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2010

지옥은 존재하는가?

프랑스의 무신론자 볼테르는 지옥을 없앨 있다는 사람에게 축하한다면서 "나는 그렇게 없었다" 고백했습니다. 무신론자 리치(M.F.Rich) 영원히 끔찍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난로 위에서 백만 동안 고통 받는 것이 낫다고 지옥의 무서움을 토로했습니다. 지옥!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히고 현기증이 납니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표현이 불가능한 고통의 현장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나타낼 없듯이 지옥의 처참한 고통도 인간의 언어로서는 표현할 없습니다. 영적으로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지옥을 말할 없겠지만 성경이 계시한 지옥에 대한 말씀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옥은 의식이 또렷한 곳입니다
지옥은 고통을 느낄 없는 의식불명의 상태나 정신이 혼미한 영혼들의 거처가 아니라, 세상에서보다 처절하게 슬픔과 절망을 느끼고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아픔과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는 곳입니다.( 16:23,24).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사람에게 행한 대로 심판을 내리고 지옥에 던진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0:11~15, 21:8). 불교에서는 팔열지옥과 팔한지옥 136종의 지옥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고 단지 사람에게 행한 대로 심판하여 불못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행한 대로 보응하여 심판을 내릴 고통의 강도는 틀리겠으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 ( 22:13) 말로 미루어 것은 사람의 상상을 불허하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 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4 ~ 28).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 지옥은 어둡고 음산한 것이 특징입니다. (8:12).
여기저기서 타고 있는 유황불에 비쳐오는 어스름한 불빛 외에는 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게 것입니다.

"나라의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8:12)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
지옥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곳은 영원히 살아서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9:48,49)

지옥은 그리스도인들과 영원히 분리되는 곳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나 것을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28)

"너희와 우리 사이에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6)

지옥은 풀려 희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지옥에 가는 것은 '영원한 심판' 받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지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합니다. '영벌'이란 말이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25:46) 성경에는 구원을 얻은 사람은 죽을 낙원 (23:43) 가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으면 영혼이 음부( 16:23)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부활로 부활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이 음부에서 나오고 육체가 바다에서, 땅에서, 무덤에서 부활되어 재결합되어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덜어지는데 이곳이 지옥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에는 영혼뿐 아니라 몸도 같이 가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 10:28)

당신은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영혼은 존재하는가 ?

영혼이란
우리는 흔히 몹시 놀라거나 무서움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때 ", 혼났다"라고 합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편을 향하여 ", 혼 좀 나봐야 알겠니?" 혹은 "혼낼 테다"라는 말들을 쓰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혼이 나다'라는 말은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을 때에 심장이 일시적으로 멎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며 때로는 죽기도 합니다. 의학계에서는 뇌사상태 또는 심장의 정지 상태를 사망이라고 하고, 종교계에서는 육체에서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 또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사망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영혼이란 육체가 아니면서 육체에 깃들여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며 죽어서도 육체를 떠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 실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불사불멸의 신령한 정신'이라 했고 철학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은 지성과 의지를 발휘하며 영원히 존재한다'라는 영혼불멸설이 있으며 불교에서는 '윤회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이 존재하느냐'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실재한다면 나의 영혼은 어디에서 왔으며 죽은 후 나의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만 있는 영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왜 생길까요?  이것은 바로 동물들에게는 없는 영혼이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인격체라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서 끝나는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과 미생물이라는 삼자()가 공생 공존하는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들 모두는 인격체인 사람을 위해 생존하다가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므로 그들에게는 영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서는 인간을 위해 노동을, 죽어서는 살코기를 제공하고 가죽을 남기고 기름을 공급하는 것입니다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격체입니다. 사람의 육체를 분석해보면 그 값은 불과 몇 푼 안 되지만 돈으로는 그 값을 정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로서 즉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만물 위에 존재하는 인격체인 것은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이 없다면 사람은 한낱 원숭이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단지 물질의 집합체라는 이 육체는 물질이기에 물질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렇게도 위대하고 장엄하고 도저히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인격체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나?
그렇다면 이 영혼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대자연의 법칙 속에서 반드시 그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나 이유, 근거도 없다면 그것을 대 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는 존재는 육신이 아니라 그 속의 영혼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이 육신 속에 나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가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분리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이며 육신은 눈에 보이는 한낱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흙이라는 물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불행한 일로 인하여 그 "오른팔"이 영영 떨어져 나갔다면 즉 수술로 잘라 내야 할 경우 "나를 왜 자르느냐" 혹은 "나를 왜 쓰레기통에 넣느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는 잘려 나간 그 "오른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잘려 나가지 않은 부분)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른팔"이 나를 떠나서 어디로 실려 나가 물에 태워지든 . 쓰레기 더미 속에서 썩든, ""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진 것입니다. "" 100% 여기에 있는 것이지 잘려 나간 만큼 ""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양팔과 양다리가 모두가 잘려 나갔다고 해도 역시 ""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 결코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몸의 반이 잘려 나갔다고 했을 때 몸의 반쪽은 여기 에 있고 나머지 반쪽이 저기에 있다고 해서 두 개의 ""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는 잘려 나간 것과는 관계없이 그대로 완전한 "'로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라는 영혼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머지 반마저 썩었다고 해서 여기에 있던 ""도 육체와 함께 썩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없어지고 썩어지는 것은 물질로 구성된 육체인 것이지 영혼이 어찌 같이 썩겠습니까? 나머지가 없어졌다고 해서 ""가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는 어디로 갔다는 말일까요? 다만 썩어진 물질과는 관계없이 ""는 그냥 남는 것입니다. 육체 속에 깃들어 ""라는 형태를 가진 눈에 보이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각각 다른 모습의 인격체를 갖고 있습니다."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맨 처음의 생각이 어떠하냐에 따라 인격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인격도 모두 다르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생각"은 또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마음을 결정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 "사고(思考)의 배경"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라는 영혼이며 나의 실체인 것입니다. ""라는 실체가 없다면 생각이나 행동, 습관, 인격도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곧 사고를 조종하고 이 사고에 의해 행동하며 각자 개성이 다른 인격체로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살인자나 간통자, 사기꾼, 사업가, 선량한 사람등등. ""라는 실체가 " 어떻게 생각하게 하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의 수천수만 수억 종류의 인격체가 모여 사회체제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육체 모두가 썩어진 후의 나의 실체인 "" "나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영혼이 돌아갈 곳
"영혼은 과연 어디로 갈까요?" 참으로 허황(虛荒)되고 막연한 생각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나는 그 어디에서부터인가 왔다는 이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죽은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 참 많은 듯합니다. 그리고 쉽게 알 수 없는 일이라며 "그걸 알 수 있다면 내가 당장 유명한 철학자가 되게?" 혹은 "죽으면 그만이지", "모두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당신은 가 봤어?"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닭이 없는 데 달걀이 생겨날 수 없고 달걀이 없는데 닭이 어떻게 생겨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은 해결할 수 없는, 팽팽히 맞선 어떤 논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느냐에 대해서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먼저냐에 대해서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닭이 먼저 라면 그야 당연히 달걀을 낳을 수 있지만 달걀이 먼저라면 달걀은 절대로 닭이 될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달걀은 반드시 닭이 적당한 온도에서 적당한 시간 동안 품어 주어야만 부화가 되고 병아리가 되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면 썩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닭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의 최초의 조상들은 모두가 한 쌍의 똑같은 모양의 성숙된 어미들이 먼저 생겨나지 않고는 지금의 동물 후손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어미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는 생겨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어미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는 생겨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인간들은 그 만든 자를 "창조주" 또는 "조물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흙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연을 다스리며 살아가도록 하심으로 이 세상의 역사(歷史)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행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이 순간 살고 있으며 그 목적이 모두 이루어지면 창조의 대상은 영원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되돌아가고 그 영()은 창조주께서 도로 찾아가실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사람의 말이나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만나 본 일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멀리서 여러 번 자세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어 준다면 그 글을 통해 그 사람의 인품과 생각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성품 등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미신적이고 우상적인 신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언 2:2~5).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신명기 17:19).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 선()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은 그들에게 주신 구약 성경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한복음 6:45).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대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과 그 지으신 우주(宇宙), 역사(歷史), 인생(人生) 그리고 내세(來世) 및 심판(審判)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 성경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믿음으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믿음에 있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성경 말씀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永生) 얻는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따라서 믿어도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죄가 많아 그런 것도 아니요, 선행이 모자란 탓도 아니며, 헌금을 많이 못하거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증거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5).

이렇듯 하나님의 감동하심(inspiration)으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을 있는 가지 길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

원래부터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마음을 주심 (로마서 1:19 ; 전도서 3:11). 만물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 (로마서 1:20).역사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 (이사야 48:3).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 (이사야 43:10 ;  에스겔 36:23,36).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14:9).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성경은 신비한 책이다.

성경은 형성 과정에서도 신비를 드러낸다. 1,600년에 걸쳐 40명의 기자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기록한 것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런데도 성경 각 권 간에  주제와 사상이 일치한다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이다. 기자들이 자기의 사상이나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였기 때문에, 성경은 전체적인 흐름이 일치한다.
대통령의 말을 비서가 받아 기록하여 편지를 보낸다면, 글은 비서의 글이지만 그 내용은 대통령의 말인 것이다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하기는 사람이 했으나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 긴 세월의 지식과 가치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하나의 흐름이 유지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책을 한 권 쓰기로 마음먹고 수 년 동안 각기 다른 장소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여 각기 다른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대필하게 하고, 마지막에 곳곳에 보관해 둔 원고를 모아 순서대로 정리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든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 내용은 연결될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역사와 지리적 배경에 살면서 기록한 책이지만, 그 내용은 한 인격자의 뜻과 목적을 향한 중심 진리가 전체 속에 흐르고 있으며 전체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약 3,500년 전부터 1,900년 전까지 기록된 것이지만, 현대인의 지식과 과학으로도 비판할 수 없고 성경과 비슷한 것을 도저히 지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구성 면에서도 신비롭다. 꽃 한 송이도 완벽하고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듯이, 성경도 완전하고 기묘막측하게 구성되어 있다. 신체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인체의 아름다움이 손상되고 마는 것처럼, 성경도 일부분이 빠지면 완전한 책이 되지 못하고 만다. 신체의 각 부분이 있어야 하듯이, 성경도 각각의 말씀들이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맹장(盲腸)은 우리 인체에 불필요하게 붙어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최근에야 그것이 신체에 요긴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나님께서 필요 없는 신체의 일부분을 만들어 두지 않으셨다면, 전 인류에게 주신 성경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일곱 번 연단한 은 같이 불순물이 없다 (시편 12:6 참조). 꼭 필요한 것을 적어두신 것이다.

성경이 얼마나 완전한 책인지를 읽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성경은 비록 작은 책 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 그렇게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또한 신비하다. 사람이 지은 책은 공부하여 그것에 통달(通達)할 수 있지만, 성경에 통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투영되어 있는 자연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 성경을 사람이 다 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쓴 글은 몇 번 이상 반복해서 읽으면 곧 싫증이 날 것이지만, 성경은 수십 번 수백 번 읽어도 항상 새로운 책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편 119:96).  

성경은 가장 오래된 책이면서도 현대에 있어서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또 어느 시대이건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라는 점에서도 신비롭다.

성경은 현재 2,123개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문자로 표기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언어로 다 출간되었다. 성경 외에 그 어떤 책이나 종교 경전도 그렇게 많은 말로 번역된 것은 물론 없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 24:1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위해 온 세계 모든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이제 성경이 전파되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은 특정한 사람들만 읽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모든 부류의 사람이 읽는 특이한 책이다. 아울러 가장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아오면서도,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서 더욱더 신비로운 책이다.

이 성경이 만들어져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더욱 신비한 것은 성경을 접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향한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고 거룩한 삶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인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까 1,600년이나 되는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다. 기자(記者) 40이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기록된 구약이 39,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기록된 신약이 27, 합계 66권으로 되어 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성경을 기록한 장소는 시나이 반도, 이스라엘, 바벨론, 소아시아여러 지역, 로마, 지중해 작은 섬 등이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신분은 학자, 혹은 장군, , 농부, 어부, 의사, 세리 등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도 있고 천한 사람도 있으며, 유식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어, 여러 계층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다. 유식한 자라고 하여 자기의 유식(有識)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무식한 자의 무식이 그대로 쓰여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다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으므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곧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나 보는 책으로 잘못 인식되다 보니, 특정 종교의 경전(經典)으로서 평가되기도 하고 막연히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고전(古典)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전승(傳承)과 신화를 모아 놓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이 신구약 합쳐 3,800번 정도 나온다. 성경 기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기록하라고 하신 것을 받아서 기록한 것이라고 성경 곳곳에서 증거한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했다니까 그렇게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기록케 하셨다면 그게 사실인지 분명히 밝혀지게 되어 있으므로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예로써 다음의 말씀을 실례로 든다.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예레미야 30:1,2).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두루마리 책을 취하여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열방에 대하여 나의 네게 이른 모든 말을 그것에 기록하라” (예레미야 36:1,2).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에스겔 1:1,3).

만일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기록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 거짓은 금방 드러나고 만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지식의 범위를 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설사 어떤 영적 계시(啓示)로 썼다고 해도, 그 계시를 준 영이 하나님이 아닌 바에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알고 계시는 일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쓰라고 하셨다는 언급이 없을지라도, 그 말씀하신 바가 하나님의 지혜의 소산인지 사람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인지는 연구해 보면 안다. 사람의 두뇌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조차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란 구절이 3,800번 씩이나 사용된 성경이 사람이 지어낸 것인지, 참으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인간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께서 섭리와 계시로써 기록케 하신 말씀인지 연구해 보고 살펴보자.

다음으로, 성경이 종교(宗敎)경전이나 도덕(道德)경전은 아닌가도 짚고 넘어가겠다.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신을 찾으려는 노력 혹은 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선행·고행의 노력이라 있다.

섬기는 대상을 향한 헌신과 봉사,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한 수행 또는 타인에 대한 선행에 대하여는 어떤 기대가치가 내재되어 있고, 해당 종교의 경전들은 결국 그것을 행하게 하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의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뜻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떤 노력·행위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음을 선포한다.

종교경전은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외면적인 행위를 규제할 행위의 준칙(準則)일 뿐이지만, 성경은 종교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창조주의 뜻이다. 읽어 보지 않고서도 “아! 성경, 참 좋은 말씀이죠!” 라며, 마치 사서삼경이나 명심보감 등과 같이 인간 언행을 가다듬어 줄 좋은 가르침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더도 말고 4복음서만 읽어 봐도, 정신 차리고 보면 무서운 경고가 더 많다.

지옥 심판(審判) 경고(警告)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를 향해 하는 소리인데, “좋은 말씀이라니 그것은 무슨 경우인가?

오래 전에 미국의 저명한 법률가요 문학가이며 다재다능한 인재로서 뉴멕시코 주지사를 지내기도 했던 웰리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웰리스는 ‘사람이 지어낸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가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는 단지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웰리스는 자신이 허구(虛構;fiction)라고 생각해 온 성경을 연구하여 ‘사람이 지은 책’이라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생각을 했다. 그런 목적하에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속적인 조사와 연구를 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완전성·정확성을 시인,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가 성경에서 생명과 진리를 발견한 후 가장 먼저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벤허(Benhur)』이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조차 익숙한 명작을 탄생시켰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라고 성경을 비판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다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된 사람은 수없이 많다. 웰리스가 발견한 것처럼 성경은 하나의 종교경전이 아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주신 하나님의 책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진리를 찾는 마음으로 자세히 성경을 상고하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 (마태 5:18).고 말씀하셨다. 일점은 히브리 문자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이며, 일획은 의미가 변하는 문자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는 성경은 결코 폐하지 못하는 것이며 (요한복음 10:35 참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 24:35)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