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기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활동들보다 더 많은 교훈을 배우도록 한다.
어느 주일 저녁 우리 교회 청년이 본당 뒤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 어머니가 내게 와서 말했다. “제 아들을 위래 기도해부세요.” 설사 그 뼈가 수십 년 전 잘못 고쳐졌다고 할지라도 부러진 뼈가 고침 받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달려가서 보니 그가 바닥에 누워 있는데 팔이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난 바닥에 앉아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갑자가 두려운 생각이 엄습해왔다.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기적들을 그 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이렇게 말했다. “의사를 부릅시다.” 난 이제 이런 상황에서 의사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결코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쩌면 의사를 부르는 것이 오리려 맞는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다. 내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난 기형적인 뼈들이 사라지며, 뼈들이 제자리를 잡고, 또 엉덩이 형체가 바뀌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일을 쭉 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팔이 부러진 청년을 보면서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느덧 난 초자연 모드에서 자연 모드로 바뀌었다. 기적을 행했던 체험들이 나는 완전히 바꿔놓지 못했던 것이다. 난 회개했고 일주일쯤 후에 그 어머니께 사과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새롭게 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받은 계시는 실행에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기적을 통해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즉 체험하는 기적들이 생각을 형성하도록 해야만 되어야 한다. 기적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며 극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적은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다르게 보는 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기적을 주셨다. 기적은 학교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보자. 음식에 영양소가 있듯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모든 상황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 ‘영양소’로 가득 차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그 체험속에 의도된 것들을 다 추출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시험에 낙방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끄집어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일은 교회에서 항상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와, 정말 대단한데.” 그리고는 아무런 변화도 갖지 못한다. 물론 감사를 드리긴 하지만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집에 돌아가면 삶은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고, 그 후에 또다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재미만을 만끽하려 할지 모른다.
당신도 이렇게 반응했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일어났다. 제자들은 음식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막6장). 음식이 불어나는 일이 예수님의 손이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손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 점은 꼭 기억해야만 할 키포인트이다. 예수님께서 “얏!”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음식더미를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음식 위에 손을 휘저으면서 불어나게 만들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음식을 들고는 12조각으로 나누었고 제자들이 가져다 줄 때 음식이 계속 불어났다.
하지만 그날이 저물 무렵, 바로 여기서 그들은 시험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는 자신은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노를 젖느라 애쓰는 모습을 영으로 보시고는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까이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고 주님은 마침내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 제자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들이 혼비백산했던 이유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6:52).
이 사건의 결말을 좀 이상하게 맺고 있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가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수행할 때 온전히 순종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둔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 보지 못했다. 기적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굳어진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기적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놓쳤다는 것이다.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씨가 결국 우리 마음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라고 하는 모든 일을 다 행했지만 그 다음 분제가 닥쳤을 때 그 전 체험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어떤 교훈인가? 그들은 기적 가운데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전 기적 가운데 그들이 행했던 역할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번 문제에 봉착하고 예수님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시지 않자 아무런 해결책을 갖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하리라.” 즉 그들의 터치를 통해 그리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 음식이 불어났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건의 핵심을 놓쳤다.
예수님의 목표는 그들을 폭풍 가운데 보낸 후 예수께서 영웅처럼 나타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배워야 할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난번 기적을 통해 영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또다시 그들을 구원해주셔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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