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012

내면의 아름다움

프랑스의 유명한 법률가이며 정치가 로버트 슈만은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자였습니다. 그래서 한 언론인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러 해 전이었습니다. 제가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에 실수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발을 밟은 적이 있습니다.

당황한 제가 사과를 하려고 그 여자에게 돌아서는 순간 그 여자는 욕을 퍼붓는 것입니다. ‘이 멍청한 병신아? 아니 자기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해?’ 그러면서 고개를 들고 저를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 선생님 미안합니다. 저는 제 남편인줄 알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외모의 아름다움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빼어난 미인이라도 품행이 단정치 못하면 그 아름다운 얼굴도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잘 간직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나 사람의 외모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타고난 미인도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운 품격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오직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고 선행을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인 것입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인한 풍성한 열매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89: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형식주의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형식주의와 형식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 형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형식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형식주의는 자신의 영성을 갉아먹는 요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헌금을 할 때도 내가 교회를 다닌 게 얼마인지, 내가 직분이 이런데 헌금을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의 모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에 조금 더 보탬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업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개업했으니 예배를 드려야 잘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 중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돕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맹이 없는 신앙의 형식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고 나아가야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형식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바로 사도 바울에게 그런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돕는 형식이 아니라 은혜를 바탕으로 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7절 말씀을 보면 감옥에 갇힌 어려운 상태 속에 있는 사도 바울이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4절을 보면 괴로움에 참여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잘못 없이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사역에 물질적 필요를 도운 교회가 빌립보교회 외에 아무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후원하고 도왔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구절에서 반복되는 참여한다는 말은 함께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즉, 함께 기쁨과 즐거움과 아픔을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기도함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둘째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해 사도 바울이 풍족함을 누렸듯이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시길 축복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26~31)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으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무엇입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감과 우월감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월등하게 잘난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고 열등감으로 몸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기가 살아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것, 자기의 소유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자기 인격의 천박함 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 존재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많은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는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 자랑거리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 지혜로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보다 더 강하고 위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졌든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나를 향하신 주인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부름 받은 자녀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간증을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을 주시고 구속해 주신 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30,31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목적대로 살아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넘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잠16:18),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5:5).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