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012

십자가를 바라보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2:22)

히브리서 3장1절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말씀합니다.
말씀 그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현대 도시인의 삶을 살기 때문에 이 일이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유가 많아서 이런 명령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특별히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 다니며 노숙인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과 핍박을 견뎌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를 깊이 묵상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가장 낮은 자리로 인도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과 종교도 십자가만큼 인간을 낮은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보게 된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아르키메데스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면 몸의 부피는 흘러넘친 물의 부피와 같습니다. 흘러넘친 물의 양을 보면 나 자신의 몸의 부피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죄의 결과 흘러넘친 물의 양이 어떠합니까? 그 물의 양은 상상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요? 우리 죄의 결과가 우주보다 크시고 온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죽으시는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우주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가 설사 느낄 수 없어도 깨닫고 알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죄의 부피’는 진실로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합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늘보다 땅보다 더 큰 우리의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셨습니까?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가 또다시 적용됩니다. 흘러넘친 물의 양을 보십시오. 우리가 받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물이 흘러넘쳤습니까? 온 세상보다, 온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 죽으셨습니다.
R C 스프라울은 “예수님보다도 더 비싼 가격을 인간에게 붙인 분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철학도, 어떤 종교도 기독교 복음보다 더 비싼 가격표를 인간에게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에 서면 어떤 인간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향해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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