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009

25 . 영혼의 치료자 나사렛 예수

나사렛 예수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사회적으로 유력한 자들을 제자와 친구로 삼지 않았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에게 다가가 저들과 대화하며 감화시켜, 저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저들을 새 삶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 지배계층인 바리새인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의 죄에 물든 삶에 영합하거나 저들의 불의한 삶을 용인하지 않고 저들을 불의한 생활에서 나오게 하고 저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었다. 예수는 저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죄를 청산하게 하실 뿐 아니라 저들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치유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단지 병든 몸을 치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복음은 개인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 마음을 변화시키며 그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1.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예수는 여리고에 이르러 그 지역 내의 전체 세관에 감독권을 가진 세리장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예수는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하신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높임과 존경받는 의인(義人)들 보다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저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는 자기에 대하여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와서 고발당한 여인에 대한 판결을 요청받고 예수는 먼저 고발자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신다. 고발자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 둘씩 사라지자 예수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은 죄인인 인간으로 겸허하게 낮아지신 예수의 겸손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 자신도 죄가 있어서 정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죄를 지은 여인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녀에게 새로운 갱신의 길을 열어주신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것은 앞으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께서 지적한 죄는 단지 도덕적인 잘못이나 사회적 불의를 넘어선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이 원죄로부터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죄들이 나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가 청산된 것을 선언하신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예수의 말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심을 둔 말씀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스스로가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설 때, 성전 안에 나타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사야처럼 인간은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게 된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고발자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 역시 하나님 과의 근원적인 관계,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한 인간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고, 우리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중심(잠재의식)을 보시기 때문이다.

2. 마음의 치료자 예수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치료하신다. 예수는 당시 소외된 지역의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신다. 어느 우물가에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을 때 예수는 물을 좀 달라고 그녀에게 다가가신다(요 4:7). 여인은 놀라서 예수에게 대답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답하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예수는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갈증을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예수는 여인에게 이르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결정적인 말을 하신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실토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와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된 삶에서 변화되고 메시아를 영접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거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여인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여태까지의 갈증에 허덕이는 마음과 방탕한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다시 갈증을 유발하는 세속의 일시적 즐거움에서 벗어나 마음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즐거움이 솟아나게 하는 생수의 원천을 제공하여 주셨던 것이다.

3. 영혼의 병을 고치는 예수
예수는 영혼의 병을 고치셨다. 영혼의 병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을 말한다. 영혼의 병은 단지 상담기술로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치유를 받아야 한다. 영혼의 병을 치유받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다.

가버나움(Cabernaum)에서 지붕으로부터 달라내린 중풍병자에 대하여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예수를 참람하다고 생각한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 5:21).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눅 5:24). 여기서 예수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나 그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시는 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의 죄, 영혼의 병을 치유하시는 자임을 알게 하신다.

예수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았을 때 어느 죄인인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일이 있었다. 죄인인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바리새인인 시몬이 속으로 예수에 대하여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라는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를 아시고 예수는 여인의 행동이 큰 죄의 빚을 탕감받은 은혜에 대한 내면의 진정한 감사에서 나온 행동임을 말해주신다. 예수는 시몬에게 말씀하신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4-48). 이 여인은 사회적으로는 죄인이라는 비방을 받는 자였으나 예수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 여인은 자기의 잘못된 과거의 삶에 대한 깊은 회심과 하나님의 사유해주시는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표현으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었던 것이다. 여인의 병든 영혼이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미리 말씀하신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예수께서는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는 명료한 메시아 의식을 가지시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시고 그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리신 것이다.

4. 믿음을 보시는 예수: 이신득의(依信得義)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사는 백부장이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는 예수에게 요청을 한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집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고 말씀만하라고 요청한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이에 예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9). 이 백부장은 이태리 사람으로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의 믿음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예수는 칭찬하신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깨뜨리고 내려진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죄를 사함에 있어서 예수는 그를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막 2:5). 예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너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눅 7:47)고 말씀하신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 만찬을 하실 때에도 예수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19-20)이라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십자가상에서 한 편의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를 비방하는 것을 듣고 다른 편에 달린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향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을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고 그 사람을 꾸짖고, 예수를 향하여 소원을 말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축복하신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인격적 믿음이다. 이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서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에게로 접근하게 한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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