). 선한 도덕적 인격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덕’(德)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고대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탁월함’(excellence)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덕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우리가 말하는 인격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의 주요 덕목
첫 번째 덕목은 분별력(discernment)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어느 시대든 간에 최대의 도덕적 논쟁은 도덕적 이론의 차이가 아니라 분별력의 차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분별력이라는 덕목은 바울의 권면의 본질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두 번째 덕목은 용기(courage)이다.
용기란 분위기가 거칠고 상황이 힘들어질 때 잘해낼 수 있는 힘이다.
용기란 유혹이 오고 고통이 찾아올 때 잘해내는 인격을 갖는 것이다.
아기가 우유를 먹으면서 깔깔거리고 좋아할 때는 어머니가 되는 게 쉽다.
그러나 아이가 치료할 수 없는 심한 장애로 고통당할 때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안전, 당신의 미래가,
당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위협당할 때 잘해내는 힘이다.
구약성경은 ‘용기’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는 하나의 교향곡이다.
세 번째 덕목은 절제(temperance)이다.
절제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고 제어하며 조율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삶을 제어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통제권을 맡기며, 그 대신에 진정한 책임을 하나님이 주시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절제하는 사람은 환경이나 물질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게 하지 않는다. 성경의 다른 은사들의 경우처럼, 우리가 절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네 번째 덕목은 정의(justice)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공정하기로 결심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을 말하면서 정의를 요구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 외에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기르기를 원하시는 성품들이 많이 있다.
두 개만 간단하게 집고 넘어가겠다.
정직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이다.
나는 이것들을 성령의 버터빵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성령의 열매보다 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행복했느냐고 묻는 대신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인격과 경건은 다르다.
내가 경건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다.
반면에, 내가 인격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한 사람의 품성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격에 관심이 꽤 많으시며, 경건한 사람이 좋은 도덕적 인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격을 갖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 사실, 이 둘은 너무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런 말은 넌센스이다. “그 사람은 착한 일은 전혀 하지 않지만 마음은 착한 사람이야!” 우리는 기념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박애주의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 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게 선한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선한 인격을 갖고도 때로는 나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한 인격이 완벽한 인격은 아니다. 선한 인격자는 정기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속에는 선한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따금 운이 좋아서 선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상황에서 선을 행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 12:33-37). 선한 도덕적 인격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덕’(德)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고대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탁월함’(excellence)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덕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우리가 말하는 인격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의 주요 덕목
첫 번째 덕목은 분별력(discernment)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어느 시대든 간에 최대의 도덕적 논쟁은 도덕적 이론의 차이가 아니라 분별력의 차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분별력이라는 덕목은 바울의 권면의 본질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두 번째 덕목은 용기(courage)이다.
용기란 분위기가 거칠고 상황이 힘들어질 때 잘해낼 수 있는 힘이다.
용기란 유혹이 오고 고통이 찾아올 때 잘해내는 인격을 갖는 것이다.
아기가 우유를 먹으면서 깔깔거리고 좋아할 때는 어머니가 되는 게 쉽다.
그러나 아이가 치료할 수 없는 심한 장애로 고통당할 때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안전, 당신의 미래가,
당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위협당할 때 잘해내는 힘이다.
구약성경은 ‘용기’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는 하나의 교향곡이다.
세 번째 덕목은 절제(temperance)이다.
절제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고 제어하며 조율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삶을 제어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통제권을 맡기며, 그 대신에 진정한 책임을 하나님이 주시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절제하는 사람은 환경이나 물질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게 하지 않는다. 성경의 다른 은사들의 경우처럼, 우리가 절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네 번째 덕목은 정의(justice)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공정하기로 결심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을 말하면서 정의를 요구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 외에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기르기를 원하시는 성품들이 많이 있다.
두 개만 간단하게 집고 넘어가겠다.
정직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이다.
나는 이것들을 성령의 버터빵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성령의 열매보다 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행복했느냐고 묻는 대신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보석으로 지은 신앙의 집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24:14)
성경에는 “보석으로 우리의 신앙의 집을 지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석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생활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보석이란, 루비나 에메랄드 같은 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아홉 가지 은사가 곧 보석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리고 아홉 가지 은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믿음의 은사, 가적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이렇게 아홉 가지의 은사입니다. 이와 같은 은사들이 보석과 같이 성경 안에서 반짝이는 것입니다.
보석으로 집을 지으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성령의 역사에 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죄를 피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도와 주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 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함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모셔 들이고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사로 잡아 죄를 이기고, 의를 이루게 하시며,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되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를 점령하고 계실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아홉가지의 열매와 아홉가지의 은사의 찬란한 보석으로 단장시켜 주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하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석으로 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가장 큰 축복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고린도전서 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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