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2010

지금은 분명 깨어 있어야 할때입니다


마태복음 24,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징조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지만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를 통하여 그 때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21:29 ~31)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13:35~36)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 상황과 징조들에 대해 점점 무뎌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처처에 지진과 홍수,폭설과 한파,쓰나미,무더위, 창궐하는  암과 질병들

*지금은 분명  깨어 있어야 할때입니다,*

솔개를 쫓아버리라 -데이빗 월커슨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영광스러운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족장에게 암소와 암염소를 가져와 둘로 쪼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또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가져다 머리를 맞대어 땅에 놓아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시를 따라 행했고 이 짐승들이 피를 흘리며 땅에 놓여 있을 때 솔개들이 사체위에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아브라함은 큰 흑암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흑암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탄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당신의 것이 되려는 것을 볼 때 사탄이 어떻게 반응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귀는 질투에 불타 격노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리라고 굳게 결단하는 것을 볼 때 그의 반응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옥 전체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솔개가 내려앉으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그가 솔개들을 쫓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우리에게 위협적인 솔개들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강력한 전쟁 무기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이 들거나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릴 때, 나의 사랑하는 주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그것을 견주어 보아야만 합니다.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이 단지 내가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에 기초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생각들을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나를 위해 쟁취한 승리에 대하여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에 견주어 측정해 보아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내게 비난하는 생각들이 들어와 그것이 의심과 공포심을 야기하거나, 책망한다거나, 또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하면, 나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무서운 생각들이 들이 닥칠 때를 대비해야만 합니다.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 주 예수님조차도 예외 없이 원수로부터 온 이런 생각들을 겪으셨습니다.

솔개가 당신이 합당치 못하다거나 불안감을 야기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에게 내려앉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쫓아버리십시오. 주님의 인도로 당신이 드린 희생 제물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은 그것을 존중하여 주실 것입니다.
Posted by David Wilkerson

전인적 성령사역



6 22. 오전에는 린세이 박사님이 목회하시는 산타모니카(Santa Monica) 교회 창립기념예배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어느 순복음교회에서전인적 성령사역에 대해 특강을 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너무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대해 둔감하고 무지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천년 전 초대교회를 보면 당시의 그들이 얼마나 성령의 주권과 능력에 민감했었는지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그렇다! 성령의 주권과 능력을 충실히 의지하는 삶과 사역 - 이것만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계선교 완수의 방법이다. 이제는 온 세계 모든 크리스천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여 성령의 주권적 역사하심 앞에 삶과 사역을 내어드려야 한다. 필자는 가는 곳곳마다 성령께서그 뜻대로”(고전 12:11) 역사하시는 능력의 현장을 보아왔다. ‘전인적 성령사역이라는 강의의 내용은 성령께서 드러내기 원하시는 초월적인 능력의 사역을 일곱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회개 사역, 구출 사역, 중생 사역, 성화 사역, 충만 사역, 주되심 사역, 그리고 순교영성 사역이다.

1. 회개 사역
성령께서 일하시는 곳에는 거의 언제나 회개의 영이 임한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성령의 회개 사역에 대한 충분한 언급을 볼 수 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스겔 36:25-26

예수께서도 성령께서 하시는 주요한 사역이 바로 회개 사역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7-8

성령께서 베푸시는 회개 사역은 삼 단계로 심화되어간다. 첫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회개케 하신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보통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보시는 것은 그런 차원보다는 예수님께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죄인들에게서 보기 원하신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다루시는 죄악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9
둘째, 성령께서는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여러 가지 죄악을 회개케 하신다. 거듭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범죄를 하게 될 수 있다. 사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영혼 속에 아직도 죄악된 본성이 거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서 중생한 자에게는 영혼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동기와 죄악된 본성 사이의 싸움이 시작되며, 이 싸움에서 지게 될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성령께서는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회개케 하신다. 거듭난 신자의 영혼 속에는 죄를 짓게끔 하는 내적 동기, 즉 죄의 유혹을 수용하기 원하는 죄의 뿌리가 잠재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전 인류가 생래적으로 이어받은 성품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력(自力)에 의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요 동기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교만을 근본적으로 지적하여 회개케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헌신을 하게 하신다.

2. 구출 사역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곧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8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 때는 악령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는 성령의 사역이 많이 나타났다. 악령들이 쫓겨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중요한 표적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사와 이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은 권세 있게 전파되어갔다.

그러나 이 일은 단지 초대교회 당시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도 악한 영들은 자신의 존재를 은신하면서 온갖 궤계로 성도들과 교회를 공격해온다. 악령들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할 때는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 또는 귀신의 억압(demon oppression) 상태를 가져온다. 여기서 귀신 들림은 귀신이 인간의 영혼 속에서 역사할 때를 가리키고, 귀신의 억압은 영혼 밖에서 역사할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귀신을 쫓는 일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사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오해로부터 결국 영적 교만과 은사 사용의 그릇된 동기가 자라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다고 선포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마가복음 16:17

그리고 그 능력의 근원은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귀신 즉 더러운 영의 정체를 바로 알아 올바른 의식을 지니게 되면 더러운 영들은 더 이상 터전을 마련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선포할 때 더러운 영들의 영향은 우리의 의식과 삶에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3. 중생 사역
중생의 은혜는 성령의 사역과 직결된다. 성령 즉 보혜사(保惠師)란 헬라어로옆에 계시면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NIV 영어성경에는상담자’(Counselor)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말 성경에 나타나는 이 말의 한문의 뜻으로는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선생이라는 의미이다. 이 모든 성경에서 일치되는 것은, 성령은 곧 인격적으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제자들의 인격적 보혜사의 역할을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16:7)고 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가시고또 다른 보혜사”( 14:16)로서 성령이 오시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고 또 우리 안에 동거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육체로가 아니라 오직 영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위격(位格)을 통하여 오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그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오셨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따라서 성령께 이끌리는 삶,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곧 예수 믿는 삶의 실체이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도 성령에 둔감하고 무지하다


전인적 성령사역
6 22. 오전에는 린세이 박사님이 목회하시는 산타모니카(Santa Monica) 교회 창립기념예배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어느 순복음교회에서전인적 성령사역에 대해 특강을 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너무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대해 둔감하고 무지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천년 전 초대교회를 보면 당시의 그들이 얼마나 성령의 주권과 능력에 민감했었는지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그렇다! 성령의 주권과 능력을 충실히 의지하는 삶과 사역 - 이것만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계선교 완수의 방법이다. 이제는 온 세계 모든 크리스천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여 성령의 주권적 역사하심 앞에 삶과 사역을 내어드려야 한다. 필자는 가는 곳곳마다 성령께서그 뜻대로”(고전 12:11) 역사하시는 능력의 현장을 보아왔다. ‘전인적 성령사역이라는 강의의 내용은 성령께서 드러내기 원하시는 초월적인 능력의 사역을 일곱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회개 사역, 구출 사역, 중생 사역, 성화 사역, 충만 사역, 주되심 사역, 그리고 순교영성 사역이다.

1. 회개 사역
성령께서 일하시는 곳에는 거의 언제나 회개의 영이 임한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성령의 회개 사역에 대한 충분한 언급을 볼 수 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스겔 36:25-26

예수께서도 성령께서 하시는 주요한 사역이 바로 회개 사역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7-8

성령께서 베푸시는 회개 사역은 삼 단계로 심화되어간다. 첫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회개케 하신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보통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보시는 것은 그런 차원보다는 예수님께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죄인들에게서 보기 원하신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다루시는 죄악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9
둘째, 성령께서는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여러 가지 죄악을 회개케 하신다. 거듭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범죄를 하게 될 수 있다. 사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영혼 속에 아직도 죄악된 본성이 거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서 중생한 자에게는 영혼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동기와 죄악된 본성 사이의 싸움이 시작되며, 이 싸움에서 지게 될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성령께서는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회개케 하신다. 거듭난 신자의 영혼 속에는 죄를 짓게끔 하는 내적 동기, 즉 죄의 유혹을 수용하기 원하는 죄의 뿌리가 잠재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전 인류가 생래적으로 이어받은 성품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력(自力)에 의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요 동기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교만을 근본적으로 지적하여 회개케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헌신을 하게 하신다.

2. 구출 사역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곧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8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 때는 악령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는 성령의 사역이 많이 나타났다. 악령들이 쫓겨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중요한 표적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사와 이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은 권세 있게 전파되어갔다.

그러나 이 일은 단지 초대교회 당시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도 악한 영들은 자신의 존재를 은신하면서 온갖 궤계로 성도들과 교회를 공격해온다. 악령들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할 때는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 또는 귀신의 억압(demon oppression) 상태를 가져온다. 여기서 귀신 들림은 귀신이 인간의 영혼 속에서 역사할 때를 가리키고, 귀신의 억압은 영혼 밖에서 역사할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귀신을 쫓는 일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사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오해로부터 결국 영적 교만과 은사 사용의 그릇된 동기가 자라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다고 선포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마가복음 16:17

그리고 그 능력의 근원은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귀신 즉 더러운 영의 정체를 바로 알아 올바른 의식을 지니게 되면 더러운 영들은 더 이상 터전을 마련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선포할 때 더러운 영들의 영향은 우리의 의식과 삶에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3. 중생 사역
중생의 은혜는 성령의 사역과 직결된다. 성령 즉 보혜사(保惠師)란 헬라어로옆에 계시면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NIV 영어성경에는상담자’(Counselor)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말 성경에 나타나는 이 말의 한문의 뜻으로는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선생이라는 의미이다. 이 모든 성경에서 일치되는 것은, 성령은 곧 인격적으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제자들의 인격적 보혜사의 역할을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16:7)고 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가시고또 다른 보혜사”( 14:16)로서 성령이 오시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고 또 우리 안에 동거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육체로가 아니라 오직 영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위격(位格)을 통하여 오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그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오셨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따라서 성령께 이끌리는 삶,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곧 예수 믿는 삶의 실체이다.

내면의 성결과 더불어 은사와 능력도 함께


린세이 박사와 아르툴로
린세이 박사의 배려로 우리가 머물고 있던 숙소는 바람이 한번 불면 바람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지역이 원래 2,500m 고지인데다가 우리가 있던 신학교 건물은 그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결국엔 강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창문 유리창 두 장이 깨어졌다. 나와 아내는 린세이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유리 깨진 값을 물어드리자고 했다. 며칠 후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린세이 목사님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신다.
여기서는 원래 유리창이 자주 깨집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갈아 끼우면 됩니다.”
린세이 목사님. 멕시코에서는 유리 값이 비쌀 것이니 우리가 유리 값을 드릴께요.”

그러나 그는 한사코 손을 내저으시며 그럴 필요 없다고 하신다. 결국 우리가 졌다. 린세이 박사는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보다도 스페인어를 더 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페인어에 능숙하다. 그는 곧잘 스페인어를 성서 언어(Bible language) 또는 천국 언어(heavenly language)라고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이 언어의 거의 대부분이 헬라어와 라틴어로부터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도 몇 마디 쉬운 회화를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영어보다도 발음하기도 편하고 또 외우기도 쉬웠다. 한국인이 스페인어를 배우기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스페인어가 대부분아에이오우의 모음 구조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려면 의도적으로 혀를 굴려야 하는데 반해, 스페인어는 그저 편하게 발음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인이 스페인어를 발음하는 것보다 한국인이 발음하는 것이 원 발음에 더 가깝게 들린다고 하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린세이 박사의 아버지는 전혀 스페인어를 배워 본 적이 없었지만, 멕시코에 도착해서 반 년 동안 계속 스페인어 성경을 읽고 또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반 년 후에는 떠듬떠듬 설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린세이 부부와 우리 부부가 차를 타고 어느 세미나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무슨 얘기 끝에 린세이 박사가 내게 묻는다.
교수직을 마치고 나면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할 생각입니까?”
주님이 인도하시면 해외 선교사역에 몰두할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멕시코 선교사로 오십시오.”
그의 단호한 어조에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잠시 후 이렇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당연히 순종할 겁니다.”
아멘!”

린세이 박사 내외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 뭔가 좀 이상한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주님이 인도하시면 멕시코든 어디든 가겠다고 하는 뜻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분들은 멕시코로 내가 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아멘!’ 한 것 같다. 아무튼 주님 뜻대로 되리라. 이 분들은 내가 멕시코 생활에 아무 문제없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냥 흥겨워하는 듯 했다.

내게 있어서 멕시코 전통 음식이나 문화 그리고 언어 등이 비록 낯설고 서툴긴 했지만, 그러나 어색하게 느껴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나 자신이 더 잘 적응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첫째는 음식이 다 흥미롭고 맛있었다. 나는 밖에서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면, 멕시코의 전통 음식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먹어볼 양으로 새로운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둘째는 인간미다. 멕시코 사람들 참 정답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주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준다. 물론 만났다 헤어질 땐 뺨에 키스도 서슴없이 하고 말이다.

키스 말이 나왔으니 이 말도 좀 해야겠다. 내가 매번 강의를 끝내고 나면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다가와서는 뺨에 키스를 해준다. 처음에는 매우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강의에 은혜를 받은 학생들이 많았는지, 나를 포옹하고 키스해 주려고 길게 줄을 늘어섰다! 키스도 키스지만 포옹하는 것도 내겐 몹시 버거웠다. 그런데 이들은 존경하는 분에게는 더 깊은 포옹을, 그것도 아주 길게 해준단다. 어떤 젊은 여학생이 린세이 학장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낯이 뜨거워 순간 외면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하루는 린세이 박사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배 박사님. 아르툴로에 대해서 좀 드릴 말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나는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언젠가 내가 강의를 할 때 아르툴로 목사가 통역을 하는 가운데 학생들에게서 약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어쩌면 적절하지 못한 통역 내용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린세이 박사의 말은 아르툴로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나의 강의를 자기 식대로 통역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해석을 하는데 반해, 아르툴로는 은사주의적 경향이 매우 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의 강의를 통역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섞어서 한 것이다.

나는 린세이 박사와 함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우리가 지닌 기본적인 입장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며칠 후 린세이 박사는 아르툴로에게서 자신의 통역상의 실수에 대한 자백과 함께 앞으로는 오직 강의 내용대로만 통역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린세이 박사는 매우 복음적인 신앙과 신학을 갖고 계신 분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는 전통적 복음주의자로서, 열광주의나 은사주의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를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웨슬리안(Wesleyan) 성결론을 매우 사랑하시는, 보기 드문 웨슬리학자이기도 하다.

린세이 박사는, 내가 성령의 능력에 대해 더 강조를 한다면 자신은 내면의 성결에 대해 더 강조를 한다고 스스로 평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나 자신의 성령론을 평가한다면, 근본적으로 나는 내면의 성결을 강조한다. 그러나 단지 내면의 성결에서만 그치지 않고 은사와 능력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점을 또한 언급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린세이 박사는 은사와 능력 부분은 비록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면 나나 린세이나 내면의 성결에 성령론의 중심이 있다는 점은 공통점이고, 차이점은 나는 내면의 성결과 함께 은사와 능력을 또한 말한다는 것이고, 린세이는 내면의 성결만 얘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이렇다. 만일 내가 내면의 성결만 얘기하고 은사와 능력의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런 부분에 대해 올바르게 말해줄 것인가. 나는 마땅히 성령사역에는 은사와 능력의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은 내면의 성결에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래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내면의 성결에 목표를 둔 능력 있는 영성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느 날 아르툴로 목사와 함께 식사 자리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르툴로가 도통 음식을 들지 않고 물만 마시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런가 하고 물어봤다.
아르툴로 목사님. 식사를 좀 하지 그러세요? 혹시 금식 중입니까?”
, . 금식 중입니다.”
그는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좀 수척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은 더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배 박사님이 처음 강의하실 때 아프리카의 신학생들 얘기를 하셨죠? 그때 그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21일 금식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날부터 21일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난 그의 말에 감탄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금식하면서 제 강의 통역을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교수님의 성령론 강의 내용이 내 사역과 삶속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목표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 대신 그의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 나는 믿는다. 멕시코에 이런 신실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역자들이 있는 한, 진정 이 땅에는 부흥의 소망이 있다고.


성결의 능력이 없이는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


성령론 강의
나는 성령과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령의 인격성, 성령 충만의 실체, 성령의 은사와 나타남 등 성령론에 있어서 오류에 빠져들기 쉬운 주제들을 중심으로 강의해 나갔다. 특히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여러 성령론의 계보들을 정리해 주었는데, 이 강의는 특히 그동안 성령론에 관해 답답하고 궁금하게 여기던 사역자들의 여러 의문들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시간이 되었다. 다음은 이곳에서 한 달 동안 강의한 성령론의 요약이다.

1주제인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The Triune God and the Holy Spirit) 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성령의 관계성, 성령과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 그리고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 등 주로 삼위일체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성령의 위치에 대해서 조명하였다.

2주제인성령과 거듭남(Holy Spirit and Regeneration)은 인간의 영과 성령의 관계, 성령의 회개케 하시는 사역, 성령의 인격적 내주, 그리고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 강의를 통해 신학생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나 능력의 차원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다.

3주제인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성령 안에서의 연합, 성령의 열매와 성화의 삶, 성령의 인격적 통치,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목표로서의 그리스도 닮기(Christlikeness)에 대해서 강의하였다. 이 강의는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분명한 성화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었다.

4주제인성령과 성결’(Holy Spirit and Sanctification)에서는 인간 속의 죄와 성결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옛사람의 죽음, 성령께 대한 온전한 헌신,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서 다루면서, 성결한 삶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근거와 원리를 살펴보았다. 학생들은 이러한 성결의 능력이 없이는 누구도 승리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점에 모두 공감하였다.

5주제인성령 충만’(Fullness of Holy Spirit)에서는 성령 충만의 정의, 성령 충만의 목적, 성령 충만의 방법, 그리고 지속적 성령 충만의 길에 대해 다루었다. 특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올바르지 못한 가르침으로 인해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학생들은 이 주제에 대해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부분들을 질의응답을 통하여 해결 받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6주제인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에서는 성령세례의 정의, 성령론 논쟁, 성령세례론의 여러 유형, 성령세례의 양 차원, 그리고 성령세례의 능력의 능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주제는 성령론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논제에 속하는 것인데,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역시 성령세례에 관한 것이었기에, 나는 학생들의 신학적 의문점들을 확신 있게 답변해 줄 수 있었다.

7주제인성령의 나타남과 능력’(Manifestation of Holy Spirit and Power)에서는 성령의 능력과 복음 전파, 성령의 나타남, 그리고 성령과 방언과의 관계 등에 대해 다루었다.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제는 중남미 지역에서도 크게 일고 있는 것이라서 학생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상세히 다루면서, 아울러 은사 활용에 대한 지혜와 은사 사역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상기시켜주었다.

8주제인성령과 치유’(Hol Spirit and Healing)에서는 성령과 전인적 치유, 내적 치유, 성령과 꿈, 육체적 치유, 그리고 성령과 악령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았다. 치유나 귀신축출 등의 실행은 멕시코의 여러 집회에서도 빈번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나 사리사욕에 근거한 실행 등이 또한 많이 지적되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영성 사역에 있어서 무엇이 참이며 거짓인지 분명히 가려서 설명해 주었다.

9주제인성령론과 극단적 영성운동’(Pneumatology and the Radical Spiritual Movement)에서는 극단적 영성운동의 여러 유형들을 소개하고, 그 대표적인 유형들로서 극단적 혼합주의 영성, 극단적 갱신주의 영성, 그리고 극단적 분리주의 영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유형들은 현대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학생들은 여러 가지 실례들을 찾아 이들의 극단성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10주제인개신교 성령운동의 흐름’(Streams of the Protestant Spiritual Movement)에서는 16세기 칼빈의 성령론, 17세기의 청교도 성령론, 18세기 웨슬리의 성령운동, 19세기 미국의 성령 운동, 그리고 20세기의 오순절운동 등에 다루면서, 종교개혁 이후 현대까지 개신교 성령론의 주요한 흐름을 정리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학생들은 교회사의 흐름속에 복음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성령론들이 발생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1주제인한국교회와 성령운동’(Korean Church and the Spiritual Movements)에서는 한국인의 재래적 심성과 성령, 한국교회의 제 1,2,3기 성령운동, 21세기 성령운동의 방향 등 주로 한국적 성령론의 배경과 흐름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비단 한국교회 성령론의 흐름을 분석할 뿐 아니라 또한 멕시코의 사역 현장에 필요한 적용점을 찾는 진지한 시간을 가졌다.

12주제인성령의 주되심(The Lordship of Holy Spirit)은 앞으로 성령론의 발전 방향, 통전적 성령론, 성령의 주되심의 정의, 그리고 성령의 주되심의 삶에 대해서 결론지었다. 모두들 성령을 인격적인 주인으로 모시는 삶만이 경건생활의 핵심이요 능력 있는 사역의 비결이라는 것을 깨닫고, 힘써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참석자들에게 이번 성령론 강의 시간은 단지 이론만을 전수받는 시간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하심을 따라 회개의 영이 임하여 많은 이들이 참회의 눈물로 기도했다. 또한 성령께서 놀라운 치유와 성결의 은혜를 주심으로 새로운 삶과 사역의 헌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임함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할 멕시코 부흥의 주역(revival maker)으로서의 다짐을 모두들 새롭게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