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4/2011

준엄한 심판

사도행전 22 : 30 ~ 23 : 11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당시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결정한 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패하였고 신학적으로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공회 앞에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타의에 의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결정했던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목하여 보며 “형제들아 오늘날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며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치라고 명한 아나니아를 향하여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며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교회사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부패하고 탐욕으로 가득했으며 폭력적인 자였습니다. 율법은 먼저 시시비비를 가리고 후에 벌을 주어야 했습니다(신 25:1~2).

그런데 그는 사도 바울을 죄도 정하지 않고 먼저 치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의 후안무치입니다. 아나니아가 제사장인 것을 미처 알지를 못했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부패한 자, 율법을 어긴 자를 향하여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준엄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장애가 되는 35가지

1. 마음이 얽매여 있는 상태.
2. 자기중심적인 마음.
3. 여유가 없다.
4.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어서 생각이 마음을 빼앗을 때.
5. 끝도 없는 자질구레한 용무에 쫓기고 있을 때.

6. 피로, 생활이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7. 초조할 때, 외적 압박을 받을 때.
8. 자제심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마음이 어떤 한계에 와 있을 때.
9. 인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10. 사회적 원인 (물질적 풍요, 편리함,) 능률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

11.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릴 때.
12. 기도에 대한 지도가 결핍되어 있을 때.
13. 의욕을 잃고 타성적이 되어 있을 때.
14. 현상유지에 머물러 향상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
15. 추상화된 개념 세계에 살고 있을 때, 또는 분석에만 치우쳐 있을 때.

16. 머리로만 기도하여 마음이 메말라 있을 때.
17. 세속적 쾌락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을 때.
18. 그럭저럭 이 정도로 좋을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을 때.
19. 자신이 지쳐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분주한 기분으로 있을 때.
20. 어떠한 자극에 대하여 만성이 되어  있을 때.

21. 목적의식의 결여.
22. 현실에서 도피해 있을 때.
23. 올바르지 못한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24. 형식주의적인 생활.
25. 과신, 교만, 마음이 둔해 있을 때.

26.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있을 때.
27.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을 때.
28. 기도를 할 수 있는 고요함과 개인적인 공간이 없을 때.
29. 기도에서 오는 기쁨을 실감하지 못할 때.
30. 기도에 대한 갈망이 부족할 때.

31. 사람들과의 불화, 비판,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32. 자기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 체험에 눈뜨지 못할 때.
33.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의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때.
34. 마음이 닫혀 있을 때.
35. 기도의 준비가 부족할 때.

- 발췌 / 케노시스 영성원 -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의 세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8:34)



세례 요한은 아주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도 분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특징은 첫째, 그의 메시지는 체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의 관계도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간증을 보면 늘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 15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 고백인데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선재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먼저 계신 분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충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헬라어로 보면 차고 넘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컵에 물을 더 부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는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샘이 바로 충만의 개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엇이 충만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그분의 능력, 그분의 지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7절에서는 ‘주어졌다’‘왔다’는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주어졌다는 말은 누구누구를 통해 온 것으로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는 온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온 것의 의미는 예수님 자체가 은혜라는 말씀이고, 예수님 자체가 구원이며 우리의 전부라는 설명인 것입니다.


18절은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의 능력에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19절에 나오는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스로 그려갑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실족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어야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셔서, 성경대로 사시고, 성경대로 가신 후, 성경대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다시금 예수님에 대해 재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는 예수님에 그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