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2010

산만함을 이겨내라 [빌 존슨]

나는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주된 근원이 세 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자로서 당신이 걸어야 할 운명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이 세 가지 근원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첫째, 원수 마귀가 일으키는 산만함이다. 마귀는 우리를 죄에 빠뜨리기 위해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어떤 것을 탐닉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변화되고 우리의 감각이 오직 하나님만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도록 훈련을 받음에 따라 그러한 유혹은 우리의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된다.

둘째, 그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산만함이다. 이 산만함은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낡고 제한된 사고방식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시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그에 반응하지 못하게 한다.

셋째, 가장 피하기 어려운 이 마지막 산만함은 마귀나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 산만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축복, 은혜, 번영, 이적,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부으시는 모든 놀라운 선물이 다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선물을 마음껏 누리며 복된 인생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주신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 들린 선물을 주목하기보다 하나님을 주목하기를 바라신다. 친구 자체보다 우정의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의 유익을 체험하거나 가까운 동료 신자들과 맺은 친밀한 관계의 유익을 맛보기 시작할 때 그 유익에 눈이 멀어 사랑을 저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관계의 유익보다 관계 자체가 좋아서, 얻기보다 베풀기 위해 그러한 관계를 추구한다는 원칙을 마음에 새겨야 하며 그 원칙을 의도적으로 늘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불신자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주변의 가까운 신자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들을 주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주변에 있는 신자들은 축복하기 위해 우리 힘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그러한 축복이 필요할 때를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본질이다.

믿음의 선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라 [빌 존슨]

신자들의 친밀한 우정관계는 강력한 힘을 발한다. 당신이 어떤 신자와 가치와 신념을 나누며 영적으로 교류할 때에 당신 삶을 지배하는 영적 실체가 상대방의 삶에 흘러 들어감과 동시에 상대방의 삶을 지배하는 영적 실체가 당신 삶에 흘러 들어온다.

특별한 우성관계
신자들의 친밀한 우정관계는 강력한 힘을 발한다. 당신이 어떤 신자와 가치와 신념을 나누며 영적으로 교류할 때에 당신 삶을 지배하는 영적 실체가 당신 삶에 흘러들어감과 동시에 상대방의 삶을 지배하는 영적 실체가 당신 삶에 흘러들어온다.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는 사람들과 우정관계를 쌓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과 우정관계를 잘 가꾸어나갈 때, 역경의 시기에 인내할 능력을 결정하는 힘의 원천과 상시접속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나는[빌 존슨]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는 축복을 받았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강해지며 사기가 진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격려를 받고 힘을 얻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므로 언제나 희망과 약속과 기쁨을 발산한다. 그들이 지닌 태도와 정신은 전염성이 강해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 않아도 금세 전염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진실한 신자들과 나누는 우정은(이것이 성령을 따라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토대로 할 때에)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환기시키는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정관계는 우리가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는지와 주께 받은 인생의 목적에 접속되어 있는지 늘 확인해주며, 그 결과 그들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 새로워질 때 우리의 힘도 강해지는 유익을 얻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피곤하거나 낙심한 상태일 때, 나 자신을 강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 그러한 친구를 찾아 얼마간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잘 안다.

네 정원에서 잡초를 제거하라
다른 한편으로, 정서적으로 심히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나 신체적으로 몹시 피곤할 때에 불평하거나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까이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중히 살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부정적인 관점이나 불신앙의 토대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을 분별하여 그들과 상호작용을 할 때 언제나 확실한 선을 긋는다.

물론 목회자와 신자로서 그들을 섬긴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 삶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힘이 떨어졌다는 것을 느낄 때면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피한다. 아마 당신은 이런 나에 대해 너무 쌀쌀맞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심과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내 마음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은 바로 나 아닌가? 그리고 내가 그러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아닌가?

솔로몬은 사람의 인격과 가치가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때로 부정적인 결과를 몰고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22:24,25)라고 훈계했다.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모든 충고는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사람들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의로 충고한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갈구하는 믿음의 관점을 결()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돕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닮아가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특별히 심적으로 연약해졌을 때) 그러한 영향력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내 마음은 밭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밭에 잡초를 심기를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씨앗을 뿌리기를 좋아한다. 내가 해야 할 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다.    <능력의 영을 받는 법 중에서>

기적을 통해서 배우자 [빌 존슨]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기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활동들보다 더 많은 교훈을 배우도록 한다.

어느 주일 저녁 우리 교회 청년이 본당 뒤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 어머니가 내게 와서 말했다. 제 아들을 위래 기도해부세요. 설사 그 뼈가 수십 년 전 잘못 고쳐졌다고 할지라도 부러진 뼈가 고침 받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달려가서 보니 그가 바닥에 누워 있는데 팔이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난 바닥에 앉아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갑자가 두려운 생각이 엄습해왔다.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기적들을 그 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이렇게 말했다. 의사를 부릅시다. 난 이제 이런 상황에서 의사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결코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쩌면 의사를 부르는 것이 오리려 맞는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다. 내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난 기형적인 뼈들이 사라지며, 뼈들이 제자리를 잡고, 또 엉덩이 형체가 바뀌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일을 쭉 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팔이 부러진 청년을 보면서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느덧 난 초자연 모드에서 자연 모드로 바뀌었다. 기적을 행했던 체험들이 나는 완전히 바꿔놓지 못했던 것이다. 난 회개했고 일주일쯤 후에 그 어머니께 사과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새롭게 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받은 계시는 실행에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기적을 통해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즉 체험하는 기적들이 생각을 형성하도록 해야만 되어야 한다. 기적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며 극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적은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다르게 보는 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기적을 주셨다. 기적은 학교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보자. 음식에 영양소가 있듯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모든 상황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 영양소로 가득 차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그 체험속에 의도된 것들을 다 추출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시험에 낙방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끄집어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일은 교회에서 항상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와, 정말 대단한데. 그리고는 아무런 변화도 갖지 못한다. 물론 감사를 드리긴 하지만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집에 돌아가면 삶은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고, 그 후에 또다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재미만을 만끽하려 할지 모른다.

당신도 이렇게 반응했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일어났다. 제자들은 음식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6). 음식이 불어나는 일이 예수님의 손이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손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 점은 꼭 기억해야만 할 키포인트이다. 예수님께서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음식더미를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음식 위에 손을 휘저으면서 불어나게 만들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음식을 들고는 12조각으로 나누었고 제자들이 가져다 줄 때 음식이 계속 불어났다.

하지만 그날이 저물 무렵, 바로 여기서 그들은 시험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는 자신은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노를 젖느라 애쓰는 모습을 영으로 보시고는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까이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고 주님은 마침내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 제자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들이 혼비백산했던 이유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52).

이 사건의 결말을 좀 이상하게 맺고 있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가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수행할 때 온전히 순종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둔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 보지 못했다. 기적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굳어진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기적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놓쳤다는 것이다.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씨가 결국 우리 마음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라고 하는 모든 일을 다 행했지만 그 다음 분제가 닥쳤을 때 그 전 체험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어떤 교훈인가? 그들은 기적 가운데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전 기적 가운데 그들이 행했던 역할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번 문제에 봉착하고 예수님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시지 않자 아무런 해결책을 갖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하리라. 즉 그들의 터치를 통해 그리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 음식이 불어났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건의 핵심을 놓쳤다.

예수님의 목표는 그들을 폭풍 가운데 보낸 후 예수께서 영웅처럼 나타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배워야 할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난번 기적을 통해 영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또다시 그들을 구원해주셔야만 했다.

능력의 증거를 간직하라

성령의 증거를 연구하고 역사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증거와 더불어 당신 주변에 있는 신자들의 증거를 전부 모아 지속적으로 묵상하기 바란다. 증거를 묵상하면 당신 마음이 모든 것을 믿음의 영역에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게 된다.

이적은 신자의 삶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왕과 제사장으로서 두 가지 책무를 지닌다. 하나는 인간의 대표자(제사장)로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대표자()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나타내 보임으로써 인간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역할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죄에 물든 인간을 대표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지셨다. 그리고 지금은항상 살아서 저희(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7:25). 성경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인간에게 나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1:15)이며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이 머물게 하기를 기뻐하셨다고 했다(골 1:19).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완벽한 신학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게 아니라면 그런 욕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마땅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셨던 일을 하시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삶과 사역에서 아버지를 완벽하게 대표하셨다.

예수께서 지상사역을 통해 입증하셨던 기본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는, 능력을 실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명확히 나타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적은 오로지 예수님과 특별한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소수의 사역자들만 일으킬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위에 계셨던 그 성령을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 왕실의 성직자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이며, 기적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실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다.

증거를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간직하여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기대를 잃지 않았다. 믿음의 수준은 하나님의 능령이 개입되는 여부를 얼마나 기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계명을 지키기위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령으로부터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지 않고는 병든 자를 치유하라라는 명령에서 이웃
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은 믿음을 통해 오신다. 믿음이 없으면 성령도 능력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들이 손에서 약속의 땅을 취하여 민족을 이루라는 임무를
하달하셨다. 임무의 성패는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능력의 개입을 기대하는 자리에 자신을 배
치할 능력을 소유했는가에 달려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출애굽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힘과 전략을 주신 분이다. 그들
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략을 의지했을 때
 초자연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러한 증거를 기억하지 못했을 때, 기적적인 일에 대한
 믿음이 시들었을 때,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의도 식어버렸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해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 안에서 걷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을 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시편 78편에서 그러한 세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몰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奇事)를 잊었도다.”(78:9-11)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가 있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무기도 갖추어주시지 않고 전쟁에 내보냈다는 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들을 위해 하셨던 일에 대한 증거, 곧 믿음으로 나아갈 용기를 줄 뿐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현재에 되풀이 할 수 있는 예언적 기름부음을 방출할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증거를 망각했다.

그것이 그들이 지닌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쟁을 치를 만한 힘도 믿음도 가질 수 없었다.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요청서를 제단에 제출한 다음, 그 중에서 하나라도 응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능력 있는 기도의 삶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마음에 아주 가까워짐으로 인해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음으로 인해 드리는 기도만이 언제나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는 자로서 권한 대행의 지위에 우뚝 설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환경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선포할 수 있다. 삶의 문제를 덮쳐 즉시 시정해달라고 구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제자들은 잠든 예수님을 깨워, 목숨을 위협하는 폭풍을 처리해달라고 간청했을 때에 이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세상의 구세주이신 주께 실로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 그런 다음 그들은, 주님이 그들의 문제를 시정하는 것을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뒤에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고, 제자들은 그러한 꾸짖음에 어리둥절했다.

사람은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갈구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기도가 언제나 믿음을 표출하는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다. 그러한 믿음만이 능히 산을 움직일 수 있으며, 폭풍을 잠잠하게 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께서 분명한 계획을 따라 신자들을 자신이 거하는 집으로 만드신다는 점을 명확히 밝힌다. 이 점을 망각 하지 말기 바란다. 성령께 순응하면 예수님을 닮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점점 더 많이 보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점점 더 많이 듣고, 아버지께 순응하기 위해 믿음 안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데까지 성숙하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고 굳건히 믿는 바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심령과 마음과 육신을 훈련시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인지하게 하고 그에 순응하게 하려면 우리에게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므로, 숨겨진 것들을 방출하고자 우리에게 선물하실 때 방언기도의 능력을 주신다. 우리가 이 도구를 잘 사용하여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해 자기를 건축하기를”(20) 배울 때에 우리 문제가 즉각 시정된 것이라 조급하게 기대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점차 버리게 하실 것이며, 그것이 우리 믿음 성장의 한 가지 징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주의를 집중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음성과 말씀을 우리 삶에 믿음으로 선포하기 전까지는 우리 상황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리를 깨달을 때,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멋진 일이지만 친밀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야 말로 우리 힘과 생명의 참 근원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능력의 영을 받는 법중에서 - 빌 존슨>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것

특히 방언기도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성령이 가르치는 것들을 더욱 명료하게 깨닫도록 해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한 후에 아버지께서 그러한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6:13,14).

이는 분명 영광스러운 약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확성기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도 우리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주파수에 우리 마음을 맞추려면 우리 생각이 주장하는 목소리를 무시라고 성령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림으로써 경청하기 위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것이라 칭한다.

방언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도록 돕는,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초점을 완전히 돌려놓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초점을 완전히 돌려놓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도록 돕는 강력한 도구이다. 이러한 준비 자세는 계시의 영을 토대하여 마음눈을 밝히도록(1:18)한다. 깨달음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레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를 깨닫기를 원한다. 그리고 비극적인 순간이나 위기의 순간을 맞으면 그러한 소망이 더욱 강력해진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이는 현상과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꾸며내어 설명하려 애쓰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못한다. 때로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하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은 것을 제 마음대로 설명하려 애쓰다가 심각한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또 그러한 순간에 종종 합당하지 못한 신학이 만들어진다. 옳지 못한 신학은 인위적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사람을 기쁘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에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위로한다(8:26). 그리고 그럴 때에 성령은 또한 우리에게 방언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신다. 방언기도는 깨달음이 부족할 때에라도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순응하여 기도하게 한다. 더욱이 방언기도는 우리 마음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지하는 곳, 곧 우리를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곳으로 데려감으로써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우리가 바울이 훈계한 것처럼(고전14:14) 마음의 깨달음으로 기도하기 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할 때에 하나님께 순응하는 수준을 한층 더 증대시킬 수 있다. 방언기도가 하나님께 순응하여 기도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는 사실은, 방언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건축하는지 깨닫는 데에 열쇠가 된다. 방언기도는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여 성경께서 주신 믿음을 즉각 활성화시킨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순응하느냐 하는 문제와 그 사람이 생활에서 믿음을 얼마나 나타내느냐 하는 문제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예수에 자신의 설명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서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했으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대로 말한 것뿐이라고 간단하게 말했다(5:19; 12:49).

이처럼 예수께서는 아버지게 완벽하게 순응하여 행동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하고 말씀하셨으며, 그로 인해 아버지의 나라라고 하는 명백한 실체가 예수님의 환경과 상황에 그대로 방출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임재와 지속적으로 접속하는 것(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길에 대한 깨달음이 증대되고 유지되는 것인데) 이야말로 모든 신자들이 갖춰야 할 믿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결과는, 우리가 정말로 주님처럼 생각하고 생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능력의 영을 받는 법’중에서 - 빌 존슨>

친밀한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빌 존슨]

하나님의 음성에 주의를 지중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라.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멋진 말이지만 친밀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야말로 우리 힘과 생명의 참 근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 하나님은 소박하고 작은 오두막을 하나님이 들어와 거하실 궁전으로 변화시키신다.

집을 부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은유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집이라 칭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신자들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진리는 실로 가슴을 벅차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부서실 필요, 개조될 필요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영광을 진실로 나타내는 집으로 만드시는 과정을 감내하겠다고 서명을 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는 이러한 과정을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자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하고 표현했고, 바울은 로마서 121,2절에서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가 기본적으로 우리 마음(새로워져야 하는)의 차원과 몸(산 제사로 드려져야 하는)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드로와 바울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우리가 마음을 내놓지 않거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거나 몸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우리 삶에서 활동하시는 건축자인 성령과 온전히 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인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러한 건축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당신이 살아 있는 집이라고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그 집을 재건축하기 위해 돌아오신다. 아마도 처음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배수 시설을 바로잡고 지붕의 새는 곳을 수리하신다. 당신은 이러한 일이 꼭 필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상식에 어긋나 보이는 방식으로, 집에 손상을 주면서 마구 부수기 시작하신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것일까? 사실인즉슨, 하나님께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집을 건축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새 문짝을 달고, 저기에 추가로 마루를 깔고, 탑을 높이고, 마당을 만드신다. 당신은, 당신이 작고 소박한 오두막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궁전을 짓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곳에 들어와 거주하기를 원하신다.-

이 예화의 요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이 신자들을 변화시키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연합하지 않으면 여전히 육신의 악취 나는 생각을 할 것인데,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8:7)라고 분명히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육신의 생각이 그렇게 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의 협력자가 되든지 아니면 우리 마음이 주님과 원수가 되게 하든지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간지대는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거부하면 성령의 불을 소멸하게 되며, 주님이 우리 삶에서 건축하고 계신 건물을 파괴하게 된다. 주님은 소박하고 작은 오두막을 주님이 들어와 거하실 궁전으로 바꾸신다.

건축과 방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은 심령과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운명과 인생의 목적에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게 하면 어려움과 반대에 직면했을 때에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힘을 얻는다. ‘강하게 하다(strengthen ing)라는 영어 단어는 건축과 관련된 용어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신약성경 대부분의 책에서 신자들은 건축을 담당하신다. 일례로 바울은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의 영적인 기초를 놓은, 구속(救贖)받은 자들이 거하는 공동체의 터를 닦은 지혜로운 건축자라 칭했다(고전3:10).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신자들이 자신을 건축하기 위해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기술한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첫째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20)이다. 나는 이 구절의 성령으로 기도하며가 구체적으로 방언기도를 언급하는 것이며, 유다가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건축하는 것과 방언이라는 특별한 행위를 긴밀하게 관련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 이와 동일한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 여기에 언급한 덕을 세우가(edify)라는 단어는 건축하다(build up)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edify’의 명사형 ‘edifice’건물의 의미를 지닌다. ‘Lance Wallnau Ministries’의 설립자 랜스 월나우(Lance Wallnau)가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믿음의 내적인 건물을 건축하며 그 건물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믿음 안에서 건축하는 것과 방언기도는 무슨관련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방언기도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라고 설명했다.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이 성령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음성으로 말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강력한 능력을 발한다. 왜냐하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완벽하게 순응한 상태에서(거듭났을 때 받은 새로운 본성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우리 영혼이 말하는 것에 온통 몰두함으로써 성령께 더욱 완벽하게 순응한다.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지속할 때, 신체적인 순종 행위를 보이면서 찬양할 때에 체험하는 것과 동일한 영적인 돌파를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를 의식하는 것이다.  <’능력의 영을 받는 법중에서 - 빌 존슨>

몸을 통해 배우자

너희 몸을 드리라 우리 육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 자체를 악하게 여기면서 무시라고, 제쳐놓고, 참아내야 할 무엇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육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우리가 거하는 장막 이상의 의미로 만드셨다. 육체는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변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다. 로마서12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대부분 해외로 새로운 선교사들을 파송하거나 혹은 자기를 부인해야 할 어떤 다른 사역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사용한다. 양로원이나 구호대에 자원하거나 혹은 몸을 드려 어디를 가거나 모슨 일을 하려 할 때 그들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도록 사람들을 격려한다. 또 종종 예배 때 우리가 손을 올리거나 춤을 추거나 무릎을 꿇거나 누워있을 때 이것이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 가르치는 사람들을 본다. 이 모든 적용이 다 참되고 올바르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함께 사역하는 데 있어서의 우리 몸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라 제안하고 싶다. 이 사실을 다윗 왕의 생애를 통해 좀 더 살펴보자.

다윗은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이재와 영광에 가장 친숙했던 인물이다. 다윗은 30, 40년 동안 언약궤 위에 머물렀던 하나님의 실제적이며 겉으로 드러난 임재를 마음껏 누렸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로부터 빛을 발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준다. Rm 결과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그가 지금 완전히 상징적으로만 날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하면서 그의 육체가 그 이상을 바라며 아파하고 부르짖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에게 이러했다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먹을 것에 주리고 마실 것에 목마른 것처럼 비단 우리의 감정과 지각, 또 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 역시 하나님을 향해 아파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다면 육체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할 수 있다. 채워질 가능성이 없는 갈망이란 없다.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식욕이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 속에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활동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집어넣으셨다.

훈련된 감각들 - 한 결음 더 나아가 히브리서514절은 성숙의 지표가 선악을 분별하도록 감각을 훈련시키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촉각, 후각, 시각, 청각, 미각은 분별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도록 훈련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몸으로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육체의 사인들이 우리로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주일 아침 예배 때 내 영은 내 앞에 있는 여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온도가 그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육체적으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않는다. 그들은 오직 지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시스템 중 하나를 무시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줄 정보가 있다. 하나님이 주로 사용하시는 언어는 말이아니다. 그는 우리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사 소통을 하신다. 마음의 인상, 생각 속에 떠오르는 그림, 감정, 느낌, 육체적인 감각들이 그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무시하면 최소한 여러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 사실을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육체적인 신호를 경시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옆을 지나가며 배 안에는 들어오고자 아니하신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6:48).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가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이렇게 하셨고 주님을 배 안으로 끌어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강한 요청이다. 주님은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오시지만 결코 이런 일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다. 제자들도 거의 놓칠 뻔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중 몇몇은 그를 유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얼마나 자주 육체적으로 보고 감지하는 것을 오해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을 기회를 놓치고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에 대해 많이 열려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지하며 주님을 배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요청한다. 그들은 모험으로 발을 내딛으며 말한다. “wp 존재의 모든 부분이 다 하나님께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 늘 유용한 존재가 되었으면 해요.” 언젠가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오감을 통해 분별하는 일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평범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훈련시켜야만 한다.

어떻게 느끼는가? - 비행기 조종사들은 훈련을 받을 때4만 피트 상공에 있는 것과 같은 기압 상태를 느끼도록 만들어진 고공 시뮬레이터로 자신의 적성을 시험받는다. 조교는 산소를 조금씩 빼내면서 비행기에서 산소가 없어질 때 그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감지하고 관찰할 수 있게 만든다.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르게 반응한다. 어떤 이들은 팔에 나있는 털이 당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귀가 윌린다. 또 다른 이들은 다리 근육이 아프다. 중요한 건 만일 산소마스크가 제때에 내려오지 않을 경우 그들이 몸에 느끼는 증상을 통해 산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방에 들어오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 주님이 우리 주변에 맴돌고 계실 때 어떻게 그를 느끼고 감지하고 인식하는가? 생동감 있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래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우리와 소통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을 때 우리의 생각은 천국의 현실과 온전히 발맟추기 어렵다.

내게 있어선 이것은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다. 손으로 만져질듯한 기름부음, 은사를 위한 성경의
임재를 난 육체적으로 분별하도록 배웠다. 난 육체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누군가 실
크스카프를 취해 내 손 위에 올려놓은 듯한 느낌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느끼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 경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요점은 우리의 감지 능력이 개발될 때 하나님께서 언제 방으로 들어오시는지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하려 하시는지 알기 위함이다.

난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이나 장소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 혹은 손이 뜨거워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난 누군가 부흥이나 치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내 왼손이 뜨거워지는 일을 경험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감춰져 있다고 가르친다(3:4).

누군가 부흥이나 치유에 대해 말을 할 때면 내 감정 영역에 불이 붙여지고 그런 심정을 통해 기름부음이 흐흔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장에서 좁아진 것이니라”(고후6:12).

……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때마다 항상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육체적인 신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나처럼 오랜 시간이 거릴지도 모른다. 때때로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고쳐질 때가 있다. 육체적인 감각은 항상 확실한 지표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하는 법을 배우는 모험에 있어서 머뭇거리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부분을 다 사용하실 것이다. 몸으로 관심을 돌려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임재를 인식하기 시작하자<기적의 삶에 다가가라 빌 존슨>

올바른 묵상 [빌 존슨]


생각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다보면 믿음은 나도 모르는 새 어느덧 약해져버리기가 쉽다. 조금씩 우리는 실제적인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하나님 나라의 현실대신 이 세상의 지혜에 기대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사고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암송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을 자신에게 상기시키며 이런 약속과 암송한 것들을 다음 세대의 신자들에게 넘겨줄 수 있게 된다. 진리를 기억하며 묵상하려는 실질적인 발걸음을 내딛지 않는 한 우리는 쉽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잊어버린다. 점차 우리는 이 땅의 사고를 하게 되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를 반드시 피해야 한다.

올바른 묵상
동양의 신비 종교에서 명상이란 생각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묵상은 정반대로 생각을 하나님의 진리로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묵상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마귀적인 종교가 이것을 이상하게 사용하는 모습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이런 일을 염려해보왔다면 당신은 이미 어떻게 묵상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성도건 죄인이건 누구나 매일 묵상한다. 문제는 무엇을 묵상하느냐이다.

만일 재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보자. 새롭게 된 생각을 자긴 사람은 그런 환경에서조차 기쁨을 끌어낸다. 왜냐하면 기쁨이란 보이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시며 항상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

하지만 걱정이라고 하는 세미한 목소리가 살그머니 기어 들어와 이렇게 속삭인다. “오래전 네가 주님께 돈 문제로 순종하지 않았지? 이제 네가 심은 것을 거두는 거야.” 상당히 그럴싸한 주장처럼 들리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대신 걱정을 묵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마치 귀에다 확성기를 대고 말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우리는 어느덧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26:3)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된다. 평강에 평강으로란 말은 영어로는 완전한 평강으로써 신적인 건강, 형통함, 웰빙, 건전한 생각을의미한다.

의뢰한다는 말은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고정되거나 안착하다란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고정되지 않는다.’ 왜 걱정은 우리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그렇게 크게 외치는가? 걱정을 오래 지켜보게 되면 걱정은 우리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방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기도하기 시작하며 결국에 가서는 기도하기를 멈추고 동정을 구하기 시작한다. 다른 목소리를 신뢰하게 되고 마음을 거기에 빼앗기게 된다.

생각을 영적인 것에 고정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생각을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로 채우는 한 우리는 그만큼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분연히 일어나 믿음의 은사로 승리를 획득하기도 하겠지만 우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흘러나와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지는 못한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모든 기회를 다해 진실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누룩 [빌 존슨]


예수께서 헤롯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셨는데, 이는 이런 것들이 우리 생각을 새롭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문맥을 보면 제자들의 가장 큰 실패는 점심을 싸오지 않은 까닭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과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두 번씩이나 음식을 많아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고는 자신에게 없는 것에서부터 출발했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공급을 해주셨다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다.

그들은 잘못된 기초에 사고를 세우고 있다. 마가복음 바로 앞장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15:6). 바로 제자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 말씀을 계속 신선하게 듣는 대신 전통에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에서부터 떨어져 나간다.

전통은 보통 어제의 말씀이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다시 말해 믿음은 과거에 들었던 말씀이 아닌 현재 듣는 말씀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신선한 말씀을 가졌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둔하냐”(8:17).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참고해서 생각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체험적으로 알이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체험하도록 하셨고 그럼으로써 그 기적이 그들 삶의 새로운 기준이 되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적을 베푸시며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며 그 사건의 일부가 될 때 주님은 보이지 않는세계를 볼 수 있는 법을 가르치고 계신다. 기적은 가정교사이고 우리에게 다른 편에 존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기적을 체험하고 나서 과거와 똑같이 의심하고 불평하고 투덜거린다면 그건 주께서 주신 정거가 내 생각을 충분히 바꾸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청년의 부러진 팔을 보았을 때 생각 속에 내가 보았던 기적의 간증들로 가득 차는대신 두려움이 업습했다. 내가 의사를 불렀을 대 다른 모든 이들의 눈에는 지혜로운 처사로 비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셨고 나도 알았다. 이것이 두려움 때문이란 사실을…. 때때로 두려움이 지혜의 모습으로 가장한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때에는 여러분과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정신에 가장 투철한 사람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고침 받고 구원 받는 일을 목격하며, 훌륭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하지만 집에 가다가 차자 망가져서 갑자기 300만 원이 들어가고 컴퓨터가 망가지고, 전화기가 고장 나고, 이웃 사람이 화를 내는 일이 벌어지면, 관연 어떤 누룩이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런 환경의 불이 확연히 드러낸다.

말라지 3 2절은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같다고 말씀하며 말라지 4 1절은 또 이렇게 말씀한다.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주님은 어떤 영향력을 받고 있는지 드러낼 일련의 사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때 우리는 좋든 싫든 분명히 그 영향력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나의 반응이 항상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면 좋겠다. 내 마음과 생각이 바른 방향을 잡는 데 하루나 이틀이 걸릴 대가 있는가 하면, 때론 단 몇 분만에 되기도 한다. 하지만 종종 너무 괴롭고 신경질이 나며 걱정이 밀려오는 때가 있다. 성경적으로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난 항상 그 점이 이상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값 주고 사셨다고 내게 독생자를 주셨고 모든 것을 마음껏 주셨는데 내가 왜 그렇게 걱정하고 압박감에 시달릴 수 있을까? 헤롯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내 영혼 속에 작동하며 주변의 압박이 그 누룩으로 부풀어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고로는 항상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여러분과 내가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고방식에 순응할 때, 우리가 주님의 상상력을 받아들이며 라고 말할 때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나라의 누룩, 천국의 영향력으로 가득 채우길 원한다. 우리는 기적을 원하며 또 이런 기적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영향을 마침으로 우리가 보고 행동하는 방식이 변하되기원한다.

바리새인의 누룩 [빌 존슨]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헤롯이 누룩과는 다르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종교를 말하는데, 이론적인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실제적이거나 체험적인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핵심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은 철저히 배제된다.

바리새인들은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 만일 바리새인과 함께 배를 탔는데 빵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빵 없이 배를 타게 한 것은 그의 주권 가운데 있는 선한 일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빵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또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해 설명은 할 수 있지만 해결책을 주지는 못한다. 그들은 마지막 사도가 죽었을 때
빵집 문은 닫혔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곳에서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거부한다.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에 대한 큰 기대는 갖지 말라고 또한 강조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러시안 룰렛(탄알이 한 발 든 권총의 실린더를 돌려 총구를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게임-편집자 주)  같은 하나님이다. 권총의 실린더를 돌려 어쩌면 응답을 받고 또 어쩌면 못 받는다.

어린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영향 받은 사람들은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잘못 알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외모로만 알았지, 관계 혹은 능력의 나타남으로 알지 못했다(6).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바리새인의 누룩에 만족하고 있다.

그들은 특정 브랜드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면서 우리의 실제 삶 가운데 침투해 들어오시는 하나님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런 누룩의 영향력 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 질병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들은 말한다. “저 사람이 그런 질병으로 고통당하는데 그가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을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 그들은 문제를 설명함에 탁월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만 해답을 제공함에 있어서 무능하다. 뿐만 아니라 해결책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헐뜯는다.

제자들도 이런 식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9:2).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그들과 토론하기를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구속하실 때 얼마나 완전하게 행하시던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이나 영광을 나타내실 목적으로 그 문제를 만드셨다고 보일 정도이다. 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으로 죄를 짓도록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때 문제는 목적인체 한다는 것이다. 그의 구속적인 터치가 없다면 그 문제는 마귀가 행한 또 다른 일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해결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적인 토론을 즐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헤롯과 바리새인의 영향력의 핵심을 드러내셨다.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을 두려워함에 기인한다. 그 동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 영향을 받으면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려 깊고, 동정심을 갖고 돌아보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삶을 이끌어간다.

시편25 14절은 말씀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로다

잠언 29 2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의 시야가 밝아진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끝없는 혼동이 몰려올 뿐이다.

기적을 통해 배우자 – 헤롯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사람과 사람이 만든 시스템, 예를 들면 정치 대중의 의견, 설득 등의 힘에 의거하는 무신론적인 영향력이다. 헤롯의 누룩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들은 상당히 냉소적인 믿음의 고백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만일 여러분이 배를 탔는데 빵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런 영향력을 받는 사람은 이렇게 조언을 할 것이다. ‘다음번에는 미리 물품 목록을 만들어서 잊어버리지 않고 빵을 가져오도록 하세요. 자신의 문제점은 스스로 풀도록 노력해야지요. 책임감을 갖고 자기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세요.”

헤롯의 누룩은 교회 안에 있는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인 실질적인 무실론을 보여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개입적인 활동을 불신하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들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거나, 혹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문서로 적고 있는 교회는 없다. 하지만 신자들은 매일 마주하는 상활 속에 하나님을 모셔오지 않는다.

헤롯처럼 그들은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문제가 닥치면 믿지 않는 이웃과 똑 같은 방법으로 해결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조언을 얻는다거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도록 초청하려 들지 않는다.

미국 문화 속에는 헤롯의 누룩이 깊숙이 침투해 있다. 미국은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들, 개척자가 세운 나라이다. 개척자들은 결단과 훈련과 탁월한 행정력을 가지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이끄신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속임수에 교회가 자주 빠진다.

하지만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가 해온 많은 일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어졌다.

우리에게는 돈이 있고 일치된 생각과 마음이 있고, 또 목표를 이룰 행정적 능력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생겨난 일이라는 증거는 아니며, 보통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노력 가운데 함께하시든 말든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으로부터 나온 일일 수 있다.

기적을 통해 배우자 – 생각의 누룩 [빌 존슨]


하나님의 나라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결정짓는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들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기적을 통해 배우고자 애쓰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 33절에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13:33).

마가복음 813~21절에서도 누룩에 대해 또 말씀하셨다.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 생각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 경고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영향력이 계시가 열리고 생각이 새롭게 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 중에는 세 가지 종류의 누룩이 언급되고 있는데, 헤롯의 누룩, 바리새인들의 누룩,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다. 이런 누룩들은 살아서 오늘날도 활동하며 우리의 생각과 삶과 도 인생 전반에 걸쳐 대단히 영향을 미친다.

누룩은 우리 생각에 미치는 영향력을 묘사한 것이다. 자연계에서 누룩은 반죽이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내 아내는 빵을 만들곤 했는데 빵이 잘 부풀지 않으면 그것을 난롯가에 가져다가 열기가 누룩을 활성화시키도록 했다. 곤경의 불은 우리 인생에서의 누룩을 드러나게 하고 표면화시킨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바 만일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우리 마음에 스며든다면 믿음 가운데 있는 천국 현실이 표면으로 드러날 것이다. 만일 그것이 헤롯이나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면 계시와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일을 방해한다.

기적을 통해서 배우자 [빌 존슨]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기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활동들보다 더 많은 교훈을 배우도록 한다.

어느 주일 저녁 우리 교회 청년이 본당 뒤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 어머니가 내게 와서 말했다. 제 아들을 위래 기도해부세요. 설사 그 뼈가 수십 년 전 잘못 고쳐졌다고 할지라도 부러진 뼈가 고침 받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달려가서 보니 그가 바닥에 누워 있는데 팔이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난 바닥에 앉아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갑자가 두려운 생각이 엄습해왔다.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기적들을 그 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이렇게 말했다. 의사를 부릅시다. 난 이제 이런 상황에서 의사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결코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쩌면 의사를 부르는 것이 오리려 맞는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다. 내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난 기형적인 뼈들이 사라지며, 뼈들이 제자리를 잡고, 또 엉덩이 형체가 바뀌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일을 쭉 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팔이 부러진 청년을 보면서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느덧 난 초자연 모드에서 자연 모드로 바뀌었다. 기적을 행했던 체험들이 나는 완전히 바꿔놓지 못했던 것이다. 난 회개했고 일주일쯤 후에 그 어머니께 사과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새롭게 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받은 계시는 실행에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기적을 통해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즉 체험하는 기적들이 생각을 형성하도록 해야만 되어야 한다. 기적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며 극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적은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다르게 보는 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기적을 주셨다. 기적은 학교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보자. 음식에 영양소가 있듯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모든 상황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 영양소로 가득 차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그 체험속에 의도된 것들을 다 추출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시험에 낙방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끄집어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일은 교회에서 항상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와, 정말 대단한데. 그리고는 아무런 변화도 갖지 못한다. 물론 감사를 드리긴 하지만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집에 돌아가면 삶은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고, 그 후에 또다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재미만을 만끽하려 할지 모른다.

당신도 이렇게 반응했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일어났다. 제자들은 음식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6). 음식이 불어나는 일이 예수님의 손이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손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 점은 꼭 기억해야만 할 키포인트이다. 예수님께서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음식더미를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음식 위에 손을 휘저으면서 불어나게 만들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음식을 들고는 12조각으로 나누었고 제자들이 가져다 줄 때 음식이 계속 불어났다.

하지만 그날이 저물 무렵, 바로 여기서 그들은 시험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는 자신은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노를 젖느라 애쓰는 모습을 영으로 보시고는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까이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고 주님은 마침내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 제자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들이 혼비백산했던 이유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52).
이 사건의 결말을 좀 이상하게 맺고 있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가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수행할 때 온전히 순종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둔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 보지 못했다. 기적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굳어진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기적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놓쳤다는 것이다.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씨가 결국 우리 마음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라고 하는 모든 일을 다 행했지만 그 다음 분제가 닥쳤을 때 그 전 체험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어떤 교훈인가? 그들은 기적 가운데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전 기적 가운데 그들이 행했던 역할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번 문제에 봉착하고 예수님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시지 않자 아무런 해결책을 갖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하리라. 즉 그들의 터치를 통해 그리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 음식이 불어났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건의 핵심을 놓쳤다.

예수님의 목표는 그들을 폭풍 가운데 보낸 후 예수께서 영웅처럼 나타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배워야 할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난번 기적을 통해 영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또다시 그들을 구원해주셔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