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009

26. 죄인을 용서(容恕)하시는 예수

나사렛 예수는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메시아를 주시겠다는 창세기의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야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뱀과 여인이 원수관계에 있게 되고, 뱀의 후손인 사단과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 나사렛 예수가 대결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부추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예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정수리(권세)를 무력화하셨다. 그래서 이 구절은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구약에 약속된 최초의 메시아 약속이다. 예수는 이러한 구원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비유(눅 15:11-32)로써 말씀하신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죄에 물든 상황에서 곤고(困苦)하여 다시 돌아오는 인간들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구체적인 죄들
예수는 죄에 대한 교리(죄의 기원 등)를 말씀하시지 않고 구체적인 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가 말하시는 죄는 추상적인 죄(sin)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면서 짓는 죄들(sins)이다. 이것은 시기, 투기, 방탕, 음란, 간음, 악독, 모함, 살인, 불신앙 등(마 23:25, 눅 11:39) 등이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내면의 죄를 지적하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체적인 죄의 모습을 다음 같은 “육체의 일”이라고 특징짓는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지붕 위로 내려진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죄를 지적하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교훈하신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적시는 여인을 향하여 예수는 “너의 많은 죄가 사(赦)해졌도다”(눅 7:48)고 말씀하신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애물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장애물이다. 죄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5:6). 예수는 죄를 다음 네 가지로 규정하신다.

첫째, 죄는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죄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은 우리 행위의 기준과 지침이다. 부자청년이 예수께 다가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는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대답하신다.

둘째,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죄란 율법을 깨뜨리는 것 이상이다. 예수는 죄를 내면적인 측면에서 본다.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형제에 대하여 살인하기 전에 살인할 마음을 품었으면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간음하는 마음을 품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죄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8). 그 구체적인 것으로 다음을 지적하신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이 탐욕으로서 이 마음에 기록된 것을 깨뜨리고 있다.

셋째, 죄는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상(傷)하게 하는 것이다. 죄란 율법을 깨뜨림으로써 도덕 질서를 파괴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작은 아들이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였을 때 그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 놓고 그 아들을 기다린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상했다. 탕자의 방탕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다. 아들의 타락은 아버지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다.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눅 15:24)고 생각한 것이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 마음에 상처를 달랠 길이 없다.

넷째, 죄는 교만(驕慢)에서 나온다.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는 죄란 교만이라고 암시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 15:12) 하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눠 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눅 15:13). 아버지로부터 더 이상 간섭을 받기를 싫어하는 독자성은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창 3:5) 마음이다. 이 교만한 마음은 창세기에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섬겨준 마음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처럼 될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이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이다.

죄의 결과 - 죄는 다음 세 가지 결과를 초래하였다.

1) 하나님과의 교통을 마비시킨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나와서 타국에서 허랑방탕하면서 전 재산을 허비하였다(눅 15:13). 그리하여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죄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창 3:8).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

2) 창조질서를 혼란하게 한다.
탐욕은 가난한 자를 탈취하며 사회공동체를 붕괴시킨다. 예수는 당시 종교적 특권층의 착취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 20:47).

3) 고립을 초래한다.
죄의 결과는 사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옴이다: 예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 15:4). 무리를 떠나 홀로 된 양은 길 잃은 양이며, 이리나 늑대의 밥이 된다. 죄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되고 갈 길을 잃은 것과 같다.

4) 인간성을 훼손한다.
죄는 물질을 낭비하는 것이다. 탕자는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눅 15:13). 그리고 죄는 인간 의 삶을 궁핍하게 만든다. 탕자는 재산을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해졌다(눅 15:14). 탕자는 돼지지기로 생계를 유지한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눅 15:15). 아버지의 유산을 물러받아 허랑방탕하던 아들은 이제 비참한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물질의 낭비와 더불어 호구지책에 살아 가면서 그의 삶과 인간성 자체가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죄를 사(赦)하시는 구속자, 예수

첫째,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赦)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우리 인간들을 용서하신다. 예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써 설명하신다.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놓고 오늘날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아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한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둘째, 죄로부터의 돌이킴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탕자는 가산을 허비한 후에 있을 곳에 없어서 돼지치기로 들어가 쥐엄열매로 연명을 한다. 그럴 때 탕자는 역경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죄는 인간을 암흑 속으로 몰아 넣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문책하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꺼이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신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예수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에 비유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셋째, 죄로부터 돌이킴은 창조질서의 회복을 함의한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 이 오신 것을 상실된 창조질서의 회복이라고 선포하신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넷째, 죄로부터의 돌이킴은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예수는 죄인의 친구가 되시면서 저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그들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14).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시어 그에게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는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는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명(살과 피)를 대속의 제물로 주셨다.

다섯째, 죄 용서의 조건은 참회이다.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조건은 철저한 죄의 고백이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예수의 비유는 탕자가 단지 배고파서 허기를 면하기 위해 돌아왔고 그러한 그를 아버지가 용납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말하는 탕자의 겸허와 뉘우침을 보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아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진정한 의인신앙: 사죄(赦罪) 은총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삶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공적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총이 주도적이다. 참회의 행위를 포함한 사죄 은총의 체험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누가가 기록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 예수의 발에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붓고 눈물로 적시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것은 죄 용서를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정죄할뿐 아니라 예수에 대하여도 판단을 하였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그러나 예수는 그 여인의 행위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온 것임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예수는 진정한 신자의 삶은 날마다 죄 사함 받은 은혜의 감격 속에 사는 삶인 것을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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