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010

예언적 행동을 하라



예언적 행동에는 반드시 굳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예언적 행동은 단순한 행동에 불과하며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히브리서11:30절은 여리고 성이 믿음으로 무너졌다고 말씀한다.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예언적 행위- ‘예언적 행위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 용어가 암시하는 것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웹스터 사전은 예언적(prophetic)이라는 말을 예언자의 능력을 가진, 예언의 성격을 가진 또는 예언과 관련이 있는, 선언(先言)하거나 예견하는이라고 정의한다.

행위(action)라는 단어는 행해진 것, 행동, 포고등으로 정의된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해 보면, ‘예언적 행위라는 말은 예언자의 능력과 관련하여 행한 일이나 행위, 선언하거나 예견하는 행동, 포고를 뜻한다.어느 때는 성령께서 내가(우리가) 늘 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게 하시기도 한다. 성령께서는 내게 그분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가르치시거나 보여주실 때도 있다. 기도에는 서서 하는 기도, 걸으면서 하는 기도,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기도, 눈을 위로 향하고 하는 기도,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하는 기도 등... 이러한 기본적인 기도 형태에 익숙해지면 예언적 상징들, 하나님께서 때때로 유도하시는 특별한 기도의 행위에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되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언적 상징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휠씬 많이 사용하신다. 그 각각의 의미와 차이를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온전히 성령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라. 온몸과 마음과 영혼이 전적으로 집중하면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크게 성장하게 된다.
       
성경은 예언적 행위에 대해 많은 실례(實例)를 보여주고 있다. 그 하나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 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 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 갈지니라 하시매”(여호수아6:3-5)

여리고의 교 - 여리고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 숭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매술(靈媒術)을 행하고 있었다. 성은 무당들로 가득했다. 친숙한 영들과의 대화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악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취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셨다. 옛 세대는 광야 생활 내내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이 있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라나 새 세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이 그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다. 약속의 땅이 이들의 것이므로 이들은 이 성들을 반드시 취해야 했다. 첫 번째로 취해야 할 성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다. 
       
여호수아6: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승리를 보장하셨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성 안의 군대보다 강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여호수아의 군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해야 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실 때가 많다

1. 희년의 신호 - 이스라엘의 무기는 매우 특이했다. 그들의 무기는 칼이나 창이나 활이 아니라 소파르스(shofars)라고 하는 양각 나팔이었다. 나팔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다른 용도로도 쓰이겠지만, 양각 나팔은 주로 희년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나팔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리는 예언적 상징이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희년에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레위기25:8-22)
       
* 종들을 행방해야 했다 -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분의 백성이 영원히 속박 가운데 살도록 작정하지 않으셨다.
       
* 희년에는 땅을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했다. -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땅은 그분의 것이다. 여리고 성이 있던 땅은 이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 희년에는 빚을 탕감해주어야 했다. -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끝장내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실 것이다.

희년의 영적 성취는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 누가복음4:18,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희년이 도래했다고 선언하셨다. 이 땅에 사는 그분의 대리자로서,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이 땅에서 희년을 완성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이레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 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6:20)

2. 외경심과 힘을 실어 주는 나팔 소리 -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겠다고 말씀하신 일을 하셨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예언적 행동을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성벽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취하게 하셨다. 나팔 소리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나팔 소리는 원수의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나팔 소리는 들렸지만 이스라엘 군대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찌 할 바를 모른체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이다.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외경심과 힘을 실어주었다. 나팔이 울릴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것 같았으며, 이스라엘은 원수가 흩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68:1).
       
이런 예언적 행동에는 반드시 굳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예언적 행동은 단순한 행동에 불과하며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30절은 여리고 성이 믿음으로 무너졌다고 말씀한다.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11:6).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으며,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약속을 받는다. 예언적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목격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9:23,24).

기드온의 모범 - 우리는 기드온에 관한 기사에도 또 다른 예언적 행동을 찾아 볼 수 있다(7:16-21). 미디안과 아말렉의 연합군이 기드온과 그의 300용사와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8:10).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적진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미 승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기드온은 이 승리를 얻는 데 몇 가지 예언적 행동을 취했다.

1. 소리 - 기드온은 소리를 사용했다. 기드온의 용사들은 모두 가능한 가장 큰 소리로 나팔을 불어야 했다. 또한 용사들은 동시에 항아리를 깨뜨려야 했다. 이렇듯 예언적 행동과 관련한 첫 번째 부분은 소리와 관련이 있다.

2. 가시화(可視化)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볼 수 있는 무언가를 사용하기도하신다 항아리들이 깨지자 횃불이 나타났다. 적진에 나타난 횃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상기시켜준다(왕상8:10,11). 기드온은 빛을 사용하여, 어둠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원수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적 행동의 가시화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의인들에게는 놀랍고 멋지지만 원수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영광의 구름은 빛, 구름, 번개, 천둥, 푸른 하늘 등으로 되어 있다.

3. 외침 음성과 관련이 있다. 기드온의 용사들은 큰 소리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다(7:18-20). 사람들은 때때로 조용히 기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큰 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마리아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종들에게 한 말이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면 우리는 그대고 순종해야 한다.


전략적 선포


에베소서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알게 하다(known) 는 단어는 그노리조(gnorizo)라는 헬라어 동사에서 왔다. 이 단어는 증언하다, 선언하다, 알리다, 이해시키다, 알게 되다, 발견하다의 뜻이다. ‘알게 하다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정사와 권세에게 선포하는 데 교회를 사용하시라는 뜻이다.       
       
사탄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선언한다는 것은 사실 예언적 선포를 하는 것이다. ‘선포하다(proclaim)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라’(qara)이다. 카라는 외치다, 불러일으키다, 울면서 호소하다, 초대하거나 전파하다라는 뜻이 있다. 주로 구체적인 대상에게 말할 때 사용되며 구체적인 반응을 끌어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아무 목적 없는 고함이나 외침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선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럿 있다. 그 중 하나는 카타겔로’(katagello)인데, “말하다,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또는 큰 소리로 선언하다는 뜻이다. 카타겔로는 정보 제공이나 격려의 의미를 갖는다. 성만찬의 결과 가운데 하나를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선포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죽음에 관해 선포하는 일이 된다. ‘선포하다에 해당하는 또 다른 헬라어는 케루소(kerusso)인데, 이것은 훨씬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케루소는 전령이 되다는 뜻이다.
       
전령은 신적(神的)인 진리를 전달하는 공적인 위치를 말한다. 이 전령이 전하는 메시지는 순종을 요구하는 공적이며 권위 있는 선포였다. 우리가(당신이) 지금 전하고(케루소) 있다면 당신은 공적으로 선포하는 전령과 같다. 이 선포는 일정한 권위를 지닌다. 권위 있는 선포를 들은 자들은 그 선포에 순종하다.

전령 - 대 도시에는 전령(town crier, 옛날 큰 소리로 포고를 알리던 고을의 관원을 말한다)이 없다. 우리에게는 정보를 전달해주는 신문과 잡지, 텔레비전, 인터넷과 이메일이 있다.

1. 수행원과 친구 - 헬라문학은 우리에게 공적인 전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공적인 전령은 군주의 수행원, 즉 그을 위 해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수행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수행원들과는 달리 전령에게는 왕의 친구와 비슷한 존경과 지위가 주어졌다.

성도인 우리는 평화의 왕을 섬긴다. 평화의 왕 예수께서 우리를 전령과 같은 위치로 높이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15)

예수께서는 주님의 백성인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또 아버지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알리다(알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베소서3:10절에 사용된 단어와 같다. 이것은 중보기도자들인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예수께서 아버지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겠다는 뜻
② 그 다음으로 중보기도자들은 예수께 받은 정보를 예언적인 선포를 통해 악한 권세들에게 알린다
③ 우리의 외침은 의미 없는 고함이 아니다
④ 우리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를 예수께 알리신다 - (그노리조)
※ 예수께서 아버지의 의도를 교회에 알리신다 (그노리조)
※ 교회는 선포(케루소)를 통해 하나님의 의도를 악한 권세들에게 알린다 (그노리조)
※ 그 결과는 무엇인가? 대변혁, 영적 도약, 영적 약진이다!

2. 왕의 대리자 - 전령은 왕의 수행자이자 친구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전령의 홀()이 주어졌다. 전령의 손에 홀은 그가 임무를 수행 중이며 왕의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바꿔 말하면, 왕은 전령에게 자신의 권위를 위임하여 임무를 수행토록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 중에서 다스리소서(11:1,2)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순간 예수께서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잃어 버렸던 권세를 되찾으셨다. 그리고 회복한 그 권세를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당에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선포란 매고 명령하며 푸는 성격이 있다. ‘매다라는 단어는 사슬이나 끈으로 단단하게 묶거나 조인다는 뜻이다. 중보기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적 선포는 마치 사슬이나 끈으로 동물을 묶듯이 악한 권세의영 향결박하는 능력이 있다. ‘풀다는 동사는 느슨하게 하다, 끊다, 무너뜨리다, 녹이거나 벗어버린다     는 뜻이다. 이 단어는 최소 입자로 분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화학에 대해서 모르지만, 물의 분자식은H2O인데, 이것은 수소 원자 두 개에 산소 원자가 하나라는 뜻이다. 물의 쓰임새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많다. 물이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를 분리시키면 물은 없어지고 만다. 여기서 수소와 산소를 분리한다는 것은 최소 입자로 분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입(원자)들은 물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 도시에서 어둠의 권세를 분리시킨다는 것은 마치 과학자가 수소와 산소를 분리시켜서 물이 물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똑 같은 일이다. 물은 더 이상 물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중보기도의 능력으로 원수는 더 이상 자기 본래의 의도를 이룰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 아담은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 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다시 한번 갖게 되었다.

3. 보호받는 전령 - 전령의 세 번째 모습니다. 헬라인들은 전쟁터에서 절대로 전령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전령에게 손을 대는 것은 그를 보낸 사람이나 그의 신들에게 손을 대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 중보기도자의 안전장치는 예수님의 능력의 피에 대한 믿음이다
* 중보기도자들은 하나같이 영적 전투에서 막중한 책무를 맡은 자들이다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보내신 자들에게 홀, 즉 권세의 막대기를 주셨다. 예수님의 보혈이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한다고 했다(3;3). 우리도 육체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신뢰할 대상은 예수님의 피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 6장에 열거된 영적 무기도 주셨다.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전령의 특성 모든 전령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권세 아래 있다 - 전령의 첫 번째 특성은 언제나 다른 이의 권세 아래 있다는 점이다. 전령은 대변인 일 뿐이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우리는 그분의 대변인이 된다.
* 중보기도자들은 언제나 그 권세 아래 있어야 한다.
* 순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할 뿐 아니라(4:7) 땅 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순복해야 한다(벧전5:5).

세상에서 보호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사도 바울은 자주 모 교회(母敎會)로 돌아가 전도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는 보호 받고 있었던 것이다.

2. 주인의 메신저이다 - 전령은 주인의 메시지와 의도를 전달한다. 전령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서는 안 된다. 메시지를 받는 사람과도 타협할 수 없다. 전령은 다만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3. 법적인 선포자이다 - 전령은 법적인 판결을 선포한다. 선언하는 내용은 선포의 행위에 의해 효력을 발한다. 미국 법정에서는 배심원단이 피고에 대한 평결은 내린다. 그 평결은 판사에게 전달되고 판사가 평결을 선언하면 비로소 효력을 갖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장차 세상을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전6:2). 한편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예수님께서는 판결을 중보기도자에게 맡기신다. 그러면 중보기도자는 악한 권세들에게 예언적 선포를 전하다. 판결은 중보기도자의 선포를 통해 효력을 발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10:27)

예언적 중보기도로 승리의 교두보를 구축하라


중보기도자들이 예언자는 아니지만, ‘예언적 기름부음(Prophetic anointing)은 받을 수 있다. 우리는(성도들을 권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예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4:31). 예언적 기름 부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소리)으로, 그분의 마음과 뜻과 목적을 대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4;1)
       
때로는 나는 새벽에 갑자기 잠이 깼다. 마치 전혀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정신이 말짱했다. 내 자신이 어리둥절했지만, 말짱한 정신으로 새벽에 깬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는다. 때로는 찬송으로 그러나 많은 때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오직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힐 때가 더 많았다. 
       
누군가가 이 시간에, 나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느낌에 사로 잡혀 안절부절 할 때도 있었고... 무엇을 ... 어떻게 누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 할 지 모르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의 영으로(방언기도) 한참 기도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위기가 지나갔다고 느껴지면... 다시 잠자리에 들곤 했다.
            
선한 목자 - 없지만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있다. 이러한 일이 자주 있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기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도와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며, 그분의 모든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때로는 이런 유형의 기도를 예언적 중보기도라고 한다. 예언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prophe teia)인데,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보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툭시스’ enteuxis)이다. 엔툭시스는 대화하기 위해 만나다라는 뜻이다. 엔툭시스는 중재를 위해 왕을 알현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2:1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도고로 표기됨)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을 구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중보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이타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두 단어를 합친 예언적 중보기도의 뜻은 다음과 같다.
* 영적 대화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
*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성경으로 그 음성을 분별하여) 그분의 마음과 의중을 말하는 것


선포하는 것
하나님의 의중 파악하기 -  중보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마음과 의중을 파악한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뿐, 하나님의 의중은 전혀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분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큰 도약을 이룰 수 있다.
       
예언적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진다(1:26-28). 시편기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놀라운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 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시편8:4-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 땅 위에 자신의 대리자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어 그분의 피 값으로 첫 사람(아담)의 실패를 구속(救贖)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은 비록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거듭나고 그 마음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는 계획,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계획은 미래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2;8,9).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지금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하는 특권을 주셨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특권, 그러나 죄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는 특권까지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2:15)

우리의 책임 -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책임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일을 하도록 계획하셨다. 타락 전에 노동은 벌의 형태가 아니라 성취의 한 형태였다. 일이 고되고 힘들게 된 것은 타락 이후이다.(3:15-17). 에덴 동산은 잡초를 뽑아줄 필요는 없었으나 보살필 필요는 있었다. 가시와 엉겅퀴도 아직 귀찮은 정도는 아니었다. 동산은 손질과 관리가 필요했다. 동산을 보살피는 하나님의 청지기인 인간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었다.

1. 경작하는 일 -  번째 책임은 동산을 경작하는 것이었다. ‘경작하다(vate)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드’ (abad)이다. 아바드, 경작하다는 말은 섬기다, 쟁기질하다, 예배하다, 예배하게 하다는 뜻이 있다. 다스림을 제사장의 역할로 묘사한다면, ‘특별한 의미에서, 아바드는 레위기의 문맥에서 여호와를 섬긴다는 뜻이다”. 호세아 10:11절은 유다가 밭을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중보기도자인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스린다는 것은 동산을 간다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마음의 밭을 갈아 마음을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게 한다. 중보기도자인 우리는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마음 문이 열려 하  나님을 인정하며 예배할 수 있게 된다.

2. 지키는 일 - 에덴동산에서의 두 번째 책임은 지키는 일이다. ‘지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마르’(shamar)이다. 조드히아테스는 샤마르억제하다, 경계 내에 묶어두다, 가시 같은 것으로 주변에 울타리를 치다, 양이나 소떼를 지키다, 예언자로서 보호하다로 정의한다
       
아담은 특히 기존의 에덴동산 경계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2:15). 그는 파수꾼이 양떼나 소떼를 지키듯이 동산을 지켜야 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동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바꿔 말하면, 그는 파수꾼으로서 동산을 아주 세심하게 돌봐야 했다.        
       
성경에서 파수꾼이란 적인 성()을 공격하려 하는지 감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성벽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왕께 알려야 했다. 특별히 추수기에는 파수꾼에게 또 다른 역할이 주어졌다. 들판과 포도밭을 지키는 일이었다.
       
중보기도자인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리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중보기도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가정, 이웃, 국가 등... 이러한 자리에 가시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쳐서 원수의 접근을 막아야 한다.

회복된 직무 기도자들이 예언자는 아니지만 예언적 기름부음’ (prophetic anointing)은 받을 수 있다. 우리는(성도들을 권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예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4;31). 예언적 기름 부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소리)으로, 그분의 마음과 뜻과 목적을 대변할 수 있게 해준다.
       
위기의 순간에 성령께서 중보기도자들을 깨우실 때 그들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자주 일어난다.
* 지금 나는 단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 나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나 이 상황을 돌보시리라고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 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불신앙의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실 때
1. 우리의 마음과 원수(사탄)는 우리의 귓전에 중보기도를 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2.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3. 우리의 영()이 깨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신 일을 놓치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의 소리가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 후에 세례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1:23)고 외쳤다. 중보기도의 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례 요한 처럼 하나님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하나님의 회의 실로 들어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4:1)

회복된 인간 하나님이 성숙한 아담을 그 회의실의 일원이 되도록 계획하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담의 거역과 타락으로 그는 이 계획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자들에게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라고 명하신다. 이들은 성삼위(聖三位)의 회의실에 들어가야 한다.

구약시대의 여러 사람들이 이 회의의 임시 회원이었다.“구약에 나오는 몇몇 성도들은 하나님의 회의의 대표 회원이자 예언자들이다. 첫 번째가 아브라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멸망을 말씀하실 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7)고 자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님의 계획을 들려주시고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다. 나머지 이야기는 모두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서열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공경하는 자세로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분명히 말씀 드렸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20:7). 하나님의 회의의 회원으로서 선지자 아브라함은 회의장에서 탄원이나 청원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대표 회원은 모세이다.

그는 예서 언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이며(12;6-8), 세례 요한 이전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회의에서 정보를 얻었고 그 회의의 결정을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시내 산을 오르내리면서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회의장에서 강하게 논쟁했으며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놓기 까지했다. (32:7-14, 30-35; 14;13-19)
       
모세는 자신만이 선지자가 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선지자로 세워주시길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경영하길 원하셨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하셨다. 인간은 주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예배하고 싶어하도록 동산 경작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왕으로서의 인간의 역할이 포함되었다. 인간은 동산을 지켜야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침입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동산을 지켜야 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은 그들을 선지자(예언자)의 음성으로 삼는 것이었다. 인간은 중보기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과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하늘 회의의 결정 사항을 선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나라를 원하셨다.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가 바로 그런 세대이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13;36).고 했다. 우리 세대에 대해 장래의 역사도 이렇게 기록된다면 더 없이 좋지 않겠는가?

원수를 제압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라


하나님께서는 늘 깨어 계시며, 자신의 말씀을 종들의 입에 두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으로 사용하시게 하라. 원수가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에게서 성령이 흘러 넘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의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29:3)

한 인간이 기도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는가? 모든 중보기도자들이 같은 권세를 가지는가? 결국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뜻하는 바는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달을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세상과 개개인의 삶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살기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하루 즐기며 산다. 교회도 우리가 왜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지 깨닫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죄를 범해왔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성경 첫머리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6-2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셨다. 다른 모든 만물을 먼저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꼭 그대로의 하나님의 형상이시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과 비슷하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존귀를 인간에게 입히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과 영, 하늘과 땅을 연합시키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은 이 땅에서 그분의 대리자로 서야 한다. 하나님의 대사인 인간은 이 땅에서 대리자의 권세와 지배권을 부여 받았다.  더치 쉬치는 그이 저서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에서 창세기1;26-28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였다. 하나님과 너무 닮은 나머지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환영처럼 비치게 했다.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인식되었는데, 이것은 아담이 이 땅에서 영향력 있는존재였음을 의미한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그분의 뜻을 이 땅에 나타냈다. 아담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자 또는 경영자였다. 땅은 아담에게 맡겨진 구역으로 아담의 책임 아래, 보호 아래 놓여 있었다. 아담은 파수꾼 혹은 관리인이었다. 이 땅이 더 좋아지느냐?  나빠지느냐? 하는 것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달렸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아담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발하거나 대변인 역할, 더욱이 그분의 성품과 권위도 나타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타락에 대한 기사를 들려준다. 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명령을 의식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어겼다. 타락의 결과로 우리는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해버렸다. 고로 하나님과 인간은 분리되었다.

회복 -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사 아담과 하와에게 구속과 회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어느 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3:15).

이 약속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8,19).
       
예수께서는 새 언약을 개시하러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언약을 통해 일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회복의 길이 열렸다. 인간은 거듭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가 된다.      

현대의 중보기도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서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는 틈을 메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개인과 도시와 나라들을 회복시키시기를 위해 틈을 메울 사람을 찾으시지만 이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고 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22:30).

틈 메우기 - ‘균열은 같은 뜻이다. 적의 공격으로 성벽이 무너졌을 때 그 틈을 메우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성경은 성벽을 수리해야 할 때에 거짓 선지자들은 정작 코빼기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되어 성벽 수리에 따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틈을 메우고자 했다(시편106:23).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통해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틈을 메우고, 벽을 수리하실 수 있다. 그 일을 통해 예수께서는 인간이 잃은 것을 다시 사셨다. 또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인간의 법적 권리를 회복시키셨으며, 그것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대리자란 에스겔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틈을 메우려고 찾고 계시는 그런 사람이다. 웹스터사전은 균열’(breach)깨짐 또는 깨져서 벌어짐, 법이나 약속을 지키지 못함, 위반, 침해, 벽이나 수비 라인에서 돌파하여 열림, 깨지거나 찢긴 곳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틈을 메우고 중보자의 역할을 할 중보기도자들을 세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바로 당신과 나다. 우리는 이 땅이 치유 되도록 돕는 하나님의 음성이 될 것이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 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시편 58:12)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틈을 메우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영감 있는 말을 하는 데도 쓰임 받을 수 있다. 시편 29편은 하나님의 음성(소리)이 이루어내는 많은 것들을 말한다시편12:3-9.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殿)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큰일을 이루는 자신의 능력을 우리의 말에 두고 계신다. 요한복음7장의 말씀처럼, 성령이 우리를 통해 강처럼 흘러 넘친다.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8,39)

생수의 강은 하나님의 음성이 흐르게 하는 수단이다. 시편 29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음성이 물 위에 있다. 그 다음으로 그분의 소리가 중보 기도자들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생수의 강물 위에 있다. “폭풍을 꾸짖으신 후, 예수께서는 폭풍을 꾸짖어야 했다는 것을 암시하시면서 그들의 두려움과 불신앙을 꾸짖으셨다. 예수께서는 또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우리가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영감 된 선언의 힘을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된다

시편29편에는 하나님의 음성(소리)이 하는 일들이 여럿 열거되어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소리가 부순다는 표현이다.

부수다(break)’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바르(shabar)의 몇 가지 유력한 예는,‘산산 조각내다, 잘게 부수다, 잘게 찢다(야생 곰처럼), 무터뜨리다, 멸망시키다(왕국이나 도시나 민족을), 참회하며 비탄에 잠기다(, 깊이 뉘우치다), (자궁이)갑자기 열리게 하다(, 아기가 나오다)’샤바르에 대한 정의를 보면, 중보기도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음성이 한편으로는 악한 일들을 무너뜨리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들이 마음을 찢고 회개 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분의 백성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목적을 낳을수 있도록 태를 열 수도 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그 백성들이 머고 마시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율법판을 깨뜨렸다’(샤바르,32:19). 거짓 신들의 제단이 샤바르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다(왕하18:14; 23:14. 대하34:4). 이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소리가 생수의 강을 타고 흐를 때 어둠의 일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어둠의 일들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하는 수많은 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흔들기도 한다. ‘흔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추불’(chuwl)이다.
       
추불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두려워하다, 고통으로 떨거나 겁에 질리다, 분만 중이다, 아이를 낳다, 생산하다, 낳게하다
       
하나님의 음성은 원수를 두렵게 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원수가 겁에 질려 고통하며 떨게 만든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은 생산하거나 낳는 능력이 있다. 그분의 음성은 우리의 수고의 열매를 낳는다. 분명 우리가 영적인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더 많이 기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즉각적인 응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깨가 얼마나 많은가. 다니엘이 응답을 받는 데 21일이 걸렸다는 것을 기억하라(10;12,13) 때때로 우리가 한 중보기도가 응답되기 까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야 할 때 - 나님께서는 언제나 원하시는 때에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들어 보았는가? 그러나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중보기도자들에게 잇사갈의 기름 부음을 주셔서 시세를 알게 하실 것이다.(대상12:32).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실 준비가 되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이루실 준비가 되면 그 말씀을 중보기도자들의 입에 두신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 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1:9-12)

여기서 지켜’[watching]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샤카드(shaqad)인데, 이 단어는 깨어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다, 방심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깨어 계신다. 그분은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입에 두신 말씀을 행하시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방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살구 나무를 보여주셨다. 왜 보여주셨는가? 살구 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카드와 스펠링이 비슷하다. 모든 나무 가운데 살구 나무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그래서 히브리적 사고(思考)로 살구 나무는 깨우는 자로 이해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방심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살구 나무를 보여 주신 것이다. 살구 나무가 깨우는 자의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늘 깨어 계시며, 자신의 말씀을 종들의 입에 두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을 사용하시게 하라, 원수가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에게서 성령이 흘러 넘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예언적 중보기도 이렇게 하라 예언적 중보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마음과 의중을 파악한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뿐, 하나님의 의중은 전혀 파악하지 못할 때다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하고, 그분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분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큰 도약을 이룰 수 있다. 예언적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