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세이 박사와 아르툴로
린세이 박사의 배려로 우리가 머물고 있던 숙소는 바람이 한번 불면 바람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지역이 원래 2,500m 고지인데다가 우리가 있던 신학교 건물은
그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결국엔 강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창문 유리창 두 장이 깨어졌다. 나와 아내는 린세이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유리 깨진 값을 물어드리자고 했다. 며칠 후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린세이 목사님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신다.
“여기서는 원래 유리창이 자주 깨집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갈아 끼우면 됩니다.”
“린세이 목사님. 멕시코에서는
유리 값이 비쌀 것이니 우리가 유리 값을 드릴께요.”
그러나 그는 한사코 손을 내저으시며 그럴 필요 없다고 하신다. 결국
우리가 졌다. 린세이 박사는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보다도 스페인어를 더 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페인어에 능숙하다. 그는 곧잘 스페인어를 성서 언어(Bible
language) 또는 천국 언어(heavenly language)라고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이 언어의 거의 대부분이 헬라어와 라틴어로부터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도 몇 마디 쉬운 회화를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영어보다도 발음하기도
편하고 또 외우기도 쉬웠다. 한국인이 스페인어를 배우기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스페인어가 대부분 ‘아에이오우’의 모음 구조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려면 의도적으로 혀를 굴려야 하는데 반해, 스페인어는
그저 편하게 발음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인이 스페인어를 발음하는 것보다 한국인이 발음하는 것이 원
발음에 더 가깝게 들린다고 하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린세이 박사의 아버지는 전혀 스페인어를 배워 본 적이 없었지만, 멕시코에
도착해서 반 년 동안 계속 스페인어 성경을 읽고 또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반 년 후에는 떠듬떠듬
설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린세이 부부와 우리 부부가 차를 타고 어느 세미나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무슨
얘기 끝에 린세이 박사가 내게 묻는다.
“교수직을 마치고 나면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할 생각입니까?”
“주님이 인도하시면 해외 선교사역에 몰두할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멕시코 선교사로 오십시오.”
그의 단호한 어조에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잠시 후 이렇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당연히 순종할 겁니다.”
“아멘!”
린세이 박사 내외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어, 뭔가 좀 이상한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주님이 인도하시면 멕시코든 어디든 가겠다고 하는 뜻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분들은 멕시코로 내가 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아멘!’ 한 것 같다. 아무튼 주님 뜻대로 되리라. 이 분들은 내가 멕시코 생활에 아무 문제없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냥 흥겨워하는 듯 했다.
내게 있어서 멕시코 전통 음식이나 문화 그리고 언어 등이 비록 낯설고 서툴긴 했지만, 그러나
어색하게 느껴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나 자신이 더 잘 적응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첫째는 음식이 다 흥미롭고 맛있었다. 나는 밖에서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면, 멕시코의 전통 음식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먹어볼 양으로 새로운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둘째는 인간미다. 멕시코 사람들 참 정답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주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준다. 물론 만났다 헤어질 땐 뺨에 키스도 서슴없이 하고 말이다.
키스 말이 나왔으니 이 말도 좀 해야겠다. 내가 매번 강의를 끝내고
나면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다가와서는 뺨에 키스를 해준다. 처음에는 매우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강의에 은혜를 받은 학생들이
많았는지, 나를 포옹하고 키스해 주려고 길게 줄을 늘어섰다! 키스도
키스지만 포옹하는 것도 내겐 몹시 버거웠다. 그런데 이들은 존경하는 분에게는 더 깊은 포옹을, 그것도 아주 길게 해준단다. 어떤 젊은 여학생이 린세이 학장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낯이 뜨거워 순간 외면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하루는 린세이 박사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배 박사님. 아르툴로에
대해서 좀 드릴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나는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언젠가 내가 강의를 할 때 아르툴로
목사가 통역을 하는 가운데 학생들에게서 약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어쩌면 적절하지 못한 통역 내용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린세이 박사의 말은 아르툴로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나의 강의를 자기 식대로 통역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해석을 하는데 반해, 아르툴로는 은사주의적 경향이 매우 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의
강의를 통역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섞어서 한 것이다.
나는 린세이 박사와 함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우리가 지닌 기본적인 입장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며칠 후 린세이 박사는 아르툴로에게서 자신의 통역상의 실수에 대한 자백과 함께 앞으로는 오직 강의 내용대로만
통역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린세이 박사는 매우 복음적인 신앙과 신학을 갖고 계신 분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는 전통적 복음주의자로서, 열광주의나 은사주의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를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웨슬리안(Wesleyan) 성결론을 매우 사랑하시는, 보기 드문 웨슬리학자이기도 하다.
린세이 박사는, 내가 성령의 능력에 대해 더 강조를 한다면 자신은
내면의 성결에 대해 더 강조를 한다고 스스로 평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나 자신의 성령론을 평가한다면, 근본적으로 나는 내면의 성결을 강조한다. 그러나 단지 내면의 성결에서만
그치지 않고 은사와 능력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점을 또한 언급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린세이 박사는 은사와
능력 부분은 비록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면 나나 린세이나 내면의
성결에 성령론의 중심이 있다는 점은 공통점이고, 차이점은 나는 내면의 성결과 함께 은사와 능력을 또한
말한다는 것이고, 린세이는 내면의 성결만 얘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이렇다. 만일 내가 내면의 성결만 얘기하고 은사와
능력의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런 부분에 대해 올바르게 말해줄 것인가. 나는 마땅히 성령사역에는 은사와 능력의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은 내면의 성결에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래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내면의 성결에 목표를
둔 능력 있는 영성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느 날 아르툴로 목사와 함께 식사 자리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르툴로가 도통 음식을 들지 않고 물만 마시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런가 하고 물어봤다.
“아르툴로 목사님. 식사를
좀 하지 그러세요? 혹시 금식 중입니까?”
“아, 예. 금식 중입니다.”
그는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좀 수척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은 더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배 박사님이 처음 강의하실 때 아프리카의 신학생들 얘기를
하셨죠? 그때 그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21일 금식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날부터 21일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난 그의 말에 감탄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금식하면서 제 강의 통역을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교수님의
성령론 강의 내용이 내 사역과 삶속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목표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 대신 그의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 나는 믿는다. 멕시코에 이런 신실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역자들이 있는 한, 진정
이 땅에는 부흥의 소망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