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009

30. 가난과 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 자신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배경이 없는 랍비였다. 그러나 예수는 사회적으로 부유한 자와 권력층에 있는 자가 자기의 기득권을 버리고 그를 따르도록 하는,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었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를 따르려고 한 서기관과 예수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아와 말한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 8:19). 이 서기관은 지금까지 예수를 따르던 제자 집단의 바깥에 서 있던 자로서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신분과 안정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서기관이란 율법학자의 신분이었다. 예수는 이 서기관에게 이르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예수는 이 서기관에게 자기를 따르려면 거처도 없고, 보호막도 없는 처지에 동참해야 할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제자직(弟子職)이란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전혀 사회의 기득권이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세상적인 부나 권력을 추구하지도 아니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면적 자유를 누렸고 어느 파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아니했다.

가난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음
예수는 스스로 가난했으나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집도 없고 유리(遊離)하는 랍비였다(눅 9:58).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알리는 복음 전도자였다. 예수는 가진 것이 없어서 중대한 가르침을 베풀려고 할 때에는 남의 돈 한 푼을 빌렸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바리새인과 헤롯당파 사람들이 “로마에 세금을 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어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과 함께 예수께 보낸다. 이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한다. 이에 예수는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이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온다”(마22:19). 이 화폐의 형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임을 보이시면서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신다. 국가에 대하여는 세금을 내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성전세와 십일조를 내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는 국가와 종교의 기본 체제를 부정하지 아니하셨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병정들이 제비뽑아 나눈 그의 옷 외에 아무 것도 다른 사람들이 나눌 것이 없었다(마 27:35). 복음서 저자 요한은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 19:23). 당시에는 처형받은 사람이 몸에 입었던 것은 사형 집행을 담당하는 부대의 군병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관례였다. 그러나 예수의 속옷은 찢어 나누지 않고 제비뽑기로 한 사람이 가지도록 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는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는 예수가 당한 가장 비참한 치욕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묻힐 무덤이 없어서 가족 무덤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무덤에 장사되었던 것이다(마 27:60).

부(富)의 소유를 시인(是認)
예수는 무소유자였으나 부(富)한 자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부자들도 있었다. 예수를 지지한 사람 중에는 부자 아리마데 요셉(마 27:57), 가버나움의 백부장(눅 7:2). 베다니 가정(눅 10:38), 자기 소유로 예수를 섬긴 여인들(눅 8:3) 등이 있다.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써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부자를 증오하고 가난한 자를 두둔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자는 재산이 많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이 아니고, 거지 나사로는 소유가 적기 때문에 낙원에 간 것이 아니다. 내세에서 이들의 처지가 달라진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富者)는 열락의 생활만을 했으나, 나사로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눅 16:19-22). 나사로가 죽어서 그 품에 안긴 구약(舊約)의 아브라함은 그 시대에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눅 18:22)고 말씀하신 것은 천국은 무소유자가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자 청년은 소유가 많으므로(눅 18:23) 그가 가진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부(富)는 거룩한 위탁

1. 재물은 지혜롭게 관리해야
첫째, 예수는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귀인(貴人)이 맡긴 돈에 대한 비유로써 재물 선용(善用)을 가르치신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눅 19:12-13). 돌아온 귀인은 자기가 위탁한 돈에 대하여 종들이 이윤을 남긴 것을 기뻐한다. 그런데 한 므나 받은 자는 이윤을 남기지 않고 수건에 싼 그대로 귀인에게 가져온다. 한 므나 받은 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1). 이에 귀인은 진노하며 꾸짖는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거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利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눅 19:22-23). 모든 종들은 동일한 금액의 밑천을 위탁받았다. 각 사람이 그것으로써 똑 같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에게 야단을 맞은 종은 돈을 운용(運用)하면서 예측되는 위험을 회피한 자이다. 예수는 여기서 재물에 대한 지혜로운 관리, 오늘날의 용어로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가르치고 계신다.

2.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혜택
둘째, 재물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혜택이 가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는 부자 청년을 가르치시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이에 청년은 근심하여 물러간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예수는 이를 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여기서 부자란 재물이 단지 많은 자를 말하지는 않는다. 재물을 많은 청부(淸富)도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욥, 아리마대 요셉 등은 청부(淸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재물욕으로 가득 찬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재물은 개인적인 욕심과 자만(自慢)과 호사(豪奢)스러운 소비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필요한 자들에 대한 구제와 나눔이 필요하다. 이 지상에서 이들과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하게 하늘나라의 곳간에 저축하는 것이 된다.

3. 하늘나라에 저축
셋째, 탐욕(貪慾)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에 부(富)를 저축하라. 예수는 부유한 농부의 비유(눅 12:16-21)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재물 많은 부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리고 자기 이웃의 궁핍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자기 만족과 오만(傲慢)에 빠진 것을 지적하고 계신다. 이러한 부의 축적을 통한 오만한 자기 만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대하게 된다.

예수는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눅 12:15)라고 가르치신다. 인간 생명의 의미란 재물과 권력의 풍부에 있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구제하고 나누는 마음의 넉넉한 데 있다. 재물의 나눔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절제하며, 가난한 이웃에게는 부요(富饒)한 태도로 나타난다. 지상의 소유란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곳간을 넓히고 스스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는 것에 끝나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재물을 주심을 감사드린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예물을 드리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재물을 자기 곳간에 쌓지 말고 소외되고 궁핍한 한 자들과 나누어 사용함으로 부를 하늘나라 창고에 저축하라고 가르치신다.

4. 재물 사용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
넷째, 종말론적 심판에도 예수는 소외(疏外)된 자에 대한 돌보지 않음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신다. 인자는 종말론적 심판의 날에 소외된 자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使者)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1-43). 이들은 인자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 25:4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예수는 여기서 인자를 종말론적 왕(임금)과 동일시하고 계신다. 종말론적인 왕은 메시아적 왕권을 지닌 자를 말한다. 심판자인 왕은 자신을 세상적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자와 동일시하신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들의 소유라고 가르치신다. 재물을 많이 가졌다고 하드라도 사회를 향하여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서 그 재물을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과 나누며, 사회의 그늘진 계층들을 향하여 사용하는 자는 가난하고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경주의 최(崔)부자, 오늘날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사 창시자 빌 게이츠(Bill Gates)와 그의 부인,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우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 등은 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주의 최부자는 자기가 사는 1킬로 내의 모든 사람들이 춘궁기를 버틸 수 있도록 대문 앞에 공익(公益)쌀전을 마련하고 굶주린 자들이 적당량 쌀을 자유롭게 퍼가도록 항상 쌀을 비치해 두었다. 게이츠 부부는 그들이 만든 자선재단을 통해 아프리카의 에이즈 퇴치와 아동 교육분야를 위한 자선사업에 매해 기부하고 있다. 버핏은 극빈층을 위한 의료보험 프로그램 설정을 위해 기부하고 있으며 그리고 “재산의 85%, 374억달러(약 36조원)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사회에서 상속제 폐지를 반대하면서 자기들의 부(富)를 사회적으로 환원하는, “사회적 자본주의”(social capitalism)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오늘날 실천하는 부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29. 가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의 충실한 아들로 성장하였고, 유대교적 가정의 이상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홀로 가계를 꾸리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면서 효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예수는 가정을 떠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에 충실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예수는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혼인잔치 도중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에게 알린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이 말에서 “내 때”란 십자가에 달리는 죽음의 때요 동시에 예수가 영화롭게 되는 때이다. 이 때는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때이다. 그러나 이 때는 그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을 통하여 이미 지금 현재적 사건이 된다.

가정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거룩한 처소
예수는 가정을 신성하게 보았다. 예수는 가정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거룩한 처소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구약 창세기를 인용하신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

결혼은 창조주의 섭리이며, 한 몸이 되는 신비이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창조주의 섭리가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그에게 반려자로서 하와를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하나님은 장성한 남자와 여자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둘이 하나의 몸을 이룰 것을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것이 가정의 신비이다. 예수는 이러한 창세기에 나타난 가정의 신비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의도를 설명하시면서 본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 그리고 음행한 사유없는 이혼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질문한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2). 음행의 경우 음행한 자가 이미 한 몸이 된 결혼의 신성함을 훼손하고 깨뜨렸기 때문에 예수는 음행의 경우만 이혼을 허락하신 것이다.

가정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신 16:11).

누가가 그의 복음서(눅15장)에서 기록한 ‘돌아온 탕자(蕩子)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이야기’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가정에 관한(눅15:11) 설교이다. 이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인류 역사상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받아서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탕진(蕩盡)한 후에 흉년이 들어 궁핍한 나머지 돼지지기로 들어간다. 둘째 아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스스로 돌이켜 이른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타국에서 멸시 받고 굶주리는 고생을 한 탕자는 겸허해져 이제 자신을 아버지의 품군 하나로 생각하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 놓고 오늘도 아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생각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눅 15:20).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잘못을 고백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런데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른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그리하여 온 가족들이 잔치를 열고 즐거워한다.

그런데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맏아들인 형은 집 나간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형은 노하여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나, 아버지는 나와서 맏아들에게 그 이유를 알린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인간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탕자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설명하고 계신다.

가정은 신성한 창조 질서
예수는 장남으로서 남동생 넷과 여동생 둘을 가졌다. 동네 사람들은 공생애에서 복음 전파를 하고 있는 예수를 보고 말한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마 13:55-56). 우리는 복음서 저자 마태가 기록한 이 장면에서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나사렛에서 살았고, 그 육신의 형제 자매들과 같이 생활하였다는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지침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혼은 남편 쪽에서만 제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편은 일방적으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예수는 원칙적으로 한 번 맺어진 혼인관계는 깨어질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9). 예수는 그 이유를 결혼에 나타난 결합원리로 선언하신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막 10:6-8).

모세의 율법이 인간의 악(惡)함 때문에 허용했던 이혼을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가정이라는 더 높은 가치에 비추어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하신 것이다(막10:1-12).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창조의 질서로서 인위적으로 깨어질 수 없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인정: 모세의 권위를 능가
가부장(家父長) 사회인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권리와 경제권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이 임의로 자기 아내를 버리곤 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악습에 대하여 예수는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를 내 쫓을 권리가 없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예수는 여성을 천시하는 유대인 사회의 관념을 깨뜨리고 계신다.

유대인 남자들은 내어 버린 아내에 대하여 이혼증서를 주는 것으로 사회적 책임을 모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 나아와 시험하여 질문한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2).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다 (막 10:4). 그러나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신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막 10:5). 예수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막 10:11-12). 예수는 여기서 모세의 이혼 규정을 넘어서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려서는 않된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다른 여인에게 장가드는 자나 이혼당한 여인에게 장가드는 자는 모두 간음한 자라고 예수는 선언하신 것이다. 여기에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역사적 예수의 메시아적 권위가 있다.

어린이를 칭찬하고 존중하셨다
파피루스(예수 당시 이집트 지방 문서를 거룩한 갈잎으로 만든 일종의 종이)에 적혀 있는 기록은 1세기 경에 있었던 남아(男兒)선호 사상을 알려주고 있다. 최근 발굴로 나타난 어느 파피루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가정생활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적여 있다: “우리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에 있소. 당신이 애들을 잘 돌보기를 바라오. 나는 보수를 받는 대로 당신에게 그것을 보내겠오. 만일 그 애기가 사내거든 잘 기르고, 계집 아이거든 내어 버리시오.” (James Stewart, 예수의 생애와 교훈, 김정준역, 대한 기독교서회, 1979, 185 재인용)

1세기 경 유대인 사회에는 어른 우위 및 남아 선호(選好) 사상이 지배했다. 이런 시대 배경에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는”(막 10:13) 장면이 이해될 수 있다. 복음서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꾸짖는 제자들에 대하여 노하시고 이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신다”(막 10:16).

복음서 저자 마태도 어린이를 사랑하는 예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3). 예수는 어린이들의 천진만난함을 좋아하셨고 이들의 순수한 신앙을 칭찬하셨고,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 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어린이 존중에 있어서도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 시대 사상을 능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 우선
예수는 가정을 신성시 하면서도 가정을 하나님 나라에 비하여는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가정생활에서 나와서 복음전파에 모든 것을 바쳤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하는 예수의 말씀을 전해준다. 복음 사역을 하고 계시는 예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마12:47)고 말을 건낸다. 예수는 그에게 다음같이 대답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요 동생”이라고 칭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49-50).

예수는 복음으로 인하여 가족 관계에 갈등과 불화가 생길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5-36). 이러한 불화와 갈등은 재산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불화이다.

복음서 저자 누가도 장례를 당한 제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제자는 말한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 9:61). 예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우선을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예수는 여기서 부친의 장례를 치룰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부친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장례는 남은 가족들에게 맡겨두고 먼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선을 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서 죽은 자에 대한 작별인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는 따름의 긴급성. 말하자면 제자직의 극단성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가르치고 계신다.


28.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자주 있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다른 종파보다는 바리새인 종파의 가르침과 공통점이 많았기(Paul Winter, On Trial of Jesus, Berlin: de Gruyter, 1961, 120) 때문이다. 동시대의 종교권력가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고, 율법을 준행하고자 하는 열심이 없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도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그것들의 정신을 바르게 구현하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전통을 경시하는 자유주의 유대교보다는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유대교가 역사적 예수와 공통점이 많았던 것이다. 예수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안식일 규례와 정결법을 존중하였으나 그것들을 이행하는 방식이 달랐다. 예수는 내면성을, 바리새인들은 외면성에 치중하였다. 예수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가르치시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에 얽매어 율법의 정신을 놓쳤다. 그래서 논쟁이 자주 일어난 것이다. 논쟁은 주로 안식일 준수와 정결법에 관련된 것이었다. 역사적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다.

I. 공통점

구약의 율법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믿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윤리적 조항을 지키려고 애썼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유대의 경전을 읽었고, 구약을 소중하게 여겼다. 예수 자신이 유대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서 유대교가 기반하고 있는 구약의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바리새인들은 613조문으로 된 계명과 규례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365조문은 소극적인 것이고 245조문은 적극적인 것 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조문이 율법 종교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바리새 정통주의자들은 이 조문(條文)만이 진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613조문에 몇 조문을 첨부한다거나 빼는 것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는 이단자로 취급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도 구약성경을 믿었다. 예수는 성경을 폐할 수 없으며, 율법은 일점 일획도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복음서 저자 마가는 바리새인이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막 2:18). 예수 자신은 금식을 부정하지 아니하시며 이르신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유대인들은 회개와 속죄를 수행하기 위하여 금식하였고,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눅 18:12).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가 계신 중에는 제자들은 잔치의 주인공 신랑과 같이 있기 때문에 속죄일에 행하던 금식 자체가 불필요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기념일인 성 금요일에는 금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기적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신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병자를 고치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 예수가 자기들 종교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요 9:6)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9:7)하시고 소경을 치유하신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치유받았다는 소경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에게 이 사람이 정말 소경으로 태어났는지를 묻고 소경에게 이른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을 보고 당황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기적을 일으킨 예수가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였다.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으나(마22:23-28)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정통파였다. 예수는 유대교가 증거한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종말에 일어날 두가지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신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예수는 단지 죽은 모든 자가 부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이 생명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에 직면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진실한 바리새인이었다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의 공회의 일원이었다. 이 공회 안에서 그는 서기관 집단에 속한 인사(人士)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요3:10)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서기관들은 대다수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니고데모와 그의 많은 동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보내신 선생(랍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에 예수께 와서 그의 신앙을 고백한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시고 그날 밤 그는 변화받은 사람이 되어 돌아간다.

II. 차이점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례를 철저히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율법의 의례적인 규례에 얽매였다. 그리하여 율법의 정신을 놓쳤다. 이들은 율법의 규례를 외면적으로 지키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위선이 심했다. 이들이 역사적 예수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논쟁거리는 안식일 준수와 정결법 규례에 대한 준수에서 나타났다. 역사적 예수는 바리새인의 이러한 외면성에 치우친 허례와 허식을 지적하시고 이것이 위선이라고 비판하셨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드러내셨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인 장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고 경고하신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 마태복음 23장에는 특히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外飾)을 질책하는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예수는 가장 심한 어조로 질책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그리고 예수는 이들 전통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지혜자를 박해한 것을 질책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마 23:34). 예수는 의로운 이들을 죽인 피값이 이들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하신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5-36).

바리새적 외면 종교에 대하여 진정한 마음의 종교를 보여주셨다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이 탐욕과 방탕으로 차 있는 것을 지적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이들에게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명하신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예수는 이들의 외면성의 경건은 속으로는 무덤에 불과하다고 꾸짖어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경건성은 그 내면에 송장이 들어 있고 외면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셨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십일조를 부인하지 아니하신다. 십일조를 드리되 그 정신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버리지 말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안식일 정신을 위하여 안식일 법을 깨뜨리신다
바리새인들은 병 고치는 것 자체를 트집잡지 아니했다. 단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친 일 때문에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였다: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 5:16).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신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여기서도 예수는 안식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우주를 섭리하기 위하여 쉼 없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예수는 아버지를 따라서 소경의 문을 뜨게 하는 선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정결법의 정신을 위하여 정결규례를 깨뜨리셨다
정결법에 관하여 예수는 정결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정결의 원리를 말씀하신다: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눅 11:42). 예수는 정결법의 정신인 내면의 정결을 가르치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39-41). 예수는 정결의 규례에만 치중하여 속으로는 탐욕이 가득하면서 외면적으로 깨끗한 체하는 외식자(外飾者)들을 나무라시면서 내면의 청결을 강조하신다.

죄 용서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에 대하여 “소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병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치유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속으로 비난한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여기서 역사적 예수는 죄 용서를 선언하심으로 모세 이상의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리새인들에게는 걸림돌(skandalon)이 된 것이다.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예수는 모세 율법과 선지자 예언의 강령은 사랑의 계명이라고 가르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는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에 얽매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이 두 가지 전통의 핵심인 사랑의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심으로써 이들의 종교를 완성하시고자 하였다.

III. 외면종교와 내면종교
구약의 율법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지켜야할 법규를 제시해준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등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모든 인간이 지켜야할 규범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유대인들은 이 법규를 외면적으로만 지키기에 열중하고 그 내면성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마음에는 살인하는 마음이 있고, 음란한 마음이 가득하고, 거짓말하는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적으로 그것을 나타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간주되었다. 그 내면은 아주 부패했음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는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찬 율법종교의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러한 외면종교에 대하여 경건의 내면성을 주장하신다. 율법은 그 나타난 결과를 중요시했으나 예수는 그 내면과 동기를 보신다. 그리하여 내면종교에서는 이미 동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율법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고 율법주의자의 경건과 외식(外飾)은 허물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율법 자체는 신성하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는 예수는 율법폐기주의자(antinominian)도 아니었고, 전통을 무시하고 폐기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해체주의자(deconstructivist)도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의 내면성을 중요시한 점에서 율법을 오히려 그 정신에 있어서 살리신 것이다.

예수는 성령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 속에 쓰시고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약속하셨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 이러한 내면성을 새롭게 하시는 약속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에스겔의 예언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6). 오늘도 예수는 그 약속하신대로 보혜사 성령을 신자들 마음 속에 보내어 주셔서 우리 속에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자벌적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게 하신다.


27.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 예수

율법 ‘전통’을 깨뜨리면서 그 ‘정신’을 구현한 분
예수는 유대교의 율법 전통을 깨뜨리면서도 그 정신을 잇고 있는 분이다. 그는 율법 종교의 틀에 넣을 수 없다. 율법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자유로운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전통 율법 종교를 비판했고,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예수는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 자체를 부정하거나 규범을 부정하는 해체주의자는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 정체성을 지닌 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장 개방적인 자였다. 그는 자기 헌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이웃을 위하여, 타자를 위하여 산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하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오늘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타당성이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중의 한 명인 하워드 스나이드(Howard Snyder)는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심을 구현하신, 궁극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이실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것은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을 초월하고, 그 꼭대기에 서 계시다는 사실이다.”(Howard Snyder, The Earthcurrents, The Struggle for the World's Soul, 1995, Abingdon Press, 김현석 역, 2000년대 지구동향, 아가페, 518).

율법 종교의 비판가 예수
복음서 저자 마가는 율법 종교를 비판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고”(막 7:1~2) 예수께 질책성의 질문을 하였다. 마가는 이러한 장면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3-4). 복음서 저자 마태도 비슷한 보도를 한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2).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예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4-5). 예수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럴듯한 종교적 근거를 들어서 부모공경을 소홀히 하는 당시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신 것이다. 마가는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 7:9-13).

예수는 바리새인의 위선과 사리사욕을 나무라신다. 수만명이 모인 처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전통과 율법 자체를 거부하거나 해체시키는 해체주의자는 아니었다.

불을 던지러 오신 분
예수는 사랑의 계명을 주신 분이면서도 동시에 불을 던지심으로써 율법과 제도에 안주하려는 사회 구성원에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불이란 구약성경의 그림언어에서 종말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수단이다. 불이란 하나님 말씀의 심판하시는 힘에 대한 상징으로도 기능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에서 불은 타오른다. 불은 인간의 불의와 오만을 심판하며 정결케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화평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여기서 분쟁이란 적대적 분쟁이나 증오의 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분쟁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거룩한 분쟁이다. 이것은 아비와 아들, 어미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거룩한 갈등이나 불순종이다. 이것은 아비와 어미, 시어머니와 며느리, 장인과 사위 사이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야기하는 거룩한 분쟁이나 불순종을 말한다.

자기 정체성을 지니신 분
예수는 “나는… 이다”(나는 길이요, 진리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산 떡이다. 등)라는 독특한 어법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교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어법은 모세에게서 찾아 볼 수 없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어법이다.

심지어 예수는 결정적인 선언을 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까지 한다. 이들의 눈에 나사렛 예수는 당시 유대의 율법과 유전을 거슬리는 신성모독자요 무법자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 요한에 의하면 당시의 정황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3).

예수는 누구의 스타일과도 부합하지 않으신 분이다. 그는 1세기나 그 이후로 현재까지 어떤 사람의 판에 박힌 삶과도 들어맞지 않으셨다. 예수는 당시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열심당파, 헤롯파 등의 고정적인 종파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아니하였다. 복음서 기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예수와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가장 개방적인 인물
예수는 역사 속에서 가장 영속적인 인물이다. 그는 가장 자유롭게 사신 분이다. 나사렛 예수는 제도나 종교의 틀에 매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시면서 가장 개방적으로 사셨다. 예수는 자신의 목적을 가지시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시고 오신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는 가장 자유롭게 사셨지만 무법자처럼 살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셨고 모든 법의 법인 사랑의 지고한 법에 따라 사셨다.

예수는 품행에 문제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근히 나아가 말을 거시셨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은 그 시대의 관습으로 볼 때는 유대인 남자가, 특히 랍비가 여인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요 4:27). 예수는 삶의 의미와 생수에 대한 갈증을 지닌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해 주신다. 예수는 남편 다섯을 가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고백을 이끌어내시고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허락하신다.

자기 헌신적인 존재
예수는 병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사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예수가 받을 세례란 죽음의 세례이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죽음의 세례를 말한다. 예수는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구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이들에게 영광에는 먼저 고통과 헌신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끌려 가실 때 자기를 따르는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자손을 위하여 울라”(눅 23:28).

철저히 이웃을 위하여 사신 분
예수는 소외되고 그늘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의 전 삶을 드리셨다. 그는 철저히 이웃, 특히 타자를 위하여 사신 분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눅 10:30-37)는 곧 나사렛 예수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주신 비유이기도 하다. 어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레위인, 제사장도 보고 지나갔으나 어느 무명의 사마리아인이 그를 주막에 데려다 기름을 발라주고 숙식비를 제공하면서 그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주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인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팔아 먹은 자들로 여겨 멸시하고 상종하지 아니하였다. 예수 자신은 유대사회에서는 나사렛이라는 자그만 시골 동리에서 온 낫선 이방인처럼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사마리아인처럼 당시 유대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척받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고아, 과부의 편에 셨던 것이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당시 종교 권력자로부터는 소외된 예수 자신을 지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탁월하신 존재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예수는 자신이 이것을 이루는 메시아인 것을 알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예수는 인간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한 후에 유대인들이 “네가 무슨 표적을 보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요 2:19). 당시 유대인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 기자 요한은 해석해준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고 말씀하신다.

빌립은 예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는 이 요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분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기록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1세기 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를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오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는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그분은 오늘도 선포되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현재하시는 분이시다. 포스트모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분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전통과 인습을 개혁하고 그 전통이 가진 아름다운 정신과 보고(寶庫)를 살아나게 하시는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26. 죄인을 용서(容恕)하시는 예수

나사렛 예수는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메시아를 주시겠다는 창세기의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야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뱀과 여인이 원수관계에 있게 되고, 뱀의 후손인 사단과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 나사렛 예수가 대결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부추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예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정수리(권세)를 무력화하셨다. 그래서 이 구절은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구약에 약속된 최초의 메시아 약속이다. 예수는 이러한 구원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비유(눅 15:11-32)로써 말씀하신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죄에 물든 상황에서 곤고(困苦)하여 다시 돌아오는 인간들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구체적인 죄들
예수는 죄에 대한 교리(죄의 기원 등)를 말씀하시지 않고 구체적인 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가 말하시는 죄는 추상적인 죄(sin)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면서 짓는 죄들(sins)이다. 이것은 시기, 투기, 방탕, 음란, 간음, 악독, 모함, 살인, 불신앙 등(마 23:25, 눅 11:39) 등이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내면의 죄를 지적하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체적인 죄의 모습을 다음 같은 “육체의 일”이라고 특징짓는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지붕 위로 내려진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죄를 지적하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교훈하신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적시는 여인을 향하여 예수는 “너의 많은 죄가 사(赦)해졌도다”(눅 7:48)고 말씀하신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애물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장애물이다. 죄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5:6). 예수는 죄를 다음 네 가지로 규정하신다.

첫째, 죄는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죄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은 우리 행위의 기준과 지침이다. 부자청년이 예수께 다가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는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대답하신다.

둘째,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죄란 율법을 깨뜨리는 것 이상이다. 예수는 죄를 내면적인 측면에서 본다.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형제에 대하여 살인하기 전에 살인할 마음을 품었으면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간음하는 마음을 품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죄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8). 그 구체적인 것으로 다음을 지적하신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이 탐욕으로서 이 마음에 기록된 것을 깨뜨리고 있다.

셋째, 죄는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상(傷)하게 하는 것이다. 죄란 율법을 깨뜨림으로써 도덕 질서를 파괴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작은 아들이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였을 때 그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 놓고 그 아들을 기다린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상했다. 탕자의 방탕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다. 아들의 타락은 아버지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다.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눅 15:24)고 생각한 것이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 마음에 상처를 달랠 길이 없다.

넷째, 죄는 교만(驕慢)에서 나온다.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는 죄란 교만이라고 암시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 15:12) 하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눠 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눅 15:13). 아버지로부터 더 이상 간섭을 받기를 싫어하는 독자성은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창 3:5) 마음이다. 이 교만한 마음은 창세기에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섬겨준 마음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처럼 될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이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이다.

죄의 결과 - 죄는 다음 세 가지 결과를 초래하였다.

1) 하나님과의 교통을 마비시킨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나와서 타국에서 허랑방탕하면서 전 재산을 허비하였다(눅 15:13). 그리하여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죄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창 3:8).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

2) 창조질서를 혼란하게 한다.
탐욕은 가난한 자를 탈취하며 사회공동체를 붕괴시킨다. 예수는 당시 종교적 특권층의 착취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 20:47).

3) 고립을 초래한다.
죄의 결과는 사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옴이다: 예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 15:4). 무리를 떠나 홀로 된 양은 길 잃은 양이며, 이리나 늑대의 밥이 된다. 죄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되고 갈 길을 잃은 것과 같다.

4) 인간성을 훼손한다.
죄는 물질을 낭비하는 것이다. 탕자는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눅 15:13). 그리고 죄는 인간 의 삶을 궁핍하게 만든다. 탕자는 재산을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해졌다(눅 15:14). 탕자는 돼지지기로 생계를 유지한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눅 15:15). 아버지의 유산을 물러받아 허랑방탕하던 아들은 이제 비참한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물질의 낭비와 더불어 호구지책에 살아 가면서 그의 삶과 인간성 자체가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죄를 사(赦)하시는 구속자, 예수

첫째,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赦)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우리 인간들을 용서하신다. 예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써 설명하신다.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놓고 오늘날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아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한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둘째, 죄로부터의 돌이킴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탕자는 가산을 허비한 후에 있을 곳에 없어서 돼지치기로 들어가 쥐엄열매로 연명을 한다. 그럴 때 탕자는 역경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죄는 인간을 암흑 속으로 몰아 넣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문책하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꺼이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신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예수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에 비유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셋째, 죄로부터 돌이킴은 창조질서의 회복을 함의한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 이 오신 것을 상실된 창조질서의 회복이라고 선포하신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넷째, 죄로부터의 돌이킴은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예수는 죄인의 친구가 되시면서 저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그들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14).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시어 그에게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는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는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명(살과 피)를 대속의 제물로 주셨다.

다섯째, 죄 용서의 조건은 참회이다.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조건은 철저한 죄의 고백이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예수의 비유는 탕자가 단지 배고파서 허기를 면하기 위해 돌아왔고 그러한 그를 아버지가 용납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말하는 탕자의 겸허와 뉘우침을 보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아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진정한 의인신앙: 사죄(赦罪) 은총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삶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공적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총이 주도적이다. 참회의 행위를 포함한 사죄 은총의 체험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누가가 기록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 예수의 발에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붓고 눈물로 적시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것은 죄 용서를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정죄할뿐 아니라 예수에 대하여도 판단을 하였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그러나 예수는 그 여인의 행위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온 것임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예수는 진정한 신자의 삶은 날마다 죄 사함 받은 은혜의 감격 속에 사는 삶인 것을 가르치신다

25 . 영혼의 치료자 나사렛 예수

나사렛 예수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사회적으로 유력한 자들을 제자와 친구로 삼지 않았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에게 다가가 저들과 대화하며 감화시켜, 저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저들을 새 삶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 지배계층인 바리새인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의 죄에 물든 삶에 영합하거나 저들의 불의한 삶을 용인하지 않고 저들을 불의한 생활에서 나오게 하고 저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었다. 예수는 저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죄를 청산하게 하실 뿐 아니라 저들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치유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단지 병든 몸을 치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 마음을 변화시키며 그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1.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예수는 여리고에 이르러 그 지역 내의 전체 세관에 감독권을 가진 세리장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예수는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하신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높임과 존경받는 의인(義人)들 보다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저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는 자기에 대하여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와서 고발당한 여인에 대한 판결을 요청받고 예수는 먼저 고발자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신다. 고발자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 둘씩 사라지자 예수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은 죄인인 인간으로 겸허하게 낮아지신 예수의 겸손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 자신도 죄가 있어서 정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죄를 지은 여인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녀에게 새로운 갱신의 길을 열어주신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것은 앞으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께서 지적한 죄는 단지 도덕적인 잘못이나 사회적 불의를 넘어선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이 원죄로부터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죄들이 나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가 청산된 것을 선언하신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예수의 말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심을 둔 말씀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스스로가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설 때, 성전 안에 나타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사야처럼 인간은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게 된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고발자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 역시 하나님 과의 근원적인 관계,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한 인간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고, 우리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중심(잠재의식)을 보시기 때문이다.

2. 마음의 치료자 예수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치료하신다. 예수는 당시 소외된 지역의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신다. 어느 우물가에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을 때 예수는 물을 좀 달라고 그녀에게 다가가신다(요 4:7). 여인은 놀라서 예수에게 대답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답하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예수는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갈증을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예수는 여인에게 이르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결정적인 말을 하신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실토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와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된 삶에서 변화되고 메시아를 영접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거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여인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여태까지의 갈증에 허덕이는 마음과 방탕한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다시 갈증을 유발하는 세속의 일시적 즐거움에서 벗어나 마음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즐거움이 솟아나게 하는 생수의 원천을 제공하여 주셨던 것이다.

3. 영혼의 병을 고치는 예수
예수는 영혼의 병을 고치셨다. 영혼의 병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을 말한다. 영혼의 병은 단지 상담기술로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치유를 받아야 한다. 영혼의 병을 치유받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다.

가버나움(Cabernaum)에서 지붕으로부터 달라내린 중풍병자에 대하여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예수를 참람하다고 생각한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 5:21).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눅 5:24). 여기서 예수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나 그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시는 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의 죄, 영혼의 병을 치유하시는 자임을 알게 하신다.

예수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았을 때 어느 죄인인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일이 있었다. 죄인인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바리새인인 시몬이 속으로 예수에 대하여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라는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를 아시고 예수는 여인의 행동이 큰 죄의 빚을 탕감받은 은혜에 대한 내면의 진정한 감사에서 나온 행동임을 말해주신다. 예수는 시몬에게 말씀하신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4-48). 이 여인은 사회적으로는 죄인이라는 비방을 받는 자였으나 예수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 여인은 자기의 잘못된 과거의 삶에 대한 깊은 회심과 하나님의 사유해주시는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표현으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었던 것이다. 여인의 병든 영혼이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미리 말씀하신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예수께서는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는 명료한 메시아 의식을 가지시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시고 그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리신 것이다.

4. 믿음을 보시는 예수: 이신득의(依信得義)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사는 백부장이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는 예수에게 요청을 한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집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고 말씀만하라고 요청한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이에 예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9). 이 백부장은 이태리 사람으로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의 믿음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예수는 칭찬하신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깨뜨리고 내려진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죄를 사함에 있어서 예수는 그를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막 2:5). 예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너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눅 7:47)고 말씀하신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 만찬을 하실 때에도 예수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19-20)이라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십자가상에서 한 편의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를 비방하는 것을 듣고 다른 편에 달린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향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을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고 그 사람을 꾸짖고, 예수를 향하여 소원을 말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축복하신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인격적 믿음이다. 이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서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에게로 접근하게 한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24. 위대한 의사(醫師) 나사렛 예수

나사렛 예수는 단지 스승이나 설교자나 윤리가만이 아니었다. 예수는 질병의 치료자였다. 그는 위대한 의사였다. 그는 영혼의 문제만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짊어진 신체의 질병을 치료하셨다. 예수는 인간을 단지 영혼만 구원받을 자만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구원 받은 영혼과 더불어 온전한 신체로 살아가야할 자로 보셨다. 그래서 예수는 육신이 병든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그의 복음 사역 가운데 치유사역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

질병의 치료자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병자 치료에 대하여 무수히 많이 기술하고 있다. 마가는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예수께 몰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 3:8). 마가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 6:55-56). 예수로부터 신성한 치유의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 자신이 메시아적 권능을 지녀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예수를 만지기 위하여 왔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누가도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왔다고 기록한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 6:17).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신체의 질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복음전파를 위하여 보내셨을 때에도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는 일과 병 고치는 일 두 가지를 하라고 명하셨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9). 마태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마 15:29-30)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다음같이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의 생애 사건에서 그가 병고친 이야기를 제(除)해 버리고 나면, 그는 다만 한 인망 있는 선생이요, 귀찮을 만큼 설교만 하는 설교자일뿐이다.”(James Steward, 예수의 생애와 교훈, 133).

은밀한 치유자
예수는 치유를 하실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보다는 은밀히 치유하셨다. 예수는 신체의 질병을 고쳤을 때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막 7:36)고 경계하셨다. 예수는 자신이 기적 행위자로 오해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다. 예수는 고치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조차 하셨다(막 7:34). 예수는 질병 치유로 인해 자신이 오해받을까 염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신 것이다.

예수의 초자연적 치유행위는 그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치료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는 모든 치유행위를 하신 후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는 기적을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에 대하여 모두 증언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 8:4, 막 8:26, 눅 8:56). 기적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영광의 신학이요, 이것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께서 의도하신 길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자기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처지에 대한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하신 것이다. 기적이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생명의 빛인 복음이 증거될 때 따라오는 그림자일뿐이다.

예수는 병 고침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한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1).

동정과 공감하시는 예수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데가볼리에서 소경과 더듬는 자와 눈 먼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간구했을 때 예수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위탁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형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막7:34-5). 예수는 병자들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함께 아파하는 동감(同感, compassion)을 지니셨다. 예수의 치유는 자신의 신비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었다. 병자에 대한 메시아적 공감과 사랑이 그들을 치유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의 사건에 있어서 예수는 자신을 결코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높였다. 그리고 질병에 고통받는 자들의 불행한 처지에 공감하셨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신 것은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과시하거나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에 대한 사랑, 동정(同情)과 공감이었다. 동정이란 말에는 “같이 괴로워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자신의 상처와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동정이요 연민이다. 질병에 허덕이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긍휼, 사랑이 그 동기였다. 예수가 보여주신 동기는 하나님은 제사보다도 인자를 원하신다는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긍휼한 마음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역사적 예수의 두 가지 면: 인간적인 면과 초인간적인 면
역사적 예수를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두 가지 본성, 인간성과 초인간성(신성)이다. 먼저 그의 자연적인 인간적인 측면이다. 예수는 어린 시절에는 목수의 아들로서 목수 아버지로부터 짐승의 멍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직업이 목수인 아버지의 착한 아들로서 성장하였다. 그는 들의 백합화를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병자를 보고 측은히 느끼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했으므로 풍랑이 이는 바다의 출렁거리는 배에서 곤히 잠드셨다.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에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신다.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다짐하신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만으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인간적 차원을 넘어선 그의 초인간성(신성)을 같이 보아야 한다. 그는 인간이었으나 그에게는 인간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에게 병자들이 다가와 만지기만 해도 그들의 병이 나았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했을 때 그것이 부풀어져 5천명이 먹고도 광주리에 가득했다. 예수는 밤중에 갈릴리 호수(바다) 위를 걸었다. 그는 바다의 광풍을 향하여 “잠잠하라”고 하니 광풍이 잠잠해 졌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에게 있는 초인간적인 면이다. 이 두 가지 면을 균형있게 보아야 우리는 역사적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체의 중요성 - 영지주의와 다른 점
신체 질병의 치료자로서의 예수상의 정립은 복음서가 그리는 역사적 예수상이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의 예수상과 다르다는 점을 명료화 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체를 죄악시하고 신체를 떠난 영혼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신체를 쓰신 예수는 영으로 오신 예수가 쓴 가현(假現)적 모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지적 예수를 중요시하면서 시공간 안에 인간의 몸을 쓰고 오신 역사적 예수를 인정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의 구속을 중요시하고 영혼의 구원은 신비로운 지혜를 깨닫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신체를 입고 오셨고 신체를 가진 인간들의 모든 신체적 질병을 치유하시고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온전히 치료하신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신체란 영혼을 가두는 무덤이 아니라, 영혼과 더불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이다. 기독교는 영혼만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긍정하는 종교이다.

예수 안에 현재하는 하나님의 능력
이러한 권능적 치유의 행위는 예수가 단지 랍비나 도덕의 선생이라는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그의 초인간적인(신적) 차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질병의 치유는 단순히 기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재하는 것에 대한 가시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한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8). 예수의 치유사역과 귀신을 쫓아 내심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능력있게 이 세상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적 행위 자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귀신을 쫓아 내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믿음과 삶과 행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예수 안에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거하였으나 예수는 그의 신비한 능력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도록 하지 않았다. 기적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감화를 통하여 그 내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인격적으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예수의 복음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종교란 인격을 도외시하는 맹목적 종교가 아니라 동정, 공감(共感, compassion), 사랑과 온유가 있는 감화에 기초한 인격적 종교이다.

23 . 모세 율법을 창조적으로 재정형(再定型)하신 예수

나사렛 예수가 가르치신 계명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그것은 율법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예수의 새 계명은 모세 율법에 대한 창조적 수정(修訂)이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었다. 모세가 준 율법은 무효화되지 않고 예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 안에서 완성된다. 사랑의 계명 안에서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을 폐기하지 않았다. 2세기 초대교회 안에서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이단(異端)이 일어나 구약 성경을 폐기하고자 했을 때 공(公)교회 회의는 144년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신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로 오늘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과 신약을 경전(經典)으로 받아 들이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다.

예수가 선포한 윤리의 새 형식
예수는 구약 율법의 요구를 행위자의 내적 동기에 적용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들을 동기(動機)의 측면에서 극단화한다. 예수는 구약 율법의 요구를 그 자신의 인격에 기초하여 재정형(再定型)함으로써 율법 해석에 신선함과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예수 교훈의 새로운 형식은 “…라고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다. 예수는 사람이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만 삶에 대한 확실한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적 교훈의 새 형식은 모세의 권위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나 서기관 등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견지에서는 자기들의 전통 규례(規例)와 유전(遺傳)에 도전하는 종교적 위법행위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를 위험인물로 보았고,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 교훈의 새로운 형식은 그 자신이 지니신 메시아적 권위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나사렛 예수의 윤리적 새 형식의 선언은 유대교의 전통이나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예수만의 독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모세의 율법 시대와 선지자의 예언 시대가 가고 하나님 은혜의 복음 시대가 온 것이다.

예수는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당시 유대교 랍비 전통의 해석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전통 규례는 구전(口傳)에 의하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계명이 주어진 본래 의도가 애매모호해지거나 왜곡되었다. 이것들은 장로들이 인위적으로 세운 유전(遺傳)과 규례였다. 그래서 예수는 랍비들의 전통 규례를 무시하였다. 예수는 계명의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 장로들의 전통에 반(反)하여 계명의 본래 의도로 되돌아갔다. 장로들의 전통은 고대 성문법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예컨대, 십계명의 넷째 계명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면 무엇이 일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적용과 해석은 누적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법문서(a law-code)가 되어 버렸다. 구전(口傳)법은 문서(文書)법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랍비의 법체계는 너무 외형적인 형식에 치우쳤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계명이란 그 본래적인 목적이 충족될 때 계명은 바르게 지켜진다고 가르쳤다.

계명의 본래적 의도를 역동화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의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라면, 예수는 안식일이 제정된 본래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율법이 제정된 목적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 동물, 그리고 땅의 휴식, 재충전과 구제를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는 일이나 행동은 안식일에 시행되기에 적합하다. 이러한 고려에 의하여 예수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다. 이 일에 있어서 예수를 비판한 자들도 사람이나 가축이 위급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안식일에도 적합한 의료적 도움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쉽사리 하루나 이틀을 기다릴 수 있는 자들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때문에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등이 굽은 여인을 치유한 일에 대하여 분을 품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 13:14). 이에 대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질책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5-16). 예수에 의하면 안식일이란 병을 고치기에 적합한 날이다. 병 고치는 일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조자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병 고치는 행위, 도랑에 빠진 가축을 끌어내는 일은 안식일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 하며 동시에 창조자를 명예롭게 한다.

여성의 보호
동일한 윤리의 원칙은 이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수치되는 일(불륜, 불효 등)을 발견하였을 경우(신 24:1)에는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랍비 학파는 수치되는 일의 성격에 대하여는 불일치하였다. 어떤 자는 좁게, 어떤 자는 넓게 해석하였다. 예수는 “아내를 버리는 일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 주기를 요청받았을 때 예수는 이혼을 반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신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5-9). 이 일을 판단함에 있어서 예수는 율법주의자나 반(反)율법주의자도 아니었다. 예수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셨다. 예수의 말씀은 여성의 처지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유대 법에 있어서 이혼의 우선권은 남자에게 있었다. 유대 가정의 저울은 아내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기울었다. 예수의 이혼 반대는 이러한 유대 사회의 불균등을 개선하려는 효과를 지녔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보다 높은 삶의 윤리를 요구하셨다.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의 일반적인 도덕성보다 더 많은 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義)보다 높은 의를 요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들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의 사람들보다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예수는 요구하셨다.

율법의 폐기 아닌 완전화
예수는 모세가 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는 율법 폐기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오히려 율법의 정신인 인자와 의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눅 6:32-34).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사랑의 지고법의 관점에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된 표징은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기복 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기 헌신이요 자기 희생이다. 나의 이익 보다는 이웃과 친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윤리를 가지는 것이다.

무한히 용서하라
복음서 저자 마태는 예수가 말씀하신 용서의 분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와 질문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신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일곱 번 용서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용서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의 생각할 수 있는 용서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어신다. 이것은 한계 없는 무한한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는 자기의 빚은 탕감받았으나 자기에게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하지 않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마 18:23). 결산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는 데, 갚을 것이 없다.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한다(마 18:24-25).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간청한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마 18:26).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마 18:27).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말한다: “빚을 갚으라” (마 18:28).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여 간청한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마 18:29). 그러나 종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둔다(마 18:30).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린다(마 18:31).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3).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긴다(마 18:34).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약 5천 데나리온이다. 종과 종의 동료의 빚 분량의 차이는 5천만 대 100이라는 엄청난 것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형제의 허물에 대한 용서는 일곱 번이라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번이라는 무한대에 이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예수가 가르치시는 용서는 무한한 용서다. 이것은 조건부의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윤리이다. 인간적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윤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이 불가능은 가능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윤리다. 이 무한한 용서의 사랑이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실천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의 위대성이요, 이 사랑은 그가 십자가 죽음으로 실천하신 그의 유일성이요 독특성이다.

22.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법

구약 성경의 두 기둥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모세의 율법이 각종 규례를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이 명하는 것을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들 가운데 율법이 해이(解弛)해지고 율법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제의 종교와 율법 종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해석자로서 선지자(예언자)들이 출현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 대한 해석인 선지자들이 전해준 예언의 내용을 사랑의 법으로 요약하였다.

구약법의 요약: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예수는 구약법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면서 구약법의 윤리적 성격을 강조하신다. 신명기와 레위기는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신명기는 하나님 사랑을, 레위기는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예수는 레위기의 계명을 “황금률”(the Golden Rule)로 요약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황금률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쌍둥이 계명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 -40).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서 예수의 사랑 계명은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윤리적으로 새로운 명제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미 구약에서 제시된 윤리적 요구들을 새 형식으로 재정립하고 있다. 예수는 이 두 계명이 모세 율법의 핵심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율법의 정신을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예수께서 대답한 것을 기록(눅 10:25-28)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묻는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9). 그 율법사는 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를 말씀하시면서 “나의 이웃이란 자비를 베푼 자”(눅10:37), 즉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라고 가르치신다.

두 가지 가장 큰 계명
예수가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실 때 어느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묻는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에 예수는 대답하신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서기관은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열광적으로 동의하면서 말한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2-33). 예수는 그가 지혜롭게 대답함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제사법 보다 더 귀중한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다. 모든 종교적 제사에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계명을 핵심으로 실천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제사는 이방종교의 제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귀한 법
사랑의 법은 고귀한 법이다. 이 지고(至高)의 법을 범하는 것은 죄다. 빛나는 선행, 깊은 경건, 긴 기도, 금식 등 모든 종교적 행위에 만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면 이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그러므로 사랑의 법이란 절대적 율법이다. 모든 선행이나 자기 희생 위에 있는 행위의 원리란 사랑이다.

진정한 종교를 드러내는 궁극적 시금석은 바로 사랑이다. 예수는 비판의 부메랑(Boomerang)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사랑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되돌아 온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예수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의 계명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1-12). 그리고 예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만큼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가르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위대한 사랑이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모세의 법을 수정하신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원수에 대하여 평안함과 형통함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신 23:5-6).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원수, 헬라 족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슥 9:15).

그러나 예수는 선인과 악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대하여 증언하신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에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달과 비를 주시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 대하여 인자(仁慈)를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편파적이어서는 않된다. 편파적 사랑이란 자기 편, 자기 가족, 자기 민족을 만을 살랑하는 차별적 사랑이다. 예수는 편파적 사랑이란 이방인들의 사랑이라고 말하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6-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십자가의 사랑
예수의 사랑은 십자가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예수가 달리시고 죽으신 십자가야말로 그 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가장 유일한 역사적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는 최후에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못박은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는 사랑을 설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그의 삶의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예수의 본성(本性)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박애와 사랑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에 대하여 수월(秀越)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역사적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단지 사랑의 이야기나 수사(修辭)가 아니라 사랑의 실재, 현존, 실체이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보낸 서신에서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 가운데 널리 애송(愛誦)되었던 그리스도 찬가(Christus Hymnus)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이 그리스도 찬가는 역사적 예수의 실재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널리 불려지는 복음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이 체험한 은혜를 시(詩)로 지은 것이다. 그처럼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 찬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역사적 예수의 겸허와 십자가의 대속으로 나타난 예수의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신앙의 체험의 표현이었다.

21. 나사렛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윤리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소식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 헌장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살아야 할 삶의 규범이요 윤리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 소식과 더불어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의 윤리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을 폐기(廢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成就)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신자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수양을 해서 실천하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신자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할 윤리이다. 이 윤리는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 명령하신다. 복음에는 직설법이 먼저고 다음에 명령법이 온다. 모세를 통해 주신 구약의 십계명에도 보면 먼저 직설법이 있다. 직설법이란 “나는 너희를 종 된 이집트에서 인도해 온 너희 나나님 여호와다”이다. 그리고 명령법이 나온다. 명령법이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 다음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
예수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동트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 자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권능으로 오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권능으로 임하는 나라는 예수가 장차 메시아적 권능으로 오시는 재림(再臨)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의 부활 이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통트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안에서 확장되어 나간다.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전주(前奏)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F. F. Bruce, The Real Jesus, 68).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도달하고 그 이후에는 그가 보내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세상에서 지속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하여 비로소 권능화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부활 이전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속에서 동트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표시하는 윤리적 원리들은 그의 메시아적 사역 안에서 선포되고 나타난다.

윤리적 극단성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설교하신다. 하나님 나라 윤리의 독특성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요, 둘째는 사랑의 원리다. 예수는 신자들이 자선을 하되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기도를 할 때 외모로 하지 말고, 금식도 보이기 위하여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신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7-18). 이 내면성은 율법의 정신으로서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한 율법의 핵심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보다는 외면적인 규례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이들은 율법의 정신을 보지 못한 채 율법의 외형적 준수에만 치중하다가 외식과 위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둘째, 사랑의 원리란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송사하는 자에게 그 요구를 갑절로 들어주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기원하라고 가르치신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을 것(마 5:9)이라고 하신다. 신자들의 윤리가 이방인의 윤리보다 높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7). 하나님 나라 신자의 윤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명령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 윤리의 극단성(radicality)을 천명하고 계신다. 이 극단성은 인간 생각으로는 실천될 수 없는 불가능한 윤리를 말하고 있다. 이 윤리가 강조하는 중요성은 외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에 있다. 율법의 규례적 측면(외면성)을 넘어서 그 정신(내면성)을 살리는 사랑의 윤리는 역사적 예수가 가르친 윤리적 독특성이었다. 사랑의 윤리는 유대교의 윤리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의 독특성이다.

잠정적 윤리가 아닌 항구적 윤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윤리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 신자들이 행할 잠정적인 삶의 규범이라고 본다. 이들은 예수가 가르친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항구적 윤리가 아니라 중간시기의 윤리였다고 본다. 이 윤리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신자들이 잠정적으로 행해야 할 삶의 지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영구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통용되는 일시적인 타당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윤리를 중간기 윤리 내지 잠정적 윤리(an interim ethics)라고 칭한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처가 이러한 견해를 표명한 대표적 학자이다 (A.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London: A. & C. Black, 1910 그리고 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London: A. & C. Black, 1925). 슈바이처는 예수가 기대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고상한 환상”(a noble delusion)이라고 보았다. 슈바이처의 견해에 의하면 실제로는 역사의 종말이 없고, 도래하지 않는 종말에 앞서 예수가 짧은 막간(brief interval)에서 실천을 제시하는 중간기 윤리는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실천할 필요가 없는 윤리이다.

그러나 이 윤리적 주제에 대한 슈바이처 입장의 역설이 있다. 신약 신학자로서 슈바이처는 중간기 윤리가 종말론적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의료 선교사로서 슈바이처는 신학, 의학, 음악에 있어서 문명사회에서 직업적 출세의 전망을 포기하고 서아프리카의 렘바르네에 가서 흑인들에게 봉사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 동기는 그가 해석한 중간기 윤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긴 예수의 윤리를 선교사로서는 실천했던 것이다. 여기에 슈바이처 삶의 역설이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가르친 것은 중간기의 임시 윤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그것은 항구적인 사랑의 윤리이다. 슈바이처가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환상(illusion)으로 본 것은 복음서를 전혀 성경적 세계상이 아닌 현대의 실증주의적 세계관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행한 종말에 관한 설교란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의 세계관이 이 세상을 멸망할 도성 처럼 보는 묵시록적 세계관에 포로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해석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 선포의 비종말론화요, 예수 선포의 비신화론적 해석으로서 역사적 예수의 설교와 윤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헌장으로서 오늘날에도 타당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종말론적 윤리 운동
이러한 사랑의 윤리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을 때 가능한 윤리이다. 왼빰을 맞거든 오른뺨을 돌려주고,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는 윤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이러한 윤리는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향하여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향하여 축복하는 윤리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옛 질서, 옛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가 아니라 새 질서, 새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s)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예수의 인격과 삶과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다. 오늘도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종말론적 윤리 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에서도 이러한 종말론적 윤리운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느 양반이 자기가 여태까지 데리고 있던 종을 해방시킨 사건이 있었다. 예수 믿고 회개한 사람이 중국집에 와서 주인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된 외상값을 갚음으로써 주인을 놀라게 했다. 길선주 장로는 별세한 친구의 돈을 자신이 아간처럼 훔쳤다고 보통 사람 같으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일을 공중 앞에 참회하였다. 옛 질서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은 사건이 새 질서에서는 문제가 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윤리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운동은 파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도 미국에서 시작된 청소년 혼전 순결운동이나 도덕 재무장운동, 어버이운동, 가정지키기, 피스메이커(peacemaker)운동 등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반영하는 운동들이 파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으나 역사 속에서 이에 공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그 세력을 키우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겨자씨 운동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조건없는 사랑
2008년 12월 21일 KBS 스페셜로 방영된 “엘렌 가족 이야기, 그 후 8년”은 감동적이었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이 세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살고 있는 69세인 시각 장애인 올스 니콜스 부부의 이야기다. 니콜스는 연방공무원으로서 사회보장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사회보장국에서 42년간이나 이 일에 종사하여왔다.

이들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한국에서 버려진 시각장애아 4명 어린이를 차례로 입양하여 성공적으로 키워내었다. 이들은 이 세상 속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다. 이들의 일이 한인사회에서 알려지자 밀알 선교회에서 이 부부를 초청하였다. 막내는 25년 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담요와 젖병에 싸서 버려진 아이였다. 시각장애뿐 아니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였다. 막내는 장애인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집에 오면 똥오줌을 더 많이 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빠 니콜스는 그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준다. 언니 세라는 한국명 신경미인데 정상인과 결혼하여 정상 아기를 분만하여 잘 살고 있다. 세라는 자폐증을 지닌 막내 동생과 특별한 교감을 갖고 있다.

니콜스 부부는 자녀들에게 항상 식사시간에 다음 감사 기도문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아멘”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다. 니콜스 부부는 말한다: “사랑은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말할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입양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조건없이 사랑할 뿐이다.” 니콜스 부부의 사랑은 예수의 종말론적 사랑에 의하여 역동화되고 있다.

성령의 윤리
예수께서 가르치신 조건없는 사랑의 윤리 실천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된다. 예수가 보내어 주시는 다른 보혜사,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어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자발성으로 사랑하도록 된다. 예수는 안식일 가버나움에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자신이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곧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한 예수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희락과 평안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그를 따르는 신자의 공동체 안에서 오늘도 파편적으로 실천된다.

20. 스승으로서의 나사렛 예수

예수는 ‘랍비’(rabbi)였다. ‘랍비’란 문자적으로 ‘나의 큰 자’를 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생님!’ 하고 부르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랍비’라는 호칭을 율법 전문가이자 선생인 서기관을 존경하는 뜻으로 부를 때 썼다. 제자들은 예수를 ‘랍비’라 불렀다. 예수는 당시 랍비들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가르쳤다. 예수는 당시 유대 율법의 전통에 관련하여 혁신주의자로 간주되었다. 바리새인들에 의해서는 심지어 신성모독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원칙없는 급진 개혁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살리고자 하였고, 모세와 선지자의 정신을 계승한 자였다. 예수는 역사상 모든 선생 중 가장 위대한 선생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이 독특했을 뿐 아니라 그는 가르침대로 살았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랍비로서 예수
예수는 ‘랍비’(선생)라고 호칭을 받았다.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를 좇으면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 1:38)라고 질문한다. 예수 자신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하여 종교적 선생으로 인정함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스스로 랍비의 제자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예수는 율법의 형식적 규례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가르쳤다. 예수는 율법 규례의 외형적 준수(안식일 준수, 정결 규례 준수 등)에만 치중하는 당시 종교관례를 무시하고 율법의 정신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율법 선생들과 회당의 지도자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양심있는 종교인들은 예수를 진정한 ‘랍비’로 생각하였다. 니고데모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산헤드린의 공회원인 니고데모란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예수의 사상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형식적인 적용을 거부하고 그 동기와 내면성을 철저히 하는 방향으로 율법의 정신을 해석하였다. 예수는 손을 씻는 등 형식의례적 정결 요구보다 내면적 순수성, 즉 내적 정결을 강조하였고. 안식일의 외면적 준수보다도 안식 제정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는 외적 정결법과 안식일 법과 관련하여 유대 장로들의 전통과 마찰과 긴장을 일으켰다. 예수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면적인 것(씻고 씻지 않음)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것(음란, 탐욕, 살인 등)이며, 안식일에도 병든 자의 치유를 위하여 병 고치는 일, 가축을 위험에서 구출해 내는 일 등은 안식일 정신에 맞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는 당시 제도적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는 율법을 모독하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윤리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모세 율법의 차원을 하나님 나라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던 것이다.

예수의 교육방법
첫째, 예수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는 간음하다 현장에 붙들린 여인에 대한 송사(訟事)에서 땅에 글을 쓰신 것(요 8:8)만을 제외하곤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쳤다. 예수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의 밭에 뿌리셨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예수의 교훈은 사실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정제된 가르침이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고친 일(마 12:10),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청년과 대화(마 19:16), 제자들의 서열다툼(눅 9:46). 세금을 내는 일(마 22:17) 등에 있어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비록 2천년 전의 일이나 이 일이 지니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예컨대, 안식일에 회당에서 반신불수(한쪽 손 마른 사람)를 고치는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논란을 일자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그리고 예수는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다. 여기서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안식일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셋째, 인격적 감화를 통하여 내담자의 내면의 삶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도록 하였다. 예수는 밤중에 자기에게 찾아온 니고데모의 경우 그에게 중생의 진리를 가르쳐 줌으로써 외형적 율법종교의 굴레에서 벗어 나오도록 하였다. 예수는 행실이 좋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라고 가르친다. 그녀는 변화를 받는다. 예수는 자기를 배신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다짐하시면서,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 그러면 “내 양을 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베드로가 내면적으로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도록 인도하신다.

넷째, 듣는 자의 처지에 자신의 입장을 세워 놓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급히 말하지 않았다. 빨리 처방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예수는 처음부터 모두 믿으라고 요구하지 아니하셨다. 초보의 믿음을 가진 자도 환영했다.

다섯째, 비유를 사용하였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사용하였다. 복음의 전파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장)로 설교하신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교하시는 의도는 슬기로운 자는 이해하나 미련한 자는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복된 소식이나 여전히 비밀이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눅 8:10). 마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여전히 비밀의 복음이다.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 사람만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를 아는 원리와도 연관된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역사적 예수를 바르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교육의 일반적 원리
첫째, 예수는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고 친구로 대했다.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5). 누가복음에는 요한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눅 13:23). 사도 요한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울 만큼 예수에 대하여 친근히 느꼈던 것이다.

둘째, 예수는 인내를 가지고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사랑이 동반되었다. 강압적이지 않고 독단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양식과 양심에 호소하셨고, 강제적으로 독단적으로 동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는 능력을 가졌으나 기적의 힘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셋째,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의 입법자가 되려고 하지 아니하셨다. 제자들 스스로가 주어진 각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통찰력과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예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 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37)를 들려줌으로써 질문자가 스스로 해답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의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하였다(고전 3:6).

넷째,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가르치신대로 사셨다. 예수는 친히 허리를 동이고 수건을 들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예수는 손수 모범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예수는 교행일치(敎行一致)의 삶을 사시고, 진정한 스승의 도가 무엇인가를 모든 선생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선생 이상의 존재: 권위 있는 존재
예수는 선생 이상의 존재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쳤으나 서기관이나 당시의 랍비들과는 달랐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이 영적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가도 가버나움에서 예수가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예수에게 있는 선생 이상의 권세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그리고 예수는 단지 가르칠뿐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나오게 하는 것을 보면서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앞서 말한 바같이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성과 영적 권세가 동반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하나의 위대한 선생으로만 보고자 한다. 또는 그를 단지 윤리적 스승으로만 보고자 한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선생이며 위대한 스승이며, 윤리적인 위대한 규범적 존재이다.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예수를 신적 의식에 충만한 인간, 리츌(A. Ritschl)은 직업의식에 충만한 사람, 헤르만(W. Hermann)도 예수를 종교의식이 충만한 인간, 프랑스의 소설가 르낭(E. Renan)은 탈콤한 휴머니스트라고 평가했다. 예수에게 이런 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를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는 스승 이상의 존재이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 있는 그의 영원한 신성을 향하여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신앙만이 역사적 예수를 그의 신성의 원천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 다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골고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19. 나사렛 예수의 산상 설교

나사렛 예수가 행하신 설교들 가운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 바로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에 기록한 산상설교이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가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헌장이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그의 메시아적 사역 가운데서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를 기대하는 신자들의 삶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5장-7장에서, 누가는 6장 20절-49절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여덟 가지 복(福)선언을 마음이 청빈하고 경건한 자가 받는 복으로 특징짓고 있는데(마 5:2-12) 반해서, 누가는 사회적인 곤궁 속의 적나라한 궁핍을 더욱 반영하며 그러한 궁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눅 6:20-26).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하여 신자가 살아야 할 윤리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태도와 삶의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수는 신자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헌장을 반포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예수의 설교와 치유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신자의 삶 속에서도 수용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산상설교의 신자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새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제자들 안에서 발아(發芽)된 모습으로 현재해 있다. 산상설교는 이 세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신자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새로운 삶의 윤리를 가진 자들이다. 그 윤리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들이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은 그 삶과 사고방식이 새로워진다. 중생한 자의 삶이란 그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는 자이다.

팔복(八福) 메시지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여덟 가지의 복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는 이러한 팔복 선언을 듣는 사람들이 이에 상응하는 삶과 태도를 가지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다.”(마 5:3) 천국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천국은 부자나 권세자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고 겸허한 자들이 영접한다. 욕심을 떠난 자들에게 천국은 다가온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 진리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자신의 허물을 알고 뉘우치는 자에게 천국은 다가온다. 자신의 허물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 5:5) 인자를 실천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천국은 그 마음이 인자한 자의 것이다.

“의에 주리는 자는 배부를 것이다.”(마 5:6) 하나님의 공의를 간절히 추구하는 자는 그의 삶 속에 정의가 실현 됨을 볼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을 받을 것이다.”(마 5:7) 어려운 지경에 있는 자에 대하여 동정과 연민을 가지는 자는 자기가 그러한 동정과 연민을 받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 그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마 5:9)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사람들 가운데 퍼트리는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복음과 의 때문에 박해와 어려움을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있다.

율법의 완성
나사렛 예수는 모세의 계명을 부정하지 않고 그 내면성, 즉 정신을 살리고자 한다. 마태는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다음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신약학자들은 ‘진실로’(amen)로 라는 단어는 바리새인이나 다른 율법학사들 등(等), 다른 랍비에게서 볼 수 없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용어라고 본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전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십계명을 지킨다면 이 세상은 더 행복한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산상설교의 더 놓은 기준을 충족하는데 성공할 수는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 시민의 윤리를 당시 율법종교의 윤리 보다 높게 책정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의 의는 율법종교의 의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이 멈추는 곳에서 산상설교는 시작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살인이란 분노하는 행위에 의하여 유발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동기를 중요시한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1-28) 예수는 범죄한 눈을 빼어 버리고 범죄한 손을 찍어 버리라고 극단한 설교를 하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예수는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고 너그러이 대하라고 가르친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 예수는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 원수 사랑의 가르침은 유대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이다.

종말론적 윤리
이러한 산상설교의 윤리는 이 세상에서는 지킬 수 없고 천국에서만 지킬 수 있는 윤리이다. 이것은 슈바이처가 해석하는바 세상 끝날이 오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지키는 ‘중간기의 윤리’내지 ‘잠정 윤리’(interim ethics)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s)이다. 이러한 윤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윤리가 전혀 이 세상에서 실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특별한 경우에는 역사 속에서 실천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에게 특별한 사랑의 은혜가 주어질 때 종말론적 윤리는 가능하다.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는 손양원 목사의 경우 이러한 원수 사랑의 계명이 실천된 것을 볼 수 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공산당 청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살해범이 경찰에 붙들여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에 손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들의 석방을 탄원하고 석방된 청년을 자기 수양 아들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 목사가 실천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중세의 성 프랜시스, 현대에 와서는 테레사 수녀 들이 이러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한 신자들이다.

물론 보통 신자들은 손양원 목사, 성 프랜시나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만 이러한 성화의 삶은 가능하다. 이러한 경우는 부자청년에게 극단한 요구를 하신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부자청년이 예수에게 나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다. 이에 예수는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대답하신다. 이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말씀하신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4) 이에 제자들이 몹시 놀라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는 실망하고 좌절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다. 기독교 윤리란 불가능한 가능성의 윤리(ethics of impossible possibility)이다.

영적 권세있는 말씀
마태는 예수의 설교가 당시 랍비들이 하는 설교는 전혀 다른 권세있는 자의 말씀이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28-9) 마태는 예수가 산상에서 행한 설교의 말씀이 당시 유대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왔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가르침의 독특성은 “옛 사람에게 말한바…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22, 27-28, 31-32, 33-34,38-39, 43-44) 라는 어귀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설교의 어법은 당시 서기관의 설교방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오로지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설교 어법만이 아니라 설교 내용도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유일성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준다. 예수는 여태까지 전해 내려오거나 당시 유대교에서 만들어 율법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단지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살리면서 그 규정의 정신을 내면화 시키고 있다. 그 예가 위에서 언급한 바같은 살인과 간음에 내적 동기까지 포함시키고 있으며, 악한 자에 대하여 보복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마 5:43)은 구약성경에는 없다. 예수 시대의 유대교 내부의 당파 싸움에서 비로소 그러한 계명이 나타난다.

당시 쿰란 문서에는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모든 어둠의 자식들을 미워하라”는 요구가 나온다. 예수는 유대교 종파의 가르침을 거절할 뿐 아니라 수정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4-48)

이러한 가르침의 내용은 여태까지 어느 선지자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이다. 이러한 설교 어법과 내용들은 예수만이 메시아적 권위를 가지고 사용하신 설교방식이다. 이러한 산상설교는 나사렛 예수가 ‘영적 권세’를 가지신 존재였음을 드러내 준다.

18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아빠’(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아빠”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였다.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는 ‘아빠’(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희미하게나마 구약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호칭 ‘아버지’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아람어로는 abba)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첫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둘째,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셋째,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단순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넷째,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우리의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의 목적이 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색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의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그것은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 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예수의 영 안에서 정립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 안에서만 정립되고 그 안에서 드러난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17 나사렛 예수가 보여준 기도의 삶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자료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4복음서에 나타난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이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증언들을 믿는 자가 곧 기독교 신자이다. 믿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 역사적 예수의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문서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미발견된 문서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이미 역사적 기독교가 전해받은 복음서의 기록을 넘어설 수 없다. 넘어설 때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처럼 다른 예수상이 된다. 다른 예수상은 더 이상 역사적 교회의 예수상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을 밝히기 위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사셨다. 예수도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통 속에서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했다. 예수는 새벽 미명에 기도했으며,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으며, 구하면 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했으며,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했다. 예수가 드린 기도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영적 안식과 평강을 누렸다. 역사적 예수가 행하신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행해야 할 기도의 본이다.

새벽 미명, 그리고 일과가 끝난 후 기도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기도하셨다. 마가는 기록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는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막 1:35)에 일어나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막 6:46). 예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치셨다. 예수는 기도 속에서 성부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사셨다. 예수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전형을 보여주셨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
예수는 아주 바쁘셨다.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 1:36-37). 그리고 저녁시간에도 각색 병든 자들이 치유기도를 받으려 물려 들었다. 예수는 쉴 틈 없이 바쁘셨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막 1:32-33). 그러나 예수는 일에 파묻히시지 않고 안정과 휴식을 취하시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위하여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다.

예수가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데가볼리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를 때 사람들이 소경과 더듬는 자와 눈 먼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간구했다. 예수는 그 사람들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위탁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형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막 7:34-5). 예수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보다는 은밀히 치유하셨다.

예수는 그의 수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조차도 모르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눅 9:28). 이 산에서 예수는 그 형체가 변형되는 놀라운 영광스러운 신비를 드러내신다. 이 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변화된 예수께서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신비스러운 광경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제자들은 구름 가운데 말씀하시는 성부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 오실 때의 음성과 같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신비로운 근원을 점차 알기에 이른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어떠한 일에도 간절히 기도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 예수는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예수는 간절히 그에게 구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딸이 더러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이 다가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는 간청을 예수는 처음에는 거절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4). 이에 대하여 이 여인은 슬기롭게 간청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5). 이에 예수는 이 이방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9-30).

여리고로 나가실 때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갈 때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지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한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를 지른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예수는 하나님에게 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는 간절히 구하는 자의 소원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였다. 예수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을 비유로써 말씀하신다: 밤중에 친구가 와서 떡을 빌려 달라 할 때 이미 밤이 깊고 침상에 누웠으니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친구가 간절히 청하기 때문에 들어 준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리고 예수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번거롭게 하니 이 재판관은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 예수는 그처럼 하나님은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고 가르치신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6-7).

기도의 내용: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
예수의 기도는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다락방에서 떡을 떼면서 감사하였고,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7-26). 그리고 구할 것을 기원하고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셨다. 예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변화산에서 예수의 기도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고 그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가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씀한다(눅 9:31). 이에 베드로와 함께 간 제자들이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체험하고 무서워한다. 그리고 이들은 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성부의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 변화산의 사건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지상에서의 유일의 사건이었다.

진정한 기도: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다(눅 22:41). 예수는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기도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땀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기도가 간절한 기도였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한 기원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기원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는 중보기도를 드리신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영적 안식과 평안을 주는 기도
나사렛 예수는 자기에게 몰려오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마음에 상처받은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인들, 아리마대 요셉(마27:57) 같은 부자와 대화하면서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속에서 안식과 평안을 찾았다. 그래서는 예수는 탈진(脫盡)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버지 안에서 항상 안식하셨고, 평안을 누렸다. 하나님의 성령이 항상 그의 마음에 충만히 거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삶은 기도가 우리 인간들이 영적 안식과 평안을 얻는 유일한 통로임을 보여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역사적 예수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히브리서 기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서 이 불신 세상과 택하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오늘도 나사렛 예수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안식을 주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심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16 열두 제자의 부르심과 하나님 나라 운동

예수의 복음 사역은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구체화된다. 이들은 20대의 청년들이었다. 예수의 복음운동은 청년들의 운동이었다. 예수는 열두 청년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신다. 이들 중에 많은 자들이 먼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마태는 열두 제자들을 이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2-4).

주님이 사랑한 네 제자
베드로, 안드레, 요한의 형제 야고보, 요한은 주님이 사랑한 네 제자였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항상 열둘 가운데 예수의 수제자들로서 항상 예수와 함께 있었고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의 제자가 된다.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 1:41)고 전한다. 안드레는 분명히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드레의 믿음은 그의 스승 세례자 요한의 증거,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증언을 듣고 생겨난다. 베드로의 본이름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다. 그가 안드레에게 이끌려 예수께 오니 예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이나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신다”(요 1:42). 게바란 번역하면 베드로, 즉 반석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복음 사역에서 반석의 역할을 한 제자였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가장 힘든 순간에 스승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고 용기와 신뢰를 주는 제자였다. 후일에 예수는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5천명을 먹이신 후 왕을 삼으려는 군중들을 피하여 산으로 피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자기를 쫓아오는 군중들에게“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라는 설교를 하신다. 이 기이한 설교를 듣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떠난다(요 6:67). 그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이 때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확고하게 예수에 대한 신뢰를 표명한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후에 세우지게 될 교회 신앙고백의 전형이 된다.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즉 구세주로 믿는 신자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였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왔다. 안드레가 아니었더라면 베드로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드레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를 통한 부흥운동에 깊은 감동을 받은 청년들 중 하나였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그의 스승이 한 말,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을 듣고 그의 친구와 함께 예수를 따른다. 안드레는 예수께 묻는다: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요 1:38) 예수는 대답하신다: “와 보라”(요 1:39). 안드레는 그의 친구와 함께 그날 예수와 함께 거한다. 복음서 기자는 이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예수와 함께 거한 시간이 “십시”(요 1:39), 즉 오후 4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드레는 나중에 예수의 복음 사역 중에 빈들에서 군중들이 시장하여 방황했을 때 어린 나이 추종자들이 가져온 떡 덩이를 찾아내어 예수에게 가지고 온 자였다(요 6:8). 안드레는 복음에 호감을 가진 헬라 사람들을 빌립과 함께 예수께 데리고 오는(요 12:20-22) 전도자의 역할을 하였다.

요한은 예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이었다(막 9:38). 그리고 주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불을 내리기를 요구한 자였다(눅 9:54).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탐한 사람이었다(막 10:35이하). 그러나 그는 예수에 대한 사랑을 변치않고 유지한 자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불렸다(요 13:23). 그는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어 운명하는 시간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 현장을 지킨 신실한 사람이었다(요 19:26). 그는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세상의 마지막에 될 일, 즉 예수의 재림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요 22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묵시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쓰는 영예를 얻은 자이다.

야고보는 세배대의 아들로서 그의 형제인 요한과 함께 한 자리에서 복음서에 두 번 나타난다. 그는 최초의 순교의 영광을 얻은 제자이다(행 12:2).

의심많은 도마와 세리 마태
도마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 예수가 수난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을 때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8). 그러나 도마는 대담하게 “우리도 주와 함께 즉으러 가자”(요 11:16)고 하였다. 그는 예수가 부활한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의심하였다. 여드레 지난 후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신다. 이 때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한다. 의심많은 도마가 이 때 한 신앙고백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한 베드로의 고백보다 더 인격적인 고백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적 고백이었으나,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매우 실존적이고 인격적인 고백, 나사롓 예수와 자기와의 관계를 고백하였다.

마태는 세리였다. 그는 세무서에 앉아 있다가 그곳을 지나가시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마 9:9)는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좇았다. 당시 세리(稅吏)는 유대를 지배한 로마에 대하여 세금을 납부하여 주는 자로서 매국과 부패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세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마태의 중심을 보시고 예수는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마태는 자기의 옛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표시로 연회를 베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친구들이 예수를 만나도록 이들을 초대한다. 그리하여 예수에게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9:10)라는 호칭이 붙여진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힐난(詰難)에 대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나머지 여섯 제자
나머지 여섯 제자는 복음서에 별로 기록이 없다. 빌립은 열심히 질문하는 사람(요 1:43 이하, 요 14:8이하)이며, 가나안 사람 시몬은 열심당이며 민족주의자이다. 가나안인 유다는 예수의 고별말씀을 듣고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라고 말한 자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자(마 10:4)이다. 바돌로메(요 1:45이하), 다대오(마 10:2)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는 자들이다.

열두 제자: 세상적으로는 천하거나 소외받는 사람들
이들 열두 제자들은 세상적으로 어부, 세리 출신으로 무식하거나 소외받는 자들이었다, 예수는 이러한 세상의 천한 사람들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사역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열두 제자들은 각기의 특성을 가진 여러 지방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을 택하여 자기의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예수는 그를 추종하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이 열둘을 사도로 선정하여 이들을 갈릴리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파송하였다. 열두 제자들은 둘씩 짝지어 여행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열두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와 숙식을 같이 하면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받는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알기에 이른다.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자는 역사적으로는 예수와 같이 기거하고 생활하면서 가르침을 받은 이 열두 제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에 대한 전기(傳記)로서 복음서를 집필한 자는 마태와 요한이다. 누가복음을 저술한 누가는 복음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동역자(사도행전)였다. 누가는 바울로부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생생한 체험을 들었다, 마가복음을 저술한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행 2:12, 행 13:5, 행 15:36-39) 그리고 베드로의 동역자(벧전 5:13)로서 베드로로부터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생생한 자료를 듣고 복음서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제자들 및 제자들의 증언에 기초하여 기록된 사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진실성에 접근하는데 가장 귀중하고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역사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제자운동
나사렛 예수는 그 시대의 엘리트를 택하거나 세상적으로 학식이 많은 자들을 택하지 않았다. 예수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천하고 무식하거나 멸시받는 사람들을 부르시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제자로 부르심에 대하여 힐난하신 것을 들으시고 말씀히신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제자운동이다. 하나님 나라는 천한 자들이 부르심을 받아 거룩하게 되는 운동이다. 죄인이 부르심을 받아 칭의(justification)를 받는 운동이다. 지식인의 운동이 아니라 순수한 자의 운동이다. 이념인의 운동이 아니라 부름받은 사명자의 운동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는 지식이나 이념이나 재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헌신(commitment)과 소명(mission)과 결단(decision)이 필요하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에 관하여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눅 5:11).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른 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다. 이들 젊은이들은 여태까지는 생계를 벌기 위하여 살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나사롓 예수를 만나 그의 복음을 듣고 난 후 소명과 헌신의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자기만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하는 제자운동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제자운동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종교인이 되거나 어느 교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격적으로 영적인 실재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인격 속에서 실현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나사렛 예수를 영접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15 예수의 복음 사역과 하나님의 세계통치

나사렛 예수는 당시 로마가 제국으로서 세계를 지배한 시대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메시지는 헤롯이나 유대총독이나 로마황제에게는 불손하게 들리는 내용, 즉 세상의 권력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 로마는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 제국이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의 왕국을 의미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나사렛 예수의 메시지는 로마의 통치와 평화를 부정하는 반체제적인 선동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나중에 빌라도에 의하여 반체제 선동가의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 메시지는 세상 권력에 대항하는 반체제적 설교라기 보다는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님 통치의 메시지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고 심지어는 로마제국도 통치하신다는 메시지였다. 예수는 세상을 궁극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인간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을 설교한다. 예수는 로마 황제 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앞에 서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인 그의 사역, 신체적으로 병든 자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병든 영혼을 고치시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평강을 주시고, 영적으로 확장되는 실재로 나타났다.

  질병을 고치심 예수의 복음 사역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였다.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막 1:32-33). 베드로 장모의 열병, 문둥병, 귀먹음, 눈멈, 중풍병, 혈루병 등 각종 난치병까지도 치유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는 질병을 치유하심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예수의 치유사역을 통하여 인간에게 신체를 주신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중요한 일상적인 고통의 하나인 질병을 치유하신 것이다. 한국의 초창기 그리고 오늘날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항상 치유사역은 뒤따르고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통치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다.

  영혼을 고치심 예수는 육체의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병을 고치셨다. 우리의 죄를 깨닫고 사함을 받도록 하셨다.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말씀하신다. 이에 대하여 힐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신다”(막 2:10)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고 명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간다”(막 2:12).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정신적인 것, 죄가 육체적인 것,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의 원인이 된 죄의 사함을 선언하심으로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그래서 그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을 치유하신 것이다. 그리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잡아와서 판결을 묻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하신다. 고발자들이 하나둘씩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 사라져 버리자 예수는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요 8:11)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권면하신다. 예수의 새로움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고차원적인 사랑과 인자의 법으로 완성시키는 데 있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면서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고 용서와 새로운 기회로 사용하시고 계신다. 그의 사랑의 법 안에서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상실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사랑의 계기로 전환된다.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통치(평강) 하나님 통치는 영적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이다.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과 안디옥과 소아시아 각 지역(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에베소 등)에서 이룬 인격적이고 사랑의 공동체는 바로 지상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의 구체적인 실재였다. 예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마 15:19)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이러한 세상적인 탐심에서 벗어날 때 마음이 가난해진다. 천국은 오로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비밀의 실재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인 실재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거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평강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강과 같은 평화가 넘치고 마음 속에서 쉴사이 없이 하늘의 곡조가 흘러나오고, 외부의 환경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적인 평강이 바로 그 구체적인 증거이다.

이 평강은 구약의 시편 기자들이 누렸고, 신약의 사도들이 감옥에서 누렸고, 교부시대와 종교개혁 시대 성도들이 누렸고, 청교도 시대 성도들이 박해시절 누렸고, 오늘날 중생한 성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누리는 평강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물질적인 처소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0이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非)가시적인 것이며, 영적이며 정신적 도덕적 실재이다. 오늘도 죄인이 용서받고 새 사람이 돠고 헐벗은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과 인자가 선포되고 실천되는 처소에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인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확장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이것은 날마다 복음의 능력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이 세상 속에서는 하나의 작은 실재이다. 그러나 하나님 통치는 이 세상에서 도피한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 통치는 이 세상 안에서 그의 부르심을 받은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도덕적 실재이다. 종교인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인정했을 때 예수는 그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쳤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중생한 자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문을 여는 자들에게만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중생의 도리를 듣고 그 날 중생의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니고데모의 신앙은 나중에 확증된다. 예수가 후일에 십자가에 처형되어 누구도 예수의 시체를 찾아가지 않았을 때 그는 예수의 시신을 돌로 된 무덤에 안치한다. 이 용감한 행동 속에서 니고데모의 신앙은 확증된다. 그날 밤 중생의 도리를 깨닫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러한 용감한 행동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통치의 실재는 사도 바울, 에디오피아의 내시, 고넬료,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길선주, 주기철, 손양원 등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구체적인 역사적인 실재로 성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개개인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 가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들이 만드는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확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저 천국에만 머무는 고정된 공간이나 처소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중생한 자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지니는 역동적인 실재이다.

14 나사렛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이었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불에 관한 메시지는 요한 설교의 중심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요한의 설교를 계승하시면서 요한이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가 충족되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하신다.

  때의 충족 예수는 자신의 출현이 “때의 충족”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나 뒤에 오실 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모세와 예언자들이 증언한 오실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때가 충족되었음을 말한다. 이 때란 “카이로스”(kairos)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적 시기를 말한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 그의 세기적 저서『그리스도와 시간』(Christus and Zeit, 1946)에서 시간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라고 밝힌 것 같이 나사렛 예수는 때의 충족이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 안의 자그마한 선인 “구속사”(Heilsgeschichte, salvation history)이다. 구속사란 역사 안에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선(線)이다. 이 구속의 섭리는 영원부터 있었고 창조의 타락과 더불어 이미 역사 안에 나타났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이 증언해주고 있는, 믿음의 열조인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부터 역사 안에서 자그만 선으로 시작되어 신약의 나사렛 예수에게로 집중한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로부터 12제자들의 선택, 그리고 초대교회, 이방선교,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보편적인 확장으로 나아간다(O. Cullmann, Christ and Time, 김근수역, 솔로몬, 1986, 245ff).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설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라고 하였다. 예수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다. 그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라고 설교하였다. 제자들을 동리에 파송하실 때에도 “어떤 동리에 들어가거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눅 10:8)고 하셨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유대인들에게는 오래 고대하던 사상이었다. 유대인으로서 나사렛 예수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자신의 인격과 생애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구약 예언자 다니엘은 그의 책에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과 뜬 돌을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3:44) 당시 유대인들은 이 나라를 다윗왕권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의 왕국으로 생각했다. 마카비 왕조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력을 가지고 이 지상에서 쟁취해서 얻어질 군사적 투쟁의 성취물로 보았다.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세상적인 왕국으로 오해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신 후 시기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 때로 오해하였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행 1:6). 그러나 예수께서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시작되는 영역이다. 예수는 옥에 갇힌 요한의 질문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에 대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실재가 아니라 영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열매로서 나타난다. 예수의 부활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설립된 초대교회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선교를 통하여 확장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신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 예수는 복음 전파의 때가 시작되었고 그 사명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언이 되리라”(행 1:8). 사도행전의 선교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역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하는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서 구현되는 구원과 평강과 희락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회개, 하나님 나라 시민의 조건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약속되었다. 모세와 예언자들에 의하여 약속되었다.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감으로써 역사적으로는 구현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 복지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모형에 불과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이 지역 주민들의 풍습에 물들어 하나님의 약속과 법을 어겼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 약속받은 축복의 땅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는 다가오는 미래의 약속으로 주어졌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실재에서 종말론적 실재가 된 것이다(John Bright, The Kingdom of God, Abingdon Press, 김철손 역, 하나님의 나라, 컨콜디아사, 18-19). 미국의 구약학자 존 브라이트(John Bright)가 말한 바와 같이 구약은 지붕이 없고 네 기둥만 있는 성전 같은 것이다. 구약은 약속만 있고 성취되지 못했다. 이 성취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 이 성취를 증언한 책이 바로 신약이다(John Bright, ibid, .252). 이 하나님 나라는 이 나라를 소망하고 자기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자들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의 설교를 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 3:5-6).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회개이다. 하나님 나라는 악한 마음과 행실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가 들어간다. 복음서 기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고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들은 세상의 혈육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들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요 1:13). 구약의 예언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그러나 성도들은 이 나라를 얻기 까지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받으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인내와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 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들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단 7:26-27).

  복음을 통해 확장되는 영적 도덕적 실재 복음은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 얽매어 있는 인간을 돌보아 주시고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복음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의 백성됨에 걸맞는 행위를 요구하였다. 그 행위에 따라서 복과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율법은 제사장들 및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왜곡되이 집행되고 의의 열매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율법과 예언이 증거한 하나님의 복된 새로운 의, 복음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예수는 이 글이 오늘날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이 복음의 실체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노를 당하며,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마 11:12). 하나님 나라는 단지 영적 실재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변화된 개인들의 변화 그리고 공동체의 변화를 통하여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같이 사회에 확장되며 역사 속에서 유기체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적인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를 떠나 있지 않고 역사 뒷면으로 퇴각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미와 목적이다. 그 의미와 목적을 이루시는 주체가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다. 복음서 기자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라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