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2009

지식의 말씀의 은사3

지식의 말씀-유익한 점

1. 상대방의 죄악을 지적하여 회개시킨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통해 그들을 전도하신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회개 촉구와 전도에 유익한 은사이다.

2. 상담과 치유사역에 유익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부끄러워서 본인 스스로 드러내 놓기를 꺼리는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본인도 잘 모르는 유아시절의 사건, 태중의 사건, 조상들의 죄를 알게 해주신다. 이렇게 하는 상담과 치유를 어떤 사람들은 <예언적 기도 & 상담>(prophetic prayer & counseling)이라고 한다.

3. 중보기도에 유익하다.
지역의 주된 죄악과 지역을 사로 잡고 있는 영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다. 오늘날 중보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미리 기도 제목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실 수도 있다( 36:37; 1:5, 8, 11). 하나님이 기도 제목을 미리 주셔서 구하게 하는 것은 <예언적 기도 또는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prayer or prophetic intercession)라고 한다.

주의! 지식의 원천이 사람, 마귀 및 하나님일 수 있고 또한 틀릴 가능성도 있으므로 반드시 옳고 그름의 분별과 영 분별을 해야 한다

<구요한 목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2


지식의 말씀
1. 성경의 예
.숨은 사울을 찾아낸 사무엘(삼상 10:22).
사무엘은 사울이 행구 사이에 숨은 사실을 알았다.

. 주의 종에게 미리 기름부은 엘리야(왕상 19:14-18).
하사엘, 예후 및 엘리사에게 미리 기름을 부어 사역자가 되게 했다.

. 아람왕의 전략을 알아낸 엘리사(왕하 6:9-12).
엘리사는 아람왕의 모든 전략을 알아내었다. 그러자 엘리사를 치기 위해 아람왕이 많은 병거와 군사를 보냈으나 엘리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환인 게하시가 두려워하자 그는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방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했다.

.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아낸 경우.
-
사무엘이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한 사무엘(삼상 9:19),
-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아신 예수님(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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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이 간사함이 없고 무화과 나무 아래 쉬고 있는 모습까지 보신 예수님( 1:47-50).).
-
사마리아 여인의 남성 편력을 알아맞히신 예수님( 4:18).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을 알아낸 베드로( 5:3, 9).
-
고기의 입에 돈 한 세겔이 있음을 아신 예수님( 17:27).
-
시몬의 검은 속마음을 안 베드로(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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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울)이 직가에 거주하며 자신이 올 것까지 알고, 주의 사자가 되어 고난을 받을 것까지 알게 된 아나니아( 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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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이방인이 찾아올 것을 안 베드로( 10:17-23).
-
귀신의 종류를 알아맞힌 예수님( 9:25).
-
그러나 때로는 말씀을 주시지 않을 때도 있다.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엘리사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왕하 4:27).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니다.

2. 지식의 말씀-임하는 방법
지식의 말씀이 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 환상, 꿈이나 말을 통해. - 어떤 사람의 신체의 부분을 보거나 어떤 단어나 문장을 보거나 듣기도 한다
. 내적 음성이나 세미한 음성을 통해.
. 신체에 어떤 감각을 느끼거나 통증을 통해. 그 사람에게 어떤 병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갑자기 어떤 능력이 임하는 경우. 손이나 신체의 어떤 부분에 열, 전류 등을 느끼는 경우.
. 어떤 생각을 통해 그냥 알게 되는 경우.
. 자기도 모르게 어떤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경우.
. 환상이나 꿈에 보이는 글자나 단어를 통해
. 은사자만이 아는 독특한 방법을 통해

지식의 말씀-유익한 점
1. 상대방의 죄악을 지적하여 회개시킨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통해 그들을 전도하신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회개 촉구와 전도에 유익한 은사이다.

2. 상담과 치유사역에 유익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부끄러워서 본인 스스로 드러내 놓기를 꺼리는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본인도 잘 모르는 유아시절의 사건, 태중의 사건, 조상들의 죄를 알게 해주신다. 이렇게 하는 상담과 치유를 어떤 사람들은 <예언적 기도 & 상담>(prophetic prayer & counseling)이라고 한다.

3. 중보기도에 유익하다. 지역의 주된 죄악과 지역을 사로 잡고 있는 영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다. 오늘날 중보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미리 기도 제목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실 수도 있다( 36:37; 1:5, 8, 11). 하나님이 기도 제목을 미리 주셔서 구하게 하는 것은 <예언적 기도 또는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prayer or prophetic intercession)라고 한다.

주의! 지식의 원천이 사람, 마귀 및 하나님일 수 있고 또한 틀릴 가능성도 있으므로 반드시 옳고 그름의 분별과 영 분별을 해야 한다

<구요한 목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1

지식의 말씀(로고스 그노세오수)

1. 정의
지식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관한 사실들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계시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학문이나 어떤 체계적인 지식이라기 보다는, 단편적인 지식(a piece of information) 즉 정보나 첩보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투시의 은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미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도 아니다

-
이것은 사람이나 환경에 대한 사실을 드러내는 초자연적인 계시인데, 자연적인 마음의 노력을 통해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단편적인 지식으로서 성령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진리를 드러낸다(David Pyrches).

-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인데, 이는 몸의 성장과 복지와 관련된 정보와 아이디어들을 찾고, 축적하고, 분석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C. Peter Wagner)

-
지식의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계시된 지식을 초자연적으로 받는 능력을 말한다(Bobby Clinton).

2. 지식의 말씀- 지식의 원천
3가지 원천 즉 사람, 마귀, 하나님이 있다.

. 인간의 지식(고전 2:14). - 학문, 직관, 과학을 통해 얻는 지식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 성령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기록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 타락한 세상에 속한 초자연적인 지식. 마귀의 지식 - 무당점, 운세, 토정비결, 점성술 등을 말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연약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지식을 사모한다. 마귀는 인간의 이런 욕구를 이용하여 사람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물론 이런 것은 성경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문명, 과학화, 산업화, 기계화로 인해 비인간화된 사람들은 더욱 이런 것들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이런 욕구를 채우시기 위해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고도 할 수 있다.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더욱 초자연적인 은사를 사모하고 권장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 - 진정한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더 가지기 위해 성경 말씀 공부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 은사로서의 지식의 말씀 - 이런 지식은 공부나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초자연적, 즉흥적, 일시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구요한 목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3

1. 성경의 예

가 요셉  -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의 관리들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기화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 대비책을 제시함으로써 죄인인 노예의 신분에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입었다. 요셉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작동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41:38-41).

나 솔로몬 -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허락하셨으며 솔로몬의 지혜는 아들의 친 엄마를 찾아주는 재판에서 절정을 이룬다(왕상 3:16-28).

. 예수님 - 바리새인과 제사장의 무리들은 걸핏하면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지혜를 발휘하여 슬기롭게 대처해갔음을 알 수 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 도전하셨을 때( 21:23-27), 세금 문제로 궁지에 빠뜨리려고 했을 때( 22:15-22), 예수님은 지혜롭게 대답하심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셨다.

. 제자들에 대한 당부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하셨지만 또한 임박한 핍박을 경고하시면서 그때 대답할 말을 줄 것이니 염려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21:15).

2. 지혜의 말씀-실제적 효과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다. - 특히 부정적인 예언, 부정적인 지식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제공해 준다.

. 치유사역 시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 상황을 따라 내담자가 기분이 상처 받지지 않고 치유사역을 받을 수 있게 하거나, 원수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는 지혜를 주신다.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예언의 말이나 지식의 말씀을 잘 전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줄 방법을 제공해 준다.

3. 지혜의 말씀-임하는 방법
. 말이나 생각으로 오는 경우.
 -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통해 받은 말씀을 제대로 잘 전하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생각이나 말(성경의 구절 포함)로 오는 경우가 많다.

. 기분이나 느낌으로 오는 경우. - 어떤 경우에는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은사를 통해 받은 정보나 예언을 전하려고 할 때 (성령이) 금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나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아직 본인에게 전할 때가 되지 않았거나 본인에게 직접 전하지 말고 중보기도 해주라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4. 지혜의 말씀-받는 방법

.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주신다.

.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전 14;1; 7:7, 11이하; 1:5).

다. 은사자를 통해 전수된다(롬 1:11). 

<구요한 목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2

1. 지혜의 원천
지혜란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
웹스터 영어사전]은 지혜를 이렇게 설명한다.

1). a.
축적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식 :지식 b. 내적 특성과 관계를 분별하는 능력 : 통찰력 c. 훌륭한 분별력: 판단 2. a. 현명한 태도나 행동 3. 고대 현인들의 가르침.

이응백 [국어대사전]은 지혜가 곧 슬기라고 하는데 슬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아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정확하게 가려내는 능력. . 지혜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재능.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지혜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만은 아니다.

2. 지혜의 종류

. 사람의 지혜, 곧 세상 지혜가 있다. -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지혜, 세상 만사를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세상 지혜 또한 하나님이 주님 지혜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나 세상 일 처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열심과 성의는 있지만 지혜롭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0:16).

. 마귀의 지혜가 있다. -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서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사역을 흉내내어 결국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전 11:14).

그러므로 신자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서 마귀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다. -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사모하고 구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마귀가 주는 지혜를 구분하는 방법은 야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 3:13-18).

마귀가 주는 지혜는 독한 시기, 다툼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도 구분이 필요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며( 2:3),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이자 지식이며(고전 2:7), 잠언이나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이미 밝혔듯이 다른 기적행하는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즉흥적, 일시적, 상황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의 여러 가지 올무를 지혜롭게 넘기신 예수님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지혜나 사람의 지혜와 두부자르듯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위기나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게 하실 수 도있기 때문이다. <구요한 목사>

지혜의 말씀1(로고스 소피아스)

1. 정의 -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먼저 개별적으로 살펴본 후 연관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란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같은 계시의 은사를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특정한 문제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어떻게 내릴까에 대한 슬기나 지혜를 말한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렵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잘 대처할 수 있는 기지나 슬기를 제공한다. 몇 가지 정의를 보자.

-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어진 계시(지식의 말씀, 예언)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어떻게 가장 잘 적용될 것인가, 또한 어떤 주어진 상황이나 필요가 어떻게 해결되거나 도움을 받거나 치유될 것인가에 대한 즉각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다(David Pytches).

-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인데, 그들은 이를 통해 성령의 마음을 잘 알아서 주어진 지식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필요들을 위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통찰력을 얻는다( C. Peter Wagner).

2.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설교의 은사 - 한편 일부에서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지혜의 말씀은 설교하는 은사, 지식의 말씀은 가르치는 은사로 이해한다.

고린도전서 문맥으로 볼 때, 복음은 세상 지식이나 지혜와 비교하여 훨씬 더 뛰어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기 때문에(고전 2:1-2, 4-5), 이 은사는 지식의 은사와 더불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과 관계된 은사라는 주장이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이 은사들은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은사들이다. 즉 기적행하는 9가지 은사들은 모두 즉흥성, 일시성, 상황성이 강한 은사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력이나 준비를 하여 행하는 설교나 가르침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바비 클린톤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으로 불리는 이 은사들은 은사들이 기록되어 있는 다른 구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 은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이나 이런 은사들을 예증하는 직접적인 구절들도 없다. 몇몇 가능성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 . . 이 두 가지 은사는 ". . . 의 말씀"이라는 공통적인 구()로 인해 기능이 유사하므로 같이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 . .

지혜와 지식이란 단어 앞에(원문에는 앞에 있음) 로고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은사들은 성령이 그 순간에 주시는 상황적인 교신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해 지식이 많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상황을 위해 지식이나 지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말씀"(a word)을 말한다."

따라서 클린턴은 지혜의 말씀을 이렇게 정의한다.
-
지혜의 말씀은 주어진 상황에서 성령의 마음을 알고, 그 상황, 사실, 진리 및 상황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실과 진리의 적용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어떤 능력을 말한다<구요한 목사> 

은사의 사용

어떻게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

. 사랑의 동기로 사용해야 한다. - 특히 기적행하는 은사는 은사자를 교만하게 만들기 쉽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은사를 뽐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겨 교회에 갈등을 초래했다.

성령이 은사를 주신 목적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는 은사의 종류를 말한 후에 고전 13장에서는 은사를 사용하는 동기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한다(고전 13:1-3).

많은 사람들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므로 사랑의 은사를 구할 것을 강조하면서 기적행하는 은사를 구하지 않는 것을 은근히 정당화한다. 더 좋은 사랑의 은사가 있는데 보다 못한 기적행하는 은사를 굳이 구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으뜸 되는 계명이자(22:37-40), 성령의 열매( 5:22)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31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할 것을 강조한 후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동기로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고전 13 1-3절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가 있더라도 사랑의 동기에 의해 사용하지 않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같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은사가 조금 있다고 하여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마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인양 착각하고,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교만한 사람들을 볼 때 "은사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랑이 있어야지"라는 말을 자주한다. 고전 12 31절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전 12, 13, 14장이 카이애스틱(역평행)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성경은 자주 강조하는 것을 중간에 위치시키고 그 주변에 비슷한 것을 포진시킨다. 이런 모습이 헬라어 카이(K)와 같다고 하여 카이애스틱 구조라고 한다.

12
장 은사들의 종류(a)
13
장 사랑 장(b)
14
장 은사의 사용 방법(a")

모든 은사는 사랑의 동기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고전 13:1-3), 오히려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같이 말썽만 일으킨다. 그러나 은사의 오남용이 은사를 배격하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된다.

. 믿음의 분량대로 사용해야 한다.
"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6).

기적행하는 은사가 많은 말썽을 부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이런 은사는 신앙의 성숙도와는 상관이 없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성숙치 못한 사람들이 우쭐대면서 지혜롭지 못하게 사용해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특히 겸손과 지혜의 신앙인격을 다듬어 가야한다.

. 보다 못한 은사를 가진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 최선을 다해서 사용해야 한다( 25-14-30의 달란트 비유 참조).
은사를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교단에서 그런 은사를 좋아하지 않아서" "교회에서 그런 은사를 좋아하지 않아서"라면서 이미 받은 은사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묻어둔다.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묻어 두면 예수님의 책망을 면치 못한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5:26-30).

한편 다섯 달란트를 받아 세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비록 절대적인 수는 많지만 받은 은사에 합당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세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두 牝聰??남겼다면 예수님은 두 달란트를 받아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을 칭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은 더 많은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29).

특별히 기적행하는 은사는 사람들의 눈치와 압력, 목회자라면 교인들과 상회의 눈치로 인해 쉬쉬하거나 묻어두어서 소멸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사람의 눈치에 때문에 사장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면 있는 것도 빼앗아가시고 담대하게 사용하면 더해주신다는 사실이다.

은사의 활용과 활성화

.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은 은사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지만 은사는 사용함으로써 계속 다듬어지고 강화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적행하는 은사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고정관념에 젖어서 사장된 은사를 개발하고, 적극 사용함으로써 강하게 활성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는 실제로 사용해 보지 않고 관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잘 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시간을 투입한다. 물론 특별 나게 설교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력과 연구를 통해 개발되고 발전된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할 때 은사는 더욱 활성화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은사를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불일듯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 아나조퓌레오는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다," "불꽃을 계속해서 보존하다"는 뜻이다. 이는 디모데가 이미 받은 은사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사를 더욱 분발하여 새롭게 하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행하는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눈치보고 교단 눈치 보느라고 불일듯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장시켜서 은사를 소멸시킨다.

오랫동안 이런 은사를 사장해 놓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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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예수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고 갖고있는 은사도 빼앗길 것이요( 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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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된다(살전 5:19).

어떤 사람은 이미 기적행하는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인 눈치, 교단 눈치를 보느라고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 후, 도전을 받고 사용해 보려고 했지만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은사자의 집회에 참석하여 안수를 받고 사장된 은사가 다시 나타났다. 이후 그는 사람의 눈치, 교파의 눈치 보지 않고 담대하게 사용하여 이전에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 계속 개발해야 한다.  - 필자가 이전에 골프를 즐길 때였다. 주말 골프를 즐기다 보니 실력이 잘 향상되지 않았다. 프로들은 매일 골프를 치고 싱글 핸디 정도를 유지하려고 해도 최소 일주일에 서너 번은 골프장에 가야 한다는데 필자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나가니 실력이 늘겠는가?

은사도 마찬가지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영적 근육이 굳어져서 그 수준에서 맴돈다. 하나님은 은사를 사용하라고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은사는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더욱 불일듯하게 하고 또한 내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장시켰다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 은사를 간절하게 사모하고 구해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은 은사란 선물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냥 주실 것이라면서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구할 마음을 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을 모양이다"라면서 구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잘못된 기적종식론의 영향, 주변 동료의 영향, 교회의 가르침, 교파의 압력과 핍박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신기해서 필자도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면 이런 은사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일어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교제하면 또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불일듯하게 하지 않고 도전을 받지 않으면 서서히 소멸된다는 사실을. 또한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과의 교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와는 달리 성경은 은사를 구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전 14:7).

필자도 예언의 은사를 받기 전에, 이 구절을 자주 보았지만 사모하라고만 하니 꼭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연구해보니 그런 뜻이 아니었다. 여기서 "사모하되"의 헬라어는 "-"인데 그 뜻은 그냥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할 정도로 구하다,"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어대로 풀어서 번역해 보면 아래와 같은 뜻이다.

. 사랑을 따라 구하라.  - 신령한 것들(은사)을 시기할 정도로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라. 특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

. 신령한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  -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여기서 "사모하는"은 젤-(동사)의 형용사형인 "-로테스"인데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을 말하는 질롯(jealot)에서 생긴 단어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을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는 자들임을 긍정적으로 인정한 후 그 열심을 발휘하여 신령한 은사들이 더욱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렇게 하기는커녕 이런 신학, 저런 이유로 오히려 억누르고 찬물 끼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은 "은사보다는 은사를 주신 분이 더 중요하다"면서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그 하나님의 뜻을 더 잘 행하기 위해 그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구해서 받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기적행하는 은사를 많이 가진 고린도교회를 보라.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가장 많이 책망 받은 교회가 아닌가? 그러므로 기적행하는 은사는 말썽만 부리므로 받은 필요가 없다"는 식의 해괴한 주장을 한다.

성경 어디에 그런 주장이 있는가? 사도 바울이 책망한 것은 은사 사용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한 것이지 은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고린도교회에 많은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더욱 많은 은사가 고린도교회에 임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4-7).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은사자가 교회에 있으면 여러 사람이나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므로 절제(?)를 강요하거나 교회를 떠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글쎄? 누구의 덕을 먼저 강조해야 할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4:12), 전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이런 은사들을 주셨는데(고전 12:7; 14:4), 사람들이 자기가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잘 모른다고 해서 이런 은사들을 배격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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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들(은사)을 시기할 정도로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라.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