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2011

하나님의 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무엇무엇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일할 때, 식사할 때, 잠을 잘 때, 누군가를 만날 때, 결혼할 때, 여행을 갈 때 등등 말입니다.세상 삶속에서도 때라는 것이 있듯이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고난이나 연단을 받을 때, 하나님께 집중해야할 때, 은혜를 받을 때 등등 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 하나님의 때를 알수가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들 각자 저마다에게 하나님의 때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영적으로 깨어있으므로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을수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여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못받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온 사람에게 기도 응답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오랬동안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때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싸인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강팎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들의 영혼을 위하여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빨리 올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때가 더디다고 느껴질 때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돌이켜 점검해봐야 합니다. 아직 내 자신이 받을만한 믿음의 분량이 되지는 못하지는 않는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허락하시지 않고는 견뎌하실 수 없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했는지, 하나님의 때를 우리들의 세상적인 시간에 맞추고자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려야할 부분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기도 응답의 때가 될수도 있지만 치유와 회복의 때, 회개의 때, 하나님과의 만남의 때, 용서와 화해의 때, 믿음의 성장과 성숙의 때, 하나님께로 다시금 돌아와야 할 때 등 기도하고 구하는 자마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허락될 수 잇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때를 허락해주시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때를 허락받은 이후의 우리들의 마음이나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밀착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즉, 하나님의 때를 허락받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뿐만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단계, 한발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과 사정과 처한 환경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급하고 절실해서 하나님의 때가 당장이라도 허락되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때는 단순히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때를 허락받은 이후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까지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잘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이 많으심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들의 계획과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시간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때를 택하여 허락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구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는만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때는 그만큼 값지고 너무나도 유익할 것입니다.우리들은 허락받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만 앞서갈 뿐 받을만한 믿음의 분량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해도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우리들 각자에게 가장 유익한 때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모세는 하나님께 40세에 부르심을 받았지만 40년이라는 세월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그의 나이 80세가 되얼을 때에 비로서 애굽에서 핍박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부여받는 하나님의 때를 허락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는 당장은 우리들의 믿음의 노력과 인내와 간절함과 필요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생각들어질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의 뜻과 필요를 따라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때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과 마음과 음성....이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과 자세와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요엘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요엘
2:12-20요엘이 언제 혹은 어느 시기에 활동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성령님께서 이 책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 고의로 시기를 넣지 않게 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 예언의 말씀은 어느 한정된 시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엘서의 예언이 바벨론이 침공하기 바로 직전에 주어졌다는 데에 동의하는 자들이 많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굳혀졌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너무도 커서 정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폭풍전야 속에 있었다. 슬프게도 그것을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때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신다. 전례 없던 메뚜기 재앙의 비유를 통하여 그 땅을 황폐케 할 군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금식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심으로 재앙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는 모든 시대의 인간들, 특별히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기 직전에 있는 인간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온전한 회복이 일어나는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으로 넘어간다(2:21-32).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다수는 이러한 마지막 회개의 외침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바벨론의 침공을 맞아 나라를 잃고 만다.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바벨론을 통한 심판의 날을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칭한다(1:15,2:1,2:11, 2:31).

하나님께서 그 날을 정하셨고, 그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을 일컬으면서 그 날은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묘사한다(2:11, 2:31). 여기에서 큰 날은 위대한(great)날이라는 의미이며, 두려운 날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날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먼저, 왜 여호와의 날이 두려운 날인가? 엄청난 재앙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메뚜기 재앙을 말씀하시면서 그러한 재앙이 전례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현재 역사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날이 두려운 것은 역사 유래로 없었던 무서운 재앙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2:30,31, 마 24장).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21가지 재앙일 것이다.

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잘 지킨 자들에게는 그날이 두려운 날이 아니라, 크고 위대한 날이 될 것이다. 왜? 그때에 성령이 강력하게 부어주심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들과 영광들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2:28-30).

어떤 이들은 7년 환란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휴거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들도 환난의 기간을 통과할 것이다.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잘 연구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통과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우리가 그 심판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심판의 인을 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하늘에서 그 심판을 쏟아 부으시기 전에 먼저 땅의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아 간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기도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선택하셨다. 따라서 그 심판은 신앙을 끝까지 지킨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는 자들은 보호를 받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의 날에 보호를 받으면서 전례 없는 하나님의 기적과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이 크고 위대한 날인 것이다.

요엘서에서 바벨론을 통한 심판이 이스라엘에 도래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현재 도래하고 있는 환난과 심판에 앞서서 온 세상에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모여서 금식하며 자비를 얻기 위해 부르짖으라고 말씀 하신다. 

일단 환난의 시기에 접어들면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다니엘의 경우와 같이). 지금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구할 때이다(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도 두 가지의 사건, 크고 두려운 사건들을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 비록 앞으로 다가올 것과 비교하면 규모나 정도 면에서 매우 작지만 말이다. 현재 세상 곳곳에서 부흥의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들리고 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한 도시가 변화되고,....반면에, 또한 두려운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지진, 쑤나미, 화산 폭발, 테러, 핍박...앞으로 이 두 종류의 사건들이 평행을 이루면서 더욱 증가할 것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두려움에 압도당하여 주님을 부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깨어 기도하자.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모이자(히 10:25).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각자가 감당하고 있는 매일의 일들(회사의 일, 가정을 돌보는 일, 엄마 아빠의 역할, 자식의 역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지금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대비할 때이다.

성령으로 도우시는 역사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119:49)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때에 꼭 성령으로 도우시는 역사가 뒤따르게 됩니다. 이 경우는 기드온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약탈하고 짓밟기 때문에 그들 중에 한 사람, 기드온에게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창세기1장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자마자 흑암이 변하여 광명이 되고, 무질서가 변하여 질서가 되며 죽음도 변하여 생명이 되고 추함은 아름다움으로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생들에게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으로 무엇을 주셨습니까? 새로운 정치 이념일까요? 사회 제도나 복지시설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기상천외한 철학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뒤 제일 먼저 하신 일은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을 마치 비둘기같이 임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에게 인류 문제의 해결은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역사하시자 미디안과 아말렉의 연합군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7년 동안의 긴 세월의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신앙의 체험을 가졌어도,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우상을 파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가졌어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큰 용사는커녕 오합지졸에 불과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환영하고 모셔들여서 매일 매일의 신앙 생활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기드온이 간 길처럼 승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일하시는 일터와 사회에도 승리를 가져다 줄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 그분만이 우리를 용사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호와(야웨)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쫒고 (사사기 6:34)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구원)과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3)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7,38)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실 때에 메시아를 배척하므로 하느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 받게 될 예루살렘 성과 유대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면서 예루살렘에 대한 애탄을 폭발하셨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까이 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시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19:41~44).

본문에 있는 ‘우시며’라는 말은 헬라여로 ‘에크라우센’(εκρυσεν)인바,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으로서, 요 11:35의 나사로의 무덤에서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신 것, ‘에다크뤼센’(εδακρυσεν, 눈물을 흘림)보다 강한 표현이다.

마리아처럼

마리아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향내가 집안을 휘감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했다고 하시지만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했기때문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아낌없이 부어 드렸습니다.

또 마리아는  주님께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과 오역에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죽음에 이제는 자신이 함께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바짝 앉아 그의 눈동자를 바라 보았습니다. 인류의 무거운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느냐고 그녀는 자문자답을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기의 소유 중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을 위해 깨뜨려 바치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를 말렸으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중심을 보시고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행동으로 표현되듯 신앙도 삶으로 표출되는 법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을 붓고 자신의 머리 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마리아처럼 우리도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온전한 헌신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종윤목사

고난은 유익이라

겨울이 지난 후 3월 되면 강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때 나무 가지가 마구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한 바람은 나무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초봄의 거센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새잎을 내는데 필요한 영양이 위로 잘 올라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겨우내  활동하지 않은 나무줄기를 통하여 새싹 부분까지 뿌리로부터의 영양공급이 원활히 잘 이루어지려면 바람에 흔들리는 운동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혈액순환을 돕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신앙인들에게도 고난의 바람이 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바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는 통로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많을수록 겸손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져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시1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