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2011

살아 있기 때문에...[롬1:17]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도 노력하고 애쓰고 금식도 하고 정말 하나님 안에서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왜 안 될까? 믿음의 역사가 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까?

오늘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식 때문입니다. 그 죄의식에 본질은 내 육체에 기초한 자기의식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가 되는지 가르쳐주시는데 처음도 믿음이고 끝도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중요한 이유는 죄 사함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예수님을 믿음 겁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거듭납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성품은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면 아버지에게 새롭게 배워야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생각해본다면 이전의 어려웠을 때 죄책감, 정죄감, 수치심으로 인해서 이거 하다가 실수하면 어쩌지, 잘못했다고 욕먹을 텐데... 이런 걱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아마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실껍니다.
"너의 이전 모습은 다 잊어버려 이젠 넌 내 아들이야 실수할 수 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지 점차 좋아질꺼야 앞으로 넌 새롭게 될 수 있더. 내가 도와줄게 힘내 사랑해!"

정말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초조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배운 거에 대해서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해야 되고 훈련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때마다 보혈을 의지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때,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가족으로 성숙케 되는 놀라운 비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성장통[행전6:1-7]

성장통은 살아있고 자라나기에 필연적으로 겪는 아픔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역시 살아있고 부흥하다보면 이런 성장통을 겪게 됩니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면 성도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이 부족해기거나 행정과 양육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해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과 문제들은 주님께서 그리시는 더 큰 축복을 위한 과정입니다.

갈등의 폭발:
문제의 발단은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의 불공평한 구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저변에는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들이 갈들이 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사도들의 해법이 독특했습니다. 사도들은 문제의 증상이 아닌 문제의 뿌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말씀사역과 기도사역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불가피하게 접대, 즉 구제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자시의 일의 본질을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의 본질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평신도 리더십의 선출 기준
사도들이 영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제자들이 리더십을 뽑았습니다.

첫 번째 기준은 공동체 내부에서 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함께 성령을 받은 믿음의 형제를 공동체 가운데서 뽑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두 번째 기준이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믿음 충만한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고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나를 붙잡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말만 하는 것이 아닌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리더는 하나님의 지혜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공동체 내에서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칭찬받는 사람이란 인기 좋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과 지혜를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로 팀워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사로 일곱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함께 팀으로 사역하라는 의미입니다. 능력과 재능이 있더라도 독불장군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모든 교회일은 함께 하는 동역입니다. 그렇기에 임직 자는 화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좋은 일을 할지라도 그로 인해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 일은 피해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와 팀워크를 이루어야 합니다.

집사라는 말은 섬긴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교회의 리더십은 군림하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파격적인 지도자 선택.
선출된 일곱 집사는 다수인 히브리파가 아닌 소수의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국제파였던 헬라파 유대인이 리더십으로 세워집으로 주님이 주신 세계복음과를 가속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헬라파가 그토록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숫자적으로 절대 다수였음에도 헬라파를 뽑아준 히브리파의 성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단으로 초대교회는 급성장 할 수 있었고, 이들의 협력으로 지상명령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해서 자리를 잡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균형 잡힌 성장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좋은 팀워크를 만들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꿈을 함께 이룰 수 있도록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성숙: 모든 문제의 열쇠 감사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20:20)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전적인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반면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그런 가운데 감사가 없는 삶도 저주입니다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감사는 우리를 만들고우리를 일깨워 가는 것입니다.

고전 1:4절을 보면 감사는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어떤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한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무엇인가 자기 힘으로 쟁취해서 소유한 사람은 진정한 감사가 없습니다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은혜를 받은 동시에 깨달은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5절에 나오는 ‘풍족하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풍족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깨달은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면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또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될 때감사하게 됩니다.

때로 역경을 통과하면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광야라는 역경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았음에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결국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사를 만들어내고 감사는 내일을 일구어 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며감사가 식었다면 믿음의 상태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다시 한 번 풍성한 감사를 회복하시고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11/29/2011

당신은 기도 없이 살 수 있는가?[행전1:15-26]

예수님이 승천하신 수 제자들은 기도의 자리로 모였다.
기도의 자리로 모여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만큼 그리스도인을 재충전시키는 것은 없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기도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깊은 기도 가운데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靈感)을 얻게 되고, 그분이 나의 앞길을 인도하심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다 할지라도 분석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분석했으면 어느 순간에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영감을 받은 사람은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기도가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 뜻에 맞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기도하는 자는 세상을 주도한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주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드기 때문이다. 무엇을 모른다는 말인가?
무엇이 우리의 목표인지, 무엇이 답인지, 무엇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기도하는 하나님 백성은 기도 가운데 그것들을 듣고 보고 알게 되기 때문에 세상을 주도한다.

기도하는 자는 지혜롭다.
논지 없이 억지를 부리면 안 된다.
논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아이젠하워(미국의 제34대 대통령)는 군사령관 때나 대통령 때 아랫사람들에게서 한 장짜리 리포트만 받았다고 한다. 논지를 세워 핵심만 보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리포드를 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큰 목소리로 주장하거나 무조건 열심히 노력한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백성에게 지혜를 주셔서 주님의 일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이끄신다.

기도하는 자는 뜻을 세운다.
베드로는 기도를 통해 가룟 유다 대신 다른 사도를 세우겠다는 뜻을 세웠다.
우리도 기도로 뜻을 세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기도로 뜻을 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약점에 매인다.
둘째, 남에게 좌지우지된다.
셋째, 급한 일 처리하다가 인생 끝난다.
넷째, 허망한 데 인생을 탕진한다.

이런데도 계속 기도 안 하겠는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나요?

신기하게도 내면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 삶도 점점 더 좋아지는데요. 이것이 훈련의 첫 번째예요. 훈련의 두 번째 내 내면과 삶의 환경이 좋아지고 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섬기거나 선교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에요.

보통사람들이 제일 많이 좋아하는 것은 내가 지속적으로 회복되고 안정감 있게 사는 수준에서 살고 싶어해요. 다른 사람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고 싶어 하진 않았요.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분들 있죠?

그런데 내가 좋은 정도만 훈련하는 건 안 돼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훈련한다는 것은 내가 왜곡된 상태에서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회복되어야 되고 그 회복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그런 것들의 증거는 뭐냐, 공동체 안에서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고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그것이 증명해 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잘 섬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영혼을 섬기는 일관성 있고 능숙한 기술: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70:72]

다윗을 하나님이 평가하신 건데요, 이스라엘 백성을 그 마음의 완전함으로 이끌었다. 일관성 있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겼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을 향하여 일관성 있는 마음으로 섬기는 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주 중요해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일관성 있게 지키고 나에게 맡겨주신 양의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일관성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죠. 양이 말 잘 들으면 하다가 말 한 듣고 분위기 안 좋으면 안하고 이러면 하나님 쓰시기 어렵겠죠. 자기중심적으로 반응하니까요.

그리고 다윗은 그 손에 능숙함으로 지도했다는 겁니다. 능숙한 기술은 뭐냐면 그 사람 영혼이 좋아지도록 세밀하게 터치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해요. 다윗이 단순히 왕노릇 잘했다고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효과적으로 기술을 사용했다 이거든요. 그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계속해서 만지고 도왔다는 것이죠. 여러분도 그런 기술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제자의 삶을 살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영혼을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음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능숙한 기술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하나님과의 은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구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과의 그런 은혜의 관계가 점점 더 강력해지시길 축복합니다.

결단하는 인생을 살라!

그리스도인은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에릭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하는 책을 보면 인간이 그렇게 자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의사 결정을 남에게 맡기길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26절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생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 다스리는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종입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판단을 내려야 됩니다. 다스려야 됩니다. 말씀에 비추어보아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정보를 모으고,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도, 우리가 반드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게 돼 있습니다.

인생 가운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 입시 앞두고 어느 대락을 가야 될지 결정을 해야 될 때, 자기 직장의 진로의 문제를 놓고 내가 어느 길로 가야 될지 갈등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그러나 군중심리는 생각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생각이 없으니깐 남들에게 끌려 다니고, 세속의 물결에 끌려 다니고, 남들이 하는 대로 하니깐 생각이 없으니깐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고, 또 하나님의 형상됨을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길입니까? 무엇이 지혜로운 길입니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옆드려야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인생은 하나님의 은햬와 능력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가 가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조건은 내 안에 교만이 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교만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마리아하고 마르다 보십시오. 마리아는 예배하는 자였습니다.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 마르다는 내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접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교만이 죽어야 겸손의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능력과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겸손함 가우데 엎드릴 줄 아는 믿음의 종 되기를 바랍니다.

11/28/2011

나는 십자가 복음 위에 서 있는가?

오늘 여러분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나는 십자가의 복음위에 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믿음으로 지금도 신앙생활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 십자가가 살아서 오늘도 내 삶의 기초가 되고 내 안에 계신 그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내 육신을 죽임으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여러분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십자가로 돌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한 번 회개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 삶을 다시 정힙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내 존재는 날마다 그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내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새 생명에 의지해서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져야 하고 살아있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로 내 혼과 육을 통지하는 성령님과 친밀함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입니다. 십자가 없는 성령 사역도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성령님과의 친밀함,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을 때에 내 육신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고 그 예수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될 때에 이 죽을 육체의 나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으로 오늘을 살지 말라!

십자가는 오늘 내 삶의 기토가 되어야 합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감격이 과거의 경험으로만 남아있을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현재적인 실존으로 계속적으로 내 심령에서 내 마음 판에서 겸험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내가 그때 구원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진정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그 십자가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 삶 오늘 내 존재에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옛날의 내가 구원받았던 하나의 사건으로만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온전하 인도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다 이러면 능력, 기적을 생각하지만 성령님의 일차적인 역사는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었을 때에 새로운 피조물로 살 때에 성령님은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내 존재가 그 십자가 위에 서야 한다는 사실! 나의 옛 자아에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내 존재가 성립된다는 사실! 바로 이러한 자리로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온전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성령님은 당신을 십자가로 인도합니다.

11/27/2011

가장 위대한 유산은 믿음입니다! 요셉:

요셉은 고난의 풀무에서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약속을 주신 다음 그 약속을 받기까지 어떤 관거을 거치게 하십니다. 요셉은 고난과정을 통해서 인품과 실력을 키웠습니다. 수많은 시련 모두에 의미가 있었고 요셉의 겪었던 수많은 시련 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커리큘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겪는 위기와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잘 견디면 위대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됩니다. 성공은 시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계속해서 극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여러분과도 함께 하심을 믿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총리가 된 요셉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과정이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친족들을 이집트로 불러들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아브라함에서 야곱과 이삭을 건너뛰고 요셉에게 건너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요셉을 통하여 터닝 포인트처럼 폭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는 기폭점이 바로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나 혼자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을 신비한 방법으로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시켜 가십니다. 스데반은 요셉 이야기의 결혼을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장례이야기롤 마무리합니다. 야곱이 묻힌 세겜땅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위해 돈을 주고 매입한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수백 년 뒤 이 땅의 주인이 될 후손들을 위해 거룩한 교두보를 찍었고 돌아와야 될 믿음이 유산을 남긴 것입니다. 믿음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유단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그네처럼 이 땅을 스치고 살아가지만 결코 타협하거나 잊어서는 안 될 영원한 교두보,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십시오. 이 교회를, 믿음의 유산을 사랑합니다.

가장 위대한 유산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는 날부터 사건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무명이었던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순간부터 그 인생에 내용이 생겼습니다. 텅 빈 백지 같은 우리 인생에 그림을 그려주시고 내용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바꾸는 첫 번째 스타트는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미래를 위해 아브라함이 자신이 편한 땅과 익숙한 인간관계를 떠나야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악 된 옛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약속의 땅이 내게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옛사람으로부터 분리되라는 것이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죄의 환경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떠났다고 해서 옛사람과의 끈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났다가 하란에서 지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항상 비전의 여정에서 우리를 지체시키는 것은 약속의 땅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가 없는 괜찮은 땅입니다. 익숙한 것, 편한 것, 적당한 헌신 등으로 우리를 타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죽고 하나님께서 아브라람을 옮기어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현실의 땅이 아닌 약속이었습니다. 약속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약속과 현실을 잇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이는 결코 비전을 추수할 수 없도록 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안 되니까 하나님도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11/26/2011

성경을 읽을 때 원칙 4가지


I. 성서는 하나님의 사건, 역사하심을 증언한 신앙 고백의 책입니다.


 "성서란 무엇일까요?" 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인간들이 역사 가운데 어려움에, 고통에,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고 개입해 오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고백적으로 증언한 책입니다. (출애굽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 찬양을 보십시요 출 15,1-18;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의 노래 출 15,21; 마리아의 찬가 눅 1,46-55)

그러므로 성서를 대할 때 신앙고백의 글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가 세상의 창조, 인류의 근원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요즘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이론들과 비교하여 이론 중 이 부분은 성서 창조기사의 이 구절을 뜻하고 또 저 부분은 저 구절을 의미한다고 직접 대입시키면서, "그러니까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기사가 옳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가 신앙고백의 글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서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고백의 글입니다. 예를 들어 깊은 산골에 갑순이과 갑돌이가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루는 갑돌이가 갑순에게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갑순아 난 너를 사랑한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이 말은 참말 일까요 거짓일까요. 사랑의 고백이라는 입장에서는 참입니다. 


왜냐하면 갑순이를 사랑하는 갑돌이 눈에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보이니까요. 그러나 과학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갑돌이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과 갑순이를 비교한 끝에 내린 결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백의 글과 과학의 글은 그 정신이, 출발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서로 비교시키면서 어느것이 진짜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핵심은 세상의 창조, 인간의 창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인간은 우연이나 우발적을 생겨난 존재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첫 날에는 무엇을 창조했고 둘 째 날에는 무엇을 창조했다는데 (고백의 언어) 지구의 역사를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첫 날"은 어디에 해당하고 "둘째 날"은 어디에 (혹은 몇 만 년에) 해당한다고 (과학의 언어)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성서의 참됨을 수호하려는 충정에서) 무리한 논리로 둘을 같다고 결론내릴 위험도 있고, 만일 이 비교가 서로 맞지 않는 다고 할 때 "성서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거짓이다"라는 잘못된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3-4000년 전의 사고관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직접 현재의 진보된 학문, 과학, 세계관과 비교하기 보다는 오늘날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그 창조의 고백을 풀어 설명하는 것이 더 올바른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성서는 역사책도 아닙니다. 물론 성서 중에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글도 있지만 (왕 상하, 대 상하)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구원의 역사'라는 신앙의 입장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모든 성서는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쓰여 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신문기사처럼 소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을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쓴다고 하는 '실증주의'는 역사학자 랑케 이래로, 즉 근대에 생겨났습니다. 이와 달리 성서는 많게는 3-4000년 전에 적게는 2000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성서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성서는 (복음서의 경우) 고백을 직접 썼다기 보다는 먼저 단편적인 고백들, 이야기들, 증언들이 있었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으고 정리해서 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묘사가 있다고 해서 "성서는 거짓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무덤에 찾아갔던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기사가 매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 28,2에는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흰 천사로, 막 16,5에 흰 옷입은 한 청년으로, 눅 24,4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요 21,12에는 흰 옷입은 두 천사로 묘사됩니다. (이런 유사한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실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우리들은 쉽게 "그럼 실제로 어떤 천사가 몇 명 나타났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는 잘못하면 "성서에 서로 모순되는 보도가 있으니 성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러나 그런 실증주의적인 사고, 요즘 신문에서 보도하는 신문기사처럼 예수님의 빈무덤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실증주의 정신은 근대 이후의 사고입니다. 성서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그 이외의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성서는 지금 여기서 무엇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지를 집중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부차적인 것이 매달리면 잘못된 결론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오늘날의 과학책이나 역사책, 신문보도 처럼 여기고 접근해서는 않됩니다.

II.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봅니다.

우리 속담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개별적인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입장에서도 그 사물을 조망해 봐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속담은 성서을 읽을 때도 적용됩니다. 각 성서로 들어가 어떤 구절을 볼 때 그 한 구절에만 몰입하여 빠져버리면, 차칫 성서가 전체로 말하는 시야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때 그 구절이해는 잘못된 것이 되고 맙니다. 항상 부분은 전체의 입장에서 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롬 7,12에서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의거해서 누가 "바울의 율법이해는 매우 긍정적이다"라고 한다면, 전에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주장은 의문의 소지가 많습니다. (갈 2,11-3,29을 보십시요)

어떤 구절을 볼 때 항상 전체 속에서 이 부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III. 각 성서가 쓰여진 시대배경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텔레비젼에서 사극을 본다고 할때 당시의 시대 상황를 잘 알고 있다면 내용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고 더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를 읽을 때도 그 글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더욱 그 말씀은 읽는 우리에게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 쪼개"는 (히 4, 12) 능력의 말씀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예수님께서 사셨던 중근동 팔레스틴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상황들을 많이 안다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당시 사람들의 심정들, 제자들의 마음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의미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드셨던 비유들의 의미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처했던 상황을 알게 되면, 그가 극복하려했고 문제, 그가 필생의 화두로 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이라는 문제가 무엇인지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태는 어떤 정황에서 처해있었기 때문에 새 율법이해를 가지고 (마 5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했는지 를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IV. 그리고 우리 현재 상황에 비추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 지를 찾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용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는 것은 공덕을 쌓으려고가 아닙니다. 부적처럼 늘 지니고 있거나, 하루에 몇 장씩 읽기만 하면 액이, 화가, 병마가 침입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현재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서 (새 천년을 눈 앞에 앞둔 이 시점, 남북의 통일이 아직 해결 되기 못한 채, 남쪽은 부의 불균형, 사회 전반에 걸쳐 공정한 룰의 부재, 정의의 상실, 부패와 이기심이 팽배하고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있고 북은 북대로 경직된 이데올로기, 극도의 비효율적인 통제경제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서 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빛과 소금의 역할의 하고 사는 것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아니면 어떤 개인적인 선택의 순간에 어느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 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서를 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라고, 이렇게 하라고 기계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서는 나의 특수한 경우를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을 예를 들어, 혹은 2000년 전 초대교회 때를 예로 들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였나를 말씀하십니다. 즉 성서가 쓰여진 상황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다릅니다. 그때의 문화나 풍습도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본처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갈을 후처로 택해서 자손을 취합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요즘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요즘 누가 주장하기를 "자기는 계시를 받았는데 자식을 재물로 바치라고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계시가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대로 돼지고기를 않먹는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비성서적으로 사는 이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바르게 성서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고전 14장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에 근거해서 요즈음 어느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아무 직분도 주지 않고 투표권이나 모든 것을 박탈한다면 이도 바른 성서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이미 여자 선지자,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이 너무 활발하여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차원으로까지 사건이 비화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전적으로 교회 내 모든 여인들의 언로, 권리를 박탈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석학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전체 성서의 정신이 무엇인 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파악한 성서의 정신에 비추어 그러면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일 지를 판단해야 (한 번 걸러서) 합니다. 성서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성서의 핵심을 뽑아내고 그 핵심과 원리에 비추어 내 상황, 나의 싯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가 혼자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고 판단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잘못 판단할 위험). 그러므로 성서는 함께 읽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모임을 통해). 함께 읽으면서 각자 처한 문제들, 상황들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이고, 다른 사람이 거기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지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 모임을 인도하는 목사님등 에게서 성서에 대해 배우고, 같이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고 관련된 주석책이나 신앙의 책을 찾아보고 하는 과정을 통할 때 지금 내 상황에서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즉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정검

1. 당신은 이전보다 주를 향해 더 갈급해 하고 있는가?(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2. 당신은 점점 더 사랑이 넘치고 있는가?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3. 당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주에 대하여 민감하고 존재를 명심하고 있는가?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4. 당신은 주의 말씀에 점점 더 따르게 되는가?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5.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이고 영적인 필요에 더욱 민감하게 되는가? (눅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6. 당신은 더욱 더 교회와 주의 나라에 대하여 염려하게 되는가? (엡 5:25)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7.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훈련은 더욱 더 당신에게 중요해지는가?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당신은 더욱 더 당신의 죄를 느끼는가?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 당신은 더욱 더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가?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0. 당신은 점점 더 천국과 주 예수와 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가? (빌 1:23˜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방인의 첫 열매를 드리고자 함입니다.

사도행전 20 : 1 ~ 16
* 여행경로 : 에베소->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헬라(고린도)->수리아 안디옥->마게도냐->드로아->앗소->미둘레네->기오->사모->밀레도->예루살렘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가 진정되자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예루살렘 여행을 급히 서두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인의 첫 열매를 드리고자 함입니다. 
바울이 굳이 보리의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오순절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하는 이유는 마치 농부가 한 해 농사의 첫 수확을 오순절 절기에 하나님께 드리듯이 이방인 사역의 열매들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역지에서 얻은 각 교회의 성도들을 선발하여 대동합니다. 4절에 나오는 7명의 동역자들이 그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데리고 감으로서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과 아울러 이방인 교회 역시 예루살렘 교회와 동등한 하나님의 교회임을 확증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이방인 성도들이 정성껏 모금한 구제헌금을 전달함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 성도들의 사랑도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방인 가운데 복음의 열매를 맺어 가는 일을 자기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도 함께 동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열매 맺고, 열매를 동역자와 함께 나누는 바울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실하는 이 계절에 수확의 기쁨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고난 중에 있는 이웃들이 없는 지 돌아보고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땅 끝까지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궁극적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였습니다(행 19:21).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심령이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자신을 통해 이방인들과 임금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던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 삶을 골똘히 집중하고 있었습니다(행 9:15).

그래서 잠시라도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자신의 갈 길을 서두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복음에 온전히 헌신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도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졸다가 3층 누각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린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과 바울 자신과 또 바울이 전파하는 말씀을 통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한 폭의 그림으로 선명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이리저리 핑계하며 지체하지 말고, 집중하여 서두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11/24/2011

모든 사람에겐 가정이 필요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1:20)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 중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보다 더 다양하게, 더 귀한 의미와 표현들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정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기관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하신 가족관계의 표현은 놀라운 하나님의 아이디어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가정을 이루라고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통해 기대하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을까요. 사람들은 세상에서 많은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안전지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가정입니다. 인생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저런 좌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특히 살아가면서 정서적인 아픔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화가 나고 외롭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서적인 시련 가운데 우리를 지켜줄 울타리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 아닐까요. 우리를 보호하는 기관으로서 가정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가정이 배움의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머니 품에서부터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의미에서 믿음의 가정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첫째는 관계입니다. 사람은 만나고 살아가기 때문에 관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치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격인데 그 역시 비언어적인 것입니다. 인격은 내면의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모습인데 아이들은 그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고 따라가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분은 신앙생활을 릴레이 경주에 비유합니다. 릴레이는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는 경기인데 우리는 그 중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신앙의 바통을 내 자녀에게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내 자녀는 또 그의 자녀에게 넘기는 것이죠. 가정은 가르치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세 번째 가정은 사역을 위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사역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역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걸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진짜 예배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어디서부터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가정에서부터입니다. 구제하는 부모 아래의 자녀 중 궁핍한 자를 본 일이 없습니다. 


가정은 안전가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남을 섬기는 것을 배웁니다. 가정을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11/17/2011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2)

세상에는 네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는 것 같다 하여 생선과 같은 만남,
처음에는 환하다가 곧 시들어지고 마는 꽃송이 같은 만남,
지워버리고 싶다 해서 지우개와 같은 만남,
힘들 때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이런 4종류의 만남이 아니라 거룩한 만남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빌립을 통해 거룩한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전도에 동작이 빨랐습니다. 26절 말씀을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그리고 빌립은 27절 말씀을 보면 “일어나 갔다”라고 말씀합니다. 30절을 보면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달려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신속하게 반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천사가 직접 가면 훨씬 효과적인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빌립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천사들은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기에 구원의 감격을 알 수 없습니다. 가슴 벅찬 그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전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가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가보면 가슴 벅찬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준비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빌립이 그렇게 달려갈 때 그곳에 사람이 있었고 그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이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입니다. 이 만남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능력의 말씀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 중 로마서의 네 구절을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39절을 보면 “둘이 물에서 올라올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은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빌립은 어땠습니까? 빌립은 주의 영에 이끌려 갔습니다. 내시는 기쁘게 자기 갈 길을 갔는데 빌립은 주의 영에 이끌리어 또 일하러 갔으니 섭섭했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주의 영이 이끌어 갔다”는 말씀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11/16/2011

우리 교회의 터전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5:1)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보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반석이 무엇인지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고 베드로를 교황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보게 되면 바로 이어지는 23절 말씀을 통해 해석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가 세워진 반석을 베드로로 본다면 사탄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이상한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이 교회가 세워진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틀리지 않지만 이 반석의 성경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베드로전서 2장 4절에서도 ‘산돌’이신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반석은 베드로도 신앙고백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해 신앙의 집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참된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된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음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중국에서 문화혁명 당시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당했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문화혁명 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이 혁명을 공산주의가 행한 실패의 산물이라고 평가하고 교회 문을 다시 열어주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과 핍박으로 인해 과연 교회에 누가 모이겠는가 생각했지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워 가십니다.
교회의 창립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세우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북극점에 18번째로 도달한 산악인 최종열씨는 북극점에 도착한 후 허무감과 허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내가 왜 3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혹독한 훈련으로 보내었는지 너무 허탈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한 산악인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이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도라 일컫는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키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앞으로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을 더 아름답게 세워 가실 분은 다른 그 어떠한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을 창조하신 우리의 가정을 지키시길 축원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11/15/2011

말씀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 : 8 ~ 20
마술과 우상, 향락의 도시인 에베소 복음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머뭇거림 없이 힘써 전도에 나섭니다. 바울의 에베소 복음화 전략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십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에서 바울은 복음에 대한 대적들의 극심한 반대와 핍박을 경험했습니다. 복음전파로 인한 핍박과 반대가 이제는 지긋지긋 할만도 한데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갑니다.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겠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당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3개월 동안 힘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무리들이 순종치 않고 비방하자 두란노 서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이번에는 강도를 더 높여서 무려 날마다, 2년 동안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그 결과 온 아시아가 주의 복음을 다 듣게 되었습니다. 이 곳이 안 들으면 저 곳으로, 이 방법이 안되면 저 방법으로 온갖 열정을 가지고 말씀으로 도전할 때 넘지 못할 산이 없습니다.
복음 전파의 힘든 장애를 만날 때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말씀에 대한 헌신의 정도를 더 높여 신앙의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거기서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포기하고 싶은 그 감정에 지지 말고 조금만 더 헌신의 강도를 높이고, 더욱 더 힘있게 전진해 나가기 바랍니다. 그 고비만 지나면 우리의 에베소가 활짝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너그러운 마음


사도행전21:17-26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해를 해소하기 위하여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대로 결례를 행하고 서원했던 자들의 머리를 깎는 비용을 부담하였습니다. 야고와 바울이 가진 선교정신은 무엇입니까? 


너그러운 마음 
사도 바울은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형제들의 환영을 받았고, 야고보를 예방하여 여러 장로들 앞에서 이방인 교보고를 함으로 지지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하지 말며, 규모(관습)를 지키지 말라고 가르쳐서 율법에 열심 있는 형제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야고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 사도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오해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로 발전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소한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종국에는 분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의 현명한 제안과 이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구원, 윤리)인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문화, 관습, 전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양보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마음의 선교정신이 있었습니다. 죽을 것도 각오하고 선교한다고 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사람을 얻고자 함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양보하고 순종한 야고보와 사도 바울에게는 사람을 얻고자 하는 선교정신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그들을 얻으려 했고(행 15:19~20), 사도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대로 율법에 대한 준수로 유대인들을 얻고자 했습니다(고전 9:19~20). 


오해나 갈등을 잘 해결하면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나 갈등이 생겼을 때에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상대를 이해함으로 양보하고, 때로는 상대의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순종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땅 위의 여러 규범과 조직들은 모두 사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막 2:27). 


사람이 여러 규범과 조직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규범과 조직을 위해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고, 사람의 할 도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복음전파는 사람을 얻고자 하는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일을 하고자 헌신합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로 인한 오해로 사람을 잃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싸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사탄의 공격에 대적해서 승리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탄과의 이 영적 싸움은 그리스도인의 숙명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다가 처절한 패배를 맛보면서 가정을 갈등과 고통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탄이 부부의 생각 속에 공격의 화살을 쏘아대면서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을 따라 상대 배우자를 대적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사탄은 부부사이의 갈등을 부채질하는가 하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들도록 부추깁니다. 직장상사가 특별한 이유 없이 부하직원을 괴롭히고, 범죄자들을 통해 삶에 공포와 아픔을 주는 일에도 관여합니다.
또한 인간의 평안과 기쁨을 공격해서 삶의 허무와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조장하지요. 그런가 하면 불신자들을 이용해서 그리스도인을 공격함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봉쇄해 버립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영적 싸움에서 사탄의 공격에 말씀으로 대적해서 승리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고통스럽습니까? 그렇다면 사탄의 유혹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삶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 결과 매일 경험하게 되는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를 통해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갓패밀리

11/14/2011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는 복음전파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는 복음전파[사도행전 24 : 10 ~ 27]

벨릭스는 천민 출신으로 총독의 지위까지 이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통치방식은 잔인했고, 한편으로 돈을 지극히 밝혔다고 합니다. 바울의 무죄를 알았지만 금방 풀어주지 않고 2년 가까이 구금해 둔 이유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욕심 때문에 그는 바울을 자주 찾아 만났습니다. 하지만 불순한 목적으로 자기를 찾는 벨릭스에게도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죄없는 자신을 감옥에 계속 가두어 두고, 돈만 챙기려는 벨릭스가 얄밉고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벨릭스를 바울은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만날 때마다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때와 장소, 상대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바울이 베푸는 복음 전파의 열정이 세계 제국 로마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열매 맺는 복음 전도자가 되고 싶다면 때와 장소, 사람을 따지지 말고 기회를 주실 때마다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함

사도행전 24 : 10 ~ 27
악명 높은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선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증거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바울과 같은 전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함 
바울은 먼저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는 고소에 대해서는 자기는 예루살렘에 예배 목적으로 올라 간지 12일밖에 되지 않았으며 소동은 커녕 아무하고도 변론조차 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둘째, 자신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그 글에 약속된바 하나님과 죽은 자의 부활을 그대로 믿는 사람으로서 결코 이단이 아님을 밝힙니다.

셋째, 자신은 성전의 결례를 따라 행하는 자로서 예루살렘 방문 목적이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지극히 우호적인 목적이지 결코 성전을 모독하고자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차분하고 합리적인 설명에 아무런 반론도 반대증거나 증인도 내놓지 못한 채 말없이 돌아서고 맙니다. 바울처럼 사람과 싸우지 않고 복음을 힘있게 전하는 사람이 되려면, 날마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복음의 비밀과 복음의 소망을 배워감으로 복음을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벧전3:15).

매번 적당히 핑계되며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복음의 소망에 날마다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될 때 힘있는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 위에 세워지는 교회와 가정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사32:17~18)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외에 또 다른 무엇이 교회에 필요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다른 무엇으로 우리의 영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소생할 수 있을까요?

각종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이벤트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교회 성장의 실제적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진짜 예수님만으로 모인 교회가 아니면 흩어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모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법은 복음주의적인 교회로 만들어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내적 성숙과 외적 성장을 위해 상고해봐야 하는 성경구절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도행전 20장 32절을 보면 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그것에 인도받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하고 성장하고 우리 교회가 더욱 복음주의적인 교회로 성숙하고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 속에 녹아 들어 갈 때 우리는 반드시 변화하게 됩니다.

둘째, 유다서 1장 20절에서 믿음이란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를 모두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개인적인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고린도전서 14장 12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서로 덕을 세워나가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복음주의적인 교회가 되려면 성도들 각자의 장점과 은사를 하나로 묶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덕을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자들을 계속해서 격려하시면서 그들을 세워나가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부활 후 다시 찾아 오셔서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도 그를 철저하게 다시 세우시기 위한 예수님의 격려였습니다.

넷째,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면 정말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신앙생활의 태도는 바로 ‘그러함에도’의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런 믿음의 자세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단순한 지식으로만 끝나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교만하여 다른 이들에게 상처만 주게 됩니다. 하지만 남을 판단하지 않는 사랑은 덕을 세우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로 선포된다면 교회는 반드시 외적으로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내적 성숙과 외적 성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내면의 은혜만을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세상 가운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도 동일합니다.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되지 않으면 아픔과 고통, 싸움과 다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우리의 가정 안에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이 우리의 가정을 다스리고 인도할 때 우리의 가정에는 큰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11/12/2011

강도 높은 헌신 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바울 주변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일할 때 쓰는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낫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바울은 알지만 스게와의 아들들은 모른다’ 하며 뛰어오른 귀신들에 혼비백산하고 혼나는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주 예수의 이름이 더욱 높이 드러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가치를 가진 부적과 마술 책들을 가져다가 자발적으로 불사르는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술의 도시 에베소에서 바울이 이루는 말씀 사역을 도우시기 위해 강력한 성령의 역사들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만 집중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도 더욱 강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 앞에 좌절하지 않고 말씀에 더 헌신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교회는 더욱 든든하게 세워져갈 것입니다. 말씀에 집중하고, 깨달은바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며, 그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닫혔던 복음의 문들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변치않는 마음을 굳게 하소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벧전3:11)

현대인들은 과거에 비해 의식주에 있어 비약적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 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불만족을 느낍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만족을 느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한 사람이 다윗일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고, 다른 여자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찾아온 것은 감사와 기쁨과 만족감이 아니라 다른 이상한 것들이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러한 다윗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죄였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빼앗았지만,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의 기쁨과 세상의 기쁨이 함께 발맞추어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세상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구원의 즐거움만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 즉 자유하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신이 자꾸 약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구한 것은 자유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로부터 나온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세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먼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둘째, 나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다윗의 이 깨달음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증거되는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첫째,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공간으로 볼 때,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상의 다른 것이 채워집니다. 그것은 콤플렉스입니다.
둘째, 속죄함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을 깨끗하게 지워달라고 기도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셋째는 성령께서 지배해 주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결론적으로 자원하는 심령입니다. 우리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근본이십니다. 이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변치 않는 마음을 굳게 하소서. 세상의 것은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믿기를 소망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11/11/2011

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사도행전 20 : 28 ~ 38
장로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가 당할 어려움에 대해 경고합니다. 교회를 흔들어 놓을 거짓선생들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명품에 짝퉁 모조품들이 생겨나듯이 교회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작품이기에 그 특별한 영광을 모방하기 위한 사단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흉악한 이리같은 거짓 선생들이 너희 가운데 들어올 것’을 경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작품이기에 밖으로는 흉악한 이리가, 안으로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그 보혈을 흘리시고, ‘성령’ 하나님이 그 가운데 친히 임재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작품이요, 불멸의 영광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세속적 관점이 아닌 그러한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허물 많고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머무는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섬길 수 있는 신앙공동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함께 할 믿음의 동역자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섬길 수 있는 건강 주신 것을 진정으로 감사하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은혜의 말씀을 붙잡고 양떼들을 돌아보라 
에베소 교회를 위협할 세력들의 특징은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듣기에 좋은 말로 말씀을 왜곡하며 성도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그들의 말에 속아 그들을 좇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면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동안 바울 사도가 눈물과 헌신으로 가르쳤던 훈계들을 의지적으로 기억하고 스스로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사도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시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거짓된 미혹의 말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가 보여준 믿음의 본을 따라 수고하여 섬기고, 나누며,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더욱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말씀대로 섬기며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마음을 다해 뜨겁게 울 정도로 사랑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고, 이 시대와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지우개와 용서

세계적인 발명품 전시회에 비행기, 자동차, 텔레비젼, 컴퓨터 이런 것들이 나왔는데 이런 것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세계적인 발명품에 뭐가 하나 나왔냐면 지우개가 나왔습니다.

지우개. 
우리가 볼 때 지우개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왜 지우개가 나왔느냐. 지우개가 있었기 때문에 작곡가는 5선지에 음악을 작곡하다가 틀리면 그 종이 전체를 찢어버리지 않고 지우개로 지워서 새로 할 수 있고, 데상을 하는 사람은 데상을 하다가 잘못 했으면 지우개로 지워서 새로 데상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문장이 틀리면 그 전체를 찢어버리지 않고 지우개로 지워서 새로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우개가 인류 문화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발명품 속에 지우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지우개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인데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의롭고 착한 일만 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그런 사람 제가 오늘 특별히 상을 줄 테니까 한번 손을 들어 보세요.

다 죄를 지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지우개인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가 바로 지우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늘 가정생활도 되고 형제간에 서로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살 수도 있고 이웃 간에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짐은 용서를 통해서 청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11/10/2011

주님, 우리에게도 정직함을...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2:22)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솔로몬에게도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잠언 30장의 아굴의 기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소원에서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도 천국에 대한 환상을 소개하며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보아서 솔로몬의 소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오늘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소원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피기 전 먼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회개합니다.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입니다.

둘째는 남을 원망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밧세바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범죄 가운데 상황을 비추어 밧세바를 원망하려고 했다면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밧세바를 한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남을 원망함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는 정직하지 못함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내 속에는 정직이 없지만 하나님께 정직함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의 이름이 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표현하는 많은 말 중에 다윗은 정직한 자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바로 다윗이 가진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블랙가비 목사님의 책 “영적 리더십”을 보면 성품이 리더십의 핵심인데 그 성품의 힘은 깨끗함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깨끗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 은 그릇 등 많은 그릇이 있지만 주인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넘어지는 경우가 등장합니다. 이 역시 정직을 잃어버리고 정결함을 잃어버릴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정직으로 채워져야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만일 비워지면 그 곳에 콤플렉스로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콤플렉스로 채워지지 않게 정직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정직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말은 세계를 반 바퀴 돈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살 긴 해야겠는데 생각하면서 미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적어도 오늘부터는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직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목동제일교회)

11/09/2011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고전14:33)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인인 존 번연 목사님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번연 목사님께 다가와 아무도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셨습니다. 왜 오셨냐고 묻는 간수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맙지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그 나라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이 감옥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간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셔서 목사님도 살고, 저도 살았습니다.
이제 저는 목사님께 아까와 같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절대 내 고집이나 방법대로가 아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세요.
양심에 비쳐오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세요.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선병문>

11/08/2011

사랑의 성질

바울이 고린도전서(13:4-7)에서 제시한 사랑의 15가지 성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참음- 해를 끼치는 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견디어 냄
온유함- 해를 끼치는 자에게 친절과 선을 베푸는 일
투기하지 않음-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고 기뻐함
자랑하지 않음- 자기를 드러내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
무례히 행치 않음- 함부로 하지 않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 상대를 대함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음-  자기의 것과 자기 의견만 고집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감정적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남의 잘못을 저주하거나 악한 감정을 품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불의와 불의한 일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함
진리와 함께 기뻐함- 진리 편에 서서 선한 방법으로 과감하게 투쟁함
모든 것을 참아줌-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것이 내게 미치는 해를 기꺼이 감수함
모든 것을 믿음- 상대가 실망스런 일을 해도 신뢰 관계를 유지함
모든 것을 바람- 상대가 성령 안에서 새롭고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을 믿어줌
모든 것을 견딤- 상대가 잘못을 해도 참고 인내함.

우리 목사님 내쫓기? - 5가지 아이디어

크리스천인 존 로버츠 칼럼니스트(저널-애드보킷)의 가장 인기있는 칼럼은 아이러니하게도‘우리 목사님 내쫓기?’였다. 인기 있는 이유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간추려 본다.

얼마전 나는 자기네 담임목사님을 내쫓으려 하고 있는 한 회중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슬프게도 이것은 오늘날 수많은 미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교인들은 목사님이나 교회의 일에 관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질 때 기도로써, 성경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편당을 가른다. 그래서 정말 불쾌한 일을 만들기에 충분한 숫자를 모으면 표결로써 담임목사를 내쫓는다.

이것은 그 담임목사에게 다가올 영향을 보더라도 마구 깨어질 관계와 목사가 떠난 뒤에도 두고두고 남아 치유를 기다려야 하는 깊은 상처를 보더라도 비극적인 불행이다. 솔직히 말해서,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담임목사를 내보내고 싶으면 표결이나 편당짓기보다는 다음 다섯 가지 아이디어중 하나를 시도해 보라.

아이디어 1:
주일예배 설교를 경청하고 노트를 하라. 담임목사의 눈을 직시하고 고개를 끄덕이며‘아멘!’을 외쳐대라. 설교로부터 얻은 교훈을 삶 속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노력을 하라. 신이 난 목사는 반년 정도 지나면 죽을 힘을 다할 정도로 설교할 것이다. 그러다 죽지 않겠는가?

아이디어 2:
목사님의 어깨를 두드려 주라. 한달 2-3회씩 그의 장점을 칭찬해 주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의 좋은 점을 널리 알려라. 얼마 안가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며, 따라서 부교역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면 담임목사는 조만간 떠나도 되지 않겠는가?

아이디어 3:
주일예배때 설교 후 헌신자를 초청할때 강단 앞으로 나가서 그리스도께 삶을 바쳐라. 그런 다음 몇주 후 담임목사와 시간을 약속하여 교회 내 일자리를 요청하라. 특히 잃은 영혼들을 방문하여 그리스도께 이끌라. 아마도 당신에게 전혀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담임목사가 충격으로 기절하거나 심장마비로 쓰러지지 않을까?

아이디어 4:
두문불출하는 사람들과 노령층 교우들을 방문하기 위한 사역체를 구성하여(참고: 행 6:1-7) 담임목회자를 격려하여(행6:1-7) 그로 하여금 좀 더 많은 시간을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설교준비에 바치게 한다. “만약 목사님께서 설교에 충분히 신경쓰신다면 제가 과부들을 돌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라. 그는 온 회중이다 미친 줄로 알고 즉시 딴 교회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이디어 5:
상당수의 교우들을 모아 중보기팀을 엮고 담임목사의 사역과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라. 교회성장과 담임목사를 그리워하고 그를 위한 중보기도 모임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교회가 대거 성장하면서 좀 큰 딴 교회에서 기꺼이 그를 스카웃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 중 하나를 시도하다 보면 결국 그분을 내쫓고 싶지 않게 될 것이다.

출처:크리스찬투데이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입니다


사도행전19:21-41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의 복음이 힘있게 들어가서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자 에베소 사람들은 엄청난 영적 경제적 충격을 받고 소동을 일으킵니다. 이 소동 속에서 나타나는 우상 숭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입니다. 
에베소는 풍요의 여신 아데미를 섬기는 거대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길이 115m, 폭 55m의 터 위에 높이 19m의 대리석 원주 127개로 이루어진 초대형 신전이었습니다. 축제 때마다 사람들은 이 신전에서 엄청난 술판과 성적 타락을 일삼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신전 모형과 아데미 신상을 팔아서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아데미 신전은 거대하고, 아데미 여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과 성적 만족, 경제적 이익을 주었지만 참 신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복음 앞에서 침묵하며 무력하게 에베소를 주님께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데메드리오 일당이 소동을 일으킨 것도 아데미를 독실하게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입이 줄어든 것에 대한 항의일 뿐이었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자신의 유흥과 쾌락,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헛된 만족을 위해 내가 만든 썩은 나무 지팡이 같은 무력한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물질적 풍요나 육체적 쾌락이 줄 수 없는 말할 수 없이 신령한 기쁨을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헛된 습관일 뿐입니다. 
데메드리오에게 선동된 사람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큰소리로 외치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하였습니다. 두 시간 동안이나 소리친다는 것은 보통 열정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로운 서기장이 제지하기까지 왜 자기들이 소리를 지르는지 그 까닭도 모르는 채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을 따라 여기 저기 몰려다니며 사람들이 하는 데로 소리를 지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의 모습은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세속적 삶의 허망함을 잘 보여 줍니다. 


말씀의 비전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젖어 사람들의 유행과 습관을 좇아 허망한 것의 종이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진리는 결코 다수결이 아님을 명심함으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 거룩함의 새 사람을 새롭게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바울과 같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11/06/2011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말씀을 채우고 기도하라!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말씀을 채우고 기도하라!

우리가 질병을 치유하기에 앞서서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의 태도가 바뀌는 것이 먼저입니다.
말씀을 붙들 때 우리 영, 혼, 육의 면역체계도 높아질 것입니다.
이에 우리의 영, 혼, 육의 면역체계를 높이는 말씀들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회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함께 드리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참고구절:누가복음 14장12-24절

하나님의 잔치로의 초청, 복음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눅14:16)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변명을 가지고, 초청을 거절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으로 둔 행동이다.

"종이 돌아와 주인이 노하여(눅14:21)"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은 이 초청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리가 있나이다"
천국에는 여전히, 아직 자리가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는 천구, 너는 지옥'을 가야 할 사람이라고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초청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집, 천국이 가득 차길 원하신다. 모두가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누구든지 이 복음의 초청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열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복음의 초청장이 더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 메시지여야 한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가?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자 알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가장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당신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라.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하심.

[사도행전21:27-22:1]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생명을 잃을 뻔 하였고 로마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천부장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심.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동원된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폭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치안유지를 위해 출동한 로마군대에 의해 폭도들로부터 격리됨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경고하신대로 예루살렘에는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죽을 각오로 예루살렘에 왔지만 주님을 위한 헌신이, 그러한 각오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결박과 환난은 순식간에 닥쳐왔습니다.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아 죽을 위기 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로마군대를 동원하셔서 그의 생명을 지켜 주셨고 신변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단은 부화뇌동하는 유대인들을 동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최정예 로마군대를 동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한 헌신과 각오로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가며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우십니다. 헌신과 각오의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크고 비밀한 일들의 경험은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늘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하심. 
유대인들의 폭행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던 사도 바울은 로마군대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지 이 순간을 복음 전할 기회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천부장의 심문을 받다가 자신은 불순분자가 아니라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라고 밝히며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천부장은 이를 허락했고 사도 바울은 로마군대의 보호가운데서 층대 위에 올라 백성에게 손짓하며 히브리말로 자신을 변호하는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에 처했던 사도 바울에게 오히려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고난의 때를 바꾸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을 위한 헌신을 포기하거나 각오를 잊어버리고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도우십니다. 특별히 고난이 예상되는 곳에서 수고하고 애쓰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이 예상되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면 용기를 내어 가십시오. 사명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복음의 열매를 허락하시며 매사에 전폭적으로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

11/05/2011

교회를 복음위에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19:1-7
* 에베소(1절) :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아시아 주의 수도. 소아시아 전체의 중심지이며 사업과 정치와 종교적 중심지. 황제숭배를 위해 바쳐진 3개의 신전들이 있으며 인구는 50만명.
* 두란노 서원(9절) : 헬라인의 철학 강당, 뜨거운 낮시간(오전11시~오후4시)의 강의가 없는 시간에 빌려 쓴 듯함.

바울의 전도여행이 계속 이어집니다. 전도 여행을 쉼없이 이어가는 바울의 진정한 여행 목적이 무엇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교회를 복음위에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친 지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3차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18: 23). 갈라디아, 브루기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의 대적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던 어린 교회들과 신자들을 말씀으로 굳게 세웠습니다. 특히 에베소에서는 스스로 믿는 제자라고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도 복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말씀으로 가르쳐 세웁니다. 바울의 최대관심은 자신의 성장이나 휴식, 명성이나 안위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그의 관심은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 교회를 복음 위에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명한 삶의 초점을 가진 바울을 축복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만 초점 맞추지 말고,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복음을 배우고, 깨닫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세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자 애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목해 보시고, 축복해 주시며, 높여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바울을 세우십니다. 
에베소에서 만난 요한의 제자들은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성령의 역사도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여 기도도 해 주었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비로소 참된 믿음을 가진 제자가 되었다는 가시적인 징표인 동시에 사도 바울을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베드로를 통해서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한 것처럼 바울을 통해서도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게 하심으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의 사도권을 더욱 든든하게 세워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선교 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뿐아니라 바울 자신도 더욱 견고하게 세워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섬기는 사람도 든든하게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생명력있는 삶을 살려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역사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섬길 때 먼저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교회도 더욱 든든히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

거울 속의 나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31:15)

옛날 어떤 왕이 매일 여러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눈부신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뽐냈습니다백성은 어떻게 살든지 왕은 자기만을 생각했습니다.
어느  그의 시종이 왕이 매일 들여다보던 거울을 치워버렸습니다.
다음날 왕이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거울을 찾았으나 거울은 보이지 않고거울이 있던 자리의 창문을 통해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을   있었습니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지치고 굶주린 모습이었습니다.

창백한 여인과 굶주린 아이를 보았고먹을 것을 찾으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과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들도   있었습니다그제 서야 왕은 자기의 화려한 의복을 벗어버리고 평민들이 입는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그리고 백성들 가운데로 나아가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관심을 쏟고 있는 동안은  무엇도  수가 없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사람에게는 언제까지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자신만을 보느라 정신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만 보고 있을 때는 예수님도 이웃도 결코  수가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오늘의 Daily Bread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1/03/2011

100가지 회개기도 제목: "부흥을 사모하는 세대여, 일어나라!"

Again 1907 평양 대부흥
개인,가정,나라,민족,교회,북한,세계를 위한 100가지 회개기도 제목
"부흥을 사모하는 세대여, 일어나라!"

개 인 
01. 성장과 변화, 열정이 사라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회개합니다.
02.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으면서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03. 영적인 하루살이임을 잊고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의지했음을 회개합니다.
04.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매여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05.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06.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자존감대신 비교의식에 빠졌던 것을 회개합니다.
07.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No'라고 하면서, 내 뜻에 대해서는 'Yes'였음을 회개합니다.
08.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위탁받은 시간과 물질, 지식과 재능 및 은사를 잘 관리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09. 땀 흘려 수고해 얻은 근로소득보다 불로소득에 관심 기울였음을 회개합니다.
10. 영적인 성공보다 세상적인 성공에 집착했음을 회개합니다.
11.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하나님보다 현실의 상황과 여건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12. 문제의식 없이 영적 자만과 안일에 빠져 영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13. 형제 자매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14.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주님이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판단했음을 회개합니다.
15. 상대방의 필요와 어려움을 알고도 사랑으로 돌아보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16.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로서 정작 다른 사람은 용서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17.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따라 행동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18.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분의식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19. 내 인생의 주도권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맡기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20.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가정 
21. 자녀들에게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본을 보이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22. 자녀들의 경건 훈련과 영적 성숙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회피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23. 자녀를 기도의 무릎으로 키우기보다 내 힘으로 키우려 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24. 자녀들을 하나님을 아는 세대, 은혜를 아는 세대로 양육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25.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앞세웠던 세속적
       가치관을 회개합니다.
26.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환상과 꿈, 시대를 향한 야성과 도전의식을 심어주지 못했음을 회개
      합니다.
27. 학교폭력, 자살, 왕따 등으로 심한 혼돈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했음을 회개합니다.
28.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고 함부로 대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29. 배우자에게 신의와 정절을 지키는 것을 가볍게 여겼음을 회개합니다.
30. 크리스천 가정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경건한 자손의 씨를 일으키지 못한 이기심을 회개합
      니다.

나라
31. 나라의 모든 책임을 대통령과 정치권에 맡기고 기도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32. 한 나라의 일원으로서 단결과 통합의 동참자로 서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의 동조자로 섰음
      을 회개합니다.
33. 참교육의 부재를 탓하며 참교육의 실현에 방관했던 태도를 회개합니다.
34. 능력보다 혈연(血緣)과 지연(地緣)에 매여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35.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이념간에 하나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36. 정직과 신용, 균형과 질서가 땅에 떨어진 사회의 총체적인 아픔을 회개합니다.
37. 정직하고 성실한 자가 오히려 대접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회개합니다.
38. 사회 전반에 걸쳐 자행되는 각종 불법과 비리로 도덕적 자정능력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회개합니다.
39. 온 오프 라인을 막론하고 독버섯처럼 범람하는 음란 문화에 동조, 방치한 죄를 회개합니다.
40.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관심 밖의 일로 여기며 홀대했음을 회개합니다.
41.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비방 문화를 회개합니다.
42. 크리스천 고품격 문화의 주체자가 되지 못하고 세속 문화의 추종자로 이끌렸던 모습을 회
      개합니다.
43. 자살과 낙태, 인간복제 등 생명경시 풍조와 이로 인한 온갖 범죄를 묵인한 죄를 회개합니다.
44. 욕심과 폭력, 편법과 불의, 기만과 갈취로 얼룩진 이 나라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45. 사치와 낭비로 얼룩진 관혼상제를 회개합니다.
46. 장기적인 투자보다 단기적인 투기에 밝았음을 회개합니다.
47. 모든 경제주체가 내 몫을 챙기기 전에 내 몫을 함께 나눔으로 상생의 모범을 보여 주지 못했
      음을 회개합니다.
48. 정치계, 사회계, 노동계, 교육계를 떠나지 않는 이권 다툼과 각종 파행을 회개합니다.
49. 하나님의 법을 구현한 정의로운 토지제도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보다 부동산 투기 및 토지
      불로소득에 마음을 쏟았음을 회개합니다.
50.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자유와 진리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함
      께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민족 
51. 부흥의 전기를 이룬 평양대부흥을 통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음에도 그 은혜를 계승하
       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52. 구국제단을 통해 이 민족을 지탱한 신앙역사를 가졌음에도 오늘날 기도하기를 쉬었던 죄를
       회개합니다.
53.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아야 할 우리 민족이 오히려 자국민 안에서조차 상대방이 잘되는 것
      을 축복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54.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행했던 조상들의 죄를 회개합니다.
55. 하나님의 얼굴과 음성을 구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술취함과 방탕, 탐욕과 게으름에 빠
      져있던 한민족의 죄를 회개합니다.
56.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학벌숭배,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57. 과거 한민족끼리 서로 총칼을 겨루며 증오하고 피흘렸던 죄를 회개합니다.
58. 지정학적 위치 상 '나봇의 포도원'과도 같은 우리 민족이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반목, 질시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59. 쇄국정책으로 초기 기독교를 박해하여 복음의 진보를 막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60. 사망의 그늘에 앉은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복음들고 달려온 선교사들을 도리어 핍박했
      던 영적무지를 회개합니다.

교회
61.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도덕적 주도권 회복의 선두에 서지 못
      했음을 회개합니다.
62. 여러가지 하나님의 경고를 보면서도 교회가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기도의 제물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63. 영혼 구원과 부흥의 회복을 위해 교회가 산고의 고통과 수고를 감내하지 못했음을 회개합
      니다.
64. 한국 교회가 민족을 위한 기도의 함대를 띄우고 문제해결의 대안을 제시하는 중심축의 역
      할을 온전히 감당치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65. 각종 사회비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가리운 죄를 회개
      합니다.
66.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향해 사랑의 대계명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67.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고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을 통해 민족 앞에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68.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본을 보이지 못했음
      을 회개합니다.
69. 교단간의 분열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몸을 나눈 채 안
      주했음을 회개합니다.
70.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한채 생명과 순결의 능력이 약화되었음을 회개합니다.
71. 교회가 외적 성장에만 치우친 나머지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합니다.
72. 복음을 통해 '왕의 위엄'과 '제사장의 거룩함'과 '선지자의 정의'를 보여주지 못했음을 회개합
      니다.
73.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참여하여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합니다.
74. 해방을 주신 한 분 하나님을 잊고, 교단적 분열 속에서 민족을 찢었던 분열의 죄를 회개합니
      다.
75. 독재정권시절 정의 앞에 서기보다 권력층과 결탁하며 명맥을 유지해온 반민족적인 굴절의
      역사를 회개합니다.

북한
76. 전 세계 가장 박해를 받고 있는 북한 땅이 동방의 예루살렘이 되는 꿈을 갖지 못했음을 회개
      합니다.
77.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내 자녀같이 끌어안고 기도하지 못했음을 회
      개합니다.
78.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이는 650만 명의 북한 동포들을 외면한 채 사치와 풍요로운 삶에 만족
      했음을 회개합니다.
79. 중국 땅에 유리방황하는 30만 이상의 탈북자들을 복음화시켜 그들을 통해 북한 선교의 기
      회로 삼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80. 박해속에서 신앙을 지켜오고 있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을 위해 동포애를 가지고 기도에
      힘쓰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81. 10만의 기독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수용소에 갇혀 참혹한 생활을 하는데도 무사안일(無事安
      逸)주의로 방관했음을 회개합니다.
82.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북한의 지도층이 맥없이 무릎 꿇고 역사의 물줄기가 새롭게 될 것을
       선포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83. 핵무기를 개발하는 북한을 적으로만 인식하였지 사랑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합니다.
84. 해방 전에 있었던 3,040여개의 북한 교회가 다 무너져 훼파되었음에도 회복을 위해 간구하
      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85. 오랜 황무한 북한 땅에 부흥과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품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세계
86. 골방에서 열방을 향한 기도로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열심을 품지 못했음을 회
      개합니다.
87. 한국교회에 부으신 축복과 은혜를 열방을 향해 베풀고 나누는 데 부족했음을 회개합니다.
88. 전 세계적으로 천재지변을 통한 이상징후로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음을 경고하심에도 깨닫
       지 못하고 망령되이 행했음을 회개합니다.
89. 전 세계 200여 국가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날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음을 회
      개합니다.
90. 6,809개의 전 세계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그 날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91. 사랑의교회 138가정 245명의 동역선교사 가정과 사역을 위해 더 열심으로 기도하지 못했음
      을 회개합니다.
92. 기독교의 박해와 핍박 아래 있는 전 세계 74개국의 고통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무관심을 회
      개합니다.
93. 전 세계 미전도종족의 90%이상이 살고 있는 10/40창 지역과 동북아를 향해 거룩한 선교적
     부담감을 갖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94. 21세기를 선교한국으로 이끌어갈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한 것을 회개
      합니다.
95. 세계선교의 잠재력을 지닌 전 세계 180여개국에 퍼져있는 650여만의 한인 디아스포라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기타
96. 나 자신과 가정, 교회가 회개와 부흥에 관심이 없었음을 회개합니다.
97. 나 자신과 가정, 교회가 방황하는 세대를 제대로 일깨우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98. 나 자신과 가정, 교회를 성령님께 100% 맡기고 신뢰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99. 나 자신과 가정, 교회가 대 사회적으로 도덕적 주도권을 잃었음을 회개합니다.
100.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 땅에 부흥을 주옵소서!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
       고 기도하오니 2007년에 평양대부흥의 역사적 새 날을 펼치소서!

출처/부흥을 위한 연합기도운동

누가 진정한 스승인가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11:14)



햇병아리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가  연주회를 가졌던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왜냐하면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인 카잘스가 청중석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세상원리라는 것이 원래   하려고 하면  틀리기 쉬운 법이지요.
그날의 연주 또한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데 신기한 사실은 연주회가 끝나자 카잘스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피아티고르스키는 카잘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입어 마침내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뒷날 서로 허물이 없는 사이가  피아티고르스키에게 카잘스는그때 당신은 이렇게 첼로를 잡고 이렇게 활을 놀려 바로 이런 음을  적이 있었소나는 당신의 연주를 통해서 음을 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박수를 쳤던 거요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나에게 가르침을  사람은  스승으로 생각한다오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스승같이 생각하고 도왔던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부흥의 경험은 겸손한 마음으로 배울  찾아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있는 사람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겸손한 마음의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우리는 항상 배우려는 부지런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비로소 진정한 스승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Daily Bread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