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6/2010

요나의 표적이 지금도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요나 선지자를 사람에게 비유하면 아주 싫어할 것이다. 나는 요나와 같이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게 되는 위험한 인물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어느 누구도 사람 주변에 있지 않으려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나에 이름에 대한 개념과 의미를 몰라서 그렇다. 그리고 요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우리가 몰라서 비아냥거리며 요나와 같다고 하는 일은 없어야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자신 중심적으로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적인 배경을 몰라서 오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하는 민족으로 얼마나 악독한 민족인지 말할 없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의도에 전적으로 동의할 없는 요나 선지자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간 것이다. 항해 중에 태풍이 일어나 배에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원해서 바다에 던짐을 받았다.

요나는 삼일 삼야 동안 물고기 속에서 머물러 있었다가 육지로 다시 살아나오게 내용을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12:38~42, 8:11~ 12, 11:29~32)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없다고 하셨는가? 땅에 오신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는데 요나의 표적 외에 다른 표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말씀인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은 무엇일까? 전에 무엇이 악하고 음란한 것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악하다는 뜻은 인간 내면의 육의 속성이 깨뜨려져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목양 받아야할 대상을 말한다. 음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도 말씀을 속에 배우지도 아니하고 적용하지도 아니한 채로 인간의 편한 생각대로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고 하고 있지만 삶의 현실 속에서는 전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으로 우상숭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간음, 귀신에게 사로잡힌 , 중풍병자, 문둥병, 혈루증 앓는 여인, 바리새인, 서기관 등을 전부 하나님 말씀을 속에 실천하지 않고 사람의 좋은 대로 말씀을 바꾸고 있는 것을 음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선지자라는 의미는 (나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안으로 들어간 상태의 존재가 바로 선지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 속에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시는 뜻인데 많은 분들이 착각하고 있다.

요나가 물고기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는 원어에는‘큰’이란 단어는 원래 없는데 사람이 물고기 속에 들어갔다고 하니까 자의적인 해석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물고기란 ()대로 살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法이란 단어가 물가 () 거할 () 단어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사상의 흐름에 따라 살겠다고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양반 처마나 불교 사찰 처마 모서리에 물고기 모양을 달아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자가용 꽁무니에 부착된 물고기 모영(익투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주신 법대로 살아가겠다는 정신을 갖고 있는 마크(표식)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 달고 있거나 폼만 잡고 있다.

따라서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속으로 들어간 상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안으로 들어간 상태의 존재가 바로 선지자라는 뜻을 반복해 상기해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는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삼일 삼야를 거쳐서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동안 무덤에서 장사지낸 것과 같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처럼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 삼야를 요나 이름처럼 발효, 썩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당연히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없다.

요나의 의미를 비둘기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발효한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같은 성질이 하나님의 성경으로 바뀐 존재가 바로 요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지성과 개성을 갖고 있다. 난센스 적인 내용으로 본다면 지성을 지랄 같은 성질이며 개성을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사망의 사람에서 생명의 사람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사망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생각에서 주님의 생각으로, 썩을 육신에서, 썩지 않는 생명으로,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지옥의 존재에서 천국의 존재로 바꿔진 상태를 요나의 표적으로 말할 있다.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발효되어 새로운 존재로 나온 것을 의미한다. 시청각교육의 차원으로 거듭남의 표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존재가 것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거듭남을 실제로 체험한 요나는 니느웨 거리를 지나가면서 백성들에게 반신반의 하는 가운데 생명을 얻는 회개를 전했다.

요나의 표적은 색다른 것이 아니며 현재 일어나는 표적과 전혀 의미를 갖고 있다.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거나 정신병자를 고쳐내는 것도 전혀 아니다. 생명이 썩어 심령이 죽은 자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육체적으로 살아가는 이들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다가 발효되어 다시 살아나는 표적을 의미한다.

요나의 표적은 과거에도 계속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 일어나야 하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야 한다. 교회마다 기관마다 개최하는 각종 집회에서 추구하는 니느웨 성회는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완전히 썩어져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탄생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요나처럼 망하던지 말든지 하나님께서 저런 민족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요나의 표적을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출처: 카페 창골산 봉서방 >

사랑하는 하나님 - 묵상말씀 - 눅15:28, 32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28, 32)

우리의 인내만을 가지고는 부족한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의 한 모습만 보고, 그 삶을 비난하기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바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삶을 보시고, 비난하실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품 중에, 주님께 거슬리는 면이 있더라고, 주님은 마음에서 우리를 잘라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내하기를 즐겨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누가 복음 15장은 종종 탕자의 비유로 많이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이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을 통해 교회 안에 넘어지는 형제와 자매가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교회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한 영혼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하지만 한 성도가 넘어졌을 때,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넘어졌을 때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함께 동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얼마나 하나님의 인내와 인자함 가운데 거할 수 있느냐는, 넘어진 다른 형제자매들을 향해, 우리가 얼마나 인내와 인자함으로 대할 수 있는 지와 비례합니다.

나의 기도
성령님, 제 주변에 넘어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당신의 인내와 사랑을 제가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더 나아가서, 당신의 사랑과 힘을 가지고 넘어진 자에게 다가가, 격려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용기를 제게 주시옵소서.

*우리의 악한 성품 중 하나가 빛에 노출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출처:사랑하는 하나님/마이크 비클>

사랑하는 하나님 - 묵상말씀 - 잠언 3:11-12

"...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했구나, 하지만 아직도 네 삶 속에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을 보아라.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 일단, 들어오렴, 하지만 너를 주시해서 지켜보겠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러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옛 방법을 저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간증을 하면, 손뼉을 치며 함께 기뻐해 줍니다.

그리고 소리치며 외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기뻐해 주었던 그 무리는 같은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의 삶 속에 미성숙한 문제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준비를 합니다.

또한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그 사람을 더 이상 응원하지 않습니다.
심술난 바리새인처럼 돌아서며 이야기합니다 "간증은 다 거짓말이었군! 똑바로 살아야지.
계속해서 지켜보겠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반대로 이야기하십니다. "네게 성숙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때라도, 나는 너를 기뻐한다."

만약 우리의 행동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슬픔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나의 기도
아버지, 저의 미성숙함과 상관없이 저를 기뻐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부드럽게 영적 성숙함으로 이끄시는 동안에도, 저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미성숙함도 제가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비난으로 그들을 낙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여 그들이 성장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 기억하라. 당신의 삶 속에 죄가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뻐하신다 *

<출처:사랑하는 하나님/마이크 비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