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2010

[특별기고-종교 다원주의 비판]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종교 다원주의 비판 (6)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옳은 이해가 근본이다. 예수님의 말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 이다. (요한 17: 3).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옳은 이해는 성경을 통하여 얻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증언이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을 그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믿는 것은 예수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권위를 친히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마태 4:4-10, 5:17-18, 누가 24:25-27, 44-47 및 기타.

그런데 예수님을 옳게 이해 하려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십자가의 도> 라고 부르고 (고전 1:18)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고전 2:2)고 말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극단적인 결심과 말을 하게된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경천동지할 사건의 의미를 사도는 똑똑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도 사도와 같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비참한 일과 고통 당하는 사람과 무서운 일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크고 어려운 문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 않은가 ? <십자가> 라는 말은 우리 마음안에 아픔이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 사용되는, 거의 일상적인 용어의 하나와 같이 되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 아니다 !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그렇게 가볍게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꼭 필요한 때만 경건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사람이 가볍게 입에 올리는 것도 죄다. (출 20:7) . 두 크신 이름을 우리의 입에 올릴 때는 반드시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또 ‘죄와 싸우기를 피를 흘리기까지 하지 아니한’ 사람은 (히브리 12:4),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중대시 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직 충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특히 나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 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의 죄 문제를 어떻게 피할수 있겠는가 ? 언제까지 피할수 있는가 ?

나는 소나 말이 아니라 인간이므로, 죄를 짓고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이 죄인지를 논하자면, 살인· 강도·사기와 같은 것 만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정의와 자비> (justice and mercy) 에 대한 무관심, 거짓 사랑, 신의가 없는 것, 자기 중심의 삶, 위선, 불성실, 시기와 분냄, 복수심, 사회의 약자와 빈곤층에 대한 무관심과 몰 인정,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불충한 마음과 언행, 그리고 하나님 보다 돈과 재물을 더 의지하고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 20:28).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특히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가장 자세하고 깊이 있는 예언이다.

이 53장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기사와 세밀한 점에 까지 일치한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700여년 전에 활약했던 하나님의 선지자다. 이 사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과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인류의 구세주 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신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 하시고, 또 인간과 교회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은, 예배 의식 이나 종교 행사가 아니라 <정의 와 자비>의 존중과 실천이다.(미가 6: 6-8), 아모스 5:21-24, 이사야 1:10-17, 예레미야 7: 1-7, 마태 23:23). 정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의지(will) 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자비> 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으므로 (창 1:27), 인간에게도 <정의와 자비>가 최대 관심사이기를 하나님은 기대 하신다. 더우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정의와 자비> 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임을 부지런히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같은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누가10:25-37). 하나님은 특히 사회의 약자와 빈민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자들과 교회까지도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 소수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소위 교회 예배와 종교 행사에만 열심을 냈다. 이것은 전 세계교회에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하겠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17세기 초기부터 19세기 중반이 지나기 까지 약 250년간,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놓고 혹사했다. 아프리카가 고향인 흑인들은 까닭없이 잡혀와서,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15시간의 중노동을 강요 당했다. 그리고 자주 구타 당했다.

백인들은 총이 있었으므로, 마음놓고 흑인을 구타하고 명령했다. 미국인들은 잔인했으며,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자칭 했다.

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땅을 치며 통곡해야 할 불행이었으며, 고난과 수모의 인생이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 것은 천인이 공노할 만행이며 죄악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교회들은 이 잔인한 노예제도를 정당화 하고 옹호했다. 위대한 링컨 대통령이 전쟁을 통해서 흑인들을 해방한 후에도,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과 멸시 그리고 차별 행위에는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교회 예배에 제일 열심이고, 이를 중요시하는 지역은 남부지역이다. 이런 종교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노예제도는 나라의 법에 의해서 폐지되었으나, 교회에서의 흑인 차별은 계속 되었다. 흑인이 백인교회에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으므로, 교회의 흑백 분리 (segregation) 가 생겼다. 흑인이 백인교회에 갔다가, 구타 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런 교회를 교회라고 할수 있겠는가 ? 이런 교회와 이런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에서 불신당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서 높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인 교회들은 미국 교회보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 있는가? 한인교회 에는 우리에게만 특이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 된다. 한국에는 무수한 교회와 성당, 목사와 신부, 그리고 신도들이 있으나, 한국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런가 ? 교회들의 도덕적·영적 타락은 거의 전 세계에 만연한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누가 18:8). 예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때, 참 신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짜 신자들을 많이 보실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는 그동안에 너무 안이했으며, 지금 깊은 반성과 신앙 생활의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누가복음 17:26-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것을 알고 있으나, 우리가 과연 사랑하고 있는지 각자가 스스로를 살펴 보면 알 것이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또는 보상으로서 복을 기대 하면서, 또는 지옥에 가지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남을 사랑 한다면, 그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 타산적인 사랑, 즉 거짓 사랑이다. 타산적인 사랑과 타산적인 선행은 사랑도 선행도 아니다. 하나님은 참 사랑과 참된 선행을 요구 하신다.

따라서 나는 순수한 참 사랑을 하기 원하고 노력도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한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며, 또 한탄 했다. (로마서 7:14-24).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 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더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대가를 지불 하고서 베푸시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인물인 그리스도와 역사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독교의 근본이며 핵심 이므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 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 만이 유일하게 이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대동소이 하다는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고전 1:22-24)고 말했다.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도는 이 말을 두가지 의미에서 했을 것이다.
첫째.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둘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은 자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그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약함과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A. 인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고
B. 인간이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므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라는 명제의 뜻도 분명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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