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201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복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니라”(전 2:26) 

전도서는 해 아래의 육신의 인생에 대한 헛됨을 강조하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기본임을 결론으로 말씀합니다(전 12:13)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나타난 행위나 마음에 숨은 생각을 선악 간에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전 12:14) 그러나 해 아래에서 살면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하늘로부터 주시는 지혜를 얻어 세상을 이기고 즐겁고 기쁨으로 산다면 솔로몬이 그토록 강조한 인생의 잠언을 얻게 되겠지요.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전 2:25)고 말하는 솔로몬이 아닙니까? 사치와 부와 쾌락의 대명사 솔로몬이 ‘해 아래서’ 라는 말을 27번, ‘하늘 아래서’ 라는 말을 2번이나 사용하며 인생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결코 참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강변합니다. 

다만 해 아래에서는 가족과 형제와 이웃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분복이 최고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으로 인해 기뻐할 여유조차 없이 뛰고 또 뛰고 있지만 분명히 해 아래의 분복과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영적인 복이 서로 다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솔로몬의 전도서를 보고도 인생의 행복을 다른데서 찾으려 한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누가 솔로몬보다 더 인생을 화려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해 아래의 것은 새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나타날 뿐입니다. 유행이 돌고 돌듯 해 아래에서는 물레방아처럼 항상 순환이 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는 항상 새롭습니다. 그리고 해 아래에서는 죄인으로 인해 몸의 수고로 살고, 그로 인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전부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희락의 복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으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는 사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주시고, 그 지식과 함께 희락의 기름을 붓습니다. 죄인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초청에 임하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수고는 헛됩니다. 그의 수고한 결과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에게 간다고 해도 그건 해 아래의 것으로 또 헛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지혜와 지식과 기쁨이 있음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위대한 마지막 부으심 - 데이빗윌커슨

<스가랴 12:10절은 마지막 추수이전에 반드시 있을 늦은비에 대한 약속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늦은비 를 내리실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늦은비가 마지막 추수를 가능케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늦은비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아마도 40년 혹은 50년 동안 지속되었고 오 늘날에 와서는 단지 소수의 '늦은비' 교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성령의 위대한 마지막 부으심을 체험하고 있었다고 확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가랴 12:10절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부흥운동들이 오기도 하며, 또 사라져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추수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많은 성령운동이 인간중심의 은사와 축복, 자기 수양, 행복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쉽게 사라졌습니다. 춤추고 웃고 떠들고 소리지르는 등 그 어떤 성령에 감동한 표현도 그것이 잃어버린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상한 심령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모두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히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잃어버린 그리고 죽어가는 세상에 대해 다가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과 마음의 기울 어짐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추수" "잃어버린 영혼"을 관련지으셨습니다"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38)

어떤 진정한 성령의 부으심도 예수님의 이런 기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부흥운동은 많은 영혼을 수확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모으지 않는 진정한 부흥운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믿는 자로서의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모든 은혜와 사역은 마지막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위로하시며 가르치시며 거룩하게 하시며 인도하시며 될 일을 보이실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추수때에 그의 포도원에 서 일하는 유능한 일꾼을 만드시기 위해 수확할 준비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엘 2:28절의 결과로서 오순절에 나타난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3,000명의 사람이 한 날에 구원을 받았고, 그 후 구원받는 영혼이 날마다 더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이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세계의 잃어버린 영혼에게로 퍼져 나갔습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은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이사야 32:15)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서 말할 때에 '성령이 임하시면 그 분은 수확할 열매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 잃어버린 영혼 을 풍성히 얻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강한 부으심이 다윗의 집에 약속되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스가랴 12:10)

교회에는 늘 은총과 간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강력한 부으심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이지 않고 강력하며 영광스러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저는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대체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오히려 저는 이 예언들에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또 마지막 때에 그의 영을 유대인들에게 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스라엘과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있을 것입니다. 그 예로 에스겔 39:22-29에 이스라엘의 적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큰 시험 뒤에 유대인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12:10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말하여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의 집, 즉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는 다윗집의 씨앗입니다. 그리고 그집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새로운 이스라엘, 모든 나라와 방언을 포함하는 믿는 자들의 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몸은 믿음으로 인함이고 육체로 인함이 아닙니다.

이 하가는 아라비아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 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라디아서 4:25-26)

다른 곳에서 바울은 이방인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것으로 인해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것을 경고합니다. 그들은 결코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얕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 도께서 허무신 벽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이 또한 엄청난 모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무셨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서 3:28-29)

아무도 그가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약속의 후손인 것 입니다. 모든 나라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온 예루살렘이요, 마지막날에 다윗의 집인 것입니다.
 
<마지막 부으심에 대해 두 가지 조건이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은 '은총과 간구의 영'(스가랴 12:10) 으로 부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마다 이 두 가지 은총의 영과 간구의 영이 여전하게 나타납니다.

디도서에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은총은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을 주며 건전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나타나게 하셨으니"(디도 서 2:11-13)

오순절 이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은총이 놀랍도록 있었습니다. 성령은 모든 족속과 방언의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릴 것인가를 가르치시면서 모든 나라들에 대해 죄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시대에 근신함과 의로움으로 살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늦은비가 올 때에는 우리는 한층 더 큰 은총을 증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진리를 견고케 하실 은총의 영을 부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견고한 사람들을 가지게 되실 것입니다.

이 부으심으로 성령님께서는 미지근하고 세상에 타협적이었던 전세계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들을 강타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들에게 "세상은 나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 는 곧 내 앞에 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말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너희가 강단앞에 있을 때에 나의 기름부음을 받아 야 한다." 라고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은총의 영은 회개로 이끄는 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경건함과 의로움을 가지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2,000 년 동안 교회에 나타났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은총으로 지금껏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은총이 전해지는 어느 곳에서나 회개와 거룩한 삶에 대한 부르심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로 스가랴 12:10절을 통하여 이 마지막 때에 성령님은 모든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바꿀 은총의 영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내리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고 그들 가운데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한 울부짖음을 생겨나게 할 것 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들 생활 가운데 숨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을 정죄하는 종류의 '은총의 설교'로 사람들을 각성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상 보지 못한 죄를 깨닫게 함과 죄를 드러냄과 회개를 전파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모든 불의와 경건 치 않은 것과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바르게 행할 것에 대해 마음의 부담을 느낄 것 입니다.

몇 주전에 저는 어떤 사역을 이끌고 있는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사역의 리더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구하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는 동성연애와 거짓말하는 영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몇몇 팀원들 은 해고되었습니다. 이 형제가 제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부담이 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죄를 드러내실 때에 미지근하고 타협적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정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다루심에 굴복하지 않는 이들은 극도로 눈이 어두 어지게 되며 굴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버리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부담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뜨겁게 하고 진지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또한 간구의 영을 부으실 것입니다>
간구라는 단어는 울부짖음이나 목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을 제외하고 성경에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개인적인 것 또는 단지 묵상이 아닌 것입니다. 간구는 목소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간구'는 양모 또는 평화와 항복을 바라는 자가 짠 옷감을 덮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 은 항복의 깃발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항복을 하겠다는 외침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생각해 보십시다. 지치고 피곤하여 탈진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혼란한 병사가 참호 속에 쳐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이고 또 지쳐 있습니다. 이제 끝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습니다. 그리고 그 가지의 끝에다가 자신의 흰 속옷을 묶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위로 올리고 흔들면서 참호 속에서 기어 나옵니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나는 항복합니다. 나는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간구입니다. 나는 항복합니다. 나는 이 전쟁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절망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구는 단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계획을 지원해 줄 것을 조르거나 요청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의 의지와 길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온통 자신의 의지로 ", 하나님! 나를 여기로 보내 주소서, 저기로 보내 주소서, 이것을 저 에게 주소서, 저것을 저에게 주소서" 그리고 사역자들은 ", 하나님! 저의 사역을 축복해 주소서, 나의 계획을 축복 해 주소서. 나의 프로그램을 위해 돈과 사람들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에는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여서 영적으로 파산한 것과 같은 감정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돈과 두뇌와 계획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각성할 것입니다.(진실로 우리는 땅을 잃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약해졌고 가련해졌습니다.)

저는 한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심령으로 부르짖는 것과 그의 이름을 절망적으로 찾는 것"이라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말라기 선지는 '주의 제단을 눈물과 애통, 울부짖음으로 덮으면서'(말라기 2:13)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간구를 듣지 않으셨으며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들을 불순하게 다 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혼하고 다른 여자들을 쫓았습니다.

이 백성들은 울며, 소리치며, 손에 항복의 깃발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 내 죄가 나를 짖누릅니다. 내 힘으로 죄와 싸우는 것에 지쳤습니다. 성령님께 저항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을 행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하셨을 것입니다.

항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외침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기꺼이 굴복하고 우리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어떤 것도 포기할 것을 동반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간구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사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다니엘 9:17-18)

이것이 굴복의 외침이고 완전한 무력함입니다. 다니엘은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하며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거부했고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 주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 우리는 굴복합니다.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우리의 간구를 들으소서."

<성령이 간구의 영을 부으실 때에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런 기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최근에 전 세계의 위대한 각성에 대해 우리 교회에서 말하였습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기도의 영' 은 마지막 추수와 관련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시베리아, 아마존, 아프리카의 줄루족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기도 하고 있습니다. 울며 소리 높여 하나님을 향해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죄를 다루고 의로운 것으로 돌이키며 그렇게 기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도모임은 저녁 여섯시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지속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정도의 기도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간구의 영이 임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12:10절에 서 약속하셨던 것을 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믿는 자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도 타임스퀘어 교회에서 기도하는 주간을 갖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약간 맛보았습니다. 실제로 이 나라 전체의 기도에서 열성과 부지런함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간구의 영의 부르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7 18일 저는 기도일지를 시작했습니다. 첫째 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주일 전에 7 11일 성령님께서 저를 기도의 해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집중적인 기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저의 서약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이 일지를 계속 쓸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30일 동안 저는 그 기도일지에 한 단어도 적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 큰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방해받아온 것입니다. 기도에 훈련되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미쳐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것을 통하여 기도하려는 욕망과 생각까지도 성령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저의 딜레마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구의 영을 그의 교회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리고 저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으며 또 진실로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일부분이고자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제가 이 성령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답은 스가랴 10 : 1 에 있습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이를 구하나 우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스가랴 10 : 1)

우리는 주님께 간구의 영을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 절에 나오는 밝은 구름은 "번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나기를 내려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하늘 로부터 온 이 짐(부담)을 주리라. 그러나 나에게 그것을 구하여야 한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 하나님. 주님의 성령을 저에게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며, 샘이 열리게 하시며, 제가 주님의 마지막 추수의 일부분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요구하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일단 그 분의 간구의 영이 여러분 위에 임하시면, 여러분은 거룩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여, 성결케 하기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중재할 것이고, 또 이 죽어가는 세상을 위해 울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그것을 행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것을 행하실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부르심(은총과 간구의 늦은비)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스가랴의 예언에서 봅니다. 지금 성령님은 이스라엘에서 바로 그것을 행하고 계십니다. 많은 무리의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 모여 그들의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은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 장막을 걷을 것이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게 될 것이고, 그를 찌른 것으로 인해 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무지했던 것과 거절한 것으로 인하여 애통하면서 그(예수님)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해 교회와 관련하여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매우 개인적인 다루심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에 대해 매우 무디게 했고 호도했으며 또한 간과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기도의 영으로 오시면 그 분을 정결케도 하실 것입니다. 울고 애통하며 또 우리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는가를 실제로 느끼 는 상한 심령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하며(스가랴 12 : 12)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죄에 대해 강하게 정죄하는 메시지보다 주예수께서 오시기 바로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게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안에 있어 거룩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견딜 수 없을만큼 의 날카로운 죄의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여기 성령의 늦은비를 부으시는 조건과 징표들이 아래에 있습니다. 만일 소위 말하는 성령의 운동이 이것 들에 필요한 만큼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육체적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경건한 슬픔으로 인한 비탄, 낙담, 울음 그리고 오직 그러한 성령에 대한 영혼들에 대한 마지막 추수에 초점이 있는가?
회개와 경건함에 이르는 은총의 영이 있는가?
굴복케 하는 간구의 영과 성령안에서 기도의 긴박함이 있는가?
주 예수를 향한 열망, 죄에 대한 태도 후에 참된 축복의 기쁨이 있는가?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분의 부르심 가운데서도 메마르고 시들며 텅빈 사막 가운데 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하는 것은 여전히 미지근하게 살며, 또 온전하지 못한 마 음으로 주님께 예배하면서도 만족해 하며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은 무리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곡식을 무르익게 할 비가 내안에 있는 가시나무와 엉겅퀴에 물을 대줄 뿐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브리서 6 : 7-8)

저는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를 포함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 분도 그와 같이 하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제 저와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그것을 주셔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부담을 저에게 주옵소서. 주님의 애통하는 영을 제 안에 두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굴복합니다. 온전히 주님께로 향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게 말하시는 어떤 것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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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님만이 참된 제자를 만드실 수 있다. -릭조이너

오직 성령님만이 참된 제자를 만드실 수 있다. 성령님께서는 죄를 책망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신다. 이에 그들은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필사적으로 십자가를 붙들게 된다. 만일 우리의 회심이 이러한 절박함에 기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죄를 용서받으려고 평안의 유일한 근원인 십자가를 붙든 것이 아니었다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십자가 이후에는 부활이 있다. 하지만 먼저 죽어야만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 부활의 전제조건이 죽음 아닌가?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지 않고 부활의 소망과 유익을 마음에 새겨두려고 한다면 그 노력은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환각일 뿐이다. 이에 도취된 수많은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처지가 나아졌다고 느끼지만 실상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영원한 위험에 처해있다.

예수님은 손에 모자를 쥐고 "나를 영접해 주세요"라며 구걸하는 분으로서 이 땅에 오신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이 땅을 거니실 동안 사람들을 부르셨던 그 방법 그대로, 지금도 사람들을 부르신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9:2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33)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1~2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로부터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우리라고 다르겠는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그 이하의 조건이라면 참된 제자도가 아니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십자가의 메시지를 변형시킨다면 진정 구원의 능력을 지닌 복음의 진수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사람에게 좋게 보이려고 십자가의 메시지에 우리의 '유식함'을 첨가하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할 복음의 진한 능력에 물을 타는 행동이리라. 

릭조이너의 1세기 교회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