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2009

영성화 훈련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정성이요 마음이며 훈련입니다.

영성화 훈련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정성이요 마음이며 훈련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은사가 훈련으로 받느냐 배워서 되느냐 하는 편견과 고집을 가지는 사람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은사의 개념도 모르는 사람의 옹졸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팍하고 굳어진 심령은 결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심령으로는 맛보지 못 할 것이요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신앙 인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려고 하다가 마실 물이 준비가 되어있지 아니하는 경우 예배 중에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처다 보면서 이것을 마음의 눈짓으로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의 사모는 이를 즉각적으로 헤아리고 대처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심령으로 사모와 통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부부간에는 말없이 그 심령을 서로가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서로가 교제를 나누고 심령을 통하고 살았기 때문에 서로가 심령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이러한 관계입니다. 내주 하시는 성령사역에 민감해야 심령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심령이 깨닫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이러한 민감한 심령은 알아차립니다.

 영적으로 결단하지 않고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게 되면 심령이 부담을 느끼고 짐을 지게 됩니다 이것을 또 무시하고 계속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강행을 하게 되면 양심이 침소를 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한 두 번 이러한 부담이나 느낌을 무시하게 되면 영적 지각은 또 둔하여 집니다 깨닫는 것도 둔하여지고 느끼는 것도 둔하여지고 영적인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지각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고 이러한 영적인 지각을 통하여 신령한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심령으로 아는 경험적인 지식이나 영적 지각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느끼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이성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원리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구약의 원리처럼 돌비나 양피지나 종이에 새기지 아니하고 성도들의 육의 심비에 새겼다고 합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롬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도 심령이 둔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반드시 말씀과 성령은 양쪽 수레바퀴와 같아서 함께 굴러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심령의 영역은 다르기 때문에 심령으로 섬기는 것과 우리 생각으로 섬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서 작용합니다 좀더 깊이는 잠재 의식에 영역에서 역사 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씨앗이 잠재의식의 영역 넘어 영의 영역에 깊이 심어지고 이 말씀이 다시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 다시 흘러나와야 하며 성령의 깊은 감동의 역사가 내 마음의 영역에 부어지고 우리의 이성이 다시 이를 해석하고 깨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안되고 말씀을 실생활의 경험적인 차원에서 심령이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설명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서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이 바로 성령의 신령한 기름부음의 사역이요 이러한 기름부음의 현상이 우리 심령에 부어지는 것들이 믿음의 현상이요 지혜의 말씀이요 지식의 말씀이요 통변이요 예언의 말씀이요 능력이요 병고치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도 말씀이 없으면 안됩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는 비유에서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심어지지 않은 말씀이 나올 때는 신령한 사역이라도 이는 사단이나 귀신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례).중이 목사 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는 자신이 전혀 예수를 대적하는 중의 입장에 있으면서 어떤 목사가 전도하러 왔다가 자신으로부터 성경강해를 8시간이나 듣다가 전도를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당시의 이 중은 성경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지만 성경을 꿰둟어 알고 있었고 이 전도하려고 온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조차 미리 알고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었기에 이 목사님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어떻게 말하려는지 조차 훤히 알고 대화를 하니 께임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나중에 예수 믿고 목사가 된 후에 다시 이 목사님을 만났는데 과거처럼 될 수가 없었고 전혀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씀은 영적인 원리를 터득하게 되고 이 영적인 원리가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길잡이는 되지만 우리의 생각영역에서 작용하는 이 말씀만으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부족합니다. 깊은 영의 영역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우리가 깨닫게 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므로 성경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오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이렇게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내 중심인 참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신의 생각이나 형식적이거나 율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아니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령으로 섬기(예배)라는 말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내적 역사가 있어 성령에 깊이 사로잡힌 심령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령은 우리 심령 가운데 임재하시며 우리의 깊은 내적인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느끼고 인식하며 받아드리어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훈련이 되어 육성이 죽고 영적인 심령이 된 사람의 이러한 심령은 곧 율법이 따로 없고 선지자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성령)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성령)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세계 영적 도해

세계 영적 도해 하나님의 사정
세상에는 무수한 신이 있지만 참 신을 찾아내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이 자신을 경배하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조건이 능력(power)이고 다음은 착한 성품으로 이 모든 조건을 모두 갖춘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 애굽에서 그의 백성을 이끌어낸 하나님의 모습은 그분의 능력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고, 그 백성을 사랑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성경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지 충분히 맛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허용하셨을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건 우리의 수준으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반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시기에 에덴에서 쫒아 내실 때도 저주가 아닌 구원 얻을 방법을 즉각적으로 약속하시고, 뱀을 향하여서는 즉각적으로 저주를 선포한다. 그리고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다. 눈물날 정도로 놀랍고 놀라운 사실 아닌가!! 또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고, 성도의 권세를 회복시키셨다.

  사단의 세계경영 가인을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가인을 최초로 살인자로 만든 사단의 수법은 늘 동일하다. 첫째는 시기하게 하고 다음은 하나님께 불평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범죄케 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하지만 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믿지도 않으므로 홀로 서서 두려움으로 인해 처음 한 일이 성(현대어로 도시)를 쌓아 다시금 인류의 악의 역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가인은 도시문명을 건설하였고 여기서부터 인류문명이 시작되어 후에 바벨문명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세계영적 전쟁의 핵심주제가 문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바벨 문명을 대적하기 위해 문명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언어를 흩으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하나님은 이 바벨문명을 심각하게 보시고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경영에 돌입하셨는데 그 방법이 사람을통해 하시는 것이였다. 가장 살기좋은 곳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고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라는 약속과 축복을 하시고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전략적 방법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시험을 받고 통과한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의 모형은 첫째 경제, 둘째 종교권력, 셋째 사회정치권력으로 나타났는데 이 세 가지 권력이 고대 바벨론 이후에 형성된 고대 신들의 권력으로 문명의 중심에 있었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명의 중심에서 일하시지 않고 낮은 곳에 임했고, 모세도 광야 40년의 시간을 갖는. 즉 history maker는 문명의 중심으로 가지 않고 변방으로 간다는 것이다. 세계문명의 힘을 비웃듯이 주님이 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유유히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세계영적전쟁 다니엘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대는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지식 정보시대이고 양과 염소가 확실히구별되며, 인생은 혼동 속에 있어 지혜자를 찾게 되고 무서운 속도로 세계는 통합되어져 점점 666시스템 통제 체제로 접어들게 되는 시대는 말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막강한 힘으로 지배해 가는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망각하고 미시적으로 활동하는 잡신들이나 동네 귀신들과 일상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그런 괴롭힘은 분명히 있지만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가장 큰 세력이 세계관임을 알아야 한다. 영적전쟁은 세계관과의 전쟁이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사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팍스 아메리카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자유주의가 활기를 치게 되고 팍스 아메리카 시대가 도래하게 되어 미국 단독 지배체제가 되었고 세계 시장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번영을 위해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보고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전쟁과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분쟁과 평화를 막는 방법이 지구촌의 다양한 종교적, 민족적 가치를 없애고 하나의 가치로 세계를 통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나의 가치로 통합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모든 사람들도 동의할 만한 “자유”라는 것이고 곧 자유주의 세계지배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엘리트들의 세계비전이다.

  세계화의 음모 미국 엘리트들이 추진하는 세계화는 기술과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추진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세계의 서구화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은 능력지상주의를 만들고 양육강식의 시대로 약자를 같이 살 동반자로 보기 보다는 사회적 경쟁력을 저해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만물의 상품화라는 가치를 두고 자유주의라는 토양에서 자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 세계를 자유롭고 개방된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강자의 무절제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빈라덴과 무슬림 전사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서구의 이러한 타락상에 대해 교육시켜왔고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지배를 받는 것이 큰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에는 한계가 있고 이제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성경은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고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를 받고, 말씀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음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지배 하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무참히 단절되고 파괴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음녀가 자신을 숨기며 성장해 왔는지 살펴보도고 하자. 이 음녀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진원지인 에게해에서 세력화되기 시작해서 바벨론 앗수르 문명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애굽 문명을 건설했던 여신 이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애굽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 여신은 앗수르(앗시리아)지역으로 이동한 다음 새로운 문명을 이루는데 그 중심도시가 호수위의 여신, 물위의 여신의 뜻을 지닌 니느웨 이다. 그리고 요시아 시대에 아세라 여신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지중해로 넘어와 시벨라 연신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르데미스(아테네) 여신으로 계속 변한다. 이 여신의 공통된 특징은 자유와 풍요의 여신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영적 뿌리이며 원조이다. 다음은 다이아나 여신으로 변신하고 또 다른 기묘한 전략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우상화하여 여신으로 둔갑한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마리아는 자유의 여신으로 다시 부활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시스 여신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이 그의 첫째 아들 호루스 탄생일이고, 그리스 기독교 정교의 예수님의 탄생일을 1월 6일로 하는데 그날은 둘째 아들 아이온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문명적 맥락에서 세계를 영적으로 도해하지 않고는 잘 잡히지 않는 가려진 실체이다. 이러한 음녀는 신학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지성사회를 공략하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무기로 사용하며, 이러한 이유로 음녀는 현재 가장 강력한 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경제권력으로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변방으로 달리며 신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룰 주님의 위대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끝까지 어린양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함으로 종교권력에서 자유해져 경제권력 없이도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거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지혜로운 5처녀와 같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통찰력 있게 이 시대를 바라보며 깨어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자아)으로부터…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자아)으로부터…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은 결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생명은 힘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생명은 느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은 강한 체험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체험을 위해 영성훈련을 하며 생명의 삶을 위해 영성형성을 이루도록 노력합니다.
생명은 느낌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생명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실재입니다.
생명은 멈춤이 아니요 변화를 가져다 주며 영향을 주어 생명의 역사를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명의 체험과 삶을 경험하며 누리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한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진리인것처럼 먼저 자신이 죽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을 체험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죽지 않고는 생명을 체험하지도 누리지도 실재도 될 수 없다. 죽는 것은 자기를 부인 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속에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은 오직 내(자아)가 죽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생명의 실재는 곧 체험이며 결과는 열매이다.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오, 주여! 오늘 아침 이 중에게 독수리의 눈과 올빼미의 지혜를 주옵소서. 저의 영혼을 하늘 중앙에 있는 복음 전화국과 연결해 주시고 이마를 천국의 태양으로 빛나게 하시고, 저의 마음에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게 하소서. 저의 상상력에 송진을 바르시고, 저의 입술에 기름을 칠하시며 저의 혀를 당신의 능력으로 진압하소서. 저의 죄에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시고, 저의 팔이 부단히 움직이게 하시며, 저의 가슴에 당신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소서. 전신에 당신의 구원으로 기름 부으시고 불을 붙여 주소서” 아멘. <케네스 맥팔랜드>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친밀함의 재탄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전세계를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할 연료가 되길 바라신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말씀이 능력있게 나타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린다. 그런 말씀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지를 드러나게 한다. 또 사람들을 다시 거룩하게 한다.

기름부음은 그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할 것이다. 기름부음은 성경에 나온 개념이며 믿음의 거인들에게 존재했던 풍부한 시앙 유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대부분 기름부음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기름부음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도대체 기름부음이 무엇이란 말인가? 

구약에 나오는 기름부음 – 기름부음이라는 히브리어 ‘맛사’(massah)는 원래 신성한 기름을 물건에 발라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쳤던 구약시대 풍습에서 유래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소명, 봉사, 권한 위임을 뜻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봉헌’과 ‘기름부음’이라는 두 히브리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고자 ‘따로 구별함’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되었다. 결국 ‘기름부음’과 ‘소명’은 동의어가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훗날 다윗의 자손이 세상을 통치하며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새의 가지에서 기름부음 받은 여호와의 종이 탄생하고 그 기름부음은 곧 성령을 통한 능력과 지혜로 나타난다고 했다(이사야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 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9:21, 행2:32-34참조) 수많은 선지자가 이처럼 회복과 기름부음을 주제로 예언했다.

요엘은 마지막 때에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라고 했고 기름부음 받은 모든 자가 하나님 말씀을 예언자처럼 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엘2:28-29).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역사하기를 원하는가? 신약에 나오는 기름부음 –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자손을 고대하던 히브리인의 소망은 드디어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성취되었다(헬라어 ‘크리스도’[Christos]는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뜻임).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 종임을 밝히셨다(눅4:18-19).

하나님은 예수님이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중에 성령으로 기름부으셨고, 다윗의자손이며 메시아임을 확증하셨다(눅3:21-22). 그 순간 예수님은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으셨다. 그래서 공생애 동안 사단에게 억눌린 자들의 해방하실 수 있었다(행10:38). 기름부음은 이제 다윗의 자손이며 진정한 예수님 한 분에게 임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나님 아버지 오른편 보좌에 앉아 믿는 자의 그리스도와 주가 되셨다(행2:36).

바로 그 영광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한 성령 세례를 믿는 자에게 부어 주셨다(33절).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소명과 능력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세상에 탄생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진리를 입증해 주는 하나님의 전폭적이고 기적적인 도움을 받았고, 그 분의 몸이요 백성인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갔다(1:1, 14).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 제사장, 왕가의 유업을 받은 자가 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교회 전체에 임한 동시에 교인들 각각에 임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고후1:21)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남은 평생 동안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1요 2:20, 27). 기름부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성도가 되었음을, 특정 사역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자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을 입증하는 증거였다(고전 1:21, 12:27).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특정한 일을 하고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즉 기름부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았다는 말이다. 다음은 기름부음에 대한 핵심 개념을 정리한 것이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과 함께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특별하고 전능한 역사를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효과적으로 사역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역사하심이 빚는 결과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의 발단과 효과는 철저히 초자연적이다. 또 기름부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효과적인 사역(봉사,섬김)을 하기 위해서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된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 이러한 힘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지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며, 그리스도인을 통해 역사한다. 바운즈는 기름부음이 기도를 통해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말했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그리스도인이 지닌 모든 잠재력이 발휘된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감과 판단력, 통찰력을 분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기름부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강한, 마음의 능력을 사용하게 한다. 기름부음 덕분에 마음에서부터 온화, 성결, 힘이 흘러나온다. 성숙, 자유, 사려, 방향성, 폐부를 찌르는 말은 모두 기름부음의 열매다.” 

기름부음은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사람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한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숨결이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충만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원활하게 하고, 자르고, 어루만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폭탄처럼 전해진다. 말씀을 위로자, 규탄자, 폭로자, 탐색자처럼 느끼게 한다. 듣는 사람을 피의자나 성자로 만들고 아이처럼 울게 만들며 거인처럼 굳세게 한다. 봄이 나뭇잎을 키우듯이 너그럽게 마음과 지갑을 열게 만든다.” 20세기 후반, 위대한 설교자 만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 때마다 기름부음을 간절히 간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기름부음이 하나님의 숨결이며,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지식과 능력임을 깊이 깨달았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하게 임하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능력의 허용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믿는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로 만드신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재능과 능력을 초월한 능력을 하나님께 바아 스스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름부음 받은 신자는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 구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받으면 직면한 상황이나 환경을 분명히 이하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담력이 생기게 한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표시 중 하나가 그러한 담대함이었다(미 3:8; 행4:31). 기름부음을 받으면 생각과 말이 명료해지고 권위가 생기며 자신감이 넘친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영향력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한 단순한 말과 행동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죄를 깨닫는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성경말씀을 실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로 인한 영향력은 전인적이다. 우리의 생각, 마음, 영혼, 심지어 육체까지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순종의 결과로 육신에 새로운 힘이 넘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 기름부음의 영향력을 알아채기는 쉽지만 그것은 철저히 성령의 전능한 역사에 속한다. 성령은 마치 바람처럼, 선택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고 축복하신다(요3:8). 문제는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하시는 시기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간절히 원하고 기대해야 하지만 그 시기와 능력의 정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역사인 기름부음은 영속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절대로 기름부음을 당연히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고 세상적인 삶을 살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여 기름부음 받은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겸허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 삼손과 같이, 당신을 통해 나타나려고 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 삼손은 부주의하고 무심한 생활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잃었고, 그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사사기 16:20). 기름부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현상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역사이다.

기름부음은 정의 내릴 수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형상으로 뭐라고 형용할 수 없고, 정체를 알 수도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부드럽고도 강력한 무언가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고, 주님의 사랑을 불어 넣어 준다. 하늘에서 그것을 얻을 수밖에 없다. 기름부음은 감정적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한 감상주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맺지 못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형식이나 감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기름부음은 결과를 보고 알 수 있으며 성령의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감상적인 조작이나 집단 최면이 아니다. 기름부음은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고 헌신하고 영적 준비를 하는 자녀에게 축복하기 원하신다. 기름부음은 곧 믿는 자의 마음과 성령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기름부음.. 중에서> - Anthony L. Jinwright


기름부음의 구체적인 결과

기름부음의 구체적인 결과
 구약에서는 특수한 몇몇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행 2:17). 사람에 따라 능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은사를 받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신자들이 구할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 세례, 성령 체험 곧 어노인팅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다음을 체험한다.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난다. 방언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은사가 나타난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의 기적행하는 은사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찬양과 예배가 살아난다 어노인팅을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과 그렇지 않은 찬양에는 차이가 있다. 어노인팅을 받은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가까이 강하게 느끼게 하며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한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3, 14).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 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지만 찬양은 용사이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적고 싸우게 만드신다(사 42:12-13; 시 149:6-9; 출 15; 수 6:16; 삿 5; 계 19:1-8).

  기도에 능력이 붙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능력이 따르고 오랫동안 할 수 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성령 체험있는 목사들이 하루 평균 45분을 기도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목사들은 15분 정도라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마귀의 세력을 물리친다(막 9:29; 엡 6:18; 단 10). 마귀를 대항하는 중보기도는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목회자들 및 어느 특정 지역 또는 단체를 위한 집중 기도로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를 말한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한 능력은 물론 눈에 보이는 능력이 현상이 나타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현상들을 보면 다른 경우에는 모두가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적인 현상을 말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8장 17절에 기록된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마술사가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저희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도행전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 -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주어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성전 기물을 만드는 여러가지 재주를 주셨다(출 31:3). - 사사들에게 임하여 육체적인 완력(physical strength)을 주셨다(특히 삼손) (삿 3:10; 6:34; 11:29; 13:25; 14:6, 19 등). -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여 사울 왕이 예언을 하고 벌거 벗은 채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다 (삼상 19:23-24). - 여호와의 신으로 인해 다윗이 시를 짓고 노래했다(삼하 23:2). -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셨다 (겔 2:2; 3:12, 14, 24; 8:3; 11:1; 행 8:39 참조―빌립을 이끌어 다른 장소로 옮김). - 꿈을 해석했다(창 41:38; 단 4:18). - 성가대가 일제히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구름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 섬기 지 못하고 쓰러졌다(대하 5:13-14). - 귀신을 쫓는다(마 12:28).

  뜨거운 신앙인이 된다 성령의 임재 자체가 올 세대―내세―의 도래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체가 우리의 삶이 올 세대의 능력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말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며 동시에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 상급을 사모한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짙은 안개가 기름부음의 강렬한 태양 빛에 의해 그 자취를 감추고 멀리만 느껴졌던 종말의 산 봉우리가 갑자기 성큼 가까이 다가온 긴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기름부음을 받은 신앙인은 예배를 사모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 하며, 세상 재미보다는 예수를 섬기는 재미를 만끽한다. 이들에게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된다. 예수는 더 이상 철학이나 개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구세주요 연인이요 친구이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신앙이 교리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예수의 임재(presence)가 더욱 개인적으로 강렬하게 체험된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이다(요 15:26; 16:1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교리를 알면서도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에서 인격적인 예수와의 친교가 결핍되어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직도 성경 내용 많이 아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받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인해 타락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일차적인 단계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성품―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성령의 열매는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갈 5:16; 엡 5:18). A. B. 심슨(Simpson)은 기름부음의 외적인 표적으로 예수충만(a fullness of Jesus), 경건하고 의롭고 순종하는 삶, 기쁨 충만, 성령의 열매, 지식과 빛을 예로 들었다.

  그 외에도 어노인팅을 받으면 나타나는 결과로서는: - 말씀이 꿀 맛같이 달게 된다(시 119:103). -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 진다(롬8:15). -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한다(롬 8:16; 살전1:5). - 긴박감을 가지고 전도한다(행 1:8; 고후 5:13-14). 성령의 도래는 종말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 믿음의 형제를 사랑한다(요일 4:11; 롬 5:5). - 예수의 재림을 갈망한다(고전 16:22; 요일 3:3). - 악령의 존재에 민감해 진다(마 12:28; 행 10:38; 엡 6:12). ♡ (글로리아넷/구요한 목사)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여러 가지 영적 경험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여러 가지 영적 경험 - 로렌스 길릭 예수회 신부 글, 번역(김한글)
 요한 복음 9장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질문을 한다. 눈이 먼 사람을 보면서 그들은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그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은 마치 눈이 멀음을 적어도 죄에 대한 벌로 간주하거나 눈이 멀음과 죄를 동등하게 보고 있다. 그들은 이 눈멀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한다. 나 자신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사도들이 질문한 비슷한 질문들을 던져 보곤 했었다. 나는 태어 날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8 살때에 "이 가혹한 은총"을 받았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의사들은 몇 번 씩이나 나의 눈을 검사하였다.

루우드의 물과 성인과 순교자들의 뼈로 축성을 받았지만, 44살인 지금까지도 눈이 먼 상태이다. 나는 아직도 하느님의 배려 깊으신 사랑과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화해하려 노력하면서 질문해 보곤 한다. 질문들은 너무나도 빨리 생기는 것에 비해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느리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대답은 분명 온다. 최근에 나는 남다코다 주의 베드렌즈 국립공원을 여행하였었다. 나와 동행한 두 친구들은 우리들이 지나가면서 보는, 계곡, 언덕과 바위들의 장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언어로 설명해 준다는 것이 머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의 웅장한 경치, 야구 선수들이 절묘하게 공을 날리는 것,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들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면서,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려 하는 것의 한계 때문에 친구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눈이 먼것에 대해 글로 묘사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도인지를 느낀다. 여러분이 한번 눈을 감고 그냥 눈이 먼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이 것은 곤혹스런 경험이다. 순간적이나마 경험하는 어두움의 와중에도, 만일 전화가 울리면 재빨리 눈을 뜨고 수화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은가? 내 친구들이 베드렌즈 공원의 장관을 나에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나도 "가혹한 선물"을 가짐으로서 얻는 경험들을, 여러분들에게 완전하게 이해시킬 수 없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과업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겪는 경험과 비슷할 수 있고 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은 몇 가지를 쓰고자 한다. 나는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눈멀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어두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좀더 보편적인 은총에 대해 가르쳐 준 것에 대해 말하겠다. 가끔 사람들이 나와의 접근을 피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처럼, 눈이 안보이게 되는 재앙을 입을까봐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감지 할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나를 욕되게 할까 혹은 무례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내 곁을 빨리 지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 자신의 눈먼 상태를 뒤돌아 볼 수도 있는 기회를 재빨리 지나 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축복이자 괴롭힘일 수 있지만, 눈 이 멀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 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나는 아직도 이 사실과 씨름하지만 매일 매일 그 것과 부딪치면서 내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소용없는 저항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의 눈먼 상태에 의해 정복당하도록 허락할 때 더욱 더 많은 평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9장을 여는 사도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 이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의 탓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의 탓도 아닙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눈이 멈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그분은 매우 분명하게, 마지 못해 하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보는 사람을 가려 못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 멀게 하려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 9, 39).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더 심오한 진실을 볼 수도 있는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우리 각자의 눈 먼 상태를 직면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영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들을 점차적으로 빛의 삶으로 천천히 안내되어 가도록 허용하면서, 우리들의 인간성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기는 약점들과 더불어 계속 기도하면서 사는 삶. 이것은 한번에 끝나는 치유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은 투명하게 볼 수 없다는 한계와 더불어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불안감과 눈이 멈 우리들은 아는 것을 경험하는 것에 본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알겠다".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겠니"?라고 물어 볼 때 see와 know를 서로 교체하면서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 마치 어떤 것을 모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양 겁을 낼 수 도 있다. 알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어두움의 무서운 형태일 수 도 있다. 우리들은 쌍둥이인 토마스 사도가, 믿기 위해서 보아야만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믿는자가 될 것을 격려하신다 (요한 복음 20, 29). 눈먼 사람으로 지낸 36년 이 지 난 후에도 나는 아직도 혼돈스런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에는 마비될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나는 피정을 지도하러 몇 년 전에 한국에 있었다. 첫날 아침 창 밖으로부터 들려 오는 소음에 공포를 느꼈던 경험이 기억난다. 예수회 건물은 언덕 위에 높이 있어서 서울 시내의 택시들과, 버스와 트럭들이 멀리서 어렴풋이 지나다니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비슷한 소리들을 내 평생 들었다. 그것은 혼란과 무질서의 소리들이었다. 또한 이것들은 알려진 안정된 자리에 있으라는 경고인 동시에 모험에 초대하는 소리이다. 나는 나의 공포를 직면하는 것을 배웠으며 예수회 건물이 주는 안전함을 벗어나서 서울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초대에 응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현기증나도록 움직이는 것들과 소음의 신비안에서 나는 보는 것도 배웠다.

만일 우리가 불안정함을 단지 피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눈이 먼 것이다. 우리들은 공포라는 물위를 걸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눈이 멀게 되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어둠의 공포 때문에 너무 슬픈 나머지 우울증까지 겪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제공할 수 도 있는, 하느님께서 다른 한 손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따른 선택, 결혼, 인간 관계에 대해 극도로 걱정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투명성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절망적인 형태의 어둠의 상태가 된다. 투명한 시력은 주어진 상품이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하느님의 보호를 배제하게 되는 방어적인 태도이다. 영적 생활은,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지켜만 보는, 관중으로서의 스포츠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보호하고 있는 확고함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떼어 내는 갈등으로 이루어진 여정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을 변호하고 우리들의 어둠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은 겉잡기 힘들고 대리적일 뿐이다.

  영적 삶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았고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향해나가고 심지어는 신뢰를 하는, 신비를 침착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은 보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다는 약속도 없이 "가서 실로암 우물의 물로 씻으십시오 (요한, 9, 7)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시력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연못으로 가야 했다. 그의 시력을 되찾는 일은, 그의 어두움의 신비를 예수님의 치유의 약속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에 달려 있다. 눈이 안보인 다는 것은 가혹한 은총이지만 그러나 계속 나아가면서 훌륭하게 성숙될 수도 있다. 나는 "나를 보내는 "실로암 우물"이 무엇이건 간에 그곳으로 좀더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을 배웠다. 나의 삶에 하느님의 약속이 충실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예수님은 그 남자에게 가서 씻으라고 말하신다, 그리고 그는 시력을 찾고 돌아 왔다. 부딪히거나 상처가 생기지 않지만, 가끔 온갖 종류의 어둠 속으로 눈이 안 보이는 나를 보낸다". 그러나 돌아 올 때는 보게 되고 그것을 봄으로서 나는 믿는다. 이렇게 되면 불안정함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은 눈이 안 보이는 것으로부터 내가 배운 영적 삶의 제일 첫 번째 요소이다.

  선택과 받아들임 눈먼 사람에게 도전을 가했던 유태인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안전과 명확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각자 마음안에 있는 불안전감으로 들어 갈 것을 제안하신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은, 그 신비의 진정함을 불신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에게 두 번이나 찾아 오신 것을 주목하라 (요한, 9:1-35). 눈먼 지도자들의 관심은 안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시력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이 먼 그 사람은 종교적인 논쟁에 말려들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한때는 눈이 멀었었지만, 지금은 시력을 회복했다는 것만을 알 뿐 이다 (요한 9:25).

  눈이 먼 나에게 두 번째 제공 된 영적 삶의 선물은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가끔은, 가장 고통스러운 받아들임이다. 파티 혹은 다른 모임에서, 나는 그 저녁시간을 보낼 사람이나, 같이 앉거나, 같이 이야기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에겐가, "미안해요. 저기 내가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가 있어요"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이 나에게 보내신 그 특정한 사람에게 항상 전적으로 마음이 열려져 있거나 고마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똑같은 미소를 띠며, 나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초대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권력이라든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몇 가지 중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신자들의 영성은 "성령을 받아들임, 즉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우리들을 비우는, 그런 종류의 가난에 기초 해 있다. 나는 곧잘 경이롭지만 이상한 상황을 통하여 감사의 미덕을 경험하도록 초대되었다. 몇 번은, 내가 길을 건너가도록 도와준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도와 줄려고 했던 술에 취한 사람이다. 또 한번은 토론토의 지하철역에서 전철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나의 양쪽에서 각각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많은 사람들과 소음 때문에 양쪽 모두 내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받아들임은 쉬운 미덕이 아니다.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를 정지시키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일어 날 수 있다.

어떤 집에 손님으로서 초대를 받아 갈 때나는 어떤 형태로든 계란 음식은 싫어한다. 나는 가끔 크고 작은 계란 조각을 셀러드에서 발견한다. 가끔 나는 내가 무엇을 먹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다. 한국을 방문했었을 때 내 친구는, "나는 무엇인가 있는 것을 보기는 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라면서 나에게 말을 해 준다. 옷을 사러 갈 때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선택을 해 주어야 한다. 항상 같은 사람과 가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복장도 일관성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인디아의 시인, 타고르는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오신다" 라고 쓴다. 신앙인 인 우리들은 그분이 선택하시는 어떠한 형태건 그 안에서 그분이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는다.

단지 우리가 보는 것을 증명을 해야 되는 것에 묶여서, 오시는 분이 그 분이라는 것을 보는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어둠이다: 피부 색, 머리 모양,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이런 것들은 분명히 그를 감싸고 참신하게 하겠지만, 오시는 그분은 오히려 꽁꽁 싼 것을 풀고 받아들여 지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마테오 25:40)라고 말씀하신다. 눈이 멀었다는 이 가혹한 선물은 나의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사치에의 욕망을 전적으로 대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나만의 바램이 있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잡은 다음에는, 내가 좀더 그분의 도움과 동행을 좀더 받아들이는 것을 배움으로서,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배운다.

나의 욕망과 기대의 손을 펴기는 하지만, 나의 손안에 무엇이 들어 와야 한다는, 이미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민감하게 만져 볼 수 있기 위해 손을 펴고 있다.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믿음의 기회를 잃은 동안, 장님으로 태어난 그 사람은 그의 시력의 회복과 함께 신앙의 빛을 받았다. 눈먼 사람의 받아들임은 바리세이파 사람들의 선택적으로 논란을 좋아하는 것이 나란히 대조가 된다. 영적 삶에서는 요구가 아닌 바램을 가지는 것, 완고한 기대가 아닌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눈먼 나를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신앙이 제공하는 시력을 받았다. 나는, 어떻게 그 분이 오시든지, 혹은 무엇을 가지고 오시든지 고마와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의존성과 독립성 나의 삶에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와 , "좀 도와 주실래요? 사이의 긴장을 겪고 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비현실적이며 영웅적이 되는 것에 대해 쉽사리 두려워 한다. 또한 너무 의존적이 되거나 남의 짐이 되거나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내 눈이 먼 것을 이용하거나, 게으르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한다. 요한 복음에서의 눈먼 사람은, 그가 누구인가를 나타 내는 데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 그의 부모들이 먹여 살렸던 사람, 그 자신 유다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등, 3가지 현실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 오셔서 낫게 해 주심으로서, 이 세가지 아이덴티티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극적으로 넘어 서게 하였다.

8절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 진정 누구인가하고 물어 본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지금 여러 가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들은 지금 아들에게 책임을 져왔던 자신들로부터 떨어진다. 그들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요한 9: 23) 라고 말한다. 그들 자신이 회당에서 위치를 잃게 될까봐 겁을 낸다. 그의 시력을 되찾음으로서 그는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34절에서, 절대적인 자유가 제공되었다. 새롭게 보게 된 그 남자는, 평생을 몸담았던 회당에서 쫏겨 났다. 그 다음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찾아서 새로운 아이덴티티, 의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제공해 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신앙과 믿지 못함, 시력과 눈이 멀음이 긴장을 야기시키지만, 시력이 제공하는 자유로 인해 이 사람은, 믿는 자로서 해방이 되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30일 피정을 하였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적절하게 의존적이 되는 것과 그가 보내는 도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고투하였다. 일주일 후에 나는 메사추세츠주의 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일을 하라고 보내졌다. 나에게 수퍼바이져가 첫 번째로 한말은, "물론 제일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 병동에서는 독립적이 되야 한다는 겁니다"였다. 나는 적절한 독립과 감사하는 의존간의 긴장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긴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에게는 은총이며 나를 도와 주는 사람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자부심이,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이다. 언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편하게 될지 혹은 그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불쾌해 할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길을 걸어 갈 때 내가 쓰고 있는 하얀 색 지팡이로 내 앞을 톡톡 치면서 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때에는, 지팡이는 항복과 패배의 견딜 수 없는 상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장님이며 내가 혹시 너무 독립적이 아닌가하는 것에 대해 따질 것 없이, 또 도움 없이 나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긴장이 해결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장님이며, 내가 너그럽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의 빛을 고맙게 받아 들 일 수 있다. 내가 가혹한 선물을 저항하지 않을 때, 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내가 은총이 되는 것을 허락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적이 되는 것을 보면서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친구들을 방문할 수 있고 또 훌륭하게 자선에 관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너무도 손쉽게 책을 펴들고 읽는 사람을 보며 원망 할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피로해 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눈을 사용 할 수 있는 나의 친구들 역시 다른 영역에서 비슷하게 의존적이 될 수 있으며 능력의 모자람과 제한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도록 배워야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설정한 자주성과 진실된 의존성이 보편적이라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내 친구들은 차를 운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림책 속에 실려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못미치지만, 책속의 그림 그대로 그리고 싶어하거나 그림속의 사진처럼 기술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할 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이 가진 한계와 싸운다. 한편 이 한계들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의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의존적이 된다는 것에 대한 또 하나 고통스러운 단면은, 인내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자주 나는 누군가가 와서 나의 우편물을 읽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왔을 때는, 그의 우편물을 먼저 읽고 싶어 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좀더 기다려야 할 는지도 모른다. 나를 도와 줄려고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나의 참을 수 없음이 의존성을 더욱 불쾌하게 할 것이다. 길을 건너 갈 때에는 모든 차들이 지나가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뿐더러 앞차가 지나간 후에도 내가 건너 가는 시간동안 뒤에 다른 차가 지나가지 않도록 거리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눈이 안보이는 사람들 뿐만은 아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 귀가 안 들리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들, 모두 다 그런 악마와 씨름을 한다. 신앙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일상 생활의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바로 악마와 나의 눈먼 상태와 씨름을 하는 악마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 할 때 나의 영적 삶의 모험에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항상 참지 못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마와 직면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 "야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애가 3, 26)라는 구절을 읽는 것을 참으로 힘들게 한다. 

내 안에 있는 참지 못하는 에너지가 가끔 폭발을 하면 나는 급히 내방으로 들어오는데 도중에 층계에 내 발가락이 걸리거나 반쯤 열린 문에 내 머리를 박곤 한다. 나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듣는다 "야훼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실 날을 기다리신다. 복되어라. 그 분을 기다리는 자 (이사야서 30: 18-19). 은혜로운 하느님 앞에서 나는 기다린다. 나는 점차 "섬기는 자"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전환된다. 그분은 나에게 봉사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나를 조용히 가라 앉혀 주고, 나에게 권위가 아닌 강인함을 주고, 단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닌 용기를 주신다.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겪는 갈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의 부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이 부족함- 나에게 희망작인 기대로 부른다.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러 온다. 그들은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기 전에 세 번씩이나 초인종을 누른다. 나의 방으로 급히 들어 와서 재빨리 앉은 다음 나에게 이미 다른 약속에 늦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53 분밖에 할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기도 생활이 매우 공허하고 무미 건조하다고 털어놓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단지 가만히 침묵속에 앉아서, 자신들이 한말을 자신들이 다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들의 삶은 연속적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대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을 성이 없다가나, 지나치게 요구를 하거나, 독립적이라면, 이것이 그대로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안에서도 대부분 반영이 된다. 성서 속의 눈이 먼 그 남자는 예수님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또 예수님이 다시 그에게 오셔서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 분임을 나타내고, 신앙의 새로운 비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론 눈이 먼 그 사람의 삶과 영적 삶은 같은 점이 많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창조물들이 그 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눈이 먼 상태 때문에, 마치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는 가끔 자신들을 우리 자신의 재산인양 취급하고 창조주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한다. 여하한 형태로든 안전하지 못함을 항상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안전성을 항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어떤 것을 거부해야 되는지에 대해 혼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만 한다고 느낀다. 눈이 먼 것은 이러한 악마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매일 겪는 육박전은 그들과의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하였으며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눈 이 먼 것처럼, 영적 생활도 끝없는 회심과, 낙오와, 다시 일어서는 것의 연속을 포함한다. 나는 항상 은총속에 서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또 항상 고마워 하는 눈이 먼 영적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능력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에 의사소통의 필요는 늘 있어 왔다. 다름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를 아는 깊이 만큼 성장한다. 오래된 친구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구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작정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냇다고 관게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알만한 기회가 없었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도 관게는 여전히 서먹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오해가 있게 마련이다. 상대의 뜻을 헤라여 아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돕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으로 원활한 의사소통법을 가르친다.

이때 좋은 의사소통의 중요한 기초 두 가지를 말하게 되는데 그 첫째는 상대방이 나를 알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며 둘째는 내가 아무리 상대의 뜻을 이해했다고 확신 하더라도 우해의 소지가 항상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상대의 말에 마음을 기울이는 태도이다. 이 기초와 빗대어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는 내가 표현하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이 나를 알아주리를 기대하는 마음과 상대방의 말을 깊이 듣기도 전에 내가 상대방을 안다고 넘겨 짚어 생각하는 버릇이다.

특히 관계 속에서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것 때문에 생기는 오해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기 포기의 과정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의사소통에는 그 자체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소지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전하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미 경험해서 알게 된 어떤 사실들에 비추어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을 경험한 적이 없는 따뜻하 ㄴ나라에 사는 아이들에게 눈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상대방의 표현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이 상처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이때 느낀 아픔으로 인해 관점이 너무 강하게 고착되면 의사소통에 장애를 일으키기 쉽다.

 이런 경우는 상대방고 관계한다 하면서도 자신의 고착된 관점을 상대방에게 투영하여 관계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상대방과 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연못에 투영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즘의 일종으로 단지 확대된 자신과 관계하고 있을 뿐이다.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를 바로 알 수 있어야 하며 의미 있는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제한된 모습을 깨뜨리며 성숙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방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경험하는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자기 포기의 과정이 필수적인 일이다. 자신의 기준과 감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기준과 관점으로는 이렇게 밖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감각에 어긋나 보이는 상대를 신뢰해 주는 것이다. 이런 의사소통의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려야 할 책임과 이에 따른 권위를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아야 할 필요는 명백하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공유할 수 있는 내면의 전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일이 우리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여전히 우리 경험의 한계가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인격으로 경험하여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나의 경험을 초월하여 그 분 스스로의 표현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내 맘속에 굳어진 관점으로 인해 생기는 나의 감각을 포기하고 내 감각에 옳지 않아 보이더라도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은 내 마음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표현에 마음을 기울이는 순종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김 준 - 의사 출신의 선교사

‘나’를 비워야 ‘주님’으로 채워집니다!


상담실을 찾은 내담자 중의 상당수가 심각한 나르시시즘의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보통 ‘자기애적 성격장애(나르시시즘)’라고 부르는 이 병은 정신과 병원에서도 치료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신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타인과의 마찰이 가장 큰 신호입니다. 그 마찰을 통해 교훈을 얻고 성숙해지지 못하는 이들이 바로 성격 장애자라는 것입니다. 일생을 나밖에 모르는 유아적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성격 장애는 정신 질환, 즉 정신병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성격 장애자들의 가장 큰 불행은 ‘성숙’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다는 점입니다. 어른의 탈을 쓴 어린이 같은 이들의 욕구는 자신의 욕구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욕구보다 중요하며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대가 좌절되면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거나 심한 좌절감에 빠집니다다.

나르시시즘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자신감을 북돋워주고, 다른 이들과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질입니다. 그러나 자기애적 성격 장애자들은 병적인 자기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지나친 데다 성격적인 응집력도 탄탄해서 누구의 충고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각한 자기애는 남들보다 훨씬 민감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산물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내면은 너무나 허약하고 쉽게 무너지는 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향한 충고를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온 몸에 날을 세우고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수치심을 건드리는 상황을 참지 못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완벽한 인물인 것처럼 연기를 하기도 합니다.

더 깊은 상처를 받는 경우는, 아주 긴밀한 관계인 가족 중에 이러한 성격장애를 가진 경우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 특히 정서적 교류가 가장 예민하게 이루어지는 엄마가 성격 장애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 자녀의 삶은 매우 팍팍하고 고달프게 됩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특징이 자기자신의 잘못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엄마로서의 자기 행동을 성찰하기보다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녀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도 똑같이 자기애적 성격장애나 경계선 성격장애 등의 질환을 안고 살아가게 합니다.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는 나르시시즘에 갇힌 성격 장애자들은 공감 능력이 절대적으로부족하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감정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거나 자기가 원하는 성취를 해주기를 바라는 미성숙한 엄마들로 인해서 자녀들이 또다시 성격장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로 가득 차 있는 이러한 성격장애를 가지게 되면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기도 매우 힘이 듭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고 좋아하고 칭찬해주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교회도 열심히 다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 다니는 것 마저 시들해집니다. 사는 재미가 없고, 교회 가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점점 신앙생활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자기애를 가득 가진 자기 안의 ‘자기’를 버리고 ‘주님’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형성된 일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자아상을 직면해야합니다. 그런 후에 그러한 ‘나’를 버리고 ‘주님’으로 채우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딤후3:1-2) 크리스천투데이

시련과 연단에 대한 신자의 태도


시련과 연단에 대한 신자의 태도 고난 또는 시련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연단 혹은 시련이 오게 되므로 이런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연단이 전혀 없는 사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은 없다. 그렇다면 연단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시련은 우리의 잘못을 교정하는 회초리의 역할도 하 지만 그것을 통해 성도의 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섭리적 목적도 있다. 인간의 죄성은 꺼지지 않는 불과 같으며 설사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예외 가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 해 깊이 살펴보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다. 

먼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교정하고 죄악에서 떠나도록 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래 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 67)고 말한다. 성도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방치하시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한 채 찍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 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채찍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 릇 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며 살 것인가.

이러한 채찍을 통해 우리를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반면에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 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 11)고도 말씀하신다.

고통을 겪을 때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 제발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게 되지만 연단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시간들 이 참으로 유익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이와 관련해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고통스러운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돌아보고 추함과 연약함, 나태함,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연단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신의 비참한 실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 게 되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에게 있어 이처럼 근원적인 복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자신의 악함과 추함, 죄악 됨을 직시하는 자만이 근본적인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거울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받은 자로서 마땅하지만 그것이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본성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하 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소망과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시 는 하나님은 분명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 또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 하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과 은혜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에 있어서도 우리가 견디고 승리하게 됨을 알게 된다. 예전엔 작은 어려움과 연단 앞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이젠 어지간한 어려움과 고통은 힘들게 느끼지 않는다. 연단을 통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어제 나와 함께 하여 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과 내일도 나와 함께 해 주시리 란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교회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배우고 알며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아가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기에 연단을 통해 성도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아간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면 연단을 통해 당신을 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의 백성들은 참으로 복되다. 동시에 연단의 시간들은 우리를 더욱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든다.

특히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적 성숙을 연단과 눈물의 시간들을 통해 얻게 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이름과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은 거친 광야와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를 힘겹게 걸어가는 가운데 확고해진다. 연단은 신자들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비록 괴롭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연단의 시간들을 감사하면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 에 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삶의 역설이며 기쁨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러한 삶의 역설에 대해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개혁신보사설>


누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는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누가 돌판에 십계명을 새겼습니까? 모세가 새겼습니까? 아닙니다. 신명기 5:22절에 보면 모세는 십계명을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가운데, 구름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 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그런데 산 위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분이 나서 그 돌 판을 깨뜨려버립니다. 그 후 다시 돌 판을 만들어서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그때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돌 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신명기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이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무엇으로 쓰십니까? 손으로 쓰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1:20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하나님의 손”이라고 묘사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세는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으라(출12:3)고 명령했는데, 이 어린양은 고난 받으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돌비에 율법을 새기신 것은 유월절로부터 정확히 50일 후였습니다(출31:18, 신16:9~)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정확하게 오십일 후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즉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돌에 글을 새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새기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유월절 후 정확히 50일 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고, 또한 성령님은 오순절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산 위에는 돌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산에 있는 아무 돌맹이나 바위에 십계명을 새겼습니까? 아닙니다. 두 번 다 모세가 정성 들여 다듬고 깎아서 가지고 간 돌판에 십계명을 새겼습니다. 돌판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즉 “육의 심비”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중에서… - 변승우목사

하나님의 때 - 시기를 분별하는 일

하나님의 때 - 시기를 분별하는 일 

 ☆ 종종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그 분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변화시기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바르게 찾아 올수 있다. 하나님의 시간은 시시각각 전진해간다. 이스라엘의 한 부족인 잇사갈의 자손들은 때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졌었다.(대상12:32).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지를 아는 통찰력이 바로 때를 아는 그들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는 적이 종종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다니엘서 2:20-21절을 묵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영으로 이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다.” 즉각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시도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는 시간과 때, 즉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고 인식하기를 바란다.

 다음 이사야서의 세 구절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기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이사야 48:6절 2)이사야 43:19절 3) 이사야 42:9절 - 꼭 찾아보셔요.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두 구절에서 “시작되다(sprung forth)”라는 구에 주목하라. 이 단어는 시간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께 물으신다. 종종 그 분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그 분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변화시기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르게 찾아 올 수 있다.

 두 번째로, “새로운”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이 단어도 변화의 시기를 뜻한다.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의 희랍어 단어가 “새로운”으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은 같아도 두 단어의 의미는 다르다. 이 다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오스’(neos)란 단어는 숫자상으로는 새롭지만 다른 것들과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의 다른 희랍어는 ‘카이노스’(kainos)인데, 이 단어는 숫자상으로 새로울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네오스와 카이노스라는 두 단어의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우리가 새로운(kainos)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네오스인 어떤 사물의 복사품이나 모사품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의미에서 새로운(Kainos) 피조물이다. 우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새로운 성품을 주시고, 변화시키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주셨다. 우리는 거듭났을 때 몇 가지만 변화한 이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속사람이 완전히 새로워진 카이노스이다. 마태복음 9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두 가지 희랍어 단어들을 모두 사용하셨다.

새(neos) 포도주는 새(kainos) 부대에 담겨질 필요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성령의 새 포도주는 뭔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의미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그분 자신을 더욱 많이 우리에게 부어주길 원하신다. 비록 포도주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포도주 분대는 변화할 필요가 있다. 포도주 부대인 우리는 카이노스, 즉 질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포도주 부대인 우리는 카이노스, 즉 질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더욱 많이 부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변화해야만 한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 질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을 능력이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새로운 “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이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변화의 과정들을 겪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한다면 성령님은 그분 자신인 그 분의 영을 우리 속에 더욱 많이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새(neos) 포도주를 새(kainos) 부대에 부으실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때를 위해 준비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 분은 계속해서 우리가 더 많은 포도주 – 더 많은 성령의 부어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이런 변화는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더라도 언제나 좋은 것임은 분병하다. 제자도란 그리스도께 헌신됨을 의미하는데, 그 분께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명하실 때 우리는 변화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하고, 그리고 우리의 “껍질”을 뒤에 남겨 놓아야 합니다. “새로운”으로 쓰이는 이 두 희랍 단어는 또한 “새롭게 함”이란 단어로도 쓰인다. 영어의 “re”와 같은 전치사로서 전치사 “ana”를 이 단어들에 첨가하면 다른 두 개념의 “새롭게 함”이 생긴다. ‘아나네오’ (ananeoo)는 숫자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가져다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쾌함이 있는 새롭게 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시거나 우리가 이전에 누렸던 신앙의 상태를 되찾도록 하신다. 다른 단어는 질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뜻인 ‘아나카이노’(anakainoo)이다. 이 형태의 새로워짐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워짐의 다음 단계로 이끄시며, 우리는 이전의 우리와 달라져 있다. 이 과정은 우리는 회복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옛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신선한 새로운 자리로 소생케 하신다. 그 분의 일이 완수되었을 때, 우리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달라졌으며 더 많은 성령의 포도주를 담기 위한 변화에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는 당신을 위해서도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 그 분은 때와 시기를 변화시키신다. 민감하고 용퉁성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포도주 부대가 새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막 부어주시려는 새로운 포도주를 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변화에 대한 준비를 갖추어라! <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 – 더치 쉬츠>


거듭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장죠셉목사님]

우리는 뒤로 몰러가 침륜(άπώλεία )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침륜이라는 άπώλεία 라는 뜻은 ‘이미 얻은 것이 황폐해 지거나 또는 이미 얻었던 것이 없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즉시 또는 어느 기간이 지난 후에 자신의 허물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며 기뻐서 외치는 사람들의 간증을 종종 듣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

 이제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죄를 용서받고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 기쁨과 감격스러움 속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다시 빠지게 되는 갈등과 좌절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완전한 구원을 얻었노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라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한번쯤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νουθεσίαν)로 기록하였노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πέσῃ) 조심(βλεπέτω)하라.(고전10:11~12)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말씀 중에서 경계(νουθεσίαν)는 νουθεσία의 목적격으로서 ‘경고, 훈계나 책망’입니다.

넘어짐으로 표기된 πέση는 πίπτω의 2인칭으로서 ‘떨어지다, 망하다, 죄에 빠지다, 있는 것이 없어지다’등입니다. 그리고 조심으로 표기된 βλεπέτω는 βλέπω의 명령형 능동으로서 ‘주의하다, 깨닫다, 식별하다, 삼가다’등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을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죄의 소욕과 욕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욕심과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걸까요? 거듭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듭난 후에 거듭남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지 어떻게 죄에서 승리하며 성화의 길을 걸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침이나 배우지 못해서 혼란스럽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듭났다”라는 것은 지각(知覺)으로 인식하한 것뿐이지 육신(70%라는 물)이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거듭난 이후에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자신의 옳지 못한 인성이 과거와 같이 육신의 타락으로 정욕과 욕심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지각으로 인식하고 말로만 하는 것은 압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육신에서 일어나는 죄의 뿌리가 되는 지난날의 옳지 않았던 성품, 성질, 인식, 말하는 언어, 등이 바꾸어진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음이지, 자기의 육체가 요구하는 소욕에 맡겨서 인성이 바꾸어지지 않은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바울 사도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고 육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는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는 육체라는 세포(유전자)나 후천성으로 배양된 습관들이 계속 남아있으므로 육신에 속한 소욕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변하도록 살아야 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거듭난 것으로써 육체로 이루는 체질이 완전무결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첫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린 아기”라는 말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먼저 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거듭남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거듭남을 어떻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면 그 순결하고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옛 성품이라는 인성이 바꾸어지고, 오로지 성령님의 지배만을 받는 생이 거듭남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은 그렇게 사십니까?” 하고 반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반문이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성품이 바꾸어졌으면 그렇게 반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바꾸어야 할 점이 누구보다도 많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깝기 때문에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 완전해서는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성품을 개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있는 것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을 개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거듭난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성화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날마다 자기 인성을 선한 쪽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듭나는 순서를 바꾸지 마세요[장죠셉목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성경에 거듭남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확한 곳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물”과 “성령” 둘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에서도 “물”이 먼저요, 다음이 “성령”이라 합니다.

이 뜻은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물로는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잘못 인식하고 자기 스스로 속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오늘은 진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교파마다 물로 거듭남에 대하여 각기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줄 압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침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예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그대로 남아있고, 못된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고, 악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형식적인 예식은 물로 거듭남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에 앞서 “물로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1. 물로 거듭남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καινόs ανθρωποs)을 입으라.(엡4:22-24)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물로 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순서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육체는 세포와 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중에서 물이 70%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aνθρωπο 앞에 형용사 παλαιόs는 낡고, 오래 된, 옛 이라는 뜻은 이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흙이라는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들어진 존재를 “사람(aνθρωποs)”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육체는 30억이라는 세포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생각과 죄에 끌려가는 연약한 세포가 육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한계(界限)를 갖게 되며, 이것이 옛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 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육체로 바꾸는 것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νοus)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롭12:2)

  마음이란 νοὔs는 이해력, 태도, 생각, 사상, 판단, 개념, 등 이런 것들을 지니고 태어난 죄 성을 의지적으로 자기의 지.정.의.라는 패턴을 바꾸어서 새롭게, 또는 새로 만듬이 καινόs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패턴으로 바꾸어짐(μεταμορϕόω)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의 지정의를 바꾸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옳지 못한 성품이라는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안 바꾸는 것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자기 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권리나 의무의 주체가 되는 독자적인 가치로서 인정되는 자격, 본체에 대한 인성을 갖춘 품격, 본체를 이루는 주체인 지정의로서 나타나는 품격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성령님도. 인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려는 사람도 인격자라야 됩니다.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이루는 부분이 하나님을 닮게 지음을 받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이러한 인격문제는 윤리적인 정의와 심리적인 정의로 보게 되는데, 거듭남은 윤리적이 아니라, 심적인 측면이 변해져야 진정으로 거듭남이 됩니다.

  지성(知性) =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인 법으로서 이성에 관하여 이해하고 인식(認識)하는 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지각(知覺)을 바탕으로 정신인 인식을 형성시키는 지적기능입니다. 인식은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으로부터 대상을 분별하는 지각입니다. 따라서 지각으로 이동되는 인식은 육체 밖에서의 것들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알아져서 깨닫게 합니다.

  정성(情性)=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느끼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황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이 밖으로부터 받아지는 쾌활과 불쾌를 의식(意識)하여 일어나는 정적기능입니다. 의식(意識)은 각성으로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나타내고 판단하는 감정입니다. 감정(感情)으로 이동되는 의식은 대상에게서 느끼고 일어나는 심정으로 의지로 표출하게 합니다.

  의지(意志)=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되는 정신적 작용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으로 사려(思慮)를 선택해서 결정하고 실행으로 나타내는 기능입니다. 사려는 여러 가지일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각(知覺)으로 받아진 인식(認識)을 의식적으로 쾌활과 불쾌를 구분하고, 그 하나를 결정하는 의지로 행동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형성되고 성장되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로 자라게 됩니다. 지정의가 옳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대부분이 성장하면서 인격을 그릇된 방향으로 틀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의지로 성품을 바꾸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바꾸며 사는 생이 물로 거듭나는 과정이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 합니다. 그러나 사려선택에서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도 있고,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변화되면 물로 거듭난 사람이고, 변화되지 않으면 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틀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물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으로 구성시키는 지각(知覺)이 바꿔지지 않으면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십니다. 받아들이는 의식(意識)이 바꿔지지 아니하고 항상 부정적인 식별로 있으면 이러한 인격자에게는 인격적인 성령은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들을지라도 올바른 의지로 행하지 않아서 물(성품)로 거듭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성령이 그에게 들어갑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갖추어질 때에 지정의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려면 지나날 자신이 좋아하고 익숙했던 습관이 바꾸어져야 됩니다. 자기에게 익숙했던 습관은 육신(물)이 요구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옛 사람은 아담에 의해 유전되는 예수 믿기 이전의 육체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지정의가 바꿔지지 않았으면 옛 성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새롭게 되라’는 뜻은 세포와 함께 물로 이뤄진 것을 바꿈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성경에서 구습은 형용사 파라이온(παλαιόν)이며, 뜻은 ‘오래되고 낡은 옛것’이라는 파라이오스(παλαιόs)의 목적격입니다. 새로움은 같은 형용사 카이논(καιύόν)이며, ‘다시 만들어서 새로움을 나타냄’이라는 카이노스(καινόs)의 주격입니다. 정리하면 ‘오래되고 낡은 사고방식을 다시 새롭게 바꾸라’는 말입니다. 나를 지배하던 자신을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새로운 성품으로 바꾸는 생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지정의가 새롭게 바꾸어(μεταμορϕόω)졌을 때 온전히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πνευματικόs)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니고데모에게 하신 권면은 물로 거듭난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가 먼저는 물이요 다음이 성령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물”로 거듭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πνευματικόs는 ‘영적인 사람, 영에 속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령을 모신) 사람’이므로, 물이라는 성품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성령의 사람, 곧 성령을 모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나’라는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는 생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몇 곳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합니다.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면서도 마음(νοὔs)의 변화(μεταμορϕόω)가 없는 비인격적인 성품의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성품이 변화하지 못해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상식과 학문으로 터득한 전공분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주변이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도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멈추지 못하고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만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물로 거듭났는지부터 점검해 보아여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성품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침을 받지못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십일조 생활과 봉사하고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또는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고 있는데, 집사요 장로요, 목사인데 하겠지요. 그런 것은 성품의 변화와는 별개입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상대를 비방하며, 험담하며, 시기하며, 질투하며, 악담까지 하는 성품의 사람이라면 성령은 고사하고 물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품의 변화는 자신의 강한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자신의 성품, 옛 사람을 마꾸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이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물로 거듭남을 먼저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대로 심판받고, 행함대로 형벌이 주어진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에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장죠셉 목사>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정동수 목사]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라탔습니다. 아직도 숨이 가빠 헐떡이며 땀을 닦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놓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십니다.” “네! 이 열차를 놓쳤으면 네 시간이나 무료하게 기다릴 뻔했습니다.” 짧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뜁니다. 하지만 영원한 미래를 생각하며 참된 길로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진화론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자동차나 비행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다 설계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먼지 가루를 땅바닥에 놓고 아무리 수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도 자동차나 비행기가 저절로 생겨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비롭게 이루어진 인간이란 존재가 우연히 생겨날 수 있을까요? 인간과 온 우주를 우연의 결과로 돌리는 진화론은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가설과 이론뿐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집마다 지은 자가 있으되 모든 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브리서 3장 4절) 성경은 말합니다. 우주 만물을 보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위엄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1장 20절). 저 하늘을 보십시오. 해와 달과 별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충돌하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시계 부품을 통에 넣고 흔든다고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설계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고의로 그분을 무시하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짐승이나 해와 달 같은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장 21-23절).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지 않습니까? 이교도들은 돌덩어리를 깎고 나무를 새겨서 만든 각종 형상에게 경배하고 있습니다.

  ◆ 세상의 __________슬픔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세상에 슬픔과 혼돈이 가득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스스로 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이사야서 59장 1절) 인간이 제멋대로 행한 죄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성연애로 인한 에이즈(AIDS)의 만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 하여 남자가 남 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로마서1장 27절)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므로 모든 사람을 무조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건을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 물건을 검사하여 설계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다 폐기시키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도 창조물인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행하면서 창조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존재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더불어 공의를 집행하십니다.

 ◆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멸망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면서도 눈앞의 일에만 빠져있습니다. 시간이 아깝다고 쉴 새 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자기 인생이 치닫고 있는 방향은 보지 못합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브리서 9장 27절)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파멸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영원의 문제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같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방향 없는 인생, 떠돌다 끝나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부담을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선하고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까맣게 잊고 있던 일과 자신도 모르던 마음의 의도까지 낱낱이 다 밝혀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자신 있으십니까? 우리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로마서 3장 10-11절). TV나 신문에 나오는 흉악한 범죄자들만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죄인이면 마땅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려고 애써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철학에 몰두하고 종교에 심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심판을 잊게 해주거나 조잡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는 그 어떤 노력에도 구원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모든 사람의 죄의 대가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로마서 5장 8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9장 13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조물인 우리 사람은 창조주께서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이제 당신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듯이 지금 이 글을 읽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잊은 채 살아 가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 분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www.KeepBible.com www.CBCK.org www.KACR.or.kr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준비해 놓으신 은혜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온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당신은 이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선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