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2011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8:1)

누구나 자연을 보면서 감탄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윗처럼 자연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온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믿을 수 없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윗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공감할 것입니다. 나무도 풀도 하늘도 다 달라져 있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24시간 주님과 동행하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바로 보입니다. 세상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달리 보입니다. 자연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지만 그럴수록 사람을 보면 초라해지고 볼품이 없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은  자연에서 받는 은혜보다 사람을 보며 더 은혜를 받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3-4)

다윗은 우주보다 사람이 더 위대함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한 다윗은 이 우주가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라는 알았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에 이렇게 감격하였지만 우리는 그 보다 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타락한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를 희생시키셔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귀중한 존재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항상 예수님 바라보기!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세상이 아름답습니까? 사람들이 사랑스럽습니까? 은혜 받았을 때는 순간 그런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충만함은 곧 사라집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세상 때문입니까? 환경 때문입니까? 사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부흥회를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누누이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4:4) 이 말은 항상 기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흥회 때 성령을 체험할 때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항상 기쁠 수 있습니까?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4:13-14)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열쇠입니다.
- 본 내용은 유기성 목사님 설교요약입니다.


강가에 모일 것인가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막연하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저 은혜의 강가에 모일 것만이 아니라 은혜의 강 속으로 뛰어들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교회의 음향시설, 아름다운 찬양, 목회자의 뛰어난 설교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에 임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런 것들로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교회시설이나 설교, 성가대 등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거룩한 허기를 느낄 때,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할 때 반응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임하시기 전에, 먼저 인간적인 프로그램을 파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모호한 상상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에 도전하는 인간적인 지식을 파하신다. 또 우리가 개발한 각종 영성 개발 프로그램이 보유한 인간적인 영성을 타파하신다.

하나님의 불길이 우리의 삶을 통과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적인 기반 위에 뿌리내렸던 모든 것이 소멸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남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에 있어 공식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가 공허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만날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맛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파도를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때, 어느 민족, 어느 교회에 몰아칠지 아무도 모른다. 부흥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법이다.

성도들에게 필요한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게 예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바울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부터 교회에 갈 때 사람들을 섬기러 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의 모든 예배와 찬양, 기도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만일 당신이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당신은 인간적인 만남에 회의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교만 듣고 끝나는 집회라면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임재나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나 성령의 불길은 기도모임에서 체험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기도의 우선성 확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그 힘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2천년전 예루살렘의 다락방 사건을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검증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실수를 한다.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신 휘장을 오늘날 우리가 오히려 다시 꿰매고 있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율법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면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과정을 훼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은 이미 예수께서 담당하고 계시다.

‘뉴에이지’를 비롯하여 세계는 영적인 배고픔을 호소하는 운동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영적인 움직임에 돌을 던지는 데만 급급해 있다.

물론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거짓 가르침을 따르게 될까봐 두려워서겠지만, 참된 교회라면 그들에게 돌 대신 ‘하나님의 임재’라는 떡을 주어야 한다. 그들의 영적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것으로 그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 상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행위에 의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하나님이 이 시대에 행하고자 하시는 역사를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으로 필사적으로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강으로 뛰어들자! 우리 앞에는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중에서...토미 테니

불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

당신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열에 들뜬 자인가? 그 증상은 뚜렷하다. 만일 당신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몰두한다면, 형식적인 교회 행사나 인간적인 방식을 혐오할 뿐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흥분을 겨냥한 감정의 과대포장, 마치 종교라는 무대 위에 올려진 공연 같은 뜨뜻미지근한 예배에 염증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거룩한 갈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럴 때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영역으로 이끌려 나오신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 이것이 가능하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성에의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기상조건과 알맞은 습도, 실내외의 적당한 기온차가 있으면 독특한 형태의 성에로 만들어져 우리 눈에 보이듯이, 영적 영역에 알맞은 영적 온도변화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결정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영적 온도변화가 없기에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던 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라는 영원한 형태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자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하려했고 그로 인해 문둥병에 걸려 죽었다. 교만한 웃시야가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과 접촉하려 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어졌다.

오늘날 교회 역시 우리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웃시야 신드롬을 겪고 있다. 바울이 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내치실 것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예배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웃시야 신드롬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이다. 평생을 의지하던 웃시야 왕 사후 의지할 곳이 없어 비통해하는 이사야에게 비로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이셨다. 우리의 육신의 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영의 왕과 영의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도 이사야는 유다민족을 향해 많은 예언을 해왔지만,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사고와 삶은 완전히 변했다. 이사야 1장에서 5장까지는 이사야 자신과 민족의 죄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내용으로 일관하다가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60장에 걸쳐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예언적 선포를 한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인간 중심의 설교와 찬양에 환멸을 느끼게 되며 이전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흥분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당신의 운명과 미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에게 관심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이상, 내 방법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자아를 버리고, 야망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중에서...토미 테니

가시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야훼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33:6)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짓눌려 씌워졌습니다가시관의 뾰족뾰족 솟은 가시가 주님의 머리와 이마를 사정없이 찔러서 피가 줄기줄기 흘러내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하나님께서 저주의 상징으로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번역하는 생각이 저주를 몰고 온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땅에 저주가 먼저 온 것이 아니고 잘못된 생각이 먼저 와서 저주를 이끌어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므로 우리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우리의 생각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시사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이 땅의 저주를 속량하였습니다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생각은 온 세계에 평화와 축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 땅의 가시와 엉겅퀴가 부정적인 생각과 열등의식과 좌절감 등 잘못된 생각들을 가시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로 제하셔서들에 나가면 들이 복을 받고집에 들어오면 집이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을 만지면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으며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고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며 남에게 꾸어 주는 축복을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32,500가지의 축복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은 저주에서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을 다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저주가 무엇입니까그것이 무엇이든지 지금 곧 예수님의 가시관을 쓰신 모습을 상상하십시오그리고 예수님의 이마에서 흘리신 피를 보십시오여러분의 저주을 묶에 버리고 여러분을 축복 속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이 흘리신 보혈입니다이 보혈을 의지하고 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이미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리라”(4:23)

오늘의 Daily Bread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2) 점선(===)이하의 말씀은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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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할때-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삼중고의 무거운 형벌을 짊어져야 합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난을 당한 인간들이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고난이 오히려 축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고난을 당할 때 우리들은 언제나 고난의 때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성령께서는 우리들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는 괴롭고 힘들지만 되돌아보면 그 고난을 통하여 그 고난을 통하여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복받는 기회로 변화시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우리에게 고난이 임할 때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시고 축복의 기회로 삼아 하나님 앞에 중심이 바로 서는 자세가 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