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2010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사람은 아담이 범죄 한 후로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살기위해서 먹는 것인지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사는 것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돈이 중요한건지 관계가 중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먹고 즐기고 동물처럼 살면 되지 뭐 그렇게 어렵게 살겠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눈먼 장님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미래의 일은 불안하고 불투명하고 근심 걱정 두려움 가운데 살기 때문이다.

또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기 때문에 지금 잘나가고 행복하다고 해도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는 것처럼 헛된 일이다.

“우리의 년 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밖에 없다. 교회를 다닌다고, 신앙 고백을 하였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아는 것처럼 하나 됨을 말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자들도 삼년 이상을 공동으로 생활하였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거듭난 삶을 살지 아니하면 종교적으로 치우치든지 세상적으로 치우치든지 기준이 없고 중심이 없다. 그래서 우선 교회에 나가면 조금 안심이 된다. 또 목사님 말씀대로 십일조 하고 봉사 하고 주일 잘 지키면 거듭난 줄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직분을 받고 구제도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면 자식들도 좋은 대학에 가게 되고 먹고 살만하고 누가 보아도 하나님께 축복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거룩 거룩하지만 삶에서는 세상 사람과 별 다르지 않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바리새인 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나 또 일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가? 그렇다고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실상이다. 곧 실상이 믿음이다. 증거가 믿음이다. 우리가 제자 교육을 받고 성경을 많이 보고 기도를 유창하게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 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거품이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고 거짓말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하는 것이다. 나도 하지 못하는 것을 세상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면 그들이 믿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죄에서 떠나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을 하고 과거의 죄를 용서 받고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며 능히 온전히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로봇처럼 만드신 것이 아닌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거듭난 체험을 하였더라도,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강제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늘 깨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영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나를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음성에 혹해서 그 음성을 따라가느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결단이다.

우리가 거듭난다고 한다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고, 그 성령님이 주시는 음성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인격적인 성품을 지니신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강제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늘 깨어서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에 이끌려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를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자료제공 : 우림과 둠밈

제14강 거짓신앙체계와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요한복음 5장 37절입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42절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5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우리는 앞에서 우리 신앙이 어떻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인 반면에 자기중심적인 삶은 타락의 본질입니다. 우리 삶속에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희생과 헌신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전적으로 타락한 삶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배후에는 사단이 잇습니다. 사실 사단이 자기중심적인 삶의 원조입니다. 자기가 자기 하나님 되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사단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가지고 아담돠 하와를 똑같이 시험한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했는데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기를 미혹한 것이고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의 본질이 자기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에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영적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기준인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한 삶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넘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은 같이 갑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다림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집니다. 가려지면 우리는 절대로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 신앙인지 모르기 때문에 옳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가려지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습니다. 

영적분별력이 있어야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 있는데 분별력이 사라지면 자기관점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성경에 기록된 역사들은 성경을 믿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백성들이신앙이 타락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지고 그러면 동시에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집니다. 그들은 신앙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신앙을 왜곡되게 이해합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자기중심적인 삶에 기초한 신앙에 대한 왜곡입니다. 거짓신앙체계 배후에는 항상 사단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한 사단의 가장 큰 공격 중에 하나가 거짓신앙체계를 통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회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을 가장 많이 대적하는 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우리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져있으면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음주일부터 거짓신앙체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전체적인 거짓신앙체계에 대한 윤곽을 그려볼 것입니다.



포도나무교회는 이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많이 들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하나님이 말씀에 반복해서 비추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체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우리 모두가 보아야할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분명하게 살펴보아야 다음주부터 살펴볼 거짓신앙체계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거짓신앙체계의 실체

성경 어디를 보아도 거짓신앙체계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여러 시대를 걸쳐 제가 말하는 거짓신앙체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거짓신앙체계가 기독교 역사에서 있고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고 사람이 다를지 몰라도 거짓신앙체계가 존재합니다. 두려운 것은 거짓신앙체계는 어느 시대나 똑같습니다. 그 배후에 사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봅시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사야 1장 10절 이하를 보면, 그들은 예배를 잘드렸습니다. 안식일 철저하게 지켰고 월삯의 예배를 드렸고 각종 절기를 빼놓지 않고 지켰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오늘 성도들보다 많은 경우에 더 잘드렸으면 잘 드렸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기독교인중에 많은 분들이 주일날 낮에 한 번 오고 맙니다. 또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수송아지 염소 어린양등을 가장 살지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무수히 드렸습니다. 많이 기도했습니다. 

사58장 같은 곳을 보면 금식의 날에는 아이부터 왕까지 모두가 재 가운데서 금식했습니다. 이처럼 예배 헌신 희생을 드리고 기도하고 금식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말하는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바로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예배하겠냐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하고 하십니까? 사1장 4절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장 10절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보세요. 왜 이런 일이 있지요?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는 관점과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그들이 신앙에 대해서 지금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누구보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평가를 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처럼 그렇게 예배 잘 드리고 자기들처럼 희생과 헌신을 드리고 기도하고 금식하는데 심판이 온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력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또 하나의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철저히 지켰습니다. 안식일에는 요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은 호텔에서 많이 가서 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안하고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심지어 채소의 뿌리까지 세어 드릴 만큼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성경은 누구보다 잘 알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율법의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롬2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기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안에 하나님의 진리와 지식의 본체가 들어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잇는 자들의 빛이요 소경을 인도하는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잘 압니까? 라고 묻는다면 당연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이 유대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거기를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줄을 알았다고 합니다. 너희가 율법은 전혀 안믿는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 신앙생활 잘하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한다고 자부하는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등 신앙의 모든 면에서 이해가 달라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진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들은 이사야서를 성경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시대의 자기 조상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저들이 소돔의 백성이요 고모라의 백성과 같았고 저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리새인들도 이사야 시대의 백성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사야가 너희에게 잘 말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조상들의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서도 자기들의 잘못은 전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가려져서입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니까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빠지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들도 똑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잘못된 것은 조금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우리도 똑같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거짓신앙체계는 어느 시대나 성격이 똑같습니다. 

우리도 거짓신앙체계에 똑같이 빠져 있으면서도 우리도 이사야 시대나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다 알지만 우리가 잘못된 것을 모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2.거짓신앙체계의 정의

1)거짓신앙체계는 교리가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거짓신앙체계는 반드시 교리가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는 100% 옳으면서도 거짓신앙체계에 빠질 수 있고 하나님의 원수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절부터 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저희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면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저희가 말하는 바는 반드시 지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들이 가르치는 바가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저들은 교리적으로는 옳았는데 거짓신앙체계에 빠져있었고 거기에서 행위가 나오는데 그것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는 교리가 잘못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리가 옳으면서도 철저하게 타락한 거짓신앙체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올바른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성경적인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른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설교자인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교리를 컵에 비유했어요.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아는 지식을 우유에 비유했어요. 컵이 있어야 우유를 담을 수 있습니다. 컵이 없으면 우유가 쏟아져버립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도 올바른 성경적인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나오지 못하는 가장 주된 이유 중에서 하나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배만 해도 큰 교회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큰 교회들도 건물만 해도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우리 숫자에 비해 이만큼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많이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와서 보면 최소한 몇 천 명은 되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배당 크게 지어서 수가 많으면 몇부 예배로 드립니다. 그 동안 설교는 한 25-30분 정도합니다. 설교 내용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새벽기도 잘 나오고 봉사하고 이런 것을 잘하면 집사되고 장로되고 권사되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신 장로들이나 권사들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도 전혀 성경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두려울만큼 그럽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장로님들도 장로가 되었지요. 그러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당회를 하고 하는 것은 잘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았어요. 우리 건물 많다고 해도 주일날 방 하나 쓰려고 해도 방이 없어요. 실제로 가르치고 이야기해보면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이 신앙의 본질인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로막는 핵심적인 내용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의 결여입니다. 심각할 정도입니다.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요. 교회는 오래 다녔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으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설교들을 듣습니다. 듣는데 들으면서도 어떻게 받아들이냐면 목사님이 말한 것 중에 내 마음에 와닿는대로 받아들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어디까지가 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부분이 적용하는 부분인지 하는 구분이 전혀 없이 그저 목사님들이 말하는 그것을 그것도 자기 마음에 와닿은 대로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이제 근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토대로 신앙생활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던데요.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던데요. 그럽니다. 어디까지가 성경이고 어디까지가 그분의 의견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모하는데 하나님을 알 수 없어요. 컵이 깨져 있어요. 컵이 없어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진짜 심각합니다. 그러니까 장로님들도 이단 앞에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도 다 넘어갑니다. 너무나 심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성경적인 지식이 그만큼 중요해요. 그런데 성경적인 지식이 있다고 신앙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컵과 우유를 비교하면서 컵은 우유를 담는 수단이다. 어떤 컵은 빈 컵이다. 교리는 정통인데 하나님과 관계가 전혀 없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전혀없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는 잘아는데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은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교리가 인격체가 서야할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죽은 정통주의를 이단 못지 않게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은 거짓신앙체계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는 교리가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거짓신앙체계란 미성숙한 신앙이 어린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을 잘못 이해한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신앙이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데 그럽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짓신앙체계에 잘 빠지는 사람들은 초신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정에 잘 빠지는 사람들은 소위 신앙생활 잘한다는 지도자들입니다. 

이사야 시대도 보세오. 그들은 신앙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신앙이 어린 상태에 있었습니까? 그 철저한 예배 헌신과 희생 금식과 기도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더했습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는 미성숙한 어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거짓신앙체계에 잘 빠지는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목회자들이 신학생들이 교회 리더들이 잘 빠집니다.



우리 포도나무 교회에도 신학교 다니며 앞으로 갈분들도 많이 있는데 여러분 제 이야기 잘 들으세요. 신학교에 가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져있어요. 이론이 인격체를 대채해버립니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을 배웁니다. 컵을 배웁니다. 그것도 성경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의 이론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컵들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컵을 잘 알고 잘 배우면 실력있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철저히 멀어져서 진짜 자세에서는 바리새인들처럼 타락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신학적인 지식 성경적 지식이 많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멸시하는 정확하게 거짓신앙체계에 잘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신학이 너무나 중요하나 이런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려면 진짜 벽에 부딪혀서 코 깨지고 엎어져서 완전히 자신의 생명없음을 인식하고 애통함으로 주님을 찾는 자리로 돌이키기 전까지는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철저히 생명은 고갈되어 있는데 우월감이 가득합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에 잘 빠지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도자들입니다.



3)거짓신앙체계는 성경적인 지식이나 지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렘5장 4-5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바리새인과 똑같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영적인 분별력은 완전히 가려져 있습니다. 이들도 완전히 무식한 일반 무리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그 삶은 하나님을 떠난 거짓신앙체계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니까 대적하며 고소하면서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영어성경을 보면 따옴표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죄를 진짜 많이 지은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처럼 율법도 모르고 율법의 규정도 안지키는 사람들을 죄인들 취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따옴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저들과 달리 세상적으로도 많이 배우고 성경적인 지식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세상적인 지식이 부족한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한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신앙체계는 하나님과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영적분별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 자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짓신앙체계가 무엇인가?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대로 자기중심적인 삶에 기초한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입니다. 신앙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나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짓신앙체계는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의 모조품입니다. 핵심은 열매가 없습니다. 생화가 아니라 조화입니다. 여러분 조화에다 아무리 비싼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아무리 습도와 온도를 맞추어 준다고 열매를 맺을까요? 못 맺습니다. 사과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좋은땅에 심고 잘 가꾸면 사과가 열리겠지요. 안열리면 기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없는 것이 기적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얼마나 이해가 비슷한가를 무엇만 보면 아냐면, 제가 집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을 안사랑한다고 대답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 몇 가지를 잘 지키니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A라는 교회가 있는데 성도가 50명 정도되는 교회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성도중에서 20명이라도 심지어 10명이라도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스데반에게 함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함께하기 때문에 10명을 위해서라도 그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 교회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우리를 판단하십나도 하십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대한 설교를 여러번 들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올바른 신앙가운데 있는지 않는지는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실제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우리가 나무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으면 내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지 않은 것이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날 만큼 귀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어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신앙은 가짜신앙이었어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한 열심은 뛰어났지만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거하시며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는 없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힌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신앙을 이런 열매를 보고 판단하면 됩니다. 설교하는 재 자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기준입니다. 저도 설교는 빵빵치지만 속으로는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예배만 해도 그럽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입니다.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이해가 달라져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 잇습니다. 여러분 일부는 거짓신앙체계에 대한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바로 이번주부터 거짓신앙체계에 대한 예배를 했어도 되었을 것인데, 이 부분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명확하게 안보이기 때문에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기 때문에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참된 예배를 못드립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예배가 잘못되어 있는지를 모릅니다. 자기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일을 율법에서 말하는 대로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켜=켰고 희생과 헌신을 드렸고 월삯과 절기를 지켰어요. 성경에서 말한대로 가장 살진 짐승을 드렸어요. 가장 온전하고 흠이 없는 것을 무수하게 드렸어요. 그래서 당연히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받으실줄을 알면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될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고 마당만 밟는다고 했고 헛된 예배라고 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가증이 여긴다고 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견디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또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가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어요. 본인들은 진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고 자부했는데요.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이사야를 나중에 톱으로 켜 죽입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예배가 참된 예배가 안드려집니다. 본인들은 그것이 성대한 예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상관없는 예배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이사야서를 잘 알았어요. 이사야 시대 자기 조상들의 예배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어요.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줄을 알았어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들의 예배가 저들과 똑같을 줄을 꿈에나 생각했겠어요. 어쩌면 그들은 수없이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조상들은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성을 드리지 못해서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 예배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5장에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해 잘 말하였도다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예배하되 사람의 교훈으로 예배하는 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십니다. 그들도 이사야 시대와 같이 똑같은 예배를 드렸고 입술뿐인 예배였고 마당만 밟는 예배였고 헛된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모릅니다.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거짓신앙체계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모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려면 이것이 분별되고 회복되어야 가능합니다.



아무리 제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설교해도 참다운 예배에 대해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런 부분이 보여지고 우리 삶에서 버려지지 않으면 참된 예배를 절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거짓신앙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전혀 엉뚱하게 예배하게 되니까요.



렘 6장 16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여기보면 하나님이 뭐하고 하냐면 옛적길 곧 선한 길을 어디 인지를 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평강이 생명이 함께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까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경말씀이 옛적 길입니다. 예를 들면 신30장 같은 것입니다. 생명과 화를 두었으니 하나님의 길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번성하고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 당시 이미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목이 터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들이 듣고 돌이키면 그들이 삽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를 모릅니다. 먼 거리까지 가서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정도이니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점 거짓신앙체계의 관점에서 읽으니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이키라는 말을 듣고도 자신들은 신앙생활 잘하고 있으니까 돌이킬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이 터지라고 외쳐도 전혀 듣지 못하니까 그들의 삶에서는 거절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우리는 지금 바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 뿐아니라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예레미야를 보냈지요. 그런데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도 듣지 못했지만 선지랄 통해서도 듣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렘23장을 봅시다. 35절 이하입니다. "너는 또 말하기를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하고 36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


37절입니다. "너는 또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것이 너희 각자가 계속해서 하는 말이다. 네 친구나 친척에게. 주님이 응답이 뭐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


37절 이것이 너희가 선지자에게 계속해서 하는 말이다.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이것을 보며 그 당시 사람들은 친구들이나 친척을 보면 선지자를 만나면 뭐라고 했어요. 여기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평화의 선지지입니다. 

만나면 하나님의 응답이 뭐냐고 물었어요. 오늘날 포도나무 교회만 해도 주일날 예배 끝나고 식당에 가서 하나님 이야기를 얼마나 합니까? 그런에 이들은 입만 벌리면 이렇게 말했어요.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안듣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선지자를 보냈고 새벽부터 보냈고 계속 보냈으나 너희가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참된 선지자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원방에서 향품을 사다가 예배할만큼 종교적인 의식이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뭐냐고 그렇게 사모함이 많았을지라도 거짓신앙체계에 빠져있으니까 성경을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해도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의 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 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보세요.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목이 터져라고 말씀했어도 이사야서를 가지고 수없이 많이 설교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거려져서 그럽니다. 이것이 심각합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의 문제입니다.



4.거짓신앙체계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바리새인들에게 요8장 44절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사단을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사단을 섬겼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가진 신앙관 배후에 사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사단에 쓰임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입니다.



여러분 거짓신앙체계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향한 사단의 가장 큰 공격은 거짓신앙체계를 가지고 합니다. 사단은 여러분을 미혹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억압적인 환경을 통해서 압박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같은 경우에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지도자가 무너지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사단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는데 교회를 향한 가장 큰 공격은 거짓신앙체계를 통한 공격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면,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다른데 갈 때마다 곧바로 따라와서 교회를 오염시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경우 교리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거짓신앙체계를 가르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거짓신앙체계를 가지고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서신서마다 이런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단이 교회를 대적하는데 거짓신앙체계를 통해서 어떻게 합니까?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단이 거짓신앙체계를 통해서 교회를 대적하는 방법

1)교회를 거짓신앙체계로 오염시킴으로 대적합니다.

성경에 한 예를 봅시다. 갈라디아교회입니다. 바울이 아파서 쉬로 갔는데 갈라디아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예수님처럼 받아들입니다.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놀랍게 세워집니다. 심지어 그들은 바울을 위해 눈까지 빼줄만큼 사랑했습니다.


갈4장 13-15절입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데 바울이 떠난 뒤에 대적자들의 영향을 받아 거짓신앙체계에 빠졌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가장 영향을 주었던 성경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전체가 율법주의에 대해 다룹니다. 제가 율법주의를 다루었는데 목사님들조차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강의를 전체적으로 듣고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육체만 남습니다. 오늘날 예배를 잘 드리고 나사도 시기 질투 미움이 가득하고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갈라지고 싸우고 그럽니다. 모든 육체적인 열매들이 가득한 이유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체계에 빠지면 절대 십자가의 능력은 함께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모양은 있지만 육체적인 열매만 가득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단은 교회를 거짓신앙체계로 오염시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일단 거짓신앙체계로 오염되면 모양을 뛰어날 수 있습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은 걷히고 육체적인 열매만 남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넘어갑니다.



2)사단은 거짓신앙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가장 대적했던 무리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거짓신앙체계를 가진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를 가장 크게 대적했던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거짓신앙체계를 가진 유대인들 종교지도자였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부흥을 보내서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열 때마다 오늘날 요한 웨슬레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 없지요. 오늘날 죠나단 에드워즈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있다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자요 설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단이라고 말하면 자기 얼굴에 침뱉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고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 그 시대에 그들을 대적했던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거짓신앙체계를 가진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두 신앙체계로 비유합니다. 아삭을 참된 신앙체계 이스마엘을 거짓신앙체계로 비유합니다. 그러면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삭을 대적했듯이 오늘날도 거짓신앙체계가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거짓신앙체계는 항상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사단이 왜 그렇게 하는지 아시겠지요. 
교회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교회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무력해집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세상적인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함께하셨기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적인 권력과 합세할 때는 항상 신앙이 타락했습니다. 신앙이 타락하니까 물리적인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운행하니까 안믿는 자들이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 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변화가 사회로 퍼지면서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느 시대라고 생각합니까? 교회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무력화됩니다. 교회가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아까 갈라디아 4장에 나오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예를 들면서 바울은 이사야 54장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하반부에서 약속하신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고 그 유업이 이삭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쫓아내라고 합니다. 여러분 거짓신앙체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진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난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거짓신앙체계를 가진 교회는 이땅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너무나 눈이 멀어서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인지 무엇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고 신앙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이 말은 포도나무 교회만 잘났고 다른 교회는 못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바는 너무나 적지 않는 사람들이 사람만 많이 모이면 그 교회에 세상적으로 유명인사들이 많이 모이면 그리고 예산이 많으면 그것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는 명성을 가진 교회였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주변의 교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가치관을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타락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신앙체계를 통해서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성장이건 개인적인 사업이건 등등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업이 그들을 통해서 이땅에 주어진 적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번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짓신앙체계의 특징

거짓신앙체계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나왔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특징은 자기 자원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방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이 율법주의이고,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기복주의이고. 자기 방법대로 사는 삶이 인본주의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삼위일체처럼 합해져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잇으면 참된 신앙에 대해서 말해도 못봅니다. 이사야 시대도 예레미야 시대도 예수님 시대도 하나님이 말씀해도 성경이 말해도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도 거짓신앙체계에 오염되어 있으면 참된 예배에 대해 말해도 이해를 못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율법주의 예배, 기복주의 예배, 인본주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저는 거짓신앙체계 전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 없는지는 내 삶에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바로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3강 영적분별력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아모스 7장 7-8절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볼 것인데 그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 신앙이 어떻게 하나님중심적인 신앙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반면에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걷힙니다. 그것을 살펴본 이유는 그것을 이해해야 거짓신앙체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자기중심적인특징에 토대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신앙체계로 넘어가기 전에 오늘은 영적인 분별력을 살펴볼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가 가짜다고 하면 왜 그것이 가짜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적분별력의 문제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는 영적분별력입니다. 영적분별력을 상실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 길로 행해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데 영적분별력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뿐아니라 영적분별력을 상실하면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자기가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또 영적분별력이 상실되면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어떻게 돌이키야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내신다고 말씀해도 그들은 그 원인을 모릅니다. 이처럼 영적분별력이 핵심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영적분별력이 어두어지면 참된 예배가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또한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도 모릅니다.

자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분별력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과 영적분별력은 항상 같이 갑니다. 우리 신앙이 올바라야 영적인 분별력이 열리고 영적인 분별력이 열려야 신앙이 바로 세워집니다. 선순환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있는 자는 더 얻게 되고 잃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고 합니다.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항상 어두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를 보았습니다. 이 시대가 신앙이 타락한 시대이며 이때 공통적으로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진 시대였습니다.

이사야 시대 예배를 보면 사6장 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보세요. 눈이 어두워진 시대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렘 5:20절입니다.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예수님 시대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어도 자신이 눈이 어두운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눈이 어둔지 압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눈이 멀면 그 결과가 역적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자신이 눈이 먼 줄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자신들이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빛이요 영적인 소경을 인도하는 인도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3:14절에서 말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동일하게 눈이 멀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 하나님의 다림줄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잘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외부에 집회갈 때도 이 부분을 가끔 나눕니다. 본물을 읽으면 성도들이 조금 의아해합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오면 좋은 본문 복주고 복주리라는 말을 전하는데 다림줄을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라라고 하는 말이 나오니까 의아해 합니다. 여러분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주 통로가 꿈이나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건축을 전공하고 수십년 해도 다림줄을 대지 않으면 똑바로 못짓습니다. 환상중에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있는데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벽이 있었습니다. 이 벽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모스 시대에 똑바로 세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림줄에 기초해서 심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 마음을 가지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가지고 심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 세우신 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실패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는 한 백성을 세웠는데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성도의모임이 교회입니다. 본문을 보면 한 개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개개인의 성도가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질 때 튼튼한 건물처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풍랑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풍파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튼튼합니다. 


무엇보다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함께하고 그곳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지말에 놀랍게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하시고 전세계에 미칠 부흥을 약속하셨는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중 하나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지 않으면 겉모습은 화려하고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종교적인 많은 의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예배만 해도 그럽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때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고 주권적인 통 치가 함께하고 영광이 임재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다림줄이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장 고민해야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기준과 의도를 알아 그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도 이런 부분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가 성장하면 됩니다. 성도들도 그저 승진하고 사업 잘되고 자녀들 좋은 학교에 가면 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림줄과 의도에 서있는가 입니다.

2.하나님의 다림줄과 영적분별력의 정의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림줄을 무엇이고 영적분별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림줄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캐논이라는 말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니지 천문대가 영국에 있어요. 표준 시간이 있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지요. 자도 표준자가 있어야 모든 것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표준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실천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학 혹은 신앙과 우리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표준자입니다. 


우리 신앙이 타락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제가 작년하고 올해가 달라요. 올해 벌써 조금 있으면 60이 되요. 작년까지는 못 느꼈는데. 그런데 우리 시대만 해도 한 세대 제가 어렸을 때 말고 젊었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이해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설까 하고 고민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거의 사라졌어요. 어떤 목사님이 교회 강대상에서 피아노를 옮기려고 하는데, 함부로 못옮깁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지 무속신앙인지 혼합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분은 지혜를 써서 한주에 1센티식 옮겨서 일년동안 옮겼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느겼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게 타락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타락합니다. 나중에는 저기 가 있는데 몰라요. 왜냐하면 그렇게 타락하여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교회사 교수가 있었는데, 종교개혁을 뭐하고 했느냐면, 출발에서 이것이 옳은 길인데 옆으로 갔어요. 그것을 다시 올바르게 가져온 것이 종교개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틀어질 때 처음에는 모릅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가다가 나중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만 해도 목회자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길에 서자라는 차원의 말씀을 전하기를 중단했어요.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좋은 말씀들만 골라서 임의로 설교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제 5복음서를 만들었어요.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에서 좋은 말씀만 골라서 5복음서를 만들어 그것만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삶을 조정해서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는 개념조차 없어요. 성경을 읽다가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읽으면 너무나 낮설게 느껴집니다. 예배만 해도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창대하리라 이런 메시지만 들으러 오다보니까 하나님의 길을 선포하면 너무나 자기와 상관없이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어요. 왜냐하면 조금씩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우리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표준자인 성경에 의한 삶입니다. 다림줄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준을 말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있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준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제 친구 중에 세상적으로 지위가 있는 친구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20년전까지만 해도 은행에서 500만원만 빌리려 해도 보증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이 왜 사용하시느냐? 성경대로입니다. 못난 자를 사용하신다고 했잖아요. 없는 자를 사용하신다고. 그런데 제 고등학교 동창중에 하나가 고시공부를 해서 판사가 되었어요. 이 친구가 고시공부할 때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데요. 왜냐하면 법조인은 모든 법의 기초가 성경이어서 세 번이나 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예수님도 전혀 몰라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조명해주셔야 성경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준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비추셔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영적분별력이 주어져야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기준이 보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성경 박사들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서기관들은 바리새인중에서 나왔는데 모세오경을 암송했어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어요. 그들의 열심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어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전혀 몰랐어요. 왜녀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으니까. 그 기준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3.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앞에서는 그분의 법만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다림줄만 통합니다.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기준이나 생각이나 조건이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 의견 조건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이것만 해도 오늘날 너무나 기준이 무너져 있습니다. 요즘은 민주화가 되다 보니까 인본주의가 세상적으로 가득하다 보니까 사람이 왕입니다. 백화점만 가도 사람이 주차장에서부터 90도로 인사하면서 손을 흔들어대지요. 


가게에 가서 여기 점장 없어요 하면 금방 와서 왜 그러십니까? 손님 그럽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올 때도 이런 자세로 나옵니다. 목사가 말이냐 나를 한번 설득시켜 봐야지 왜 자세가 그렇게 뻣뻣해. 나에게 한번 잘 보여봐 그러면 내가 헌금해줄지 알아. 당신 모를지 모르지만 나 대단한 사람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그분 앞에서 인간의 생각이나 조건이나 인간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책중에 하나가 관계중심전도입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관계의 동심원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계시지요. 오스카 톰슨 박사가 쓴 책입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관계를 맺어서 전도를 복음을 제시할 때가 되면 제일먼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만이 통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구원받을 줄 알고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가 교회 잘 다니니까 자기도 좋은 영향을 주어질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이 개망나니처럼 살다가 어느날 문득 그렇게 살다가는 지옥갈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새벽기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죄를 용서해주고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자신이 뻔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집을 팔아서 가지고 교회에다 헌금했어요. 구원해 달라고. 그러면 이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지요. 희생과 헌신은 대단하지만 구원은 못받습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다림줄은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만 아니라 예배도 봉사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 전체에서 그럽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이 통합니다.

4.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 희생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모든 대화와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무수한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어요. 많은 기도를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소돔의 백성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알았다면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며 그 엄청난 희생을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했는데 본인들은 몰랐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다림줄을 몰랐어요. 그것을 모르니까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력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또 하나의 예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입니다. 계3장 1절 이하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명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NIV는 너희는 명성을 가졌다 살아있다고 생각한다고 번역합니다. 어떤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이고 명성을 멀리는 교회입니까? 성도 한두명 있고 아무런 활동도 없는 교회를 사람들은 명성이 있는 교회라고 칭찬할까요?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봉사와 활동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사데지역의 교회는 자기들 뿐아니라 주변의 교회들로부터 살아있는 교회라고 명성을 날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실상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2년 전에 저녁설교 시간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하면서 보니까 일곱교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중 하나가 하나님의 관점과 그들이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자기들 뿐아니라 주변의 교회들이 살아잇는 교회라고 칭찬할 만큼 명성을 날리는 교회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칭찬하나 할 것이 없었어요.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니까 작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작다고 하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 내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내가 닫으면 열자가 없는 문을 열어놓겠다고 하십니다.

여기보면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관점이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를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오늘날 어느 교회가 훌륭한 교회이고 어떤 사람이 복받은 사람입니까?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관점으로 봅니다. 이 시대에도 눈이 멀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데교회만 몰랐을 뿐아니라 주변의 교회도이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고 칭찬하며 명성을 주는 것을 그 당시 무엇이 하나님의 기준인가가 가려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교회를 가지고 살아있는 교회라고 소문났으니까요. 주변의 모든 교회에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렇잖아요.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만 통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요?
다음 절입니다. “”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이를지 네가 알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우리의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 모양 사람들의 칭찬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5.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다림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알아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져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가려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 말은 성경에 하나님의 기준이 들어있으되 이것을 보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는 눈 듣는 귀가 주어져야 합니다. 다림줄이 가려진다는 말은 영적인 분별력이 가져진다는 말입니다. 보는 눈 듣는 뒤가 가져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사야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가 유대인들입니다. 좋은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 이하입니다. 12장에 보면 1절부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다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요. 밀을 비벼먹는 것을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쭉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절 이하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몰랐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날 밀 비벼먹는 것도 안할만큼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루살이를 뱉어낸 것과 같았습니다. 지나가다가 하루살이가 입에 들어왔는데 확 뱉어냅니다. 그런데 낙타는 삼긴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규정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더 중요한 인과 신과 의는 버렸다.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버렸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뿐아니라 심각한 것은 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버렸다고 했지요. 여기도 보면 나는 인애 즉 하나님 사랑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6장에 보면 이 말씀을 이마에 붙이고 팔목에 매고 문설주에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서기관이 와서 묻잖아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잘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분별력이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5장 45절에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줄알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인데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철저하게하고 안식일에는 요리도 안하고 모든 종류의 일을 안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규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지켰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에서 자기 자신이 내려지지 않고 돈에 대한 탐심이 전혀 내려지지 않고 실제 자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물으면 아니라고 하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주일날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고 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수십배 더 잘했습니다. 이사야 시대도 예레미야 시대도 우리보다 훨씬 더 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가 없어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져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된 예배는 무엇인지 등에서부터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잘못되었으면서도 잘못된 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6.다림줄이 가려지면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올바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아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면 쉽게 표현하면 사데교회에 편지했는데 하나님이 사데교회를 보시는 관점에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면 사데교회를 보더라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도 여러분 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서 잘 말했도다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바리새인들을 두고 예언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보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리새인들에게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너무나 똑같았다는 말입니다. 오죽 했으면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했겠어요. 이처럼 똑같은 상태인데 이들은 이것이 자기들의 모습인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지니까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안 보이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바리새인들이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고 또 수없이 많이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율법이 잊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햇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세오경을 암송했어요. 자기들은 빛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자기들의 모슴인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겠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나 호세아 시대와 같았습니다. 


실제로 요5장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너희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셧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을 읽으면서도 모르는줄 아세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주일날 빼놓지 않고 애배하고 예수믿은 오래되어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심지어 목회자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신학박사라고 해도 하나님의 기준을 모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아도 자신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7.다림줄이 가려지면 과거는 보아도 현재는 못봅니다.
여섯 번째와 똑같은 이야기를 바꾸어서 말합니다. 다시 바리새인들의 예를 들겠어요. 바리새인들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였음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성경중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도 이사야가 옳았음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회개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 이하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사야갸 참된 선지자임을 알았고 자기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위해서 비석을 세웠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주세여. 저들이 무지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무죄한 선지자들의 죄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과거를 알았습니다. 왜 성경을 믿으니까 알았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다 압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잇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옳은지 압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이사야가 옳은지를 알았고 자기 족상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자기들도 똑같이 행했습니다.

이사야 1장을 아까 읽었잖아요. 소돔의 백성 고모라의 백성, 너희가 나를 버렸다. 이런 구절을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를 알았다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똑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의미로 말씀했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가려지니까 과거는 아는데 자신들의 진정한 의미를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변화되는지 아세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가 선명하게 비추어질 때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내 자신이 보여야 변화됩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면 과거는 믿어요. 이사야가 옳고 예레미야가 옳은 것도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와 관점이 가려지니까 자기를 몰라요.

보세요. 이사야시대의 문제가 뭐였는지 아세요? 보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이사야 시대는 이사야가 가서 소돔의 백성이요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타락할수록 메시지가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올바르면 속삭이셔도 우리가 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타락하고 자기 길로 가고 귀가 어두어지면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서 매시지가 강해집니다. 


소돔의 백성이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해서 돌이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수많은 의식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사야가 벌거벗고 다닙니다. 벌거벗고 다니게 한 것은 저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벌거벗은 상태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관점이 모르니까 그러면 그렇지 제가 미쳤으니까 그러지 하면서 톱으로 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이사야가 옳은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참된 성경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이 영적인 분별력이 그들에게도 가려지니까 똑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모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바리새인들에게 했어요. 회칠한 무덤이라고 외식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햇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을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위해 십자가 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게 하신 이유는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못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분별력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석을 세우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의 자손을 죽인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독사의 새끼들아 그럽니다. 독설을 품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신앙관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자기 조상들은 선지자나 죽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입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그럽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6장을 보면 말씀합니다. 16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이때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너희가 듣고 행하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30장 같은 말씀입니다. 이 구절 여기서 말하는 바만 올바로 깨달았어도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하나님의 관점을 못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만 해도 구약성경 전체가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알았어도 그들은 돌이킬 수 있었어요.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에게 외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눈이 가려지니까 안보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신구약성경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가려지면 못 봅니다. 이사야 시대가 잘못되었고 바리새인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똑같은 상황에 설령 있을지라도 돌이키지 못합니다.

예배만 해도 바리새인들은 그럽니다. 이사야 시대는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햇지요. 우리 조상들은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헛되이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식대로 생각합니다. 정성이 없는 예배라고. 정성으로 따지면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면 그들보다 더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림줄이 가려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으니까 문제는 과거는 믿어도 현재가 안보여요.

8.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몰랐는데요 안보였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예배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당화되었다면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멸망한했어요. 오늘날도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서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못본다고 그 책임이 면제되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우리 자세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가려져서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나에게 나누어지지 않는 한 마음을 주라고 기도합니다. 시119편 기자는 마음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법을 보고 하나님의 길을 보고 주의 길로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고 고백합니다. 왜? 영적분별력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완전히 끝나니까요.

제가 이런 것을 살펴본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런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거짓신앙체계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해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이사야 시대 백성들은.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어요.

이사야 시대와 예수님 시대는 800년 차이가 납니다. 오늘 우리는 시대가 다르고 사람들은 달라도 거짓신앙체계는 똑같습니다. 가짜입니다. 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종교적인 모양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걷힙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단정하냐고요? 우리가 옳으면 하나님이 생명이 우리에게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옳으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실재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 좋은 토양에 사과나무를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안맺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실재와 생명이 걷혀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 가운데 가짜가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