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2010

바리새인의 누룩 [빌 존슨]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헤롯이 누룩과는 다르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종교를 말하는데, 이론적인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실제적이거나 체험적인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핵심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은 철저히 배제된다.

바리새인들은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 만일 바리새인과 함께 배를 탔는데 빵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빵 없이 배를 타게 한 것은 그의 주권 가운데 있는 선한 일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빵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또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해 설명은 할 수 있지만 해결책을 주지는 못한다. 그들은 마지막 사도가 죽었을 때
빵집 문은 닫혔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곳에서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거부한다.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에 대한 큰 기대는 갖지 말라고 또한 강조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러시안 룰렛(탄알이 한 발 든 권총의 실린더를 돌려 총구를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게임-편집자 주)  같은 하나님이다. 권총의 실린더를 돌려 어쩌면 응답을 받고 또 어쩌면 못 받는다.

어린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영향 받은 사람들은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잘못 알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외모로만 알았지, 관계 혹은 능력의 나타남으로 알지 못했다(6).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바리새인의 누룩에 만족하고 있다.

그들은 특정 브랜드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면서 우리의 실제 삶 가운데 침투해 들어오시는 하나님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런 누룩의 영향력 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 질병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들은 말한다. “저 사람이 그런 질병으로 고통당하는데 그가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을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 그들은 문제를 설명함에 탁월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만 해답을 제공함에 있어서 무능하다. 뿐만 아니라 해결책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헐뜯는다.

제자들도 이런 식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9:2).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그들과 토론하기를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구속하실 때 얼마나 완전하게 행하시던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이나 영광을 나타내실 목적으로 그 문제를 만드셨다고 보일 정도이다. 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으로 죄를 짓도록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때 문제는 목적인체 한다는 것이다. 그의 구속적인 터치가 없다면 그 문제는 마귀가 행한 또 다른 일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해결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적인 토론을 즐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헤롯과 바리새인의 영향력의 핵심을 드러내셨다.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을 두려워함에 기인한다. 그 동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 영향을 받으면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려 깊고, 동정심을 갖고 돌아보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삶을 이끌어간다.

시편25 14절은 말씀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로다

잠언 29 2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의 시야가 밝아진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끝없는 혼동이 몰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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