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2011

[나이로 살기보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99℃사랑이 아닌 100℃사랑으로 살아라.
속담에『밥은 봄처럼, 국은 여름처럼, 장은 가을처럼, 술은 겨울처럼』이란 말이 있다. 모든 음식에는 적정 온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도 온도가 있다. 사랑의 온도는 100℃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99℃에서 멈춰 버린다.

기왕 사랑하려면 사랑이 끓어오르는 그 시간까지 사랑하여라. 계란후라이가 아닌 생명으로 살아라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생명(병아리)으로 부활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 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뱀은 그 허물을 벗지 않 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은가? 남이 너를 깨뜨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비참한 일 이다. 관습의 틀을 벗고, 고정관념을 깨뜨려, 매일 새롭게 태어나라.

돼지로 살기보다는 해바라기로 살아라. 돼지는 하늘을 쳐다보지 못한다. 넘어져야 비로소 하늘을 쳐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 해바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흐린 빛도 찾아내 그 쪽을 향하는데 있다.

나이로 살기보다 생각으로 살아라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 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생각의 게으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일이다. 나이로 보다 생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아라 생리적 나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정신적 나이, 신 체적 나이는 29살에 고정해 살아라.

인상파로 보다 스마일맨으로 살아라. 잘 생긴 사람은 가만있어도 잘 나 보인다. 그 러나 못생긴 사람은 가만있는 것만으로도 인상파로 보이기 십상이다. 너는 '살아 있는 미소'로 누군가에 기쁨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라.<자료:창골산봉서방>  

죽기를 각오함으로...

사도행전 22 : 22 ~ 29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강력한 반발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돌파하였습니까?

죽기를 각오함으로... 
사도 바울은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음을 언급하며 설교하였습니다. 이방인의 문제를 터치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였습니다. 이방인의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사도직, 소명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누군)가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누구)을 위해 죽기로 각오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목적, 가치관 등을 보여줍니다. 주를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헌신이 있었기에 그는 유대인들이 꺼리는 이방인 선교도, 배신자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 동족을 향한 섬김도, 강력한 힘을 가진 로마 군인들에 의한 체포와 구금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닥쳐옵니다. 위기가 없는 곳만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바울처럼 닥쳐오는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찾고 도전하며 돌파합니다.

로마 시민권을 주장함으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했던 천부장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소동을 부리자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사도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포악한 로마 군인들에 의해 고문을 당할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며 위기를 돌파하였습니다. 천부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자신의 결정을 인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위기를 당할 때에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드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지혜롭게 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선교의 현장에서 순교를 각오한 과감한 선교도 필요하지만 순교가 아닌 순교적 헌신을 지속적으로 지혜롭게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교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교회의 선교열기에 찬물을 붓고, 안티기독교의 불길에는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된다면 결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국내외 선교의 현장에는 무모함보다는 비상한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안주의 자리에서 약속의 땅으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90:16)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을 살리고 그 백성을 출애굽 시키며 이끌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모세는 무엇이 달랐고, 어떤 믿음을 가져서 그 시대에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첫째, 모세의 믿음을 견고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히11:27절).
우리는 항상 말씀보다는 내가 편한 쪽으로 삶이 움직이게 되고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모세는 편안한 자리에서 단호하게 떠나게 됩니다. 27절은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떠났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단호하게 떠났다는 것입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잡힐 때 그 꼬리를 떼버린 채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떠났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말씀을 의지했기에 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떠날 수 있었습니다(출 3:10, 12, 21∼22, 6:8). 우리 역시 단호하게 떠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이 들리는 것을 말합니다(요 14:26).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확신 못하는 이유는 무일까요? 첫째는 성경을 너무 안 읽어서이고, 둘째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지 않아서이며, 셋째는 말씀을 암송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단호하게 떠나려고 하면 세상은 타협으로 나옵니다. 사단은 물질에 있어서도 타협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모든 영적 타협의 협상에서 떠났던 것입니다.

둘째, 모세의 믿음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나의 치부나 나의 단점을 아는 사람에게는 두렵고 말이 잘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두려움보다 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세처럼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영적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시 118:8∼9).

셋째, 모세의 믿음은 구원의 길을 순종하면서 받아들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많은 불평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붙드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4장 13절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은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후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얼마 동안’ 떠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험과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동안 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며 구원의 길을 모세와 같이 걷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