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 또는 그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고대에서 부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으로서 알려진 것은 현재까지 20여종에 달한다. 그러나 이 것들을 소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검토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의 신관인데, 유신론은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 (God as a person 또는 a personal God )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이 신관이 가장 타당한 신관이라고 생각한다.
<인격적 하나님 > 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생각하는것·남과의 대화·행위·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 가능하고, 자아 의식과 자유가 있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이런 능력과 자질이 있으므로, 인격적인 존재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이런 능력과 자질이 있는데, 창조주인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없겠는가? 만일 없다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보다 열등한 하나님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피조물인 인간이 초월적이며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 자신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으시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 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참된 종교와 참된 도덕의 성립이 가능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까닭에,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도 주시지 않는다. 이 점은 설명이 필요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떨며 땅에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의 정신은 (거의) 마비되고, 마음의 자유도 상실하고, 책임성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이기를 멈출 것이다. 나를 당장, 말하자면, 지옥불 속에 던져 넣을 수도 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누가 감히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으며, 누가 그의 법을 지키지 않겠는가? 이 상황은 노예가 무서운 주인 앞에서 몸과 마음이 위축되고,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만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의미있는 종교와 도덕이 성립할 수도 없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 자신도 그런 관계를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바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공포에 떨며 땅에 납작히 엎드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과 부득이 마지못해 도덕을 지키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다르다. 참된 종교와 참된 도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의 유지가 필수적이다.
인간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 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또 하나님의 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도록 우주 만상과 인간의 경험이 되어 있는 것은, 이 ‘거리’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기 원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자연계(우주)와 인간의 경험 안에 다양하게 준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 무신론자(atheist) 가 되는 것은 그의 의지(will)의 결정이지, 이성적 판단의 결과는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것과 인간의 사후 내세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정확하게 비슷하지는 않지만, 두 경우 사이에는 공통된 면이 있다. 내세가 있고 또 천국과 지옥의 존재가 확실하다면, 지옥에 가지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누가 행동을 조심하지 않겠는가?
누가 신중하고 타산적이되지 않겠는가? 이 경우에도 참된 종교와 참된 도덕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후에 내세가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면 안되는 것이다.
지각이 있고 철이 든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다음과 같은 인생의 근본 문제를 생각할 때 일 것이다.
1.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 죽음의 문제와 각 사람의 <궁극적 운명>의 문제는 여기에 속한다.
2.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느냐? 있다면 무엇이냐?
3.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이냐?
4. 이 경이롭고 신비한 우주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느냐 ?
사람이 이 근본 문제들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무관심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 근본 문제 중에서 1번, 즉 각 사람의 죽음과 <궁극적 운명> 은 가장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의 죽음과 그 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세속화’ 된 현대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으며, 그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무의미한 짓으로 본다는 말을 우리는 가끔 듣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세속화’ 한다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세상이 세속화 되어가고 있으니, 나도 그 추세에 따라가는 것은 잘 하는 일이 아니다.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를지 모르나, 나 자신은 사람이 의례히 세상의 추세에 따르고, 또 세속화 하는 것은 잘못 이라고 본다. 사람이 거의 아무런 생각이 없이 세상의 추세와 유행을 따르고, 사소한 일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넓은 들판에서, 수백 또는 수천마리의 짐승 떼가 뛰기 시작하면, 모든 짐승이 아무런 생각없이 함께 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소나 코키리와 같은 짐승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로서, 정신적 내면성과 주체성 그리고 깊이의 차원이 있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수백마리의 소떼가 뛰듯이, 거의 생각없이 세상의 추세에 따라가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일이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짐승은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는 것 같다. 짐승에게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인간 만이 정신이 있으므로, 죽음을 생각하고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을 갖는 것이 정상이다. 이 불안은 오직 종교적 신앙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사람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또는 친지의 장례식장에 가서도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요,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 러시아의 사상가요 문호인 톨스토이( Tolstoi) 는 “나이 35세를 지난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바보다”고 말했다. 시대와 문화가 변하면, 죽음의 의미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행과 생활 양식은 변하지만, 인생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현대인은 미래와 자기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불안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는데,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 세속화된 현대인도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여러가지 보험, 예를 들면, 건강보험·화재보험·자동차보험·생명보험에 드는데, 그러면서도 자기의 <궁극적 운명> 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과연 현명한 일 인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다음 문제로 넘어 가겠다.
필자는 편견 없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어려울 것으로 믿고 있다. 자연계(우주) 의 관찰과 자연과학을 통하여 알려진 우주의 놀라운 현상들과 인간의 경험적 사실들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 라고 할만한 것 (clues)이 많이 있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 특히 의미 깊다고 생각 되는 것 12 가지를 골라서, 필자의 저서 「하나님은 계신다 : 그 증거」 (603쪽. 2002년) 안에 제시하고 자세히 논했다.
12/20/2010
[특별기고-종교 다원주의 비판]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종교 다원주의 비판 (6)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옳은 이해가 근본이다. 예수님의 말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 이다. (요한 17: 3).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옳은 이해는 성경을 통하여 얻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을 그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믿는 것은 예수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권위를 친히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마태 4:4-10, 5:17-18, 누가 24:25-27, 44-47 및 기타.
그런데 예수님을 옳게 이해 하려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십자가의 도> 라고 부르고 (고전 1:18)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고전 2:2)고 말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극단적인 결심과 말을 하게된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경천동지할 사건의 의미를 사도는 똑똑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도 사도와 같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비참한 일과 고통 당하는 사람과 무서운 일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크고 어려운 문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 않은가 ? <십자가> 라는 말은 우리 마음안에 아픔이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 사용되는, 거의 일상적인 용어의 하나와 같이 되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 아니다 !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그렇게 가볍게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꼭 필요한 때만 경건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사람이 가볍게 입에 올리는 것도 죄다. (출 20:7) . 두 크신 이름을 우리의 입에 올릴 때는 반드시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또 ‘죄와 싸우기를 피를 흘리기까지 하지 아니한’ 사람은 (히브리 12:4),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중대시 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직 충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특히 나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 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의 죄 문제를 어떻게 피할수 있겠는가 ? 언제까지 피할수 있는가 ?
나는 소나 말이 아니라 인간이므로, 죄를 짓고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이 죄인지를 논하자면, 살인· 강도·사기와 같은 것 만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정의와 자비> (justice and mercy) 에 대한 무관심, 거짓 사랑, 신의가 없는 것, 자기 중심의 삶, 위선, 불성실, 시기와 분냄, 복수심, 사회의 약자와 빈곤층에 대한 무관심과 몰 인정,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불충한 마음과 언행, 그리고 하나님 보다 돈과 재물을 더 의지하고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 20:28).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특히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가장 자세하고 깊이 있는 예언이다.
이 53장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기사와 세밀한 점에 까지 일치한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700여년 전에 활약했던 하나님의 선지자다. 이 사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과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인류의 구세주 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신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 하시고, 또 인간과 교회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은, 예배 의식 이나 종교 행사가 아니라 <정의 와 자비>의 존중과 실천이다.(미가 6: 6-8), 아모스 5:21-24, 이사야 1:10-17, 예레미야 7: 1-7, 마태 23:23). 정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의지(will) 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자비> 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으므로 (창 1:27), 인간에게도 <정의와 자비>가 최대 관심사이기를 하나님은 기대 하신다. 더우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정의와 자비> 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임을 부지런히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같은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누가10:25-37). 하나님은 특히 사회의 약자와 빈민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자들과 교회까지도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 소수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소위 교회 예배와 종교 행사에만 열심을 냈다. 이것은 전 세계교회에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하겠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17세기 초기부터 19세기 중반이 지나기 까지 약 250년간,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놓고 혹사했다. 아프리카가 고향인 흑인들은 까닭없이 잡혀와서,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15시간의 중노동을 강요 당했다. 그리고 자주 구타 당했다.
백인들은 총이 있었으므로, 마음놓고 흑인을 구타하고 명령했다. 미국인들은 잔인했으며,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자칭 했다.
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땅을 치며 통곡해야 할 불행이었으며, 고난과 수모의 인생이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 것은 천인이 공노할 만행이며 죄악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교회들은 이 잔인한 노예제도를 정당화 하고 옹호했다. 위대한 링컨 대통령이 전쟁을 통해서 흑인들을 해방한 후에도,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과 멸시 그리고 차별 행위에는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교회 예배에 제일 열심이고, 이를 중요시하는 지역은 남부지역이다. 이런 종교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노예제도는 나라의 법에 의해서 폐지되었으나, 교회에서의 흑인 차별은 계속 되었다. 흑인이 백인교회에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으므로, 교회의 흑백 분리 (segregation) 가 생겼다. 흑인이 백인교회에 갔다가, 구타 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런 교회를 교회라고 할수 있겠는가 ? 이런 교회와 이런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에서 불신당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서 높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인 교회들은 미국 교회보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 있는가? 한인교회 에는 우리에게만 특이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 된다. 한국에는 무수한 교회와 성당, 목사와 신부, 그리고 신도들이 있으나, 한국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런가 ? 교회들의 도덕적·영적 타락은 거의 전 세계에 만연한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누가 18:8). 예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때, 참 신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짜 신자들을 많이 보실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는 그동안에 너무 안이했으며, 지금 깊은 반성과 신앙 생활의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누가복음 17:26-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것을 알고 있으나, 우리가 과연 사랑하고 있는지 각자가 스스로를 살펴 보면 알 것이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또는 보상으로서 복을 기대 하면서, 또는 지옥에 가지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남을 사랑 한다면, 그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 타산적인 사랑, 즉 거짓 사랑이다. 타산적인 사랑과 타산적인 선행은 사랑도 선행도 아니다. 하나님은 참 사랑과 참된 선행을 요구 하신다.
따라서 나는 순수한 참 사랑을 하기 원하고 노력도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한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며, 또 한탄 했다. (로마서 7:14-24).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 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더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대가를 지불 하고서 베푸시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인물인 그리스도와 역사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독교의 근본이며 핵심 이므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 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 만이 유일하게 이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대동소이 하다는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고전 1:22-24)고 말했다.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도는 이 말을 두가지 의미에서 했을 것이다.
첫째.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둘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은 자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그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약함과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A. 인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고
B. 인간이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므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라는 명제의 뜻도 분명해 진다.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옳은 이해는 성경을 통하여 얻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을 그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믿는 것은 예수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권위를 친히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마태 4:4-10, 5:17-18, 누가 24:25-27, 44-47 및 기타.
그런데 예수님을 옳게 이해 하려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십자가의 도> 라고 부르고 (고전 1:18)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고전 2:2)고 말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극단적인 결심과 말을 하게된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경천동지할 사건의 의미를 사도는 똑똑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도 사도와 같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비참한 일과 고통 당하는 사람과 무서운 일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크고 어려운 문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 않은가 ? <십자가> 라는 말은 우리 마음안에 아픔이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 사용되는, 거의 일상적인 용어의 하나와 같이 되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 아니다 !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그렇게 가볍게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꼭 필요한 때만 경건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사람이 가볍게 입에 올리는 것도 죄다. (출 20:7) . 두 크신 이름을 우리의 입에 올릴 때는 반드시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또 ‘죄와 싸우기를 피를 흘리기까지 하지 아니한’ 사람은 (히브리 12:4),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중대시 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직 충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특히 나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 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의 죄 문제를 어떻게 피할수 있겠는가 ? 언제까지 피할수 있는가 ?
나는 소나 말이 아니라 인간이므로, 죄를 짓고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이 죄인지를 논하자면, 살인· 강도·사기와 같은 것 만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정의와 자비> (justice and mercy) 에 대한 무관심, 거짓 사랑, 신의가 없는 것, 자기 중심의 삶, 위선, 불성실, 시기와 분냄, 복수심, 사회의 약자와 빈곤층에 대한 무관심과 몰 인정,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불충한 마음과 언행, 그리고 하나님 보다 돈과 재물을 더 의지하고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 20:28).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특히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가장 자세하고 깊이 있는 예언이다.
이 53장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기사와 세밀한 점에 까지 일치한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700여년 전에 활약했던 하나님의 선지자다. 이 사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과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인류의 구세주 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신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 하시고, 또 인간과 교회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은, 예배 의식 이나 종교 행사가 아니라 <정의 와 자비>의 존중과 실천이다.(미가 6: 6-8), 아모스 5:21-24, 이사야 1:10-17, 예레미야 7: 1-7, 마태 23:23). 정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의지(will) 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자비> 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으므로 (창 1:27), 인간에게도 <정의와 자비>가 최대 관심사이기를 하나님은 기대 하신다. 더우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정의와 자비> 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임을 부지런히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같은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누가10:25-37). 하나님은 특히 사회의 약자와 빈민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자들과 교회까지도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 소수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소위 교회 예배와 종교 행사에만 열심을 냈다. 이것은 전 세계교회에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하겠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17세기 초기부터 19세기 중반이 지나기 까지 약 250년간,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놓고 혹사했다. 아프리카가 고향인 흑인들은 까닭없이 잡혀와서,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15시간의 중노동을 강요 당했다. 그리고 자주 구타 당했다.
백인들은 총이 있었으므로, 마음놓고 흑인을 구타하고 명령했다. 미국인들은 잔인했으며,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자칭 했다.
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땅을 치며 통곡해야 할 불행이었으며, 고난과 수모의 인생이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 것은 천인이 공노할 만행이며 죄악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교회들은 이 잔인한 노예제도를 정당화 하고 옹호했다. 위대한 링컨 대통령이 전쟁을 통해서 흑인들을 해방한 후에도,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과 멸시 그리고 차별 행위에는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교회 예배에 제일 열심이고, 이를 중요시하는 지역은 남부지역이다. 이런 종교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노예제도는 나라의 법에 의해서 폐지되었으나, 교회에서의 흑인 차별은 계속 되었다. 흑인이 백인교회에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으므로, 교회의 흑백 분리 (segregation) 가 생겼다. 흑인이 백인교회에 갔다가, 구타 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런 교회를 교회라고 할수 있겠는가 ? 이런 교회와 이런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에서 불신당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서 높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인 교회들은 미국 교회보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 있는가? 한인교회 에는 우리에게만 특이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 된다. 한국에는 무수한 교회와 성당, 목사와 신부, 그리고 신도들이 있으나, 한국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런가 ? 교회들의 도덕적·영적 타락은 거의 전 세계에 만연한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누가 18:8). 예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때, 참 신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짜 신자들을 많이 보실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는 그동안에 너무 안이했으며, 지금 깊은 반성과 신앙 생활의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누가복음 17:26-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것을 알고 있으나, 우리가 과연 사랑하고 있는지 각자가 스스로를 살펴 보면 알 것이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또는 보상으로서 복을 기대 하면서, 또는 지옥에 가지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남을 사랑 한다면, 그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 타산적인 사랑, 즉 거짓 사랑이다. 타산적인 사랑과 타산적인 선행은 사랑도 선행도 아니다. 하나님은 참 사랑과 참된 선행을 요구 하신다.
따라서 나는 순수한 참 사랑을 하기 원하고 노력도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한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며, 또 한탄 했다. (로마서 7:14-24).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 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더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대가를 지불 하고서 베푸시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인물인 그리스도와 역사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독교의 근본이며 핵심 이므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 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 만이 유일하게 이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대동소이 하다는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고전 1:22-24)고 말했다.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도는 이 말을 두가지 의미에서 했을 것이다.
첫째.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둘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은 자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그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약함과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A. 인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고
B. 인간이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므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라는 명제의 뜻도 분명해 진다.
기적은 있는 것이냐? 종교 다원주의 비판 (5)
성경에는 대단히 많은 기적 (miracle) 이야기가 있다. 이런 기적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냐 ?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직결 되어 있다. 무신론자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존재 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 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적의 유무 여하를 알려고 하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 한다면,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시면서, 또한 ‘자유로운’ 인격적인 하나님 (God as a person) 이시다.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 자유가 하나님에게는 없다고 믿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는 다음 글에서 정식으로 다룰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없다’ 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된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씨는 얼마전 한 강연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과 같은 기적을 믿는 사람은 4 살된 어린 아이의 수준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것은 망언이다. 그는 기적을 부인하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믿는지도 의문시 된다. 우리는 오 씨를 한심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나, 우리가 그를 무시해 버리지 않고 그에게 주목 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일부 한인들에게 대단히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통적 기독교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서슴치 않는 경솔한 지식인의 한 표본으로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그 것을 기독교의 입장과 대조 시킴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다.
오 씨는 최근 또 하나의 책을 출판 했는데 이 책에서도 잘못된 말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문자에 사로잡혀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유치하다며,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하라고 충고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그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고있다.
필자는 이런 오만과 무례함을 본 기억이 없다. 이것은 불교신자가 아닌 내가 불자들에게 불경을 옳게 해석하는 법을 강의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오 씨의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문자대로 해석할 말씀도 있고, 그 참 뜻을 헤아리는 해석을 해야 할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두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오 씨는 이 구별을 안하고 있다.
문자대로 해석하고 이해 할 성경 구절의 예를 들겠다. 구약성경 에서는 출애급기 34:5-6, 이사야 45:21-22, 신약성경에서는 요한복음 3:16.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 참 뜻을 이해해야 할 성구의 예는 요한복음 10:11, 15 : 1-2 이다. 문자대로 해석해야 할 말씀 “여호와 께서 그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과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출 34:5-6)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말씀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 10:11)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한 15:1)
성경을 상식에 따라 해석하라는 오 씨의 주장에는 <숨은 전제> 가 있다. 그것은 동정녀 탄생과 부활, 승천과 같은 기적과 초자연 현상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숨은 전제>는 어느 특정한 세계관, 또는 무신론에 근거가 있는데, 오 씨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숨은 전제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느 특정한 세계관이나 무신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가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무신론 (atheism)도 이런 세계관도 성경과 기독교의 기본 입장과는 상용될 수 없다.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하라고 했는데, 오 씨는 인간의 상식이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변해 왔음을 모르는 모양이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 유럽인들은 지금부터 200년 또는300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는 식탁의 표면과 같이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즉 이른바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 라는 천문학자는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하여 당대인들로 부터 ‘바보’ 라고 조소를 받았다. 지동설은 천동설의 정반대 이론이다. 즉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 보다 약 100년후에, 이태리의 천문학자 갈리레오(1564-1642)는 책을 출판하여 지동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 천문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갈리레오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학설 때문에 그는 죄인 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몇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여전히 천동설을 믿었다. 이 것이 그 시대의 <상식> 이었던 것이다. 아마 일부 동양인과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20세기 초반까지도 지구는 평평하며, 지구가 우주의, 또는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것이 그 시대의 <상식> 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있는 현대인은 아마 없거나,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다. 즉 <상식>이 변한 것이다. 천문학에 관한 상식만이 아니라, 인간의 거의 모든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오 씨의 주장대로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한다면, 성경해석과 신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도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종교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일 수가 없다. 만일 교회가 오 씨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머지 않아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오씨는 그동안 여러 옳지못한 말을 했다. 그는 한인들에게 이미 많은 해독을 끼친 사람인데, 아직도 끼치고 있다. 오씨는 자기 영혼의 평안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중하고 근신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직결 되어 있다. 무신론자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존재 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 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적의 유무 여하를 알려고 하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 한다면,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시면서, 또한 ‘자유로운’ 인격적인 하나님 (God as a person) 이시다.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 자유가 하나님에게는 없다고 믿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는 다음 글에서 정식으로 다룰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없다’ 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된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씨는 얼마전 한 강연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과 같은 기적을 믿는 사람은 4 살된 어린 아이의 수준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것은 망언이다. 그는 기적을 부인하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믿는지도 의문시 된다. 우리는 오 씨를 한심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나, 우리가 그를 무시해 버리지 않고 그에게 주목 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일부 한인들에게 대단히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통적 기독교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서슴치 않는 경솔한 지식인의 한 표본으로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그 것을 기독교의 입장과 대조 시킴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다.
오 씨는 최근 또 하나의 책을 출판 했는데 이 책에서도 잘못된 말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문자에 사로잡혀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유치하다며,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하라고 충고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그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고있다.
필자는 이런 오만과 무례함을 본 기억이 없다. 이것은 불교신자가 아닌 내가 불자들에게 불경을 옳게 해석하는 법을 강의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오 씨의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문자대로 해석할 말씀도 있고, 그 참 뜻을 헤아리는 해석을 해야 할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두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오 씨는 이 구별을 안하고 있다.
문자대로 해석하고 이해 할 성경 구절의 예를 들겠다. 구약성경 에서는 출애급기 34:5-6, 이사야 45:21-22, 신약성경에서는 요한복음 3:16.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 참 뜻을 이해해야 할 성구의 예는 요한복음 10:11, 15 : 1-2 이다. 문자대로 해석해야 할 말씀 “여호와 께서 그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과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출 34:5-6)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말씀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 10:11)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한 15:1)
성경을 상식에 따라 해석하라는 오 씨의 주장에는 <숨은 전제> 가 있다. 그것은 동정녀 탄생과 부활, 승천과 같은 기적과 초자연 현상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숨은 전제>는 어느 특정한 세계관, 또는 무신론에 근거가 있는데, 오 씨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숨은 전제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느 특정한 세계관이나 무신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가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무신론 (atheism)도 이런 세계관도 성경과 기독교의 기본 입장과는 상용될 수 없다.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하라고 했는데, 오 씨는 인간의 상식이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변해 왔음을 모르는 모양이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 유럽인들은 지금부터 200년 또는300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는 식탁의 표면과 같이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즉 이른바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 라는 천문학자는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하여 당대인들로 부터 ‘바보’ 라고 조소를 받았다. 지동설은 천동설의 정반대 이론이다. 즉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 보다 약 100년후에, 이태리의 천문학자 갈리레오(1564-1642)는 책을 출판하여 지동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 천문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갈리레오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학설 때문에 그는 죄인 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몇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여전히 천동설을 믿었다. 이 것이 그 시대의 <상식> 이었던 것이다. 아마 일부 동양인과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20세기 초반까지도 지구는 평평하며, 지구가 우주의, 또는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것이 그 시대의 <상식> 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있는 현대인은 아마 없거나,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다. 즉 <상식>이 변한 것이다. 천문학에 관한 상식만이 아니라, 인간의 거의 모든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오 씨의 주장대로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한다면, 성경해석과 신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도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종교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일 수가 없다. 만일 교회가 오 씨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머지 않아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오씨는 그동안 여러 옳지못한 말을 했다. 그는 한인들에게 이미 많은 해독을 끼친 사람인데, 아직도 끼치고 있다. 오씨는 자기 영혼의 평안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중하고 근신해야 할 것이다.
[특별기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4) 종교 다원주의 비판 (4) - 그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 -
단지 세상의 관습이나 미신 또는 맹신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인생을 옳게 사는 길을 찾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 (하나님)의 존재 여부, 그리고 신 이 존재한다면, 그는 어떤 신이냐 ? 즉 그의 성격이 무엇이며, 또 그는 <인격신> (God as a person) 인지의 여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근본 문제다.
그러나 신 이 존재 한다해도, 신은 ‘신비’ 에 둘러 싸인, 크고 높으신 존재일 것이니, 미미한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그런 신 을 알수 있을 것이냐 ? 그러므로 신 편에서 먼저 인간에게 자기를 알려 주기를 원하시고, 또 알려 주심으로만, 즉, 신 의 자기 계시 (self- revelation) 에 의해서만, 인간은 신 에 대해서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도 형성 할수 있는 것이다. 만일 신 이 숨어 있기를 원 하신다면, 인간은 영원히 신 에 대해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 이 실제로 자기 계시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와 성격과 목적 등을 알려 주셨다고 말하고, 성경은 신 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며, 성경 안에는 계시된 여러 진리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며, 성경의 내용은 단지 인긴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것을 증명할수 있느냐 ? “누군가가 그것을 증명할 때까지는 나는 그것을 믿지못하겠다. 그것을 증명하라” 고 불신자는 요구한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은 성경 밖에 있는 것, 즉, 성경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임을 증명 (authenticate itself)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증명> (self- authentication)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의 논리나 지혜 또는 학문, 그리고 다른 어느 것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 하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지니고 있는 권위와 위엄에 의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런 권위와 위엄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 만일 이런 권위와 위엄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주제(subject)의 종류와 성격 여하에 따라서, 주제를 증명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증명 외에 다른 증명의 방법은 없다. 이 것이 기독교 신학의 답변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불신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이성에 의해서 판단한다. 나에게 있어서, 나의 이성은 모든 진리 판단의 기준이다.” 이 말은 경솔하다. 인간 이성이 진리판단의 기준이라면, 여러 개인들의 이성적 판단이 흔히 서로 다르고, 더러는 정 반대인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왜 그러냐 ? 개인의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개인의 소위 ‘이성적 판단’ 은 흔히 순수한 것이 못된다. 인간이 순수한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하는 학문이나 사업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수학 뿐일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는 종종 또는 자주 감정적 요소와 이해관계의 고려, 그리고 여러가지 편견이 개입하여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고, 죄가 있는 피조물의 이성으로서 심히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 자기의 이성을 모든 진리 판단의 척도로 삼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커피잔 안에 바다의 물을 다 부어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만큼이나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인간이다.
우주와 우리 인생에는 인간의 이성 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신비>가 있다. 우리는 많은 신비에 둘러 싸여서 살고 있으나, 바쁜 삶을 살다 보니, 신비를 전혀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존재의 신비> (mystery of being) 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이 있느냐?” (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 우주와 태양과 인간과 동물과 이런 세상이 있느냐? 아무 것도 없으면 안되느냐?”
여기서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성경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한 증명 없이, 오직 성경의 <자기 증명> 에 의거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임을 믿는다. 이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함께 일하신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믿음>의 중요성과 필수성을 강조 한다. 이것은 신 구약 성경이 같다.
구약성경에서 예를 들면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사야 7:9).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나니라.” (마태 9:22).
“예수께서 저희 (소경)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 진지라” (마태 9:29-30).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 (마태 14:31). 사도 바울의 말: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 (고린도 후서 5:7).
여기서 ‘보는 것’은 증명이나 확실한 증거에 의거하여 믿는 것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이 믿기 시작한 후의 신앙생활에서는, 본인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경과 기독교의 <경험적 증명>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이런 믿음으로 <기사(奇事) 와 이적>, 또는 다른 희한한 것을 경험한 사람은 많다. 이 필자 자신도 그것을 친히 경험했다. 12년된 눈병이 어느 날 순간적으로 완치된 경험이다.
나는 나의 저서 「하나님은 계신다 -그 증거」 (2002년 출판) 의 제15장에서 이 경험을 자세히 기술했다. 믿지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적은 생기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좁은 소견에 따라 종교를 비웃고, 지성인이라고 자부심을 갖는다. 이 것도 일종의 교만이다.
그러나 신 이 존재 한다해도, 신은 ‘신비’ 에 둘러 싸인, 크고 높으신 존재일 것이니, 미미한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그런 신 을 알수 있을 것이냐 ? 그러므로 신 편에서 먼저 인간에게 자기를 알려 주기를 원하시고, 또 알려 주심으로만, 즉, 신 의 자기 계시 (self- revelation) 에 의해서만, 인간은 신 에 대해서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도 형성 할수 있는 것이다. 만일 신 이 숨어 있기를 원 하신다면, 인간은 영원히 신 에 대해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 이 실제로 자기 계시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와 성격과 목적 등을 알려 주셨다고 말하고, 성경은 신 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며, 성경 안에는 계시된 여러 진리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며, 성경의 내용은 단지 인긴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것을 증명할수 있느냐 ? “누군가가 그것을 증명할 때까지는 나는 그것을 믿지못하겠다. 그것을 증명하라” 고 불신자는 요구한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은 성경 밖에 있는 것, 즉, 성경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임을 증명 (authenticate itself)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증명> (self- authentication)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의 논리나 지혜 또는 학문, 그리고 다른 어느 것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 하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지니고 있는 권위와 위엄에 의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런 권위와 위엄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 만일 이런 권위와 위엄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주제(subject)의 종류와 성격 여하에 따라서, 주제를 증명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증명 외에 다른 증명의 방법은 없다. 이 것이 기독교 신학의 답변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불신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이성에 의해서 판단한다. 나에게 있어서, 나의 이성은 모든 진리 판단의 기준이다.” 이 말은 경솔하다. 인간 이성이 진리판단의 기준이라면, 여러 개인들의 이성적 판단이 흔히 서로 다르고, 더러는 정 반대인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왜 그러냐 ? 개인의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개인의 소위 ‘이성적 판단’ 은 흔히 순수한 것이 못된다. 인간이 순수한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하는 학문이나 사업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수학 뿐일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는 종종 또는 자주 감정적 요소와 이해관계의 고려, 그리고 여러가지 편견이 개입하여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고, 죄가 있는 피조물의 이성으로서 심히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 자기의 이성을 모든 진리 판단의 척도로 삼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커피잔 안에 바다의 물을 다 부어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만큼이나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인간이다.
우주와 우리 인생에는 인간의 이성 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신비>가 있다. 우리는 많은 신비에 둘러 싸여서 살고 있으나, 바쁜 삶을 살다 보니, 신비를 전혀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존재의 신비> (mystery of being) 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이 있느냐?” (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 우주와 태양과 인간과 동물과 이런 세상이 있느냐? 아무 것도 없으면 안되느냐?”
여기서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성경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한 증명 없이, 오직 성경의 <자기 증명> 에 의거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임을 믿는다. 이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함께 일하신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믿음>의 중요성과 필수성을 강조 한다. 이것은 신 구약 성경이 같다.
구약성경에서 예를 들면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사야 7:9).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나니라.” (마태 9:22).
“예수께서 저희 (소경)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 진지라” (마태 9:29-30).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 (마태 14:31). 사도 바울의 말: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 (고린도 후서 5:7).
여기서 ‘보는 것’은 증명이나 확실한 증거에 의거하여 믿는 것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이 믿기 시작한 후의 신앙생활에서는, 본인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경과 기독교의 <경험적 증명>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이런 믿음으로 <기사(奇事) 와 이적>, 또는 다른 희한한 것을 경험한 사람은 많다. 이 필자 자신도 그것을 친히 경험했다. 12년된 눈병이 어느 날 순간적으로 완치된 경험이다.
나는 나의 저서 「하나님은 계신다 -그 증거」 (2002년 출판) 의 제15장에서 이 경험을 자세히 기술했다. 믿지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적은 생기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좁은 소견에 따라 종교를 비웃고, 지성인이라고 자부심을 갖는다. 이 것도 일종의 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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