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009

24. 위대한 의사(醫師) 나사렛 예수

나사렛 예수는 단지 스승이나 설교자나 윤리가만이 아니었다. 예수는 질병의 치료자였다. 그는 위대한 의사였다. 그는 영혼의 문제만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짊어진 신체의 질병을 치료하셨다. 예수는 인간을 단지 영혼만 구원받을 자만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구원 받은 영혼과 더불어 온전한 신체로 살아가야할 자로 보셨다. 그래서 예수는 육신이 병든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그의 복음 사역 가운데 치유사역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

질병의 치료자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병자 치료에 대하여 무수히 많이 기술하고 있다. 마가는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예수께 몰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 3:8). 마가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 6:55-56). 예수로부터 신성한 치유의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 자신이 메시아적 권능을 지녀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예수를 만지기 위하여 왔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누가도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왔다고 기록한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 6:17).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신체의 질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복음전파를 위하여 보내셨을 때에도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는 일과 병 고치는 일 두 가지를 하라고 명하셨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9). 마태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마 15:29-30)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다음같이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의 생애 사건에서 그가 병고친 이야기를 제(除)해 버리고 나면, 그는 다만 한 인망 있는 선생이요, 귀찮을 만큼 설교만 하는 설교자일뿐이다.”(James Steward, 예수의 생애와 교훈, 133).

은밀한 치유자
예수는 치유를 하실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보다는 은밀히 치유하셨다. 예수는 신체의 질병을 고쳤을 때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막 7:36)고 경계하셨다. 예수는 자신이 기적 행위자로 오해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다. 예수는 고치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조차 하셨다(막 7:34). 예수는 질병 치유로 인해 자신이 오해받을까 염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신 것이다.

예수의 초자연적 치유행위는 그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치료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는 모든 치유행위를 하신 후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는 기적을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에 대하여 모두 증언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 8:4, 막 8:26, 눅 8:56). 기적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영광의 신학이요, 이것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께서 의도하신 길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자기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처지에 대한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하신 것이다. 기적이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생명의 빛인 복음이 증거될 때 따라오는 그림자일뿐이다.

예수는 병 고침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한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1).

동정과 공감하시는 예수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데가볼리에서 소경과 더듬는 자와 눈 먼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간구했을 때 예수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위탁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형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막7:34-5). 예수는 병자들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함께 아파하는 동감(同感, compassion)을 지니셨다. 예수의 치유는 자신의 신비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었다. 병자에 대한 메시아적 공감과 사랑이 그들을 치유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의 사건에 있어서 예수는 자신을 결코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높였다. 그리고 질병에 고통받는 자들의 불행한 처지에 공감하셨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신 것은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과시하거나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에 대한 사랑, 동정(同情)과 공감이었다. 동정이란 말에는 “같이 괴로워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자신의 상처와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동정이요 연민이다. 질병에 허덕이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긍휼, 사랑이 그 동기였다. 예수가 보여주신 동기는 하나님은 제사보다도 인자를 원하신다는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긍휼한 마음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역사적 예수의 두 가지 면: 인간적인 면과 초인간적인 면
역사적 예수를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두 가지 본성, 인간성과 초인간성(신성)이다. 먼저 그의 자연적인 인간적인 측면이다. 예수는 어린 시절에는 목수의 아들로서 목수 아버지로부터 짐승의 멍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직업이 목수인 아버지의 착한 아들로서 성장하였다. 그는 들의 백합화를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병자를 보고 측은히 느끼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했으므로 풍랑이 이는 바다의 출렁거리는 배에서 곤히 잠드셨다.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에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신다.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다짐하신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만으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인간적 차원을 넘어선 그의 초인간성(신성)을 같이 보아야 한다. 그는 인간이었으나 그에게는 인간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에게 병자들이 다가와 만지기만 해도 그들의 병이 나았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했을 때 그것이 부풀어져 5천명이 먹고도 광주리에 가득했다. 예수는 밤중에 갈릴리 호수(바다) 위를 걸었다. 그는 바다의 광풍을 향하여 “잠잠하라”고 하니 광풍이 잠잠해 졌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에게 있는 초인간적인 면이다. 이 두 가지 면을 균형있게 보아야 우리는 역사적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체의 중요성 - 영지주의와 다른 점
신체 질병의 치료자로서의 예수상의 정립은 복음서가 그리는 역사적 예수상이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의 예수상과 다르다는 점을 명료화 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체를 죄악시하고 신체를 떠난 영혼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신체를 쓰신 예수는 영으로 오신 예수가 쓴 가현(假現)적 모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지적 예수를 중요시하면서 시공간 안에 인간의 몸을 쓰고 오신 역사적 예수를 인정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의 구속을 중요시하고 영혼의 구원은 신비로운 지혜를 깨닫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신체를 입고 오셨고 신체를 가진 인간들의 모든 신체적 질병을 치유하시고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온전히 치료하신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신체란 영혼을 가두는 무덤이 아니라, 영혼과 더불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이다. 기독교는 영혼만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긍정하는 종교이다.

예수 안에 현재하는 하나님의 능력
이러한 권능적 치유의 행위는 예수가 단지 랍비나 도덕의 선생이라는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그의 초인간적인(신적) 차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질병의 치유는 단순히 기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재하는 것에 대한 가시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한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8). 예수의 치유사역과 귀신을 쫓아 내심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능력있게 이 세상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적 행위 자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귀신을 쫓아 내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믿음과 삶과 행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예수 안에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거하였으나 예수는 그의 신비한 능력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도록 하지 않았다. 기적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감화를 통하여 그 내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인격적으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예수의 복음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종교란 인격을 도외시하는 맹목적 종교가 아니라 동정, 공감(共感, compassion), 사랑과 온유가 있는 감화에 기초한 인격적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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