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2010

제13강 영적분별력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아모스 7장 7-8절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볼 것인데 그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 신앙이 어떻게 하나님중심적인 신앙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반면에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걷힙니다. 그것을 살펴본 이유는 그것을 이해해야 거짓신앙체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자기중심적인특징에 토대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신앙체계로 넘어가기 전에 오늘은 영적인 분별력을 살펴볼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가 가짜다고 하면 왜 그것이 가짜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적분별력의 문제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는 영적분별력입니다. 영적분별력을 상실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 길로 행해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데 영적분별력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뿐아니라 영적분별력을 상실하면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자기가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또 영적분별력이 상실되면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어떻게 돌이키야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내신다고 말씀해도 그들은 그 원인을 모릅니다. 이처럼 영적분별력이 핵심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영적분별력이 어두어지면 참된 예배가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또한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도 모릅니다.

자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분별력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과 영적분별력은 항상 같이 갑니다. 우리 신앙이 올바라야 영적인 분별력이 열리고 영적인 분별력이 열려야 신앙이 바로 세워집니다. 선순환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있는 자는 더 얻게 되고 잃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고 합니다.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항상 어두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를 보았습니다. 이 시대가 신앙이 타락한 시대이며 이때 공통적으로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진 시대였습니다.

이사야 시대 예배를 보면 사6장 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보세요. 눈이 어두워진 시대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렘 5:20절입니다.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예수님 시대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어도 자신이 눈이 어두운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눈이 어둔지 압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눈이 멀면 그 결과가 역적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자신이 눈이 먼 줄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자신들이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빛이요 영적인 소경을 인도하는 인도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3:14절에서 말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동일하게 눈이 멀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 하나님의 다림줄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잘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외부에 집회갈 때도 이 부분을 가끔 나눕니다. 본물을 읽으면 성도들이 조금 의아해합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오면 좋은 본문 복주고 복주리라는 말을 전하는데 다림줄을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라라고 하는 말이 나오니까 의아해 합니다. 여러분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주 통로가 꿈이나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건축을 전공하고 수십년 해도 다림줄을 대지 않으면 똑바로 못짓습니다. 환상중에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있는데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벽이 있었습니다. 이 벽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모스 시대에 똑바로 세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림줄에 기초해서 심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 마음을 가지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가지고 심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 세우신 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실패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는 한 백성을 세웠는데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성도의모임이 교회입니다. 본문을 보면 한 개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개개인의 성도가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질 때 튼튼한 건물처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풍랑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풍파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튼튼합니다. 


무엇보다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함께하고 그곳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지말에 놀랍게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하시고 전세계에 미칠 부흥을 약속하셨는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중 하나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지 않으면 겉모습은 화려하고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종교적인 많은 의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예배만 해도 그럽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때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고 주권적인 통 치가 함께하고 영광이 임재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다림줄이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장 고민해야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기준과 의도를 알아 그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도 이런 부분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가 성장하면 됩니다. 성도들도 그저 승진하고 사업 잘되고 자녀들 좋은 학교에 가면 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림줄과 의도에 서있는가 입니다.

2.하나님의 다림줄과 영적분별력의 정의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림줄을 무엇이고 영적분별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림줄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캐논이라는 말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니지 천문대가 영국에 있어요. 표준 시간이 있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지요. 자도 표준자가 있어야 모든 것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표준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실천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학 혹은 신앙과 우리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표준자입니다. 


우리 신앙이 타락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제가 작년하고 올해가 달라요. 올해 벌써 조금 있으면 60이 되요. 작년까지는 못 느꼈는데. 그런데 우리 시대만 해도 한 세대 제가 어렸을 때 말고 젊었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이해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설까 하고 고민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거의 사라졌어요. 어떤 목사님이 교회 강대상에서 피아노를 옮기려고 하는데, 함부로 못옮깁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지 무속신앙인지 혼합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분은 지혜를 써서 한주에 1센티식 옮겨서 일년동안 옮겼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느겼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게 타락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타락합니다. 나중에는 저기 가 있는데 몰라요. 왜냐하면 그렇게 타락하여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교회사 교수가 있었는데, 종교개혁을 뭐하고 했느냐면, 출발에서 이것이 옳은 길인데 옆으로 갔어요. 그것을 다시 올바르게 가져온 것이 종교개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틀어질 때 처음에는 모릅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가다가 나중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만 해도 목회자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길에 서자라는 차원의 말씀을 전하기를 중단했어요.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좋은 말씀들만 골라서 임의로 설교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제 5복음서를 만들었어요.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에서 좋은 말씀만 골라서 5복음서를 만들어 그것만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삶을 조정해서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는 개념조차 없어요. 성경을 읽다가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읽으면 너무나 낮설게 느껴집니다. 예배만 해도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창대하리라 이런 메시지만 들으러 오다보니까 하나님의 길을 선포하면 너무나 자기와 상관없이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어요. 왜냐하면 조금씩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우리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표준자인 성경에 의한 삶입니다. 다림줄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준을 말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있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준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제 친구 중에 세상적으로 지위가 있는 친구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20년전까지만 해도 은행에서 500만원만 빌리려 해도 보증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이 왜 사용하시느냐? 성경대로입니다. 못난 자를 사용하신다고 했잖아요. 없는 자를 사용하신다고. 그런데 제 고등학교 동창중에 하나가 고시공부를 해서 판사가 되었어요. 이 친구가 고시공부할 때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데요. 왜냐하면 법조인은 모든 법의 기초가 성경이어서 세 번이나 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예수님도 전혀 몰라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조명해주셔야 성경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준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비추셔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영적분별력이 주어져야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기준이 보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성경 박사들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서기관들은 바리새인중에서 나왔는데 모세오경을 암송했어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어요. 그들의 열심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어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전혀 몰랐어요. 왜녀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으니까. 그 기준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3.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앞에서는 그분의 법만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다림줄만 통합니다.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기준이나 생각이나 조건이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 의견 조건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이것만 해도 오늘날 너무나 기준이 무너져 있습니다. 요즘은 민주화가 되다 보니까 인본주의가 세상적으로 가득하다 보니까 사람이 왕입니다. 백화점만 가도 사람이 주차장에서부터 90도로 인사하면서 손을 흔들어대지요. 


가게에 가서 여기 점장 없어요 하면 금방 와서 왜 그러십니까? 손님 그럽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올 때도 이런 자세로 나옵니다. 목사가 말이냐 나를 한번 설득시켜 봐야지 왜 자세가 그렇게 뻣뻣해. 나에게 한번 잘 보여봐 그러면 내가 헌금해줄지 알아. 당신 모를지 모르지만 나 대단한 사람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그분 앞에서 인간의 생각이나 조건이나 인간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책중에 하나가 관계중심전도입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관계의 동심원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계시지요. 오스카 톰슨 박사가 쓴 책입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관계를 맺어서 전도를 복음을 제시할 때가 되면 제일먼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만이 통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구원받을 줄 알고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가 교회 잘 다니니까 자기도 좋은 영향을 주어질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이 개망나니처럼 살다가 어느날 문득 그렇게 살다가는 지옥갈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새벽기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죄를 용서해주고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자신이 뻔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집을 팔아서 가지고 교회에다 헌금했어요. 구원해 달라고. 그러면 이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지요. 희생과 헌신은 대단하지만 구원은 못받습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다림줄은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만 아니라 예배도 봉사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 전체에서 그럽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이 통합니다.

4.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 희생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모든 대화와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무수한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어요. 많은 기도를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소돔의 백성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알았다면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며 그 엄청난 희생을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했는데 본인들은 몰랐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다림줄을 몰랐어요. 그것을 모르니까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력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또 하나의 예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입니다. 계3장 1절 이하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명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NIV는 너희는 명성을 가졌다 살아있다고 생각한다고 번역합니다. 어떤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이고 명성을 멀리는 교회입니까? 성도 한두명 있고 아무런 활동도 없는 교회를 사람들은 명성이 있는 교회라고 칭찬할까요?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봉사와 활동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사데지역의 교회는 자기들 뿐아니라 주변의 교회들로부터 살아있는 교회라고 명성을 날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실상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2년 전에 저녁설교 시간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하면서 보니까 일곱교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중 하나가 하나님의 관점과 그들이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자기들 뿐아니라 주변의 교회들이 살아잇는 교회라고 칭찬할 만큼 명성을 날리는 교회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칭찬하나 할 것이 없었어요.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니까 작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작다고 하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 내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내가 닫으면 열자가 없는 문을 열어놓겠다고 하십니다.

여기보면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관점이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를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오늘날 어느 교회가 훌륭한 교회이고 어떤 사람이 복받은 사람입니까?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관점으로 봅니다. 이 시대에도 눈이 멀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데교회만 몰랐을 뿐아니라 주변의 교회도이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고 칭찬하며 명성을 주는 것을 그 당시 무엇이 하나님의 기준인가가 가려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교회를 가지고 살아있는 교회라고 소문났으니까요. 주변의 모든 교회에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렇잖아요.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만 통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요?
다음 절입니다. “”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이를지 네가 알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우리의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 모양 사람들의 칭찬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5.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다림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알아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져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가려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 말은 성경에 하나님의 기준이 들어있으되 이것을 보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는 눈 듣는 귀가 주어져야 합니다. 다림줄이 가려진다는 말은 영적인 분별력이 가져진다는 말입니다. 보는 눈 듣는 뒤가 가져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사야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가 유대인들입니다. 좋은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 이하입니다. 12장에 보면 1절부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다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요. 밀을 비벼먹는 것을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쭉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절 이하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몰랐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날 밀 비벼먹는 것도 안할만큼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루살이를 뱉어낸 것과 같았습니다. 지나가다가 하루살이가 입에 들어왔는데 확 뱉어냅니다. 그런데 낙타는 삼긴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규정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더 중요한 인과 신과 의는 버렸다.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버렸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뿐아니라 심각한 것은 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버렸다고 했지요. 여기도 보면 나는 인애 즉 하나님 사랑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6장에 보면 이 말씀을 이마에 붙이고 팔목에 매고 문설주에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서기관이 와서 묻잖아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잘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분별력이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5장 45절에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줄알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한 삶인데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철저하게하고 안식일에는 요리도 안하고 모든 종류의 일을 안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규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지켰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에서 자기 자신이 내려지지 않고 돈에 대한 탐심이 전혀 내려지지 않고 실제 자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물으면 아니라고 하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주일날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고 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수십배 더 잘했습니다. 이사야 시대도 예레미야 시대도 우리보다 훨씬 더 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가 없어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져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된 예배는 무엇인지 등에서부터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잘못되었으면서도 잘못된 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6.다림줄이 가려지면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올바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아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면 쉽게 표현하면 사데교회에 편지했는데 하나님이 사데교회를 보시는 관점에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면 사데교회를 보더라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도 여러분 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서 잘 말했도다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바리새인들을 두고 예언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보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리새인들에게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너무나 똑같았다는 말입니다. 오죽 했으면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했겠어요. 이처럼 똑같은 상태인데 이들은 이것이 자기들의 모습인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지니까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안 보이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바리새인들이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고 또 수없이 많이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율법이 잊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햇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세오경을 암송했어요. 자기들은 빛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자기들의 모슴인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겠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나 호세아 시대와 같았습니다. 


실제로 요5장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너희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셧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을 읽으면서도 모르는줄 아세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주일날 빼놓지 않고 애배하고 예수믿은 오래되어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심지어 목회자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신학박사라고 해도 하나님의 기준을 모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아도 자신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7.다림줄이 가려지면 과거는 보아도 현재는 못봅니다.
여섯 번째와 똑같은 이야기를 바꾸어서 말합니다. 다시 바리새인들의 예를 들겠어요. 바리새인들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였음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성경중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도 이사야가 옳았음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회개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 이하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사야갸 참된 선지자임을 알았고 자기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위해서 비석을 세웠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주세여. 저들이 무지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무죄한 선지자들의 죄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과거를 알았습니다. 왜 성경을 믿으니까 알았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다 압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잇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옳은지 압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이사야가 옳은지를 알았고 자기 족상들이 잘못된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자기들도 똑같이 행했습니다.

이사야 1장을 아까 읽었잖아요. 소돔의 백성 고모라의 백성, 너희가 나를 버렸다. 이런 구절을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를 알았다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똑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의미로 말씀했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가려지니까 과거는 아는데 자신들의 진정한 의미를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변화되는지 아세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가 선명하게 비추어질 때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내 자신이 보여야 변화됩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면 과거는 믿어요. 이사야가 옳고 예레미야가 옳은 것도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와 관점이 가려지니까 자기를 몰라요.

보세요. 이사야시대의 문제가 뭐였는지 아세요? 보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이사야 시대는 이사야가 가서 소돔의 백성이요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타락할수록 메시지가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올바르면 속삭이셔도 우리가 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타락하고 자기 길로 가고 귀가 어두어지면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서 매시지가 강해집니다. 


소돔의 백성이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해서 돌이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수많은 의식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사야가 벌거벗고 다닙니다. 벌거벗고 다니게 한 것은 저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벌거벗은 상태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관점이 모르니까 그러면 그렇지 제가 미쳤으니까 그러지 하면서 톱으로 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이사야가 옳은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참된 선지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참된 성경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이 영적인 분별력이 그들에게도 가려지니까 똑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모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바리새인들에게 했어요. 회칠한 무덤이라고 외식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햇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을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위해 십자가 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게 하신 이유는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못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분별력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석을 세우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의 자손을 죽인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독사의 새끼들아 그럽니다. 독설을 품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신앙관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자기 조상들은 선지자나 죽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입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그럽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6장을 보면 말씀합니다. 16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이때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너희가 듣고 행하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30장 같은 말씀입니다. 이 구절 여기서 말하는 바만 올바로 깨달았어도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하나님의 관점을 못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만 해도 구약성경 전체가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알았어도 그들은 돌이킬 수 있었어요.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에게 외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눈이 가려지니까 안보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신구약성경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가려지면 못 봅니다. 이사야 시대가 잘못되었고 바리새인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똑같은 상황에 설령 있을지라도 돌이키지 못합니다.

예배만 해도 바리새인들은 그럽니다. 이사야 시대는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햇지요. 우리 조상들은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헛되이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식대로 생각합니다. 정성이 없는 예배라고. 정성으로 따지면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면 그들보다 더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림줄이 가려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으니까 문제는 과거는 믿어도 현재가 안보여요.

8.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몰랐는데요 안보였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예배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당화되었다면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멸망한했어요. 오늘날도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서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못본다고 그 책임이 면제되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우리 자세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가려져서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나에게 나누어지지 않는 한 마음을 주라고 기도합니다. 시119편 기자는 마음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법을 보고 하나님의 길을 보고 주의 길로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고 고백합니다. 왜? 영적분별력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완전히 끝나니까요.

제가 이런 것을 살펴본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런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거짓신앙체계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해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이사야 시대 백성들은.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어요.

이사야 시대와 예수님 시대는 800년 차이가 납니다. 오늘 우리는 시대가 다르고 사람들은 달라도 거짓신앙체계는 똑같습니다. 가짜입니다. 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종교적인 모양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걷힙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단정하냐고요? 우리가 옳으면 하나님이 생명이 우리에게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옳으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실재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 좋은 토양에 사과나무를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안맺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실재와 생명이 걷혀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 가운데 가짜가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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