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012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왕상8:13)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때로 신앙생활 중에 이런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며 곤란을 느낀다.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 사람은 제자였다.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젊은 제자에게는 중요한 결정에 직면해 있던 상황이었다. 자기 부친이 작고할 때까지 집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자기 스승 예수를 따라가면서 그를 섬기기 위해 그의 가정과 가족을 떠나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생각컨대 그 청년의 부친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얼마나 더 연명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가족 중 어디에 우선권을 두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기꺼이 제자의 길을 가려는 마음도 아셨다. 그래서 그는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무슨 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급한 더 중요할 수 없다는 교훈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 교훈은 문자적으로 또 아무에게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사상 장례식은 부활의 소망을 더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엄수했던 것이다.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전데 부모에게 작별하였다(왕상 19:20,21).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이 상황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청년의 남은 가족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죽은 자들인가? 그들은 주 예수를 믿는 신자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아직 영적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여전히 죽은 상태였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you were dead)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허물로 죽은(dead)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들의 영적 관계에서 볼 때 그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친의 필요를 공급해 주며 최후의 장례에 대한 책임을 지기에 적합한 처지에 있었다.

지금도 우리들의 가족과 주변에는 영적으로 죽은(dead) 사람들이 많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에게 임함으로 그들이 다시 태어나는(born again)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resurrection)이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한 11:25). 그분은 살리는 영이시다. (큐티일대일)

1/30/2012

♧가로등의 유래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교만에 이를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롬4:1-12)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행위가 아닌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창15:6).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와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것과 같은데, 다윗의 생애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큰 불법을 행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통회 자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죄에 대하여 가리우심을 입은 것입니다(시32:1이하). 바울은 이처럼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은혜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거저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은 없으나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 주신 이 행복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이 행복을 담는 그릇은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이 유대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믿음으로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행복자로 살 수 있습니다.

‘조심하면 중간은 갈 수 있었는데’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욥36:24)

잘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식 중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에 대한 것이 없었다. 즉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 왔다. 그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사람을 고쳐줄 능력도, 지식도,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을 바리새인들 앞에 데려 오면 당황할 뿐일 것이다. 성경은 너무나도 단순(simple)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다.
그 벙어리가 말할 뿐만 아니라 보게 된 것이다. 말을 하고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이 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듣고 말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 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바알세불이란 사단과 마귀의 이름으로도 그다지 익숙지 않은 용어이다. “바알세불”은 “바알”(Baal)과 “제붑”(zebub)의 합성어이다. “바알”(Baal)은 가나안 이교신 아하시야의 돌발적 사고와 죽음의 기사가 나오는 에그론의 블레셋인들의 제식에 나타났다. “제붑”(zebub), 또는 “파리들의 주(lord of flies)"라는 뜻이다.

“제붑”(zebub)에 나오는 ‘b’들은 모두 ‘v’로 발음되는 것으로 파리들이 붕붕거리는 것을 의성어 형태로 모방한 것이다. 제식용의 작은 금파리들이 가나안 유적의 발굴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바알세붑이라는 칭호는 사단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고대 이교적 칭호들과 마찬가지로 이 단어의 음은 불분명하게 바뀌어 바알세붑이 바알세불(Baalzebul) 또는 베엘세불(Beelzebul), 즉 “똥의 주”가 되었다. 바리새인이 말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와 사단이 사단을 내어 쫓을 수 없는 영적 진리를 예를 들어 반박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시면서 성령의 역사임을 분명히 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면 죄 사함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밝히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생각해보라 “파리의 주” 혹은 “똥의 주”라는 뜻을 가진 칭호를 우리 주님 메시야에게 사용하였다니.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한낱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라고 하다니. 잘 모르면 알려고 하고 그래도 모르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를 인정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하다.

오늘날에도 성령 하나님(God the Holy Spiriy)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이나 지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신다. 오, 주님의 신비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이 되지 않게 하소서! (큐티일대일)

1/29/2012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

다른 복음은 요란케 한다(갈1:6~10) 
다른 복음은 바른 복음에 기초한 교회와 공동체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바울은 그의 양떼들을 위협하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경고하며, 바른 복음을 수호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더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고 할례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을 미혹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 완전하라고 도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시험에 노출되는 교회와 신자들은 크게 요동하게 됩니다. 바른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과 미혹된 사람들로 나뉘어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천년 교회사에서 계속하여 반복되어 온 일입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더하여 말합니다. 결국 교회는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요동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갈1:6~10)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복음,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생략된 복음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나 논리적인 설득이 있더라도, 탁월한 도덕과 윤리를 가지더라고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열심과 뜨거움이 있어도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더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시 바울이 경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할례와 율법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보충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무엇을 삭제하거나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의 말을 합니다. 차이점을 말하기보다 유사점을 강조하는 연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 자체를 훼손시키면서 타협하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일용할 양식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눈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과 환경과 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0:1∼4, 147:7).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기에 찬양을 통해 감성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5:1, 빌 4:6∼7).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염려가 많을수록 기도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염려하는 만큼 기도한다면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표현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드림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시 50:14, 고후 9:11).
지금 나의 형편이 어렵고 지금 나의 형편이 드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양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으로 나아가느냐의 질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기 헌금을 드릴 때 부부가 상의해 드리는 것이 더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넷째, 간증을 나눔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사 12:4, 신 4:9).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간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간증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간증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목격자가 하는 것입니다. 보고 경험한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간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의 간증은 신명기 4장 9절 말씀과 같이 우리 주변과 우리 가족들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적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3:9~20]
지금까지 유대인의 죄를 심도 있게 다루었던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은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방인들이라고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더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모두가 죄인들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그 혀에는 속임이,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어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파멸과 고생으로 달려감으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목구멍, 혀, 입술, 발과 같은 이런 신체기관들은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인간들은 스스로 그 목적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죄는 그렇게 죄 중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8절).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 까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입니다. 오늘날도 지구촌에는 평화라는 명목으로 온갖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서운 악들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의로움이 없음을 진실로 인정하고 더욱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가 다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죄를 핑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거울 앞에 서게 되면 자기 몸의 허물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인류의 죄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자신만만한 사람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지만, 사실상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자도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어보면서,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참된 구원을 맛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1/28/2012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야곱은 역전승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30년을 방황하면서 험난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의 인생 마지막 17년은 행복으로 인도된 삶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름답게 변화되고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픔을 승화시켜 성숙된 인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인생을 멋지게 혹은 아름답게 마칠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은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매력적인 삶을 살았던 야곱을 인도한 분은 하나님이셨기에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자기중심적 믿음을 가졌었고 철저히 자기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야곱은 이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 변화의 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쌓아오고 만들어가고 속여가며 누렸던 것이 진짜 복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환도뼈를 치실 때에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내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축복하는 사람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야곱은 혼자 복 받기 위해 뛰어다니던 자였습니다. 물론 그는 그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그가 창세기 49장에서 축복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축복이 나오게 됩니다. 그는 자녀들을 축복하고, 바로를 축복하고, 만나는 자들을 축복하는 자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바로왕 앞에 섰을 때 예전이었다면 자녀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을 그가 이제는 왕까지 축복하는 자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축복하는 것에 약합니다.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는 이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은 형이 망하고, 삼촌이 망하고, 다 망해도 자신이 부유해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지만 말년에는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배하는 사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믿음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며 예배도 배웠는데 예배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배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배자는 나의 존재가치를 내려놓는 자입니다. 진짜 믿음이 좋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야곱을 인생역전으로 인도하시고 풍성함으로 채우신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는 시간 가운데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인도하시길 소망합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음 갖기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2)



이스라엘 사회에 이러한 민화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아이를 업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친구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 이 말에 아버지는 “내 아들일세”라고 바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번에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이 분이 네 아버지가 맞는가?” 그러자 이 아이가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내려놓고 “내가 이제껏 너를 업고 왔고, 너를 키워왔는데 왜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 아니고도 업고, 키우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꼭 나를 업고 키웠다고 아버지라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민화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광야 40년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이방신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민화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당신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80%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믿지 못하고, 자녀를 믿지 못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불행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건강한 사회는 신용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믿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이렇게 중요한데 왜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까? 


첫 번째는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고, 주님과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의지적으로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꾸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또 다른 언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믿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속아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속아줍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믿기 때문에 속아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너무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성경이 그렇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너무 많습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믿음이 생명이고, 믿음이 구원입니다. 이 믿음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에,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돼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가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올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대하30:2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물음은 여기에 열거되고 있는 죄의 목록이 단지 대표적인 실례이며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때 훨씬 더 날카로운 문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요구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에서 배제되는 여러 다른 부도덕에 대해서도 열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는 음행, 우상숭배와 술 취함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더러운 것, 호색,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방탕함 등이다.

일단 우리가 바울이 열거한 내용을 전부 읽으면, 우리 가운데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읽은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들조차도 죄로 얼룩져 있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눅 18:26)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고린도 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여 하나님의 도적적인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자격을 거부하는 것이다.

바울은 실제적인 도덕성을 무시하여 당당하며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까지 부추겼던 종교관에도 관심을 두었다. 그는 고린도 교인 사이에 나타난 이러한 불의의 증거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악을 비난하게 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왜 그런가? 
정의에 의하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악의 세력의 패배로 절대적인 의가 깃든 나라이기 때문이다(고전15:21~28).

바울은 이런 비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불의한 옛 삶 속에 하나님의 변화의 기운이 개입하실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인간 삶의 찢기고 죄로 얼룩진 잔해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덧입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죄의 침범을 거부하는 하나님 백성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파괴적인 생활 방식에서 구원받은 죄인, 즉 기적의 산물이었다. “씻음”받은 모습은 그들의 세례를 생각나게 했으며, 동시에 이 의식이 상징하는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내적인 정화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음에 틀림없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 “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더 나아가 그들은 ‘거룩함’을 얻었다. 이 같은 은혜의 선언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누구인가? 
서두에서 바울이 열거한 죄로 상처를 입었으나, 그들의 상처 난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고 깨끗해져, 도래하는 주의 나라를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면서 끊임없이 파고드는 죄의 침범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산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큐티와 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26/2012

궤도 수정에 성공한 사람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6:19)

‘아폴로 13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폴로 11호에서 17호까지 달에 무사히 착륙했지만 13호는 산소탱크 폭발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지구로 귀환하는 내용입니다. 13호가 지구로 돌아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대기권을 통과하는 일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자동장치가 고장 나서 수동으로 들어올 때 대기권을 너무 빨리 통과하면 타버리게 되고, 너무 늦으면 튕겨 나가 우주 미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아폴로 13호는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오지만, 궤도를 수정해서 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2번의 궤도 수정을 했던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구원으로 향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걸음이고 두 번째는 축복의 문을 열기 위해 100세에 가진 이삭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관련 내용을 살피며 우리도 동일하게 궤도 수정에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우선순위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계속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우선순위의 수정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궤도 수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기에 그의 희망이고 전부였습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으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며(창 21:11) 쫓아내었기에 이삭만 남았는데 그마저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드림의 신앙’이었습니다.
드렸다는 말은 헬라어로 완료시제입니다. 아직 이삭을 드리지 않았는데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시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구하지만 드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만일 내 신앙이 드릴 줄 아는 신앙이 아니라면 궤도 수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릴 줄 아는 신앙을 가진 것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작정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결정체는 부활입니다. 그때에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힌트를 얻자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무작정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이삭이 다시 살아날 것을 하나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저자도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따라가는 삶인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인생의 궤도를 하나님께로 수정하여 은혜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목동제일교회)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8~17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할 정도로 그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간절함 때문에 로마에 가기 위해 수차례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길이 막혔던 바울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울의 마음이 로마 성도들을 향하여 불타듯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교회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만(8절), 로마교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기독교인들과의 신학적 논쟁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무슨 신령한 은사(11절)-복음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서 나오는 가르침-를 나눠줌으로 로마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견고히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13절). 참 목자 바울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문제 있는 곳에 가기를 꺼려합니다. 자신을 환영해주고, 대접해 주는 사람들에게 가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갈등에 휩싸여 있고 자신을 환영해 줄지 안 해줄지도 모를 그런 곳에 가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열이 있는 곳, 상처가 있는 곳, 다툼이 있는 곳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더욱 사모하여 가야할 곳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 받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9:15). 그때부터 자신 같은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이방인을 위한 사명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그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했습니다(고전 9:16). 그리하여 바울은 복음의 황무지였던 서바나(스페인, 당시 땅 끝) 까지도 로마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선교하고자 했습니다(롬 15:23,24). 



특별히 복음에 대한 확신(16절)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17절)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하였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매우 부담스러운 마음입니다. 빚을 갚아야 할 생각 때문에 잠자리도 편하지 않고, 눈만 뜨면 빚 갚을 생각으로 땀 흘려 일합니다. 우리도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다하여 복음 전도와 제자 삼는 일에 우리 자신을 확실히 내 던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머리를 이해하십시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대상16:36)

“그 사람은 사무실에서 머리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때의 머리(head)란 지도자, 수장(chief), 우두머리, 지휘자로서 자명 하게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을 볼 때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말씀도 이해가 된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 그런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려해 볼 때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의 머리로서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기란 혼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위치와 격(格)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전 11:3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머리’이다.
헬라어 ‘케파레(kepare)’로 사용된 ‘머리’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들어서서 여자들의 머리에 쓰는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이런 교훈을 준 것이다. 권세를 암시하는 것으로 ‘머리’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남녀 관계의 위계질서(位階秩序)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전통 안에서 있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 권세를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로 연결되는 ‘명령의 연쇄’를 단정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선 안 된다. 상하관계(上下關係)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NIV, RSV, NASB와 NEB는 헬라어 ‘케파레’를 영어의 축자적 의미인 ‘머리’로 옮겨 신중하게 번역하는 반면, 다른 현대 번역본들은 비유적인 의미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TEV(Todays English Version)은 케파레를 ‘…에 대한 지고성(superemover)’으로 옮긴다. LB(Living Bible)은 이 본문을 ‘아내는 남편에게 그 남편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라고 옮겨 놓았다.

데이비드 로어리(David K. Lowery)는 말을 들어보라. “머리(케파레)라는 단어는 종속과 기원의 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구약 적 개념이며, 후자는 신약적인 개념이다.” 흔히70인 역으로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역본을 해석할 때 많은 학자들은 ‘머리’에 대한 바울적 용법의 배후에서 ‘출처, 기원 또는 최고, 왕관, 완성’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머리’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말
14세기에 헬라어를 말하는 탁월한 교회지도자인 알렉산더 시실은 이 본문을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남자의 케파레(머리)는 그리스도시라. 왜냐하면 그 각 남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훌륭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의 케파레(머리)는 남자니라.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육신으로부터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케파레(머리)는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14에 따르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이 땅에 오사 육신이 되셨다. 또한 요한복음 8장 42절, 13장 3절, 16장 27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언급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그리스도는 남자의 존재 근원이요 남자는 여자의 존재 근원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 근원이시라.” (큐티와 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25/2012

약속을 받았음에도 부르짖는 사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다니엘이 위대한 기도를 결단하게 된 것은 성경 예레미야서에 나온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70년이 되는 때에 그 백성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말씀을 볼 때에, 그는 성경이 말씀하는 ‘그때’가 가까운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니엘의 태도는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있고, 그리고 이미 때가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회복되겠다고 약속되어 있으면 일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에는 다니엘이 그 약속을 보고서 굳이 ‘결심’을 하고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부모가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면 때가 될 때 사주실 것이 아닙니까?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조르면 부모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 부모에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예의가 될지 몰라도, 하늘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예의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셨지만, 놀랍게도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에는 하나님의 회복 약속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끝부분에는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인간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가령 뷔페식당을 생각해 보십시다. 거기에 있는 것을 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크로 찍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실제로 기도해야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가 약속의 말씀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너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중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도 싱겁습니다. 그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구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서 감동을 받고서 좋아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번 두번 기도하다가 끝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사실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자동적으로 공급해주셔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시금 다니엘의 영성으로 돌아가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 우리의 사역지에 실제적인 역사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박지웅목사)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로마서 1 : 1 ~ 7]

바울을 일면식도 없었던 로마 성도들과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오래전에 예언된 약속의 성취였습니다(2절).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오래전부터 약속하셨던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입니다. 


둘째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영원한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에 의해 바울이 부르심을 받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어 순종케 하는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5절).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복음은 장구한 세월을 거쳐 확실하게 검증된 복음입니다. 바울의 심령을 밑바닥부터 변화시켰고, 그의 근본자체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강력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살 때,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강력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로마서 1 : 1 ~ 7 ]

바울은 고대 서신의 양식을 따라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수신자를 언급한 후에 인사를 합니다.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중심으로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종의 존재 목적이 주인이듯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목적이었고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바울의 존재를 생각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자입니다. 자기주장이 없고 자기의 소유권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 능력,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생사여탈권까지 모두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바울을 주님은 원하는 대로 쓰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으로서 주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확신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 헌신하며 복음을 위해 삽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면서도 기쁨과 평강이 없고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종으로서 자기 포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려 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고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고민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대상16:8~9)

예수를 믿어 구원의 은총을 맛보고 있는 사람이 다시 멸망 당할 수 있는가? 예수 믿는 자가 무서운 죄를 짓게 될 경우, 그는 회개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은 우리에게 ‘그렇다’라는 답변을 주는 것 같다.

이와 유사한 교훈이 히브리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毁謗)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 하느니라”(막 3:28~29).

갈라디아서 5:19~21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수 믿어 구원에 참예하게 된 신자는 멸망 당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며, 어떠한 죄든지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용서될까? 안 될까?
그렇다면 이 두 주장의 말씀은 어떤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히브리서 본문에 대해 칼빈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타락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특수한 것으로 하나는 일반적인 것이다. 성도가 어떠한 일에 또 어떠한 길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타락하는 수가 많고 따라서 모든 죄는 타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적질, 위증, 살인, 술 취함, 간음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죄인이 하나님께 어떤 한 가지 일로 범죄 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의 은혜를 거부함에서 오는 복음에서의 전적 이탈 또는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떠나는 것이고 성령에 대해 범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미끄러져 나가 전적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수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만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대체로 타락한 자는 진실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 명목적으로 신자였다는 것과 거듭났다 해도 택함을 받지 못했다는 견해(Alford)를 내놓았다. 또한 본서가 당시 유대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다는 독특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은 배교(背敎)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 성경에 보면 도저히 양립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것은 있다. 그것은 성도의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죄악의 문제는 매순간 그리고 날마다 보혈을 의지하여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해결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사죄(赦罪)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큐티와 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24/2012

하나님에 대한 죄 된 태도

로마서 1 : 18 ~ 32
경건치 않음(18절) : 하나님에 대한 죄 된 태도
불의(18절) : 인간에 대한 죄 된 태도
저희 속(19절) : 이성과 양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는 말씀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자연 계시, 즉 양심과 자연세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지만, 어리석게도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짐승과 벌레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죄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불러옵니다.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지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도 하나님 대신에 다른 피조물들을 조물주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돈, 성공, 건강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상들과 죽은 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바로 탐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즉각적인 우상숭배가 됩니다(골 3:5). 즉 우상 숭배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내 맘에 싹 트는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심판을 아끼시지만, 죄가 쌓이면 반드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첫째로 사람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일정기간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동성끼리 서로 음욕이 불 일듯 하는 것입니다(26,27절).

진실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남녀의 결혼관계 속에서만 성의 사용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간의 성적행위와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점에서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 둘째로 상실한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의한 모든 죄악들이 세상에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사형에 해당되는 무서운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행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옳은 일이라며 부추깁니다(32절).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 의지 남용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유의지의 무제한적인 사용으로 인간들은 도덕적 파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시 119:9).

복음은 그 무엇에도 결코 제한 받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셋집에서 만 이 년을 거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은 다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학신 있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것들을 가르치되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더라"(행전28:30-31)


사도행전은 로마의 셋집에서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이 이렇게 미완성적인 모습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침] 
사도 바울은 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결코 성경 가르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감시하는 군사들조차 호의적이 되었거나 복음화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비록 사도 바울의 몸은 쇠사슬에 매어 있었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 무엇에도 결코 제한 받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고 한다면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잘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새로운 영혼들의 중생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생하는 이들이 있어야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며, 말씀이 풍성하게 증거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롬 10:17).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려면 성경선생들이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성경선생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많아지고 그곳에서 교육받고 훈련받고자 하는 좋은 지원자들이 많이 있어야합니다.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 
사도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 세계의 심장부 로마의 한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마치 한 점 누룩과도 같은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헌신의 결과 복음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때가 AD62년경인데 AD313년에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던 나라에서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고 복음은 로마를 벗어나 유럽과 온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역사를 이루려면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지는 어디입니까? 각 나라의 대학입니다. 대학은 세계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을 교육합니다. 세계를 경영하는 이념과 철학, 경제이론과 과학기술 등이 대학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대학은 오늘날의 세계 중심지입니다.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을 가지고 사도 바울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성경선생으로서 사역한다면 사도행전적인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의 29장에 기록되는 제2, 제3의 사도 바울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묵상하신 당신의 모습이길 기도합니다.

누가 요청한 것일까?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사118:14)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 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일에 대해 요청한 사람이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로 되어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두 아들이 직접 예수님께 부탁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마가복음 10:35~37).

얼마 전 성경을 정독하다가 새삼스럽게 그 차이를 발견한 말씀이었다. 누구든지 이런 차이점을 발견하면 의구심이 든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누가 맞는 거야? 이거 잘못된 것 아냐? 성경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열을 올린다. 성경도 인간이 기록한 글인데 어떻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느 설명이 정확한가? 함께 살펴보자.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두 가지 다 정확한 것으로 본다. 그 어머니와 두 아들이 주님께 이런 간청을 드리기로 동의하고 어머니가 먼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감으로써 이 간청을 드릴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면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아들은 곧 뒤따라 나아와서 자기들을 위한 어머니의 청원이 단순히 어머니만의 생각이 아님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라고 기록한 것이다.

아마 마가는 먼 훗날 그 어머니가 요청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두 아들이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했던 것 같다. 두 복음서에서는 동일하게도 그 요청에 대해 어머니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두 아들에게 직접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늙고 병든 다윗 왕에게 먼저 들여보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왕상 1:11~21). 그런 연후에야 나단 자신이 들어가서 다윗이 전에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였던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가 다윗의 후계자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그녀의 진언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왕상 1:22~27절).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다보면 이 같은 기록의 차이점을 보기도 하고 때론 번역 성경의 오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정황을 이해하며 동시에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신앙고백에는 흔들림이 없다.(큐티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20/2012

내면의 아름다움

프랑스의 유명한 법률가이며 정치가 로버트 슈만은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자였습니다. 그래서 한 언론인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러 해 전이었습니다. 제가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에 실수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발을 밟은 적이 있습니다.

당황한 제가 사과를 하려고 그 여자에게 돌아서는 순간 그 여자는 욕을 퍼붓는 것입니다. ‘이 멍청한 병신아? 아니 자기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해?’ 그러면서 고개를 들고 저를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 선생님 미안합니다. 저는 제 남편인줄 알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외모의 아름다움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빼어난 미인이라도 품행이 단정치 못하면 그 아름다운 얼굴도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잘 간직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나 사람의 외모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타고난 미인도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운 품격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오직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고 선행을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인 것입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인한 풍성한 열매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89: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형식주의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형식주의와 형식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 형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형식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형식주의는 자신의 영성을 갉아먹는 요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헌금을 할 때도 내가 교회를 다닌 게 얼마인지, 내가 직분이 이런데 헌금을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의 모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에 조금 더 보탬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업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개업했으니 예배를 드려야 잘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 중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돕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맹이 없는 신앙의 형식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고 나아가야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형식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바로 사도 바울에게 그런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돕는 형식이 아니라 은혜를 바탕으로 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7절 말씀을 보면 감옥에 갇힌 어려운 상태 속에 있는 사도 바울이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4절을 보면 괴로움에 참여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잘못 없이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사역에 물질적 필요를 도운 교회가 빌립보교회 외에 아무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후원하고 도왔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구절에서 반복되는 참여한다는 말은 함께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즉, 함께 기쁨과 즐거움과 아픔을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기도함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둘째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해 사도 바울이 풍족함을 누렸듯이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시길 축복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26~31)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으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무엇입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감과 우월감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월등하게 잘난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고 열등감으로 몸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기가 살아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것, 자기의 소유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자기 인격의 천박함 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 존재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많은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는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 자랑거리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 지혜로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더 강하고 위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졌든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나를 향하신 주인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부름 받은 자녀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간증을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을 주시고 구속해 주신 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30,31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목적대로 살아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넘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잠16:18),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5:5).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1/19/2012

마음의 감옥 6가지

마음의 감옥 6가지 

첫째 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

[행전28:17-29]
사도 바울은 죄수로서 가택 구금이 되었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에서의 첫 사역은 어떠하였습니까?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 
사도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로마에 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민족과 조상들이 전하여 준 풍습을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동족이 자신을 고소하였고, 로마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석방하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거부하자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여 로마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며, 자기는 결코 동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전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날짜를 정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하루에 10시간이상 성경을 강론하며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은 믿기도 하고 믿지 아니하기도 하였고 서로 맞지 않은 가운데 흩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자기 사역의 원칙이었습니다(롬 1:16). 동족에게 고발을 당하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동족들을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사랑하여 먼저 동족들을 청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하기로 전략을 바꿈]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로마에 오게 되었다고 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자신에게 모진 고난을 겪게 했던 유대인들을 먼저 청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동족들이 복음을 제대로 받아드리지 않는 것을 목도하고 낙심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좇았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방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사역의 전략적인 전환을 하였습니다(28절).

사도 바울의 지금까지의 사역의 원칙, 전략은 늘 그래왔습니다. 먼저는 유대인, 유대인들이 거절하면 사역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음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13:46 “비시디아 안디옥”, 18:6 “고린도”, 19:8~9 “에베소”). 유대인들의 고의적인 복음의 거절은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

내 양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를 다르느니라 목사 안 따라가면 다른 길이 없으니깐...
그게 험해보이든 불가능해 보이든 상관없이 가자면 가고 서자면 서고 건너자면 건너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은 절대적입니다.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네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결코 따라올 수 없다! 죽고자 하지 아니하면 죽지 않고는 따라올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전 주님 따르는 편을 택하겠어요!
우리의 형펀이 어떻든 어떤 상황이든 자다가 깨서라도 물을 때 머리가 터져 나갈만큼 고민하다가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 무슨 꼴을 하고 있다가도 따라야지!

주님이 나를 따르가고 하신 말에 덜도 더도 있을 수 없어 누구라도!
저 개인에게 묻는다면 전 여전히 주님 따르는 편을 택하겠어요!
엎어지고 제껴지고 부끄럽고 별짓다해도 난 주님 따르겠어요. 더욱 따르겠어요.
난 그 길 밖에는 없느니깐...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데,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데, 저를 어디서 구원해 주셨는데,

예수면 다야?
다른 건 말할게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람들 예수님이라면 꺼뻑 넘어가더라.
고민하고 싸우다가도 예수님이 뭐라고 했다 그러면 그낭 무릎 딱 끓더라.
너덜너덜 깨지고도 주님 자가 그러면 가더라.
겁이 나서 덜덜 떨면서도 무서워도 가더라.
못하겠어도 순종하더라.
이런 말을 해서 우리 주님이 가장 높임을 받으셔야돼.
우리 주님이 가장 영광를 받으셔야 돼.
예수면 다야? 예수면 다냐고?
그럼.. 다지!
그럴수록 다지!
그러기에 다지!
당신은 누구를 따를거야?
지금 예수님의 요청을 믿음으로 취하자고
"넌 날 따르라".
<김용의선교사>

고난 중에 로마에 입성[행전 28:11-16]

안전하게 로마에 입성 
사도 바울의 로마로의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안전하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요, 또한 주님의 뜻이었던 로마 복음화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내가 ……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 “네가 ……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행 23:11)는 사도 바울의 결심과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여러 험난한 여정 중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도중에 죽거나, 도착하더라도 심각하게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려 복음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모습으로 도착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도록 안전하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로마에 입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형편과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타납니다(엡 1:11).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비록 여정이 험난했더라도 안전하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은 꼭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는 어떠한 형편과 상황 속에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고난 중에 로마에 입성 
사도 바울이 비록 안전하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로마에 입성하기는 했지만 로마로 오는 길에서 예상치 못한 여러 고난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겨울이기에 뱃길이 위험할 것이라는 예감은 했지만 실제로는 예상보다 더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배는 파선하고 바다에 수장될 위험에 처했다가 간신히 섬에 상륙하게 되었고, 섬에서 독사에 물려 죽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분은 자유롭지 못한 죄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채 셋집에 가택연금 되어 군사들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로마에 가고자 했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도 하였지만 그 길의 여정에서 고난을 당하거나 죄수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로마로의 여정은 매우 힘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고난 중에서도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 8:28). 

모든 것에는 좋은 일, 불행한 일도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을 로마에 보내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을 가르쳐 로마복음화를 이루고, 당시 세계의 중심도시 로마복음화를 통해 세계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사단도, 자연재해나 사람들의 악한 생각도 결코 막지를 못했습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1/15/2012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고전1:1-9)

고린도 지역은 그리스 반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연결되는 해협에 위치한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항구 두 개가 합쳐져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이 지역에는 이방 신전이 30개 정도 있었고, 한때 여사제가 천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이라 하면 ‘음란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락한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생겼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거룩한 사람들, 즉 성도들이 탄생된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의 공동체가 아름다운 것은, 타락한 세상 한가운데 세워져 죄와 힘써 싸우고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소망이 됩니까? 그 타락한 땅에 고린도 교회가 없었다면, 죄의 지배 아래 상처받고 있던 사람들은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활로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성도들을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초청해주셨습니다. 죄로부터 건져내서 거룩한 교제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특히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은사’란 은혜의 개인화되고 구체화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언변(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능력)과 지식(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은사로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흐릿하지 않고 분명하게 복음을 표현하는 능력을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은사들을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책망할 것이 없는 의로운 자로 성장해 가는데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 섬기며 믿음 위에 견고히 서서 성도들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세우기보다는 도리어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각양 풍성한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를 견고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표현이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1/14/2012

드림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시 50:14, 고후 9:11)

지금 나의 형편이 어렵고 지금 나의 형편이 드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양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으로 나아가느냐의 질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기 헌금을 드릴 때 부부가 상의해 드리는 것이 더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간증을 나눔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사 12:4, 신 4:9).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간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간증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간증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목격자가 하는 것입니다. 보고 경험한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간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의 간증은 신명기 4장 9절 말씀과 같이 우리 주변과 우리 가족들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적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영적성숙]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눈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과 환경과 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찬양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0:1∼4, 147:7).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기에 찬양을 통해 감성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5:1, 빌 4:6∼7).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염려가 많을수록 기도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염려하는 만큼 기도한다면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표현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눈 먼 나실인의 눈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6)



구약시대에는 나실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또는 일생 동안 하나님께 구별되어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음으로 구별되어 보였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함으로 세상 즐거움에서 절제하였으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 부정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나실인 규례를 갖고 살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구별된 자로서의 나실인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나실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거룩한 백성들이 의미적으로 보면 나실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삼손 역시 사사이자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나실인이었던 삼손이 두 눈이 뽑힌 채, 짐승들이 돌리는 맷돌을 돌리며 비참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 멀리해야 할 포도주에 취했고, 부정한 시체를 만지기도 했습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좋은 대로 결정했습니다. 말씀을 떠난 삶이 그 당시에는 좋을지 모르나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그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둘째는 괴로움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6장 16절은 삼손이 들릴라의 요청에 마음이 번뇌로 가득했다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의 자리에 있으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번뇌와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죄의 자리에서 떠나야 하는 신호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러지 못했고, 그는 결국 죄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서서히 무너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떠나 쾌락을 좇아 사는 그의 삶은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한번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서서히 무너져 가게 됩니다. 뉴스에서 들리는 무너진 목회자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번에 무너진 것일까요? 그들은 서서히 무너져 갔던 것이고 삼손 역시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비참하게 쓰러진 삼손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힌 후에 영적인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의 유혹들을 보고 넘어졌던 그는 눈이 뽑힌 후에 정말 떠야 할 눈을 떴던 것입니다. 또한 삼손은 영적 교제의 회복과 함께 그의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블레셋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그의 사명을 그의 죽음으로 감당했던 것입니다. 삼손과 같이 그리스도의 백성 된 성도들에게 사명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기를 축복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15:2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인자(人子)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복음 1:51에는 최초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당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왜 스스로를‘사람의 아들’이란 단어로 사용하셨을까? 사뭇 궁금한 일이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용어를 마태복음에서 15회, 마가복음에서 15회, 누가복음에서 25회, 요한복음에서 12회 사용하셨다.

먼저 구약의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선 ‘인자’라는 단어가 두 가지로 사용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단순히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시적 표현이거나 하나님이 상대적 존재로서 불릴 때 사용되었다. 시편 8:4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하였다.

에스겔서에는 인자라는 칭호가 90회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부르시는 특정한 대명사로 여겨진다. 이것은 다니엘서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단8:17)

두 번째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칭호는 메시아 예언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80:17)
다니엘서에서 ‘인자’라는 단어는 장차 올 메시야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인성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다. 첫 아담이 인류의 시조로 ‘사람’으로 불린 것처럼 둘째 아담(고후 15:45)인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 자칭했다. 주님은 당신을 인자라고 했으나, 제자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 메시아요,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인자’라는 용어의 특징은 또한 종말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자는 장차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다(마 13:41,26:31,막13:26, 눅17:22). 이것을 보면 인자의 초자연적, 신성의 신비한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은 역시 신비에 속한다.(큐티와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12/2012

남은 자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계획입니다(롬11:1 ~10).

바울은 이스라엘에 남은 자를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섭리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결과 이방인에게 복음이 퍼져나가 그들이 놀랍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때에는 이방인들이 얼마나 충만하게 되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로 크게 번민하던 바울은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하여 끝내는 온 세상이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희망에 찬 비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결코 절망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안전한 일들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더욱 크고 위대하신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그 어려움을 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위의 것을 찾는 삶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8)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한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매일의 일상과 업무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땅의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의 말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 땅의 것들을 주지 말고, 세상 일로 채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하면서 매일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 네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문을 보면 “나는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무척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 연수도 중요하고, 오늘 신앙의 경험과 배경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영적인 고백입니다.
내가 과거에 대해 철저하게 끊어지고 회개하며 죽었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린은 의미요법을 통해 세 가지 가치를 소개하는데 간단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만 과거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힘든 것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나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건강한 의미를 계속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의 것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해 주십니다.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땅히 죽어야 할 나를 바라보게 되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앞에 도래할 천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계속해서 생명을 경험하게 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신비스러운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는 소망의 사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올해 초 40년을 통치하던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무바라크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무하마드라는 손자가 있었습니다. 측근의 말을 들어보면 국정을 운영하는 가운데 그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손자만 보면 그는 인자하게 웃고 힘을 내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요 행사에 영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손자가 그 자리를 늘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바라크에게는 손자가 큰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09년 5월에 원인 모를 두통으로 병원에 갔던 손자가 뇌출혈로 죽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무바라크는 예전에 보여주었던 추진력도 사라지고, 삶의 의미를 잃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 5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취소하였고, 2009년 6월 5일 이집트로 온 오바마가 상당히 중요한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조차도 무바라크는 슬픔에 잠긴 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문 기사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수많은 기간 동안 독재를 해왔던 자들로 본다면 무바라크는 오히려 깨끗한 쪽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가 무너진 것은 그의 부정부패가 폭로된 것이나 고실업률이나 고물가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힘이 되었던 손자의 죽음일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면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그가 바라보는 그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 우리의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을 산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과 그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원은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세 가지 교훈을 통해 소망을 가진 사람, 즉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첫째 부모는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이 오고 잠깐 근심하게 되는 상황이 있으나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부모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지만 너무 현실만 보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부모는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뛰어넘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참을 줄 알고, 예수님 때문에 가슴 뭉클해하며 전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을 통해 세워질 부모들이 이와 같은 자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혼의 온도계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17)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뒤에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들어갈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서 다시금 언약갱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낭독되고 그 앞에서 그들은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계표는 말 그대로 땅의 경계를 정하는 것인데, 이것을 옮긴다는 것은 땅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굉장히 무서운 죄로 단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가지의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이 탐나서 그 땅을 빼앗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결정적인 멸망을 선포해버리십니다(왕상 21:19). 아합의 아내 이방인 이세벨은 아합이 왕으로서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지 아합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들의 죄를 지적할 때, 호세아 선지자는 여러 가지 죄 중에서 바로 지계표를 옮기는 것을 지적하여 말씀하십니다(호 5:10). 결국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그 백성의 생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백성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백성은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백성은 지계표를 옮기지 않는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극적으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적극적으로 감사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결국 지계표의 문제는 하나님백성의 기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생사의 문제를 걸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백성과 세상 사람들의 인생이 ‘근본 기초’가 다릅니다. 욕망이 기초가 되느냐 아니면 만족과 감사가 기초가 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삶’이란 결단코 예의범절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감사란 예절의 문제요 사람됨의 문제일 수 있지만, 하나님백성들에게 감사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영적인 온도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그것은 오직 우리에게 감사의 향기가 나고 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계표를 옮길 때, 하나님은 그들 안에 감사의 향기가 말라있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향기가 말랐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비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향유의 향기이기 이전에 그 영혼 속에서 풍겨나는 감사의 향기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에서 감사의 향기가 풍겨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백성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영적 온도계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11/2012

쉿! 침묵해보세요...

우리는 지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독하고, 침묵할 필요가 있습디다.
고독하고 침묵해야 거짓 자아가 탈을 벗고 참 자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과 고요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 '침묵',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있을지라도, 여리고 성 앞에 있을지라도, 어떤 위협과 급박한 것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3세기 말부터 5세기에 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드의 사막으로 들어가 생활한 수도자를 가리켜 사막의 교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전까지 기독교는 로마의 박해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고인하여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더 이상 싸움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교회의 적이 아니며 세상은 교회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세상 문화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 시절과 다른, 아니 더 심하게 죄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 속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 더 여러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막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막은 세상 죄와 유혹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장소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을 멈추는 일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생각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이해 우리에게는 침묵과 고독이 필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점이 큐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큐티가 잘 안되는 이유는 큐티(Quiet Time with God)라는 단어의 뜻 처럼 하나님과만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독이 필요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큐티할 때TV를 겨놓거나 음악을 듣지는 않습니까?
전화를 받거나 다른 일을 함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큐티 시간을 자투리 시간이 날 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쿠티는 언제나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내려놓고 고독과 침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하나님의음성을듣는큐티/하정완>

내 안에 역사하는 부활의 권능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119: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5절부터 네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마지막 네 번째 기도제목에 해당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너희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도대체 어떤 능력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어떤 능력이 머물러 있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강력과 힘과 능력으로 일하셨는데, 그 결과 믿는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이 부어졌고 바로 그 능력이 지금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자연과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창조 능력이 대단하지만 그 창조 능력도 죽은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합니다. 죄를 씻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려놓았고, 성령님은 오늘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제발 알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칫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무력하지 않은가’라는 고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앞에서 무력하게 순교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은 이와 같은 고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을 뒤집어 놓은 부활의 능력이 있으며,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 안에 머물러 역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사상도 철학도 교리도 아닙니다. 
부활은 능력이고 실제 경험해야 할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부활절의 형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질문합니다(고전 15:29). 부활은 생활 속에 체험해야 할 능력이고,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 그것을 주장합니다. 자신은 그 부활의 능력 때문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으며, 또한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이는 경험을 했지만 결국은 이겼다고 간증합니다(고전 15:31∼32). 


믿음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무력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교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즉 부활의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험하면서 살았고, 더욱 더 체험하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빌 3:10). 부활의 능력은 현장성을 가집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거기서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바로 그것이고, 그 바울의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돼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10/2012

마음의 감옥 6가지

첫째 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진 마음을 회복하세![엡4:31-31]

치유함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능력

첫째, 친절: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님은 '친절'이라는 항목을 원어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친절은 '육익한 사람이 되라는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긍훌: '다른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보면서 슬퍼하는 따뜻한 마음'을 긍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긍휼함은 굳어진 마음이 풀어진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이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당대의 의인이라면, 그에게 굳은 마음이 있었을까요? 원한이 있었을까요? 복수심이 있었을까요?

노아는 자신을 조롱하고 상처주는 사람을 위해 긍휼함으로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도 노아의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긍휼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긍휼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셋째, 용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로마서 5:6,7절에는 이 말씀이 확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내 삶에 날마다 적용시키길 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7)

'친절과 긍휼과 융서'가 우리 안에 자리 잡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베풀어야 할 덕목 8가지

1. 스스로에게 성공 바이러스를 감염시켜라.
당신의 적은 슬럼프다 늘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유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2. 젊음을 느낄수 있도록 자신을 배려하라.
스스로의 의욕을 불태워야한다. 젊음은 나이 위에 머무는것이 아니다 바로 그자리에서 뛰는 순간 찾아온다.

3. 건전한 시민 정신을 키워라.
자신이 갖고 있는 민주적 사고방식을 다음세대의 정신적 인프라로 넘겨주어야 한다. 사십대의 가장 중요한 의무중 하나다.

4. 부를 추구하되 한편으론 관대하게 대하라.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물질적인 부는 정당하게, 노력한만큼 구하라.

5. 원망하지 말라.
갑작스런 사태 앞에서도 세상 탓하고 남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알고 좀더 겸허하게 인생사를 받아들자.

6. 남을 배려하라.
나이 들수록 세상은 함께 사는것 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7. 떠날때를 알아야 한다.
아직은 이르지만 만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당신은 미련 없이 떠날 줄 알아야 한다.

8. 사랑으로 뭉쳐라.
애들도 사랑하고, 배우자도 사랑하며, 나아가 자신도, 세상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지나쳐 망가지는 세상이란 결코 없다.

- 마흔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

부모는 믿음의 사람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3:18)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믿으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일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고 산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때 마가복음 6장 48절에는 독특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들을 보시고’입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해서 보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믿음을 체험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음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주려고 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민수기 13·14장을 신명기 1장이 반복해서 기록하는데 모세는 의미 있는 단어를 씁니다. 개역개정은 둘 다 정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바뀌기 전 성경은 민수기에서는 탐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정탐은 소가 풀을 먹기 위해 대충 훑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탐사는 주의해서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탐사하라고 했지만 그 사람들은 정탐, 즉 대충 훑어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이라는 말과 진실이라는 말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본문 28∼29절, 32절에 보면 그들이 정탐한 땅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며,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 살고 있었고, 아낙 자손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뚜기 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보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왕, 홍해, 아말렉의 위험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거기에 아낙 자손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리더는 사실을 사실대로만 보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만 본다면 누가 순교하고, 누가 선교하며, 누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14장으로 가면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만 봅니다. 불평과 원망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른 백성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용서를 구하는 모세의 믿음의 간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은 하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믿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시며 28절에서 너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의 교회는 믿음의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1/09/2012

혀가 아닌 마음으로 대하라

말을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다. 대화를 통해서 목적한 바를 달성하는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 가운데 달변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대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 던진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서 대화의 질도 높이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화제를 이끌어 나간다.

성공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한 순간 "이 사람은 참 진실 하구나"하는 걸 느끼게 된다. 세치의 혀로 대화를 하지 않고 마음으로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 육체나 영혼이 깨끗해 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기에 성공한 사람 가운데 의외로 순수한 사람이 많은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사람을 이용 하거나 속이려 들지 말아라 속인 사람은 금세 잊어버려도 속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한다. - 좋은 글 중에서 -

은혜에 들어감.

바울은 칭의의 결과를 현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의 화평, 과거적인 측면에서 은혜에 들어감, 미래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총 망라하여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혜에 들어감이란 말은 마치 어느 공간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과거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일반 백성이나, 심지어 제사장들도 성소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데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 우리들은 이제 환난을 당해도 불행으로 생각하거나, 운명주의자가 되거나 절망가운데 머물지 않습니다. 환난을 나에게 꼭 필요해서 주신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내하며 연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당신은 환난을 분노와 비탄으로 반응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면서 훨씬 더 풍성한 복을 가져올 것으로 믿고 감사하십니까?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믿음의 부자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 앞에 섰습니다주머니를 뒤졌습니다만 마침 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차마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속 깊은 연민 때문에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면서 말했습니다. “형제여마침 내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그러나 당신의 너무 춥게 보이는 손을 잡아 드리고 싶소부디 용기를 내서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남에게 소망을 주면 자기도 소망을 얻게 되고
남을 사랑하면 자기도 사랑을 받게 되고남을 성공시키면 자기도 성공하게 되고남을 축복하면 자기도 복을 받게 됩니다그러나 남을 실패하게 만들면 자기도 실패하게 되고남에게 고통을 주면 자기도 고통을 당하게 되고남을 저주하면 자기도 저주받게 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에 서서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구제하며 성공시키는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2:22)

히브리서 3장1절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말씀합니다.
말씀 그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현대 도시인의 삶을 살기 때문에 이 일이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유가 많아서 이런 명령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특별히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 다니며 노숙인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과 핍박을 견뎌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를 깊이 묵상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가장 낮은 자리로 인도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과 종교도 십자가만큼 인간을 낮은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보게 된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아르키메데스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면 몸의 부피는 흘러넘친 물의 부피와 같습니다. 흘러넘친 물의 양을 보면 나 자신의 몸의 부피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죄의 결과 흘러넘친 물의 양이 어떠합니까? 그 물의 양은 상상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요? 우리 죄의 결과가 우주보다 크시고 온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죽으시는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우주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가 설사 느낄 수 없어도 깨닫고 알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죄의 부피’는 진실로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합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늘보다 땅보다 더 큰 우리의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셨습니까?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가 또다시 적용됩니다. 흘러넘친 물의 양을 보십시오. 우리가 받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물이 흘러넘쳤습니까? 온 세상보다, 온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 죽으셨습니다.
R C 스프라울은 “예수님보다도 더 비싼 가격을 인간에게 붙인 분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철학도, 어떤 종교도 기독교 복음보다 더 비싼 가격표를 인간에게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에 서면 어떤 인간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향해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07/2012

♧가로등의 유래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