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012

약속을 받았음에도 부르짖는 사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다니엘이 위대한 기도를 결단하게 된 것은 성경 예레미야서에 나온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70년이 되는 때에 그 백성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말씀을 볼 때에, 그는 성경이 말씀하는 ‘그때’가 가까운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니엘의 태도는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있고, 그리고 이미 때가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회복되겠다고 약속되어 있으면 일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에는 다니엘이 그 약속을 보고서 굳이 ‘결심’을 하고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부모가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면 때가 될 때 사주실 것이 아닙니까?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조르면 부모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 부모에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예의가 될지 몰라도, 하늘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예의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셨지만, 놀랍게도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에는 하나님의 회복 약속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끝부분에는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인간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가령 뷔페식당을 생각해 보십시다. 거기에 있는 것을 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크로 찍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실제로 기도해야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가 약속의 말씀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너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중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도 싱겁습니다. 그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구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서 감동을 받고서 좋아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번 두번 기도하다가 끝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사실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자동적으로 공급해주셔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시금 다니엘의 영성으로 돌아가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 우리의 사역지에 실제적인 역사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박지웅목사)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로마서 1 : 1 ~ 7]

바울을 일면식도 없었던 로마 성도들과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오래전에 예언된 약속의 성취였습니다(2절).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오래전부터 약속하셨던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입니다. 


둘째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영원한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에 의해 바울이 부르심을 받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어 순종케 하는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5절).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복음은 장구한 세월을 거쳐 확실하게 검증된 복음입니다. 바울의 심령을 밑바닥부터 변화시켰고, 그의 근본자체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강력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살 때,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강력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로마서 1 : 1 ~ 7 ]

바울은 고대 서신의 양식을 따라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수신자를 언급한 후에 인사를 합니다.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중심으로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종의 존재 목적이 주인이듯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목적이었고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바울의 존재를 생각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자입니다. 자기주장이 없고 자기의 소유권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 능력,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생사여탈권까지 모두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바울을 주님은 원하는 대로 쓰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으로서 주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확신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 헌신하며 복음을 위해 삽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면서도 기쁨과 평강이 없고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종으로서 자기 포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려 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고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고민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대상16:8~9)

예수를 믿어 구원의 은총을 맛보고 있는 사람이 다시 멸망 당할 수 있는가? 예수 믿는 자가 무서운 죄를 짓게 될 경우, 그는 회개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은 우리에게 ‘그렇다’라는 답변을 주는 것 같다.

이와 유사한 교훈이 히브리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毁謗)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 하느니라”(막 3:28~29).

갈라디아서 5:19~21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수 믿어 구원에 참예하게 된 신자는 멸망 당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며, 어떠한 죄든지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용서될까? 안 될까?
그렇다면 이 두 주장의 말씀은 어떤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히브리서 본문에 대해 칼빈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타락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특수한 것으로 하나는 일반적인 것이다. 성도가 어떠한 일에 또 어떠한 길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타락하는 수가 많고 따라서 모든 죄는 타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적질, 위증, 살인, 술 취함, 간음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죄인이 하나님께 어떤 한 가지 일로 범죄 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의 은혜를 거부함에서 오는 복음에서의 전적 이탈 또는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떠나는 것이고 성령에 대해 범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미끄러져 나가 전적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수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만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대체로 타락한 자는 진실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 명목적으로 신자였다는 것과 거듭났다 해도 택함을 받지 못했다는 견해(Alford)를 내놓았다. 또한 본서가 당시 유대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다는 독특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은 배교(背敎)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 성경에 보면 도저히 양립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것은 있다. 그것은 성도의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죄악의 문제는 매순간 그리고 날마다 보혈을 의지하여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해결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사죄(赦罪)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큐티와 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