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2010

[특별기고-종교 다원주의 비판] 하나님의 존재와 그 증거 종교 다원주의 비판 (7)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 또는 그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고대에서 부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으로서 알려진 것은 현재까지 20여종에 달한다. 그러나 이 것들을 소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검토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의 신관인데, 유신론은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 (God as a person 또는 a personal God )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이 신관이 가장 타당한 신관이라고 생각한다.

<인격적 하나님 > 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생각하는것·남과의 대화·행위·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 가능하고, 자아 의식과 자유가 있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이런 능력과 자질이 있으므로, 인격적인 존재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이런 능력과 자질이 있는데, 창조주인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없겠는가? 만일 없다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보다 열등한 하나님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피조물인 인간이 초월적이며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 자신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으시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 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참된 종교와 참된 도덕의 성립이 가능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까닭에,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도 주시지 않는다. 이 점은 설명이 필요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떨며 땅에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의 정신은 (거의) 마비되고, 마음의 자유도 상실하고, 책임성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이기를 멈출 것이다. 나를 당장, 말하자면, 지옥불 속에 던져 넣을 수도 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누가 감히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으며, 누가 그의 법을 지키지 않겠는가? 이 상황은 노예가 무서운 주인 앞에서 몸과 마음이 위축되고,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만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의미있는 종교와 도덕이 성립할 수도 없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 자신도 그런 관계를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바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공포에 떨며 땅에 납작히 엎드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과 부득이 마지못해 도덕을 지키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다르다. 참된 종교와 참된 도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의 유지가 필수적이다.

인간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 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또 하나님의 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도록 우주 만상과 인간의 경험이 되어 있는 것은, 이 ‘거리’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기 원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자연계(우주)와 인간의 경험 안에 다양하게 준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 무신론자(atheist) 가 되는 것은 그의 의지(will)의 결정이지, 이성적 판단의 결과는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것과 인간의 사후 내세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정확하게 비슷하지는 않지만, 두 경우 사이에는 공통된 면이 있다. 내세가 있고 또 천국과 지옥의 존재가 확실하다면, 지옥에 가지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누가 행동을 조심하지 않겠는가?

누가 신중하고 타산적이되지 않겠는가? 이 경우에도 참된 종교와 참된 도덕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후에 내세가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면 안되는 것이다.

지각이 있고 철이 든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다음과 같은 인생의 근본 문제를 생각할 때 일 것이다.

1.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 죽음의 문제와 각 사람의 <궁극적 운명>의 문제는 여기에 속한다.

2.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느냐? 있다면 무엇이냐?
3.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이냐?
4. 이 경이롭고 신비한 우주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느냐 ?
사람이 이 근본 문제들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무관심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 근본 문제 중에서 1번, 즉 각 사람의 죽음과 <궁극적 운명> 은 가장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의 죽음과 그 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세속화’ 된 현대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으며, 그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무의미한 짓으로 본다는 말을 우리는 가끔 듣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세속화’ 한다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세상이 세속화 되어가고 있으니, 나도 그 추세에 따라가는 것은 잘 하는 일이 아니다.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를지 모르나, 나 자신은 사람이 의례히 세상의 추세에 따르고, 또 세속화 하는 것은 잘못 이라고 본다. 사람이 거의 아무런 생각이 없이 세상의 추세와 유행을 따르고, 사소한 일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넓은 들판에서, 수백 또는 수천마리의 짐승 떼가 뛰기 시작하면, 모든 짐승이 아무런 생각없이 함께 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소나 코키리와 같은 짐승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로서, 정신적 내면성과 주체성 그리고 깊이의 차원이 있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수백마리의 소떼가 뛰듯이, 거의 생각없이 세상의 추세에 따라가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일이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짐승은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는 것 같다. 짐승에게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인간 만이 정신이 있으므로, 죽음을 생각하고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을 갖는 것이 정상이다. 이 불안은 오직 종교적 신앙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사람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또는 친지의 장례식장에 가서도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요,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 러시아의 사상가요 문호인 톨스토이( Tolstoi) 는 “나이 35세를 지난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바보다”고 말했다. 시대와 문화가 변하면, 죽음의 의미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행과 생활 양식은 변하지만, 인생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현대인은 미래와 자기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불안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는데,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 세속화된 현대인도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여러가지 보험, 예를 들면, 건강보험·화재보험·자동차보험·생명보험에 드는데, 그러면서도 자기의 <궁극적 운명> 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과연 현명한 일 인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다음 문제로 넘어 가겠다.
필자는 편견 없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어려울 것으로 믿고 있다. 자연계(우주) 의 관찰과 자연과학을 통하여 알려진 우주의 놀라운 현상들과 인간의 경험적 사실들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 라고 할만한 것 (clues)이 많이 있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 특히 의미 깊다고 생각 되는 것 12 가지를 골라서, 필자의 저서 「하나님은 계신다 : 그 증거」 (603쪽. 2002년) 안에 제시하고 자세히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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