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12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롬16: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7~9)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약속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약속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행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모두 십자가 밑의 가나안 땅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이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 밑의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먼저,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 합니다. 그 땅은 믿음의 싸움을 통해서 점령 할 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적을 이기고 그 땅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말씀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의심하거나 행하기를 두려워하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는 죽은 말씀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 능력 있는 복된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읽고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게 됩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영광을 바라보고 고난을 감당하라(롬8:12~27)

신자들의 성화에 가장 큰 장애물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여 아주 작은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날 피조물들도 본래의 상태대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육체가 새로운 몸을 얻고 타락한 본성이 완전히 소멸하여 해방되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책과 속박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확고하게 해방되었지만, ‘아직’ 우리의 죄된 본성은 소멸되지 않았고 육체는 영화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을 열렬히 소망해야 하며,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견디면서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 기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27/2012

♡♣중년을 즐기는 아홉 가지 생각♣♡

첫째. 학생으로 계속 남아 있어라.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둘째. 과거를 자랑 마라.옛날이야기밖에 가진 것이 없을 때 당신은 처량해진다. 삶을 사는 지혜는 지금 가진 것을 즐기는 것이다

셋째. 젊은 사람과 경쟁하지 마라. 대신 그들의 성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과 함께 즐겨라.

넷째. 부탁받지 않은 충고는 굳이 하려고 마라. 늙은이의 기우와 잔소리로 오해받는다.
다섯째. 삶을 철학으로 대체 하지 마라. 로미오가 한 말을 기억하라.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꺼져라"


여섯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겨라. 약간의 심미적 추구를 게을리하지 마라.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며 책을 즐기고 자연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일곱째. 늙어 가는 것을 불평하지 마라.가엾어 보인다. 몇 번 들어주다 당신을 피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덟째.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다 넘겨주지 마라. 그들에게 다 주는 순간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다. 두 딸에게 배신당한 리어왕처럼 춥고 배고픈 노년을 보내며 두 딸에게 죽게 될 것이다.

아홉째.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마라.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상 어떤 예외도 없었다. 확실히 오는 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 그때까지는 삶을 탐닉하라. 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왔노라.

- 작자 미상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롬8:12~27)

로마서 8 : 12 ~ 2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빚진 자로서 더 이상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삽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롬8:12~27)
성령의 인도함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의미는 타락한 본성을 그 모든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갈 5:24)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막8:34).

우리가 부정과 불법이라고 하는 모든 습관에 대한 냉정한 거부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회개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스러운 습관, 버릇, 교제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택해야할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자유로 바꾸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와 그분의 상속자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받은 유업의 첫 열매로서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해 증거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육신을 좇아 살 수 없고 몸의 행실을 죽이며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여리고에서의 승리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신11:16~17)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수6:1~5)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려면 먼저 여리고 성을 함락해야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여리고 성을 점령할 것인가를 자세히 지시하였습니다.

우선 제사장 일곱 명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하고, 그 앞에는 무장한 백성이 따르며 언약궤 뒤에는 백성들이 행하게 했습니다. 또 여리고 성 주위를 돌 때, 절대로 외치거나 음성을 발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수6:10)

이것은 성을 돌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치된 마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3백만 명에 이르는 큰 무리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주위를 돌면서 ‘과연 이 견고하고 높은 성이 단지 성 주위를 돈다고 해서 무너질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리고 성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욕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 여섯 번을 돌아도 끄덕 없이 서 있는 여리고 성을 보았을 때, 그들은 ‘우리가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한 사람도 불평이나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고 순종하고 돌았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 성은 무너지고 그들의 손에 점령된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26/2012

양떼의 강건과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3 : 14 ~ 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재창조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독자들의 체험 가운데서 더욱 완전하게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이 무엇이며 어떤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먼저 양떼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은 강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의 왕좌에 계시며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통치하실 때 그의 강력함으로 우리가 강하게 됩니다. 그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능력과 강건함으로 우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강건은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에게는 사랑이 가장 탁월한 덕이요 가장 강한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도의 삶을 견고하게 세워가는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알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사랑은 내 삶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갑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궁하신 그 사랑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날마다 자라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합니다. 충만함은 모자람과 결핍이 없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종말에 우리를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강함과 사랑과 지식과 거룩과 완전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넘치도록 응답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간구하는 강건하고 충만한 삶은 악하고 연약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 위에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충만함에까지 이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신적인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능력만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충만하신 곳에까지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힘 있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저 멀리서 졸거나 주무시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편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고 내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미처 구하지 못했고 상상력의 한계로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기도, 생각, 꿈을 넘어 역사하시는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응답하심이 가득한 오늘 하루되기를 바랍니다.

2/25/2012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해야(갈5:13~26)

16절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사는 삶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삶의 동인이요, 표준과 목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삶을 추진하고, 안정시키며, 인도하십니다.

또한 육체의 소원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타락한 본성에 기뻐하지 않으며, 매이거나 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는 우리의 삶을 위한 쾌락과 의존과 굴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육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소원하는 것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에 원수가 되며,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항상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될 뿐입니다.

신자가 육체를 따르면서 성령을 따른다거나, 성령을 따르면서 육체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동시에 성취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자는 성령으로 행해야만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에 매이고, 성령을 좆아 행하는 분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소망을 갖게 됨.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놀라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신자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뵈옵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더 나아가 신자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은 고난을 인내하게 하고 더욱 성숙한 신자로 연단받게 하여 어떤 고난도 이기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은 헛된 소망이 아니라, 근거 있는 소망입니다. 그 근거는 성령님과 십자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완전한 구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근거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더욱 확신하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솔로몬에게도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잠언 30장 아굴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6∼10절)

솔로몬은 그의 소원에서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도 천국에 대한 환상을 소개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보아서 솔로몬의 소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소원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피기 전 먼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며 회개합니다.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입니다.

둘째는 남을 원망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밧세바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범죄 가운데 상황을 비추어 밧세바를 원망하려고 했다면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밧세바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남을 원망함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는 정직하지 못함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내 속에는 정직이 없지만 하나님께 정직함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의 이름이 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표현하는 많은 말 중에 다윗은 정직한 자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바로 다윗이 가진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블랙가비 목사님의 책 ‘영적 리더십’을 보면 성품이 리더십의 핵심인데 그 성품의 힘은 깨끗함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깨끗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 은 그릇 등 많은 그릇이 있지만 주인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넘어지는 경우가 등장합니다. 이 역시 정직을 잃어버리고 정결함을 잃어버릴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정직으로 채워져야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만일 비워지면 그곳에 콤플렉스로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콤플렉스로 채워지지 않게 정직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정직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말은 세계를 반 바퀴 돈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살 긴 해야겠는데 생각하면서 미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적어도 오늘부터는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직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2/23/2012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게 하심]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복음의 일꾼이 되기에는 너무나 작은 자라고 겸손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일꾼됨에 대한 분명한 자기인식과 사명의식이 있었습니다(7절). 복음의 일꾼이 감당해야할 사명은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전하고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루실 놀라운 지혜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며,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까지 알리는 것이었습니다(10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가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2절).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을 걱정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여러 환난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3절).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복음의 놀라운 영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자이며 동시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은 충성된 자세로 이 직분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고난조차도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하심]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 비밀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밀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력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도 알려진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며, 함께 언약의 후사가 되고 한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혈연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지역과 인종을 초월한 국제적인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지혜를 천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하는 것입니다(10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비밀은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치유되고 개선되어져야할 많은 문제점과 고질적인 병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원부터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인류 구원과 새 창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11절).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에 맞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갈5:22)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야훼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야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야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14:9~12)

유다 지파의 갈렙은 하나님께서 45년 전에 자신에게 약속하신 산지를 얻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허락을 받고자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 그 날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야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12절).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45년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꿈으로 받아들이고, 그 꿈을 품고서 45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질 때가 왔다!'는 확신이 들자,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달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꿈을 가진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좋은 기회가 와도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고, 그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갈렙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85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1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점령하려고 하는 산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아낙 자손들의 거주지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아무도 점령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그 산지를 정복하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갈렙과 같이 꿈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꿈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꿈이 간절한 사람은 그만큼 믿음도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꿈과 믿음을 가진 사람과 동행하십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6/2012

먼저 할 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4~1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야훼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삿18:5~7)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에게 땅을 할당해 주셨고, 그들에게 그곳에 사는 자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19:40~46). 그러나 단 지파는 저항에 부딪쳐 땅을 차지하는 일이 지체되었습니다.(삿 1:34) 그러자 단 지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계획을 모의했습니다. 그들 임의로 땅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이 하는 일을 원하고 계시는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그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신앙도 없었고 신앙의 분별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뽑아 정탐을 보냈습니다. 다섯 정탐꾼들이 라기스에 이르러서 보니 그곳 사람들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단 지파가 쉽게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비옥하였고 물도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곳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때,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으로 우리의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생각하고 성급하게 모든 일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본 후에 일을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5/2012

서로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자(갈6:1~10)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짐을 지는 것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범죄한 사람을 바로잡는 일(1절), 겸손할 것(3,4절), 자기 짐을 질 것(5절),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와 교제하는 것(6절) 등입니다. 바울은 범죄를 비롯하여 인생의 다양한 어려움들을 포괄하여 짐을 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짐을 지는 것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은 구약의 율법(레19:18),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22:37~49), 사도들의 교훈(갈5:14) 등이 모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짐을 지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위대한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분담하는 것의 가치를 절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의 짐을 지는 것, 공동체 안에서의 연약한 지체를 섬기는 것, 어려움을 나누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강조하신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서로 짐을 지면서 낙심하지 말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짐을 지면서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음과 거둠의 원리를 통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심음과 거둠의 원리에서 최대의 적은 낙심과 피곤입니다(9절). 결실하기를 기다리기까지는 뿌리기에 낙심하기 쉽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피곤하기 쉽습니다. 모든 곡식과 열매는 제 때가 되어야 결실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시1:3).

그러므로 심음과 거둠의 원리는 우리에게 낙심과 피곤 중에서도 소망과 인내를 가르쳐줍니다(시126:5~6).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우리의 선한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의 짐을 지기 위해서 고군 분투하는 아름다운 행위를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양들을 향하여 흘리는 목자의 눈물과 공동체의 리더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갚아주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들은 하나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적실한 때에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2/14/2012

♥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있게 하셨습니다[행전4:1-12]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며 복음역사를 감당했던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역사를 감당하던 사도들에게 공개적인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지만 말씀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은 남자의 수가 약 5,000이나 되었습니다(4절).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시기 위해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있게 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도들은 놀라운 말씀의 역사를 경험하였기에 핍박에 결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이 나고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러기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선포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갇힌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갇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력이 있으며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말씀의 역사를 이루고자 힘써야 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행전4:1-12].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았던 사도들은 담대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고압적인 공회의 심문에 답변을 하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이를 걷게 한 것이며,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고( 118:22~23),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시기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담대함을 갖게 하였고 더욱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위기는 오히려 정면 돌파로 헤쳐 나갈 때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강력하게 대적할 때 도망을 갑니다(4:7).

무서워 피하려고만 하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때일수록 더욱 주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서원기도의 능력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12:20)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야훼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1:9~11, 17,18)

우리가 응답을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서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서원기도는 결정적인 기도가 됩니다. 본문에 보면, 한나는 아들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서원을 했습니다. 그녀는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 전에 바쳐서 성전에서 야훼를 섬기게 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이 서원 기도를 받으셨고, 한나는 자기의 서원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마음의 평안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얼굴에 수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18절) 이전에도 많은 기도를 드려도 마음에 평화가 없었는데, 강력한 서원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원 기도를 하여 응답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사사 입다 입니다. 암몬 족속의 침략을 받아 동족이 위경에 처했을 때, 입다는 군사적 지도자로서 암몬과 싸워 달라는 부탁을 받고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강한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개선하여 집에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제일 먼저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서원 기도를 들어주셨고, 입다는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제일 먼저 영접한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입다는 극한 슬픔을 안고 그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 서원을 이행하였습니다.(삿11:29-40)

이와 같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드리는 서원 기도는 하나님 보좌를 움직여 개인과 나라의 운명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와 같이 무모하게 서원 기도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서원 기도가 응답된 후에도 그 서원을 갚지 않거나 더디 갚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3/2012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고, 또 채움 받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제대로 된 건물이나 조직, 교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필요를 돌볼 줄 알고, 채워줄 줄 아는 헌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마 초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루살렘 본토박이보다는 명절에 예루살렘 순례를 왔다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눌러 앉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행이 장기화됨으로 삶의 제반 여건이 열악해지는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생활비도 부족했을 것이고, 숙소나 식사, 의복 등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들을 보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기쁨으로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일일이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섬김 속에서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이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도 성도들을 칭송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나의 채움이 필요한 이웃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첫 번째 반응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메시아적 관점에서 구약을 탁월하게 해석해 낸 베드로 사도를 통해 구약 성경을 새롭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그 생애,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샅샅이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말씀을 따라서 실제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런 말씀을 배우기 힘쓰는 공동체의 영향 가운데서 훗날 스데반과 같은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성경 선생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 기쁨이 충만한 신자가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말씀의 옹달샘에 두레박을 내리고, 과연 이 말씀이 그러한가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다 지켜 행하려 노력한 만큼 삶에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 지혜와 총명의 영이신 성령님

한 목사님이 도자기 공장 근처에 사는 어떤 사람을 심방했습니다. 목사님은 유리상자 속에 든 두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보고 사겠다고 했지만, 주인은 절대로 팔 수 없다면서 꽃병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저는 지독한 술 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를 받고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자기 공장 옆에 진흙 한 무더기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집에 가져와서 반죽하여 모형을 만들어 녹로에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쓸모없던 흙에서 저 두 개의 꽃병이 나온 것입니다. 저는 그날 생각했습니다. ‘내가 흙으로 꽃병을 만든 것처럼 예수님은 아무 쓸모 없는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또한 그 사람에게는 지혜와 총명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자기 자신의 문제도 지혜롭게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의인은 존경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미스바 회개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37:11)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야훼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야훼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야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야훼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야훼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훼께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7:5~9)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소집하고 금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입어 블레셋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온전한 믿음의 헌신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구약 4천년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우상 숭배였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너희가 전심으로 야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삼상7:3)고 촉구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먼저 회개를 통해 영적무장을 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사무엘은 하나님께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히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을 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으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사회, 나아가서 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인과 나라안에 있는 우상을 멸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1/2012

변화된 새사람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대하2:1)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야훼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훼께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10:6~9)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소집하고 금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입어 블레셋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온전한 믿음의 헌신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구약 4천년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우상 숭배였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너희가 전심으로 야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삼상7:3)고 촉구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먼저 회개를 통해 영적무장을 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사무엘은 하나님께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히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을 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으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사회, 나아가서 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인과 나라안에 있는 우상을 멸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전2:22~41)

베드로의 설교는 무리들에게 큰 찔림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고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아요, 마른 뼈들 같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해주실 분이었음을 깨닫자 그들의 심령에는 예리한 칼로 찢겨 나가는 것과 같은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과 절규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변화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파하는 그들을 향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하면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주실 때, 핑계대지 말고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속죄와 성령충만의 기쁨을 풍성하게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행전2:22~41)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심으로 무죄한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고난의 공생애, 대속의 십자가만 해도 우리에겐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장 놀라운 사역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신 것과 성령을 보내 주신 사건입니다. 다윗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예견하고, 생명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생의 절대적 절망의 끝이었던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생명의 주로 부활하셨으며,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생명의 기쁨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과 소망을 삶의 환경에만 두지 말고,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둘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권세로 담대하게 승리를 선포함으로 마음으로 기뻐하고, 입술로 즐거워하며, 희망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

한 상인에게 늦잠 꾸러기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태에 대한 아버지의 거듭되는 훈례에도 불구하고 그 게으른 아들은 여전히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는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상인은 아들을 일찍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익 동기를 이용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돈 좀 벌고 싶지 않나?”라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사람이 잃어버린 금 단지를 줍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니!

이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금 단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일찍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어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는 집안 일을 게을리 하고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며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은 평화가 없고 항상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으며 황폐케 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소득이 많아도 가족을 돌보는 데 쓰지 않고 허랑 방탕하게 낭비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배짱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0~22)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5~47)

본문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대치하여 싸움을 돋우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담대하게 나가서 골리앗을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외적인 조건으로 볼 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그야말로 뻔한 싸움이었습니다. 골리앗은 백전노장이요, 갑옷과 투구와 칼과 단창으로 무장한 절벽같은 용장인 데 비해 다윗은 군사 훈련 한번 받아 보지 못한 풋내기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골리앗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매와 돌맹이 다섯 개만을 가지고 그 앞에 당당히 섰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골리앗이 이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린 나이의 초립둥이 다윗이 어떻게 블레셋의 막강한 장수인 골리앗을 단번에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종종 사자나 곰에 새끼 양을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쫓아가서 사자와 곰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습니다. 그리고 사자와 곰이 자기를 해하려 하면 다윗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다윗은 ‘야훼께서 함께 하신다’ 굳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곰과 사자를 쳐 죽였던 다윗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또 야훼의 구원하심과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45,47절)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하여 싸워 주신다’는 믿음의 배짱은 어떠한 두려운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9/2012

♥믿음의 부자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 앞에 섰습니다주머니를 뒤졌습니다만 마침 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차마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속 깊은 연민 때문에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면서 말했습니다. “형제여마침 내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그러나 당신의 너무 춥게 보이는 손을 잡아 드리고 싶소부디 용기를 내서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남에게 소망을 주면 자기도 소망을 얻게 되고
남을 사랑하면 자기도 사랑을 받게 되고남을 성공시키면 자기도 성공하게 되고남을 축복하면 자기도 복을 받게 됩니다그러나 남을 실패하게 만들면 자기도 실패하게 되고남에게 고통을 주면 자기도 고통을 당하게 되고남을 저주하면 자기도 저주받게 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에 서서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구제하며 성공시키는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입니다(행전2:14-21)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시대를 여셨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활발한 성령의 부어 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백성에게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 부어주심은 남녀, 노소, 주종 관계 등 모든 사회적 구분과 인위적 한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그때에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아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을 기쁨으로 예배하게 될 것이고, 온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으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후에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지금 소리를 높여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폭우를 쏟아 붓듯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향해 편견을 버리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힘든 삶에서 항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비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3:17-19/참고:벧후1:3-4))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3-4)

주님 함께하시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사랑의 약속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6:16)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야훼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야훼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야훼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20:14~17)

요나단은 사울의 본심을 파악해 달라는 다윗의 요청을 수락하고, 다윗에게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의 속마음을 알아낼 방도와 그 알아낸 내용을 다윗에게 알릴 견책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왕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며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부탁하는 요나단은 실로 진정한 우정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순종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희생도 불사한 요나단의 우정에서 맺어진 이 사랑의 약속으로 결국 다윗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약속]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어떤 비행기 조종사가 한 여성과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주는 허무함, 출격 때마다 느끼는 불안, 긴장...이 모든 것들 속에서도 그는 그 여자가 보내는 편지에서 위로를 얻고 삶의 의욕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기차를 타고 지정된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꽃 송이를 들고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합실에는 한 뚱뚱한 여자가 꽃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줌마라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렸습니다. 그는 크게 실망하여 잠시 망설였습니다.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어떤 멋쟁이 아가씨가 내 손에 이 꽃을 쥐어 주면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우리가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하다 보면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이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상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신실함으로 끝까지 사랑의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7/2012

♥교회를 통해 인류의 하나됨이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 각 나라들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큼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인류의 죄악과 실패, 상처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치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싸고 각 나라와 열방이 한 목소리로 주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장차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인종적, 국가적, 언어적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됨과 궁극적 승리를 이루어 주실 것을 보여주시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인류의 진정한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불같고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 다툼과 분열로 나날이 황폐화되어가는 이 나라와 이 민족, 우리 가정과 나의 삶에 불의 바람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이 시간 간구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순간부터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힘든 것들과 답답한 것들이 물러가고 우리 자신과 교회 공동체,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불과 연기가운데 율법을 받음으로 노예백성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을 통해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로 태어났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제자들에게 강하게 임재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나타내 보이시고,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놀랍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주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는 주님의 몸이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믿는 우리들 가운데는 불과 같고,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주님의 성령이 놀랍게 임재하셔서 강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신앙 공동체 교회에 친히 부어주셨고, 부어주고 계시고, 앞으로 부어 주실 그 성령 하나님을 통한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믿음의 직분들과 신앙 공동체 그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분투하여 오늘도 승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현숙한 여인 아비가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중략--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야훼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25:23~26)

아비가일은 오만 불손한 그녀의 남편 나발과는 달리 온유하고 겸손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남편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윗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다윗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피 흘려 보수하는 죄악’을 행하지 않도록 막고 계심을 느끼고 이를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근거로 한 아비가일의 호소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요청을 수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아비가일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인정한 데 있었습니다.

나발은 신앙이 없고 난폭하며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남성인데 반하여,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신앙이 뛰어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비가일이 못된 부자 청년 나발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남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고, 가난한 집안의 여자는 부유한 집의 남자에게 마치 팔려 가듯이 시집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아비가일의 경우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남편에게 많은 고통을 받고 결혼생활에 갈등이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이 있는 여자가 신앙을 갖지 않는 남편을 만났을 때 겪는 환난과 고통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비록 못된 남편 밑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신앙을 지키며 집안을 성실하게 잘 돌보았습니다. 또한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조금 청구하였을 때 남편이 거절함으로 인하여 집안이 멸망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녀는 다윗을 찾아가서 지혜로운 말과 상냥한 태도로 간곡히 간구하여 남편과 집안을 살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을 통해서, 오늘날 신앙을 가진 여자가 믿지 않거나 믿음이 약하여 자기를 핍박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남편이 대단히 어리석고 난폭하며 고집이 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기의 주(主)로 섬기고 그의 핍박을 아름다운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가정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그와 같이 성실하게 행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6/2012

의인의 집과 악인의 집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12: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다윗을 집요하게 추격하면서 핍박하던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 중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삼상28:19,31:1-6)
따라서 이제 사울의 집에 남자라고는 그의 아들 이스보셋과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비보셋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보셋마저 자기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4:5-8)

반면, 사울의 핍박과 계속적인 추격으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고생하던 다윗은 유다 족속의 추대로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즉위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막 강한 군사와 백성을 거느린 군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조차도 다윗 왕에게 복속하여 바야흐로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다가 결국 망하게 되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하게 되었을까요?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대신 다윗을 택하셨음을 알게 되자 다윗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된 광포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보다 뛰어난 다윗을 인정하지 않고 시기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끝없는 추격과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용서하고 대적하지 않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스스로 복수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십 황무지에 몸을 숨겼을 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그의 부하인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고자 했지만 다윗은 말렸습니다.

사무엘상 26장9절로 10절에 보면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야훼께서 사시거니와 야훼께서 그를 치리시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온유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왕이 되어 결국 온 이스라엘 땅을 기업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5/2012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

쉬운 인생을 구하지 말라. 
더 강해지기를 기도하라. 
너희들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라. 
너희가 맡은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하는 일에는 기적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너희들이 기적이 될 것이다.


 Do not pray for easy lives. Pray to be stronger men. Do not pray for tasks equal to your powers. Pray for powers equal to your tasks. Then the doing of your work shall be no miracle, but you shall be the miracle.
-Phillips Brooks

+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보이시는 변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시거나 불편한 것들을 없애시기 보다는 우리의 인격을 계발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세우시는 데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6:1-2 문맥보기)

주권적으로 그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충만을 통해 온전하게 세워진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성령 공동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든 중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하면서 기다리며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여쭙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합니다. 하루 중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정해놓고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분주한 척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과 교제하려는 시간이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역사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갈3:1~14).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창 15:6). 의롭다함을 받은 후 14년이 지나서 구원받음의 표징으로 이방인들과의 구별을 위해 할례를 행했습니다(창 17:26).

그리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아브라함의 전통을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7, 8절). 이러한 사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바울은 메시아가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받았다는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의 시작은 바로 그 저주받은 십자가입니다(13, 14절). 이 십자가에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 결정됩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구속의 능력을 덧입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은 믿음으로부터 왔다(갈3:1~14).

바울은 마치 강렬한 폭포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쏟아져 내리듯 다섯 개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를 지적합니다. 특히 성령의 경험을 중심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4장에서 1차 선교여행시에 갈라디아교회를 선교할 때 그들과 공유하였던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권능이 ‘율법을 행함으로인가?’, ‘믿음으로인가?’를 반복하여 질문함으로써 바울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필요충분조건임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결론적으로 묻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 답은 ‘믿음으로’입니다.

2/04/2012

제자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뜨거웠을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제자들을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 공동체를 먼저 바르게 세우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빠르게' 이루는 것보다 '바르게'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직전에는 ‘누가 크냐?’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고, 십자가 앞에서는 서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앞 다투어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들이 많이 상실되고 공동체는 많이 침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고, 맛디아를 사도로 뽑아 사도의 빈 자리를 채우는 시간은 이런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부터 바르게 세우는 역사입니다.

밖으로 역사를 감당하기에 앞서 안으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더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동지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공동체를 위한 기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역사가 꼭 있길 바랍니다

♤ 수고하지 않고 얻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두기 위한 것으로만 열매가 맺지는 않습니다.
길쌈과 각종 수고가 있을 때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평안의 가치는 전쟁의 비참함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죽음이 우리 곁에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장마는 햇볕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가뭄의 목마름은 단비의 소중함을 잊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미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불청객들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달콤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장과 성실한 일상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고단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도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압니다.

기쁨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우리 자신의 수고는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 발걸음이 가벼울 것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롬4:1-12)

유대인들이 얼마나 할례를 중시했습니까? 
할례는 유대교의 절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의 유무로 하나님의 백성의 가부를 결정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17:14). 그러나 바울은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물리적이고 표면적인 할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면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모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을 때는 할례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합니다. 우리의 조상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행한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비결은 찬양에 있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6:12~13)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야훼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야훼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6:12~14)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궤를 자기 성으로 메어 오려고 했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래에 싣고 오는 도중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갑자기 뛰었습니다. 그래서 웃사가 당황하여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낙심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가기를 두려워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하나님의 궤를 메어 갔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에게 복을 내리셨다는 말을 들을 다윗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지 않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그리고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할 때마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야훼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즐거이 찬양했습니다.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극한 위험 속에서도 다윗은 항상 자기를 돌보시고 지키시며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과 열정이 있었으므로 가장 낙심되고 어려울 때에도 절망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평생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2/2012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면 얼마나 이상할까요?

"존귀하신 나의 아버지시여! 당신은 저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생사화복을 좌지우지 하십니다. 당신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그러니 저에게 돈 10,000원만 주십시오. 제가 지금 급하게 필요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아버지에게 말을 하는 아들이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기도가 이러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격식이 없는 자연스러운 기도를 원하십니다.
일하면서 순간 순간 나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필요를 그분께 겸손하게 어린이와같이 말씀해 보세요..

분명하고도 틀림없이 주님은 당신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식으로든... 하나님 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 오실지 모르기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열린 생각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모임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어린 아 이를 통해서 시장의 분주한 환경 속에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가 미물이라 여기는 곤충(파리 모기 개미 등)을 통해서 나뭇잎을 통해서 먼 하늘 노을지는 석양을 통해서 가을 하늘의 맑고 깨끗한 구름을 통해서 아무튼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이용해 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2/01/2012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대상17:12)



한번은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셨다. 주변의 사람들은 놀랐으나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내어 쫓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라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이 범한 죄의 무서운 본질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 죄는 성령을 거스리는 죄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마귀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우두머리의 도움을 받아서 주님께서 기적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이요 훼방이었던 것이다.


주님 자신을 대항하는 말과 그 밖의 모든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거짓말, 살인, 간음, 우상숭배, 시기, 다툼, 어떤 죄라도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다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성령 훼방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잘 몰라서, 진리를 몰라서, 무지 때문에 지은 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주님의 초라한 외모와 비천한 생활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주님이 나사렛 사람이니 것을 조롱했다. 또 주님이 갈릴리 사람으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온 일이 없다고 빈정댔다(요 7:52). 예수님은 이러한 비방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가 마귀와 연합하여 능력을 행한다고 비방하는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 훼방 죄는 명백히 거룩하신 분을 대적하는 죄이며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마귀의 역사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성령님을 더럽히고 추하게’ 만드는 성령모독 죄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요하겠느냐”(히 10:29).


그렇다면 진정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성령 훼방 죄와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주님의 생명과 이적과 기사를 믿는 믿음의 사람은 성령 훼방 죄를 짓지 않는다. 그 죄와는 멀다. 그러나 만일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산 다면 성령님의 마음이 아프시다. 죄와 타협한다는 것은 성령님을 실망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님의 탄원을 소멸하고 억누르고 제지하고 숨 막히게 하지 말라. 우리가 만일 우리의 생애 가운데 불이 꺼지도록 한다면 재만 남을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오히려 성령의 불을 사모하라. 성령 충만을 늘 갈망하라. 성령님의 손에 붙들려 인도함을 받으라. (큐티일대일)

1/31/2012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왕상8:13)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때로 신앙생활 중에 이런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며 곤란을 느낀다.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 사람은 제자였다.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젊은 제자에게는 중요한 결정에 직면해 있던 상황이었다. 자기 부친이 작고할 때까지 집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자기 스승 예수를 따라가면서 그를 섬기기 위해 그의 가정과 가족을 떠나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생각컨대 그 청년의 부친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얼마나 더 연명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가족 중 어디에 우선권을 두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기꺼이 제자의 길을 가려는 마음도 아셨다. 그래서 그는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무슨 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급한 더 중요할 수 없다는 교훈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 교훈은 문자적으로 또 아무에게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사상 장례식은 부활의 소망을 더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엄수했던 것이다.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전데 부모에게 작별하였다(왕상 19:20,21).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이 상황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청년의 남은 가족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죽은 자들인가? 그들은 주 예수를 믿는 신자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아직 영적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여전히 죽은 상태였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you were dead)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허물로 죽은(dead)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들의 영적 관계에서 볼 때 그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친의 필요를 공급해 주며 최후의 장례에 대한 책임을 지기에 적합한 처지에 있었다.

지금도 우리들의 가족과 주변에는 영적으로 죽은(dead) 사람들이 많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에게 임함으로 그들이 다시 태어나는(born again)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resurrection)이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한 11:25). 그분은 살리는 영이시다. (큐티일대일)

1/30/2012

♧가로등의 유래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교만에 이를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롬4:1-12)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행위가 아닌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창15:6).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와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것과 같은데, 다윗의 생애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이 큰 불법을 행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통회 자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죄에 대하여 가리우심을 입은 것입니다(시32:1이하). 바울은 이처럼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은혜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거저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은 없으나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 주신 이 행복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이 행복을 담는 그릇은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이 유대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믿음으로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행복자로 살 수 있습니다.

‘조심하면 중간은 갈 수 있었는데’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욥36:24)

잘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식 중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에 대한 것이 없었다. 즉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 왔다. 그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사람을 고쳐줄 능력도, 지식도,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을 바리새인들 앞에 데려 오면 당황할 뿐일 것이다. 성경은 너무나도 단순(simple)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다.
그 벙어리가 말할 뿐만 아니라 보게 된 것이다. 말을 하고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이 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듣고 말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 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바알세불이란 사단과 마귀의 이름으로도 그다지 익숙지 않은 용어이다. “바알세불”은 “바알”(Baal)과 “제붑”(zebub)의 합성어이다. “바알”(Baal)은 가나안 이교신 아하시야의 돌발적 사고와 죽음의 기사가 나오는 에그론의 블레셋인들의 제식에 나타났다. “제붑”(zebub), 또는 “파리들의 주(lord of flies)"라는 뜻이다.

“제붑”(zebub)에 나오는 ‘b’들은 모두 ‘v’로 발음되는 것으로 파리들이 붕붕거리는 것을 의성어 형태로 모방한 것이다. 제식용의 작은 금파리들이 가나안 유적의 발굴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바알세붑이라는 칭호는 사단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고대 이교적 칭호들과 마찬가지로 이 단어의 음은 불분명하게 바뀌어 바알세붑이 바알세불(Baalzebul) 또는 베엘세불(Beelzebul), 즉 “똥의 주”가 되었다. 바리새인이 말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와 사단이 사단을 내어 쫓을 수 없는 영적 진리를 예를 들어 반박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시면서 성령의 역사임을 분명히 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면 죄 사함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밝히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생각해보라 “파리의 주” 혹은 “똥의 주”라는 뜻을 가진 칭호를 우리 주님 메시야에게 사용하였다니.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한낱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라고 하다니. 잘 모르면 알려고 하고 그래도 모르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를 인정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하다.

오늘날에도 성령 하나님(God the Holy Spiriy)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이나 지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신다. 오, 주님의 신비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이 되지 않게 하소서! (큐티일대일)

1/29/2012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

다른 복음은 요란케 한다(갈1:6~10) 
다른 복음은 바른 복음에 기초한 교회와 공동체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바울은 그의 양떼들을 위협하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경고하며, 바른 복음을 수호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더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고 할례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을 미혹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 완전하라고 도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시험에 노출되는 교회와 신자들은 크게 요동하게 됩니다. 바른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과 미혹된 사람들로 나뉘어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천년 교회사에서 계속하여 반복되어 온 일입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더하여 말합니다. 결국 교회는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요동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갈1:6~10)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복음,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생략된 복음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나 논리적인 설득이 있더라도, 탁월한 도덕과 윤리를 가지더라고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열심과 뜨거움이 있어도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더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시 바울이 경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할례와 율법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보충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무엇을 삭제하거나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의 말을 합니다. 차이점을 말하기보다 유사점을 강조하는 연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 자체를 훼손시키면서 타협하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일용할 양식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진정한 감사로 나아가는 축제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눈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과 환경과 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0:1∼4, 147:7).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기에 찬양을 통해 감성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함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시 105:1, 빌 4:6∼7).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염려가 많을수록 기도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염려하는 만큼 기도한다면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표현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드림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시 50:14, 고후 9:11).
지금 나의 형편이 어렵고 지금 나의 형편이 드릴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양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으로 나아가느냐의 질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기 헌금을 드릴 때 부부가 상의해 드리는 것이 더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넷째, 간증을 나눔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사 12:4, 신 4:9).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4절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간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간증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간증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은 목격자가 하는 것입니다. 보고 경험한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간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의 간증은 신명기 4장 9절 말씀과 같이 우리 주변과 우리 가족들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적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3:9~20]
지금까지 유대인의 죄를 심도 있게 다루었던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은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방인들이라고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더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모두가 죄인들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그 혀에는 속임이,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어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파멸과 고생으로 달려감으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목구멍, 혀, 입술, 발과 같은 이런 신체기관들은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인간들은 스스로 그 목적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죄는 그렇게 죄 중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8절).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 까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다 죄 아래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입니다. 오늘날도 지구촌에는 평화라는 명목으로 온갖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서운 악들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의로움이 없음을 진실로 인정하고 더욱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가 다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죄를 핑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거울 앞에 서게 되면 자기 몸의 허물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인류의 죄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자신만만한 사람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지만, 사실상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자도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어보면서,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참된 구원을 맛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1/28/2012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야곱은 역전승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30년을 방황하면서 험난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의 인생 마지막 17년은 행복으로 인도된 삶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름답게 변화되고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픔을 승화시켜 성숙된 인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인생을 멋지게 혹은 아름답게 마칠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은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매력적인 삶을 살았던 야곱을 인도한 분은 하나님이셨기에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자기중심적 믿음을 가졌었고 철저히 자기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야곱은 이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 변화의 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쌓아오고 만들어가고 속여가며 누렸던 것이 진짜 복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환도뼈를 치실 때에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내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축복하는 사람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야곱은 혼자 복 받기 위해 뛰어다니던 자였습니다. 물론 그는 그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그가 창세기 49장에서 축복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축복이 나오게 됩니다. 그는 자녀들을 축복하고, 바로를 축복하고, 만나는 자들을 축복하는 자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바로왕 앞에 섰을 때 예전이었다면 자녀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을 그가 이제는 왕까지 축복하는 자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축복하는 것에 약합니다.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는 이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은 형이 망하고, 삼촌이 망하고, 다 망해도 자신이 부유해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지만 말년에는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배하는 사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믿음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며 예배도 배웠는데 예배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배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배자는 나의 존재가치를 내려놓는 자입니다. 진짜 믿음이 좋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야곱을 인생역전으로 인도하시고 풍성함으로 채우신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는 시간 가운데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인도하시길 소망합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음 갖기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2)



이스라엘 사회에 이러한 민화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아이를 업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친구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 이 말에 아버지는 “내 아들일세”라고 바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번에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이 분이 네 아버지가 맞는가?” 그러자 이 아이가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내려놓고 “내가 이제껏 너를 업고 왔고, 너를 키워왔는데 왜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 아니고도 업고, 키우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꼭 나를 업고 키웠다고 아버지라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민화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광야 40년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이방신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민화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당신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80%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믿지 못하고, 자녀를 믿지 못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불행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건강한 사회는 신용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믿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이렇게 중요한데 왜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까? 


첫 번째는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고, 주님과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의지적으로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꾸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또 다른 언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믿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속아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속아줍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믿기 때문에 속아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너무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성경이 그렇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너무 많습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믿음이 생명이고, 믿음이 구원입니다. 이 믿음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에,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돼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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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가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올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대하30:2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물음은 여기에 열거되고 있는 죄의 목록이 단지 대표적인 실례이며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때 훨씬 더 날카로운 문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요구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에서 배제되는 여러 다른 부도덕에 대해서도 열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는 음행, 우상숭배와 술 취함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더러운 것, 호색,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방탕함 등이다.

일단 우리가 바울이 열거한 내용을 전부 읽으면, 우리 가운데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읽은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들조차도 죄로 얼룩져 있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눅 18:26)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고린도 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여 하나님의 도적적인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자격을 거부하는 것이다.

바울은 실제적인 도덕성을 무시하여 당당하며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까지 부추겼던 종교관에도 관심을 두었다. 그는 고린도 교인 사이에 나타난 이러한 불의의 증거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악을 비난하게 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왜 그런가? 
정의에 의하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악의 세력의 패배로 절대적인 의가 깃든 나라이기 때문이다(고전15:21~28).

바울은 이런 비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불의한 옛 삶 속에 하나님의 변화의 기운이 개입하실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인간 삶의 찢기고 죄로 얼룩진 잔해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덧입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죄의 침범을 거부하는 하나님 백성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파괴적인 생활 방식에서 구원받은 죄인, 즉 기적의 산물이었다. “씻음”받은 모습은 그들의 세례를 생각나게 했으며, 동시에 이 의식이 상징하는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내적인 정화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음에 틀림없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 “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더 나아가 그들은 ‘거룩함’을 얻었다. 이 같은 은혜의 선언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누구인가? 
서두에서 바울이 열거한 죄로 상처를 입었으나, 그들의 상처 난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고 깨끗해져, 도래하는 주의 나라를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면서 끊임없이 파고드는 죄의 침범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산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큐티와 일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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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2012

궤도 수정에 성공한 사람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6:19)

‘아폴로 13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폴로 11호에서 17호까지 달에 무사히 착륙했지만 13호는 산소탱크 폭발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지구로 귀환하는 내용입니다. 13호가 지구로 돌아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대기권을 통과하는 일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자동장치가 고장 나서 수동으로 들어올 때 대기권을 너무 빨리 통과하면 타버리게 되고, 너무 늦으면 튕겨 나가 우주 미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아폴로 13호는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오지만, 궤도를 수정해서 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2번의 궤도 수정을 했던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구원으로 향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걸음이고 두 번째는 축복의 문을 열기 위해 100세에 가진 이삭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관련 내용을 살피며 우리도 동일하게 궤도 수정에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우선순위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계속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우선순위의 수정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궤도 수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기에 그의 희망이고 전부였습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으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며(창 21:11) 쫓아내었기에 이삭만 남았는데 그마저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드림의 신앙’이었습니다.
드렸다는 말은 헬라어로 완료시제입니다. 아직 이삭을 드리지 않았는데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시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구하지만 드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만일 내 신앙이 드릴 줄 아는 신앙이 아니라면 궤도 수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릴 줄 아는 신앙을 가진 것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작정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결정체는 부활입니다. 그때에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힌트를 얻자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무작정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이삭이 다시 살아날 것을 하나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저자도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따라가는 삶인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인생의 궤도를 하나님께로 수정하여 은혜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목동제일교회)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8~17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할 정도로 그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간절함 때문에 로마에 가기 위해 수차례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길이 막혔던 바울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울의 마음이 로마 성도들을 향하여 불타듯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교회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만(8절), 로마교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기독교인들과의 신학적 논쟁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무슨 신령한 은사(11절)-복음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서 나오는 가르침-를 나눠줌으로 로마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견고히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13절). 참 목자 바울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문제 있는 곳에 가기를 꺼려합니다. 자신을 환영해주고, 대접해 주는 사람들에게 가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갈등에 휩싸여 있고 자신을 환영해 줄지 안 해줄지도 모를 그런 곳에 가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열이 있는 곳, 상처가 있는 곳, 다툼이 있는 곳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더욱 사모하여 가야할 곳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 받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9:15). 그때부터 자신 같은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이방인을 위한 사명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그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했습니다(고전 9:16). 그리하여 바울은 복음의 황무지였던 서바나(스페인, 당시 땅 끝) 까지도 로마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선교하고자 했습니다(롬 15:23,24). 



특별히 복음에 대한 확신(16절)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17절)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하였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매우 부담스러운 마음입니다. 빚을 갚아야 할 생각 때문에 잠자리도 편하지 않고, 눈만 뜨면 빚 갚을 생각으로 땀 흘려 일합니다. 우리도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다하여 복음 전도와 제자 삼는 일에 우리 자신을 확실히 내 던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머리를 이해하십시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대상16:36)

“그 사람은 사무실에서 머리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때의 머리(head)란 지도자, 수장(chief), 우두머리, 지휘자로서 자명 하게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을 볼 때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말씀도 이해가 된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 그런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려해 볼 때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의 머리로서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기란 혼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위치와 격(格)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전 11:3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머리’이다.
헬라어 ‘케파레(kepare)’로 사용된 ‘머리’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들어서서 여자들의 머리에 쓰는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이런 교훈을 준 것이다. 권세를 암시하는 것으로 ‘머리’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남녀 관계의 위계질서(位階秩序)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전통 안에서 있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 권세를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로 연결되는 ‘명령의 연쇄’를 단정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선 안 된다. 상하관계(上下關係)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NIV, RSV, NASB와 NEB는 헬라어 ‘케파레’를 영어의 축자적 의미인 ‘머리’로 옮겨 신중하게 번역하는 반면, 다른 현대 번역본들은 비유적인 의미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TEV(Todays English Version)은 케파레를 ‘…에 대한 지고성(superemover)’으로 옮긴다. LB(Living Bible)은 이 본문을 ‘아내는 남편에게 그 남편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라고 옮겨 놓았다.

데이비드 로어리(David K. Lowery)는 말을 들어보라. “머리(케파레)라는 단어는 종속과 기원의 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구약 적 개념이며, 후자는 신약적인 개념이다.” 흔히70인 역으로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역본을 해석할 때 많은 학자들은 ‘머리’에 대한 바울적 용법의 배후에서 ‘출처, 기원 또는 최고, 왕관, 완성’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머리’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말
14세기에 헬라어를 말하는 탁월한 교회지도자인 알렉산더 시실은 이 본문을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남자의 케파레(머리)는 그리스도시라. 왜냐하면 그 각 남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훌륭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의 케파레(머리)는 남자니라.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육신으로부터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케파레(머리)는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14에 따르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이 땅에 오사 육신이 되셨다. 또한 요한복음 8장 42절, 13장 3절, 16장 27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언급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그리스도는 남자의 존재 근원이요 남자는 여자의 존재 근원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 근원이시라.” (큐티와 일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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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012

약속을 받았음에도 부르짖는 사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다니엘이 위대한 기도를 결단하게 된 것은 성경 예레미야서에 나온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70년이 되는 때에 그 백성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말씀을 볼 때에, 그는 성경이 말씀하는 ‘그때’가 가까운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니엘의 태도는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있고, 그리고 이미 때가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회복되겠다고 약속되어 있으면 일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에는 다니엘이 그 약속을 보고서 굳이 ‘결심’을 하고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부모가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면 때가 될 때 사주실 것이 아닙니까?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조르면 부모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 부모에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예의가 될지 몰라도, 하늘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예의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셨지만, 놀랍게도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에는 하나님의 회복 약속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끝부분에는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인간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가령 뷔페식당을 생각해 보십시다. 거기에 있는 것을 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크로 찍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실제로 기도해야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가 약속의 말씀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너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중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도 싱겁습니다. 그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구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서 감동을 받고서 좋아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번 두번 기도하다가 끝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사실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자동적으로 공급해주셔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시금 다니엘의 영성으로 돌아가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 우리의 사역지에 실제적인 역사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박지웅목사)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로마서 1 : 1 ~ 7]

바울을 일면식도 없었던 로마 성도들과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오래전에 예언된 약속의 성취였습니다(2절).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오래전부터 약속하셨던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입니다. 


둘째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영원한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에 의해 바울이 부르심을 받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어 순종케 하는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5절).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복음은 장구한 세월을 거쳐 확실하게 검증된 복음입니다. 바울의 심령을 밑바닥부터 변화시켰고, 그의 근본자체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강력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살 때,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강력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로마서 1 : 1 ~ 7 ]

바울은 고대 서신의 양식을 따라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수신자를 언급한 후에 인사를 합니다.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중심으로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종의 존재 목적이 주인이듯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목적이었고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바울의 존재를 생각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자입니다. 자기주장이 없고 자기의 소유권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 능력,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생사여탈권까지 모두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바울을 주님은 원하는 대로 쓰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으로서 주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확신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 헌신하며 복음을 위해 삽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면서도 기쁨과 평강이 없고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종으로서 자기 포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려 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고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고민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대상16:8~9)

예수를 믿어 구원의 은총을 맛보고 있는 사람이 다시 멸망 당할 수 있는가? 예수 믿는 자가 무서운 죄를 짓게 될 경우, 그는 회개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은 우리에게 ‘그렇다’라는 답변을 주는 것 같다.

이와 유사한 교훈이 히브리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毁謗)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 하느니라”(막 3:28~29).

갈라디아서 5:19~21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수 믿어 구원에 참예하게 된 신자는 멸망 당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며, 어떠한 죄든지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용서될까? 안 될까?
그렇다면 이 두 주장의 말씀은 어떤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히브리서 본문에 대해 칼빈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타락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특수한 것으로 하나는 일반적인 것이다. 성도가 어떠한 일에 또 어떠한 길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타락하는 수가 많고 따라서 모든 죄는 타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적질, 위증, 살인, 술 취함, 간음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죄인이 하나님께 어떤 한 가지 일로 범죄 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의 은혜를 거부함에서 오는 복음에서의 전적 이탈 또는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떠나는 것이고 성령에 대해 범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미끄러져 나가 전적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수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만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대체로 타락한 자는 진실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 명목적으로 신자였다는 것과 거듭났다 해도 택함을 받지 못했다는 견해(Alford)를 내놓았다. 또한 본서가 당시 유대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다는 독특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은 배교(背敎)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 성경에 보면 도저히 양립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것은 있다. 그것은 성도의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죄악의 문제는 매순간 그리고 날마다 보혈을 의지하여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해결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사죄(赦罪)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큐티와 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24/2012

하나님에 대한 죄 된 태도

로마서 1 : 18 ~ 32
경건치 않음(18절) : 하나님에 대한 죄 된 태도
불의(18절) : 인간에 대한 죄 된 태도
저희 속(19절) : 이성과 양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는 말씀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자연 계시, 즉 양심과 자연세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지만, 어리석게도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짐승과 벌레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죄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불러옵니다.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지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도 하나님 대신에 다른 피조물들을 조물주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돈, 성공, 건강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상들과 죽은 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바로 탐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즉각적인 우상숭배가 됩니다(골 3:5). 즉 우상 숭배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내 맘에 싹 트는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심판을 아끼시지만, 죄가 쌓이면 반드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첫째로 사람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일정기간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동성끼리 서로 음욕이 불 일듯 하는 것입니다(26,27절).

진실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남녀의 결혼관계 속에서만 성의 사용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간의 성적행위와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점에서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 둘째로 상실한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의한 모든 죄악들이 세상에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사형에 해당되는 무서운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행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옳은 일이라며 부추깁니다(32절).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 의지 남용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유의지의 무제한적인 사용으로 인간들은 도덕적 파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시 119:9).

복음은 그 무엇에도 결코 제한 받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셋집에서 만 이 년을 거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은 다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학신 있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것들을 가르치되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더라"(행전28:30-31)


사도행전은 로마의 셋집에서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이 이렇게 미완성적인 모습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침] 
사도 바울은 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결코 성경 가르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감시하는 군사들조차 호의적이 되었거나 복음화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비록 사도 바울의 몸은 쇠사슬에 매어 있었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 무엇에도 결코 제한 받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고 한다면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잘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새로운 영혼들의 중생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생하는 이들이 있어야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며, 말씀이 풍성하게 증거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롬 10:17). 계속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려면 성경선생들이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성경선생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많아지고 그곳에서 교육받고 훈련받고자 하는 좋은 지원자들이 많이 있어야합니다.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 
사도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 세계의 심장부 로마의 한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마치 한 점 누룩과도 같은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헌신의 결과 복음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때가 AD62년경인데 AD313년에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던 나라에서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고 복음은 로마를 벗어나 유럽과 온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복음역사를 이루려면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지는 어디입니까? 각 나라의 대학입니다. 대학은 세계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을 교육합니다. 세계를 경영하는 이념과 철학, 경제이론과 과학기술 등이 대학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대학은 오늘날의 세계 중심지입니다. 세계의 중심지 복음화전략을 가지고 사도 바울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성경선생으로서 사역한다면 사도행전적인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의 29장에 기록되는 제2, 제3의 사도 바울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묵상하신 당신의 모습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