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2009

거듭나는 순서를 바꾸지 마세요[장죠셉목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성경에 거듭남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확한 곳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물”과 “성령” 둘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에서도 “물”이 먼저요, 다음이 “성령”이라 합니다.

이 뜻은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물로는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잘못 인식하고 자기 스스로 속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오늘은 진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교파마다 물로 거듭남에 대하여 각기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줄 압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침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예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그대로 남아있고, 못된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고, 악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형식적인 예식은 물로 거듭남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에 앞서 “물로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1. 물로 거듭남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καινόs ανθρωποs)을 입으라.(엡4:22-24)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물로 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순서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육체는 세포와 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중에서 물이 70%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aνθρωπο 앞에 형용사 παλαιόs는 낡고, 오래 된, 옛 이라는 뜻은 이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흙이라는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들어진 존재를 “사람(aνθρωποs)”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육체는 30억이라는 세포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생각과 죄에 끌려가는 연약한 세포가 육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한계(界限)를 갖게 되며, 이것이 옛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 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육체로 바꾸는 것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νοus)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롭12:2)

  마음이란 νοὔs는 이해력, 태도, 생각, 사상, 판단, 개념, 등 이런 것들을 지니고 태어난 죄 성을 의지적으로 자기의 지.정.의.라는 패턴을 바꾸어서 새롭게, 또는 새로 만듬이 καινόs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패턴으로 바꾸어짐(μεταμορϕόω)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의 지정의를 바꾸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옳지 못한 성품이라는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안 바꾸는 것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자기 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권리나 의무의 주체가 되는 독자적인 가치로서 인정되는 자격, 본체에 대한 인성을 갖춘 품격, 본체를 이루는 주체인 지정의로서 나타나는 품격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성령님도. 인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려는 사람도 인격자라야 됩니다.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이루는 부분이 하나님을 닮게 지음을 받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이러한 인격문제는 윤리적인 정의와 심리적인 정의로 보게 되는데, 거듭남은 윤리적이 아니라, 심적인 측면이 변해져야 진정으로 거듭남이 됩니다.

  지성(知性) =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인 법으로서 이성에 관하여 이해하고 인식(認識)하는 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지각(知覺)을 바탕으로 정신인 인식을 형성시키는 지적기능입니다. 인식은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으로부터 대상을 분별하는 지각입니다. 따라서 지각으로 이동되는 인식은 육체 밖에서의 것들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알아져서 깨닫게 합니다.

  정성(情性)=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느끼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황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이 밖으로부터 받아지는 쾌활과 불쾌를 의식(意識)하여 일어나는 정적기능입니다. 의식(意識)은 각성으로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나타내고 판단하는 감정입니다. 감정(感情)으로 이동되는 의식은 대상에게서 느끼고 일어나는 심정으로 의지로 표출하게 합니다.

  의지(意志)=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되는 정신적 작용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으로 사려(思慮)를 선택해서 결정하고 실행으로 나타내는 기능입니다. 사려는 여러 가지일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각(知覺)으로 받아진 인식(認識)을 의식적으로 쾌활과 불쾌를 구분하고, 그 하나를 결정하는 의지로 행동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형성되고 성장되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로 자라게 됩니다. 지정의가 옳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대부분이 성장하면서 인격을 그릇된 방향으로 틀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의지로 성품을 바꾸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바꾸며 사는 생이 물로 거듭나는 과정이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 합니다. 그러나 사려선택에서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도 있고,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변화되면 물로 거듭난 사람이고, 변화되지 않으면 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틀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물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으로 구성시키는 지각(知覺)이 바꿔지지 않으면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십니다. 받아들이는 의식(意識)이 바꿔지지 아니하고 항상 부정적인 식별로 있으면 이러한 인격자에게는 인격적인 성령은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들을지라도 올바른 의지로 행하지 않아서 물(성품)로 거듭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성령이 그에게 들어갑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갖추어질 때에 지정의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려면 지나날 자신이 좋아하고 익숙했던 습관이 바꾸어져야 됩니다. 자기에게 익숙했던 습관은 육신(물)이 요구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옛 사람은 아담에 의해 유전되는 예수 믿기 이전의 육체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지정의가 바꿔지지 않았으면 옛 성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새롭게 되라’는 뜻은 세포와 함께 물로 이뤄진 것을 바꿈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성경에서 구습은 형용사 파라이온(παλαιόν)이며, 뜻은 ‘오래되고 낡은 옛것’이라는 파라이오스(παλαιόs)의 목적격입니다. 새로움은 같은 형용사 카이논(καιύόν)이며, ‘다시 만들어서 새로움을 나타냄’이라는 카이노스(καινόs)의 주격입니다. 정리하면 ‘오래되고 낡은 사고방식을 다시 새롭게 바꾸라’는 말입니다. 나를 지배하던 자신을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새로운 성품으로 바꾸는 생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지정의가 새롭게 바꾸어(μεταμορϕόω)졌을 때 온전히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πνευματικόs)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니고데모에게 하신 권면은 물로 거듭난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가 먼저는 물이요 다음이 성령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물”로 거듭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πνευματικόs는 ‘영적인 사람, 영에 속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령을 모신) 사람’이므로, 물이라는 성품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성령의 사람, 곧 성령을 모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나’라는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는 생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몇 곳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합니다.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면서도 마음(νοὔs)의 변화(μεταμορϕόω)가 없는 비인격적인 성품의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성품이 변화하지 못해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상식과 학문으로 터득한 전공분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주변이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도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멈추지 못하고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만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물로 거듭났는지부터 점검해 보아여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성품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침을 받지못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십일조 생활과 봉사하고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또는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고 있는데, 집사요 장로요, 목사인데 하겠지요. 그런 것은 성품의 변화와는 별개입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상대를 비방하며, 험담하며, 시기하며, 질투하며, 악담까지 하는 성품의 사람이라면 성령은 고사하고 물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품의 변화는 자신의 강한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자신의 성품, 옛 사람을 마꾸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이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물로 거듭남을 먼저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대로 심판받고, 행함대로 형벌이 주어진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에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장죠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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