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나는 보여졌다(I have not seen, but I have been shown).
본다(to see)는 것은 “눈으로 보아 시각적인 인지”를 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볼 때, 나는 이것의 형체, 모양, 그리고 소리와 친숙해 지는 데, 그 이유는 이것이 보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보여준다(to show)라는 것은 “표적(sign) 으로서 인정되고 가리키다, 표현에 의해서 분명해 지다”라는 뜻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적이며, 시각적 감각을 선호한다. 만일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 전체적인 그림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시각적인 평가는 시각적 감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것은 애매한 인상 혹은 깨달음이 될 수도 있다. 안정감은 당신이 시각적으로 무엇인가를 감지하게 하지만, 당신이 감지하고 있는 안정성에 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가질 필요는 없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사용할 때 가장 기뻐하신다 (히11:6). 시각의 두 가지 영역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백문이 불여 일견”이라고 말하는 데, 왜냐하면 어떤 것이 나타났을 때 이것에 대한 증거가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저자이며 생물학자인 라이얼 왓슨(Lyall Watson)은 “나는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 하지만 신경생리학적으로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면 내가 처음부처 이것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면 나는 이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가”라는 글을 썼다.
당신에게 일단 무엇인가가 보여졌다면 당신은 이것을 보기 전에 믿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다면(이것이 시각적인 연결이 아닌 어떤 표시 혹은 감각이라는 것을 지금 기억하라), 당신에게 일어나게 될 다음의 것은 개념과(conceptualization)하는 것이다. 즉 당신이 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개념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만일 이것이 당신을 최초의 인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이것은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분명하게 듣지 못하는 데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귀로 듣는 것-감각(sense), 이해(realiza tion), 인상(impression)-대신에 고막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무엇인가가 보여졌을 때, 이것이 필수적으로 시각적 만남을 통해서가 아닌 표현 (expression) 혹은 인도(guidance)함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다음은 이와 같은 성경의 예들이다.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울이라 불렸던 특별한 손님을 위해서 저녁을 준비한다. 사무엘은 사울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울이 그에게 보여졌다.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로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아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삼상9:15 ~17)
주님은 사울이 도착하기 하루 전 사무엘의 귀에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리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무엘이 보았을 때(시각적 만남) 주님은 그에게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그가 보기 전에 사울이 보여졌다. 당신도 이와 같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무언가가 보여지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당신에게 무엇이 보여졌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내적 음성이 이것을 지적해 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데, 그것은 너무 힘들게 듣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보게하실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 장을 통해서 이전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세 개의 다른 시각의 수준 안에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마음과 감각들 – 인간들은 단순히 육체적 존재가 아닌 영적 그리고 혼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과 연결되어져야만 하는 숨겨진 진리와 보물이 있는 곳, 즉 다른 두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마음(the mind: 주관적)
2. 감각(the sense: 객관적)
만일 마음과 감각이 우리의 영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감속되며 그것 때문에 과학, 지식 그리고 일반적인 세계가 진보하는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지난 세기동안 높은 비율로 모든 것이 증가 할 수 있었던 단 한자기 이유는 하나님의 왕국이 종교의 네 가지 벽 밖에서 진보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적인 것들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며, 비록 심하게 공격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추구되어지고 있는 존재이다.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29: 18) 라고 말했다. 히브리어 단어인 “파라”(parah)의 의미는 “썩다, 감속하다, 후퇴하다, 즐어들다”이다. 우리는 오늘 날 전세계적으로 도덕적 윤리의식이 타락해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선견지명 (foresight)에 의해서 얻어지는 혁신적인 진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보게 해주는 선견지명 없다면, 사람들의 꿈과 비전은 줄어들게 되고, 그들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퇴보하게 된다.
매일 당신의 성품과 직업, 그리고 각각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들의 발전이 있어야만 한다.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다음의 세 가지 영역에서 당신이 향상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생각과 인식의 명확성
2. 당신의 판단력의 진보
3. 절제
항상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과거를 재현하려고 시도하는 것 대신에, 지금 당신의 존재로 미래를 현실로 끌어 오라.
믿음-알려지지 않은 곳 –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할 때 당신은 이것과 함께 하는 느낌과 감정들에 친숙해지게 된다. 내가 무엇인가 마음 속 깊은 것을 알게 되거나 혹은 인상을 통해서 가지게 된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또한 음성에 대해서 확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근심(걱정)을 경험한다.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새로운 종류의 믿음이 생겨나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이것을 시도해 보지 않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쉬운데 신약성서의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라”(약2:20)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위해서 역사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죽은 것이다. 일단 당신이 그 믿음을 시도해 보았고 믿음대로 역사를 했다면, 이것은 굉장히 실제적으로 알려진 믿음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과 친숙해 진다면 확실하게 당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을 만지고 돕는데 사용할 수 있다.
당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어떤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당신은 기도하고 질병이나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기도의 과정 가운데 질병이 사라졌다. 이제 당신은 이러한 특정한 도전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다룰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당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도전이 다가 온다면,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고 당신을 위해서 역사하지 않았던 다른 수준의 믿음이 요구되어진다.
나는 모세와 반석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예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바닥나게 되자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반석에서 물을 얻는 것에 대한 것을 알고 있지 못했고 의심했다. 다만 하나님이 그에게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셨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세는 자신들을 억누르는 압제자들의 발톱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으며 지팡이로 홍해를 둘로 가르는 기적 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행하도록 도전 받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셨고 만일 그가 순종하면 물이 반석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천천히 반석으로 걸어가 그의 지팡이를 들었을 때 이미 어떤 사람들은 모세를 미쳤다고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멈췄지만 갑자기 결단력과 정확함으로 바위를 내려쳤다(출17:1-7). 물론 모세는 이것을 전에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근심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러한 기적이 이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더 높은 수준의 믿음-노력, 갈등, 그리고 끈기를 요구로 하는 알려지지 않은 믿음-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당신의 삶의 과정 사운데 친숙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행할 때 당신이 초조하며, 걱정하며, 그리고 경직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일단 당신이 여러가지 갈등을 극복하고 성공했다면, 다음에 당신이 비슷한 일을 하도록 요구되어졌을 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적응한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전에는 신비롭고 알려있지 않은 것을 이제는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일단 당신의 미음이 역사하게 되면, 그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게 된다. 대신에 믿음을 성취하는데 휠씬 수월해지고 빨라진다. 왜냐하면 당신은 더 이상 내부적인 의심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힘들어 하지 않고, 경험과 담대함으로 영감을 얻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 반석을 친 후 물이 솟아나는 결과를 본 후에, 그의 역할은 끝이 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더욱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움직일 것을 요구하셨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절대 만족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당신은 무척 흥분 될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는 여정 가운데,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물이 없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라고 하신다. 모세는 반석에 명령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친숙했던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반석을 내려 쳤으며 그의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민20:1-13참조).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라는 더 높은 수준의 믿음을 요구하셨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세는 그의 안정적인 영역 안에 남아있기로 결정하고, 그가 생각한 최선의 행동을 선택함으로서 하나님을 잘못 대표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모세가 그 반석을 내려지는 데는 많은 믿음이 요구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그렇게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석에 명령하여 물을 솟게 하는 것을 모세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만약 모세가 순종하였더라면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다.
예언적인 말씀은 어두운 곳에 비추는 빛과 같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관점을 하나님이 변화시키도록 허락하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변화될 때 모든 것이 이것과 함께 변화될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변화가 당신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기도는 사물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기도는 당신을 변화시키고 당신이 사물을 변화시킨다. 기도가 당신을 변화시키고 당신의 환경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때, 모든 것을 쉽게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역사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예언적인 말씀이 역사하는 것이다.
<나는하나님의음성을 듣는다/킴 클레멘트/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