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orah Kang)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의 기도생활을 자부심했던 것에 대해 처음으로 회개기도 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님들께 부탁하는 것은 이 책을 꼭 사서 읽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908년 여름, 우리는 존에게 산으로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 집 한쪽 편에 있는 언덕 위 독방에 묵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방문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중보 기도를 하며 보냈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기도 제목을 놓고 열심히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혼의 깊은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었습니다. 그의 방에 가서 보니, 때로는 깊은 탄식을 하며 누워 있거나, 또는 마치 마음속의 불길이 그의 뼈를 살라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서성거리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 50)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불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금식은 하지 않았지만, 음식을 권할 때면 미소를 지으면서, “배가 고프지 않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영혼을 사르는 훨씬 더 큰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오직, 기도만이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었죠. 그러한 영적인 굶주림 때문에 육체적인 굶주림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너희는 여기 있어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머물렀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신과 함께 겟세마네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던 것입니다.
존의 마음속에는 잃은 영혼들을 위해 고뇌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인용하곤 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을 언급하곤 했다. 또한, 그는 주님께서 그분의 양떼가 우리 안에 안전하게 들어오게 될 때까지 오래 기다리며 애쓰겠다고 맹세하셨다는 사실도 배놓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22:18).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와 같은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사용하셔서 존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존에게 있어서 이 무렵은 마치 구름이 간간이 뚫려 그 사이로 빛이 비치듯이, 영광받으신 주님의 빛이 고난과 수고의 신비를 그에게 드러내었던 시기였다. 주님께서는 땅 위에 계셨을 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보좌에 앉아 계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여전히 고난을 당하시는 어린양이시다. 그러한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존 하이드는 주님께서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의 무거운 쪽을 짊어지고 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 것이다. 존은 한 걸음씩 다른 사람을 위해 염려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지만 밝고 명랑했다. 우리 아이들이 그에게 늘 큰 기쁨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존 아저씨로 통했던 그는 아이들과 함께 자주 기도도 했고, 아이들은 항상 존을 사랑의 미소로 반겼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그런 아이들까지도 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얌전하고 조용히 굴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를 통해 그가 다른 세상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은둔자와 같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더 그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그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에 관해 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고, 전보다 훨씬 더 참을 성 있게 사람들의 고통과 실망에 동참했다. 존은 자기 양떼를 위한 주님의 열망을 지긋이 나누어지는 듯해 보였다.
그가 깨어 금식하고 기도했던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의 연약한 몸이 과로로 쓰러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시간을 잘 견디어 냈다! 그는 때로 고통으로 침묵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눈앞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항상 소망으로 빛났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소망,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으로 말이다.
존은 때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의 깊이를 측량해 보는 듯하다가, 그 사랑이 사무쳐 깊은 감동을 느낄 때면 찬양의 물결이 그의 심령에 밀려와 마치 땅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듯한 순간을 경험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주님의 기쁨을 누리며 갑자기 소리 높여 찬양했다. 하지만 그의 찬양은 언제나 “영혼의 고뇌 속에서 부르는 찬양”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선교 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곧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마치 목구멍이 막혀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흐느끼며 탄원했다. 그는 그 고뇌로 인해 영혼 밑바닥까지 뒤흔들렸다. “아버지여, 이 영혼들을 구원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짊어졌던 무거운 기도의 짐이었다. 쓸모없이 녹슬어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불에 타 없어져 버리겠다는 심정에서 울어나온 그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패터슨이 쓴 들 하나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존 하이드의 기도 생활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삶 자체가 기도였다는 것이 비결이다. 그의 모든 삶의 근원은 누구였는가? 바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이셨다. 그러면 어떻게 그분으로부터 그러한 삶을 허락받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의를 받아야 그렇게 된다. 나 스스로는 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있다고 해도 나의 의는 더러운 의복과 같다. 나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얻는다. 그렇게 될 때, 두 가지 결과가 생겨난다.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보고 내 의를 보지 않으시게 된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외면만을 감사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경우처럼 성령을 통해(요20:22) 우리의 존재 깊숙이 들어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왜 그와 같지 못한가? “위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살아서 우리를 ‘위해’, 즉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 내 기도는 항상 실패한다(나는 감히 내 기도 생활을 “생활”이라고 부르기도 두렵다). 나는 나의 실패를 고백하며, 결코 실패함 없는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간구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더욱이,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는” 응답이 주어진다. 그 결과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입는다. 그리스도의 기도의 삶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그분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다. 그렇게 될 때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이다. 이 얼마나 큰 평안이며 위로인가!
기도의 삶을 살려고 인위적으로 애쓸 필요도 없고, 실패를 맛보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는 순간, 수고가 끝나고 우리가 원했던 곳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앞에서 잠잠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한편, 그분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시말해, 우리의 심령 속에 그분의 넘치는 중보 기도가 솟아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게” 되고, 참된 “연합”과 “교제”를 누리게 된다.
<잠들지않는기도의사도/존 하이드/생명의말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