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3/2010

고통의 문제 - 하나님 알기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이다. 어떤 도구인가? 자신(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표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내 자신을 포기하게 되고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렇게 고통을 '이해'하고 그 원리대로만 적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다. 고통은 정말 힘든 것이고 아픈 것이다. 이 고통은 우리를 그야말로 극단에 이르게 한다. 벼랑끝으로 몰아낸다.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에 내던진다절벽 끝에 서있는 느낌. 이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하는  자괴감. 내가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나를 몰아친다. 이 고통의 아픔은 그만큼 견디기 힘들다.

고통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몸이 아픈 고통,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살아야 하는 고통도 있다. 북한의 굶는 아이들이나 아프리카의 기아민들처럼 아무 곳에도 먹을 것이 없다면 그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또 마음의 고통이 있다. 이 역시 통증이 심하다. 몸이 아픈 것 못지 않게 아프다. 서로 미워하고 오해하며 상처를 받게 됨에 따라 생겨나는 고통은 찢어진다는 표현 그대로 찢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또 죽음의 고통도 있다. 죽는 것이 고통인지 아닌지는 경험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아픔은 이루말할 수 없다.

이 고통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고통은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한 필연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고통은 우리에겐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통은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는 도구이다. 고통은 우리의 편안한 삶에 각성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고통은 우리가 삶을 되돌아 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고통이 필연적이라면 차라리 숙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속편하지 않을까한대 맞아야 잠이 잘 오던 군대에서의 졸병 시기와 같은. 하지만 고통은 아무리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준비된 마음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고통 외에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고통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아니 오히려 이 고통 속에 뛰어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고통이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상을 깨뜨리는 고통이고, 또 하나는 세상으로의 동화를 거부하는 고통이다.

일상이라 함은 우리의 삶을 받치고 있는 시간이라는 속에서 갖는 우리의 생활 자체를 말한다. 기독교인도 사람인 이상 어찌 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침에 일어나고 식사를 하고 가정을 갖고 직장을 가져야 하며, 돈을 써야 하고 버스를 타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이러한 일상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에 함몰되면 우리의 의식은 그 일상을 이어가는데만 골몰하게 된다. 모든 것은 평범해 져버리고 그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우리가 가져야 할 감사와 경이를 우리는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말조차 일상이 되어 버린다. 또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조차 감동이 없어져 버린다.

각성이 없이 이러한 일상에 내 생각을 그냥 맡겨버리면 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기 싫어진다. 내 일상으로 인해 이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일상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되어 왔고 그 의미가 소중한지 매일매일 느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이 일상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일상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매일 영혼을 갉아먹는 것이 된다.

일상을 깨어보라. 얼마나 신비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지. 아침의 햇빛은 내 영혼을 쪼갠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숨을 쉬면서 내가 갖고 있는 이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걸음조차 신기하고 손가락의 움직임조차 감사하다. 온몸이 마비된 자에게 손가락 움직임은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 손가락 움직임은 온몸의 다양한 활동을 종합한 에너지의 총합이 이뤄진 결과이다매일 먹는 밥이 정말 흔한 일이 아닌 점도 알게 된다꽃들이 다양한 색깔로 반길 때 그곳에 담긴 DNA를 통해, 그리고 만져지는 그 촉감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일상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매일 갈고 있어야 하며, 마치 굶주린 이리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양식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외에도 세상과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고통도 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자신들의 세계에 동화시키기 위해 교묘하고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겨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과 가깝다.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누가 준 재능이지 모르지만 모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천재적인 재능으로 우리를 재미로 붙들어 놓는다. 그 갈고리는 정말 교묘해서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아 버린다. 티브이와 영화, 여자와 음식, 맛과 향기, 월급과 경쟁심, 수많은 감정 싸움 등은 나를 이 땅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밀착시켜 버리게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접촉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달콤한 유혹을 뿜어내며 우리를 쓰러뜨린다이 땅의 거주민들은 굉장한 미인들이 많고 그들은 언제나 나를 자신들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를 받아들이게끔 동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직장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태도보다는 세상의 틀을 갖추게 강요한다. 술을 마시게 하는 것, 동료와 경쟁하게 하는 것, 개인의 악한 권위에 굴복하게 하는 것 등은 그런 유혹의 하나이다.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기 보다는 학원에 보내야 하는 것도 이런 세상의 원리에 동화되는 작용이다.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그 종류이다.

우리에게는 이 교묘한 수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구별의 능력과 신앙의 성장이 필요하다. 또 용기와 심지어는 목숨을 거는 각오까지 돼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동화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라. 술자리에서 술을 거부하게 되면 어떤 위협을 받게 되는지. 오른쪽 뺨을 때린 자에게 왼쪽 뺨을 대는 행위에 어찌 고통이 따르지 않겠는가. 복수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복수심을 죽여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겸손하려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 교만의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눌러야 하는지. 내 모든 소유를 팔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곳곳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부정하게 하는 지시를 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하는 자는 딱 두 가지이다. 이미 그렇게 따르고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외면하면서 살고 있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고통을 우리는 견딜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는 견딜 수 없다. 견딜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이다. 하나님이 그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그분에게 맡겨야만 한다. 기도로 승리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어 했다. 기도로 이겨내고 믿음으로 이겨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신다. 아니 정말 도와줄 수밖에 없다.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신앙을 견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선택은 너무나 자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내 의지와 내 뜻을 열어드리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내 골격을 바꾸는 일이다. 뒤틀렸던 골격을 다시 잡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뒤틀린 척추가 다시 잡힘으로써 온몸이 건강해지듯이 내 뒤틀린 삶이 바로잡히는 순간 내 마음과 생명 속에는 기쁨과 생기가 다시 넘치게 된다. 그 기쁨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사모할 수 있으며 그 기쁨을 맛본 자로서 그 진정한 달콤함을 못잊어 지금 동화된 순간에도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고통이자 또다른 쾌감이다. 나는 매일 처절한 고통을 겪는다. 아니 죽는다. 매일 죽는다. 기독교인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고 매일 이런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출처] 고통의 문제| 작성자 균열의 발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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