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012

남은 자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계획입니다(롬11:1 ~10).

바울은 이스라엘에 남은 자를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섭리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결과 이방인에게 복음이 퍼져나가 그들이 놀랍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때에는 이방인들이 얼마나 충만하게 되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로 크게 번민하던 바울은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하여 끝내는 온 세상이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희망에 찬 비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결코 절망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안전한 일들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더욱 크고 위대하신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그 어려움을 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위의 것을 찾는 삶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8)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한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매일의 일상과 업무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땅의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의 말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 땅의 것들을 주지 말고, 세상 일로 채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하면서 매일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 네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문을 보면 “나는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무척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 연수도 중요하고, 오늘 신앙의 경험과 배경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영적인 고백입니다.
내가 과거에 대해 철저하게 끊어지고 회개하며 죽었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린은 의미요법을 통해 세 가지 가치를 소개하는데 간단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만 과거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힘든 것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나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건강한 의미를 계속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의 것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해 주십니다.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땅히 죽어야 할 나를 바라보게 되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앞에 도래할 천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계속해서 생명을 경험하게 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신비스러운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는 소망의 사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올해 초 40년을 통치하던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무바라크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무하마드라는 손자가 있었습니다. 측근의 말을 들어보면 국정을 운영하는 가운데 그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손자만 보면 그는 인자하게 웃고 힘을 내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요 행사에 영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손자가 그 자리를 늘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바라크에게는 손자가 큰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09년 5월에 원인 모를 두통으로 병원에 갔던 손자가 뇌출혈로 죽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무바라크는 예전에 보여주었던 추진력도 사라지고, 삶의 의미를 잃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 5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취소하였고, 2009년 6월 5일 이집트로 온 오바마가 상당히 중요한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조차도 무바라크는 슬픔에 잠긴 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문 기사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수많은 기간 동안 독재를 해왔던 자들로 본다면 무바라크는 오히려 깨끗한 쪽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가 무너진 것은 그의 부정부패가 폭로된 것이나 고실업률이나 고물가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힘이 되었던 손자의 죽음일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면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그가 바라보는 그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 우리의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을 산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과 그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원은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세 가지 교훈을 통해 소망을 가진 사람, 즉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첫째 부모는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이 오고 잠깐 근심하게 되는 상황이 있으나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부모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지만 너무 현실만 보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부모는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뛰어넘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참을 줄 알고, 예수님 때문에 가슴 뭉클해하며 전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을 통해 세워질 부모들이 이와 같은 자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혼의 온도계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17)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뒤에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들어갈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서 다시금 언약갱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낭독되고 그 앞에서 그들은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계표는 말 그대로 땅의 경계를 정하는 것인데, 이것을 옮긴다는 것은 땅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굉장히 무서운 죄로 단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가지의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이 탐나서 그 땅을 빼앗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결정적인 멸망을 선포해버리십니다(왕상 21:19). 아합의 아내 이방인 이세벨은 아합이 왕으로서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지 아합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들의 죄를 지적할 때, 호세아 선지자는 여러 가지 죄 중에서 바로 지계표를 옮기는 것을 지적하여 말씀하십니다(호 5:10). 결국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그 백성의 생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백성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백성은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백성은 지계표를 옮기지 않는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극적으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적극적으로 감사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결국 지계표의 문제는 하나님백성의 기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생사의 문제를 걸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백성과 세상 사람들의 인생이 ‘근본 기초’가 다릅니다. 욕망이 기초가 되느냐 아니면 만족과 감사가 기초가 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삶’이란 결단코 예의범절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감사란 예절의 문제요 사람됨의 문제일 수 있지만, 하나님백성들에게 감사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영적인 온도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그것은 오직 우리에게 감사의 향기가 나고 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계표를 옮길 때, 하나님은 그들 안에 감사의 향기가 말라있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향기가 말랐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비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향유의 향기이기 이전에 그 영혼 속에서 풍겨나는 감사의 향기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에서 감사의 향기가 풍겨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백성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영적 온도계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