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시설이나 설교, 성가대 등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거룩한 허기를 느낄 때,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할 때 반응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임하시기 전에, 먼저 인간적인 프로그램을 파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모호한 상상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에 도전하는 인간적인 지식을 파하신다. 또 우리가 개발한 각종 영성 개발 프로그램이 보유한 인간적인 영성을 타파하신다.
하나님의 불길이 우리의 삶을 통과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적인 기반 위에 뿌리내렸던 모든 것이 소멸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남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에 있어 공식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가 공허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만날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맛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파도를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때, 어느 민족, 어느 교회에 몰아칠지 아무도 모른다. 부흥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법이다.
성도들에게 필요한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게 예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바울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부터 교회에 갈 때 사람들을 섬기러 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의 모든 예배와 찬양, 기도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만일 당신이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당신은 인간적인 만남에 회의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교만 듣고 끝나는 집회라면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임재나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나 성령의 불길은 기도모임에서 체험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기도의 우선성 확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그 힘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2천년전 예루살렘의 다락방 사건을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검증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실수를 한다.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신 휘장을 오늘날 우리가 오히려 다시 꿰매고 있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율법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면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과정을 훼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은 이미 예수께서 담당하고 계시다.
‘뉴에이지’를 비롯하여 세계는 영적인 배고픔을 호소하는 운동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영적인 움직임에 돌을 던지는 데만 급급해 있다.
물론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거짓 가르침을 따르게 될까봐 두려워서겠지만, 참된 교회라면 그들에게 돌 대신 ‘하나님의 임재’라는 떡을 주어야 한다. 그들의 영적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것으로 그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 상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행위에 의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하나님이 이 시대에 행하고자 하시는 역사를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으로 필사적으로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강으로 뛰어들자! 우리 앞에는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중에서...토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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