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2010

영적 지도자의 범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 – 릭 조이너

20세기에 공공연히 성직을 빼앗긴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에서 범한 것만큼의 죄를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간음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덮기 위해서 자신의 충실한 신복을 살해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다윗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몄을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했을 것입니다. (삼하 15:13)
 
그런 행위를 자행한 후에도 어떻게 다윗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다윗에게서 기름부음을 거두어 가신 적이 없습니다. 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사독은 기름부음이 아직도 다윗의 위에 있음을 인정했고 그래서 그에 대해 계속 신실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독을 축복하셨고 그의 아들들이 항상 주님 앞에서 그분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독의 분별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죄는 주님을 깜짝 놀라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다윗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이 악이 다윗의 마음 속에 있으며 적당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타락 전에도 또 후에도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의 가장 위대한 시편들은 그의 타락 이후에 쓰여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는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자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영적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불가해한 증거들 중 하나는 주님이 실제로 다윗과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에게 기름부으시고 그를 왕위의 계승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로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간음과 심지어 살인까지도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와 구원의 마음의 또 다른 계시일 뿐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우리의 가장 나쁜 실수들까지도 취하셔서 그것들을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솔로몬을 선택하신 것이 놀라운 일인 것처럼 그분이 아담의 자손들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심지어 우리들 중에 그분의 거처를 두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걸려 넘어졌던 지도자들 중 어떤 이들은 다시 일어 설 것입니다. 사실 그들 중 일부는 오히려 더욱 위대한 영적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정말로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까지도 속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더 큰 은혜가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죄를 지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바울은 그런 어리석음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여 함이니라 ( 6:1-4)
 
회개 때문에 다윗은 회복되었고 성령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여전히 적용되었고 다윗은 이 죄 때문에 큰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가정은 다시는 평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죄가 그의 자녀들에게 되물림되었습니다. 은혜를 넘치게 하려고 죄를 짓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10:29) 일이고 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천박하고 덧없는 즐거움 때문에 후퇴하는 일입니다.
 
비록 다윗의 죄가 그 자신의 가정에 비극의 씨를 뿌려 놓았지만 주님은 다윗의 왕위를 완전하게 보존하셔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다윗의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윗의 그의 전임자 사울에게 그토록 많은 은혜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다윗에게 그토록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사울 왕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신 후 그가 다윗에 대해 가장 잔학한 행위들을 자행했을 때에도 다윗은 그를 대적하기 위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삼상 24:6)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실수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이었든 주님이 그를 권위의 자리에 앉히셨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사울을 거두어 가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패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을 교정하려는 자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방패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알려진 죄가 계속 되도록 하고 그것을 범한 자들이 계속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도록 우리가 허용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가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되려면 남을 교정하는데 대한 성경의 지시를 조심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 18:15-17)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실수에 대해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영적 영웅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에 있어서 잔인할 정도로 정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그들을 벌하고 굴욕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들 뒤에 올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것들은 구설수에 오를만한 행위들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되었거나 심지어는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단지 죄인들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 6:1) 만약 우리가 올바른 정신으로 교정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일한 유혹들과 죄악에 대해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밖게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름부음을 받았든 혹은 어떤 죄들을 과거에 물리쳤든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만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자신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 속으로 빠져 버릴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에서/릭 조이너>

예수님의 일을 하기 [바비 코너]

성령의 기름부음은 단지 우리를 흥분되고 기분좋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더 큰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한복음14:12).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권능 가운데 행할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하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단지 머리로 지적인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으로 그분과 동행하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로 , 저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권능 가운데 역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기름부음을 주지 않고는 그 어떤 임무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절대로 임무를 완수할 능력을 부어 주지 않으신 채 어떤 일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주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하려 한다면 그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몇 가지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자, 귀신 들린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태복음 4:23-24).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일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르침 *설교 *치유 *축사.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계속 연약함 가운데 사는 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그들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약하고 권능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려는, 사단의 계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계속 고백해야 합니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찌어다”(요엘 3:10).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채움을 얻고...”(미가3:8). 스스로를 무능하고 연약하게 본다면 사단도 여러분을 바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수기13:33).

성령님은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사실 성령님과 하나님의 권능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갖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을 받지 않고 권능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단순히 어떤 부드러운 분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성령님은 실제로 권능과 권세로 가득한 분입니다. 교회가 강력한 표적과 기사 가운데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확증하기 위한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마가복음16:15-20)

신약의 설교의 원형은 강력한 표적과 기사가 동반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로마서15:18-19).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고전11:1). ‘본받다 (follow)라는 말은 영어 단어 따라하다(mime)’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어 흉내내다 (mimic)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을 드린 위대한 모델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바울이 그의 메시지와 사역에 대해 어떻게 말씀했는지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길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진도전서 2:1-5).

나타남(demonstration)’은 전시하거나 실제로 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젊은 세대가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복음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시편110:3).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나타남이 나타나야 합니다. 단지 에 영향을 주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을 움직이셔야 합니다. 실질적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담대한 설교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의 첫 번째 오순절 설교를 했는지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전2:37-4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의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죄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구하게 되었습니다. 회개할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설교의 원형입니다. 회개를 촉구한 그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해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꾜 하거늘”(사도행전2:22-37).

베드로는 그 시대의 종교적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사랑과 담대함을 통한 설교로 선포되어 질때에만 사람들이 심령은 회개를 갈망하도록 찔림 받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는 사단의 심각한 덫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29:25). 바울 역시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이에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1:6-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죄의 유혹에 대해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이사야55:7). 많은 설교자들이 두 가지의 악한 영, 정치적인 영(political spirit)’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영(man-pleasing spirit)’ 때문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 조롱하는 회의적인 세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세례 요한과 같은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으니라.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이 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그는 성경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사’(마태복음3:1-12).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 중에서 성령님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불의 세례에 관한 부분은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불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역자주: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세상의 쓰레기를 불태우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단지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로운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너그러운 자비의 하나님은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거룩한 말씀에 계시된 대로 담대히 주님을 전할 때에만 우리의 설교에서 성령의 증거를 나타내어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나.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브리서2:1-4).

이 말씀은 신약 교회에 처음 선포된 설교의 원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한 목사인 친구가 이런 근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않고, 단지 성령님이 예배 가운데 자연스럽게 역사하시도록 허락한 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결코 예상할 수 없을 걸세.” 저는 단도직업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아 적정 말게나. 한 가지 확실히 일어날 일이 있네. 주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걸세!”

<전진하라/바비 코너>

교만으로부터의 해방 – 바비 코너

우리가 교만에서 더 자유해지고 영적으로 더 성숙해 질 수록 우리는 다른 교회들을 판단하라고 부르심 받은 자들이 아니라 생명을 다해 그들을 섬기라고 부르심 받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는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회복기와 많이 유사합니다.  그 당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감독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 건축 도구를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들도록 지시했습니다. 만약 성벽의 한 구역이 공격을 당하면 나팔을 울려 모든 유대인들이 그 지역에 지키기 위해 다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최근 우리 사역 킴이 미주리 주 브랜슨(Branson)의 예언적인 집회에서 사역했는데,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자인 필 드리스콜(Phil Driscol)의 전화를 받고 놀랐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사역하기 위해 집회에 와서 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회동안 필(Phil)은 쇼우퍼(Shofar, 뿔피리)를 불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분위기로 사람들을 압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왜 그를 이 집회에 데리고 왔는지 아느냐?” 저는 아니요, 주님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느헤미야 때와 같이 일꾼들이 너무 성벽 위에 흩어져 있다. 나는 한 예언적인 나팔을 불어 일꾼들이 모이도록 알리기 원한다.” 우리가 조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적이 각 교회를 패배시킬 수 있었습니다. 각 교회의 다른 사람들은 전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가 정기적으로 연합 예배로 함께 모이기 시작한다면 훨씬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시 규모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도시 크기의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도시 전체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인다면 얼마나 압도적인 권능을 가져오겠습니까.

전체 교회는 죽었고 우리만 홀로 남았다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엘리야가 이같이 한탄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직 신실한 7,000명이 있다고 보증하셨습니다.

에스겔도 역시 홀로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른 뼈 계곡으로 데리고 가셔서 대언하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뼈들이 모인 후에 생기가 들어가니 극히 큰 군대”(에스겔 37:10)로 변하였습니다. 적절한 때가 왔을 때 예언적인 음성이 얼마나 빠르게 하나님의 군대의 소집을 명하는지 우리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극히 큰 군대(a exceedingly great Army)’ 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도시의 견고한 진을 무너드리려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효과적인 영적 전쟁을 위해 기름 부으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역 교회의 영적 죽음의 상태를 볼 수 있는 예언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지금 시간 하나님의 군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이런 영적 세계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는 계시의 기름부음을 받은 중보 기도자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를 위한 기도의 날이나 지역을 위한 기도의 주간(weeks) 을 정할 수 있습니다. 특정 지역이 변화하도록 기도하기 위해 수만 명을 소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 교회가 다툼의 영에 속박되어 있고 분열되어 있다면 사단이 그 힘을 잃게 되어 도망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진하라/바비 코너/큰믿음출판사>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해 증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천사는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너무 편협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멋지게 전해야만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도울 때 당신 자신이 그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당신을 사랑하듯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높임을 받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로로 써주셔서 나타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하나의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그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며 복음을 증거하거나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거하는 메신저가 되기보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메시지 자체가 되어야합니다.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기 위해서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아둘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실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으로 나아가면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나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면 하늘나라에 보물이 쌓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하늘나라의 책에 우리의 상급이 가득 기록되도록 힘씁시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나아갑시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분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주님의 사랑으로 행한 모든 일이 하늘 나라에 차곡 차곡 쌓입니다.

마태복음 25 35~40절에서 예수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바로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우울해 있는 사람을 찾아가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도 포함되고 병약한 엄마를 위해서 어린 아기를 돌보아 주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비록 피곤한 가운데서도 "저는 당신과 함께 이 짐을 함께 지고자 합니다" 라고 말하며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한다면 그것이 곧 주님께 하는 일이 되고 하늘 나라에 쌓이게 됩니다.

우리가 자존감을 잃어버려서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데에 도움을 줌으로써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드러낼수 있는 통로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함이나 지혜나 능력이나 다른 어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사랑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로지 영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에 어떤 것을 말하는 일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물질적인 필요나 육체적인 필요 혹은 감정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 모두에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제 사무실에 왔는데 그는 제가 아주 싫어하는 동성연애자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과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에서 벗어나고자 기도를 받거나 축사를 받아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배가 고팠고, 당장 먹을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와 그 사람 자체를 별개로 보셨기 때문에 그의 절박한 상황을 도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제게서 악한 마음이 벗겨졌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배고픈 그에게 먹을 것을 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 때문에 힘들었지만 이 말씀대로 그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굶주리고 있다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 더 굶주린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도 떠올라 제가 갈등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당신이 어떤 삶을 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몹시 굶주린 상태이시네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배고픔을 채워주기 원하시기에 저도 당신의 필요롤 채워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저는 물론 어떤 상급을 기대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지만 분명 저의 그 선행이 하늘나라에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 성령께서 운행하심을 느낀다면 당신 안에 사랑을 부어 주실것이고 그것이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갈라디아서 5:22~23)

이 모든 특성은 사람들이 맺어야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오늘날에는 주님을 대신하여 사랑을 나타낼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나아가기 원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병든 자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거나 그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반드시 하늘에 기록됩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고아나 과부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아나 과부를 돕는 것이 참되고 순수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이것만이 영원히 남아 하늘나라에 쌓이는 것이다 ."

(중간  생략)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통로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한 가지를 더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진정한 갈망과 바라는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58장에서 나와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이사야 58장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한 그대로 이사야 58장에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나와 있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하며 네 뼈를 견고케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같은 것이라" (이사야 58:6~11)

이 말씀에 나오는 대로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여러분 속에 살아있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도 채워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다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게 될때 하나님은 하늘의 책에 그런 행위들을 모두 기록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고맙다! "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것이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정말로 고맙구나."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다/롤랜드 벅>

나의 임재의 실상으로부터 판단해야 한다 – 릭 조이너

있는 자
" 지금 너는 나를 심판의 주로 알고 있지만, 너는 또한 나를 안식일의 주로 보아야 한다. 나는 그 두 가지에 다 해당된다. 너는 나를 천군의 주로 알고 나의 군사들을 보아야하며, 너는 또한 나를 평강의 왕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유대 민족의 사자(Lion of Judah)이고, 나는 또한 어린 양이다. 나의 지혜를 아는 것은 또한 나의 때를 아는 것이다. 내가 어린 양으로 오기 원할 때 나를 사자라고 선포한다면 네가 지혜 안에서 행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만군의 주 ()인 나를 따라 어떻게 싸울지를 알아야 하며, 너는 안식일의 주인 나와 함께 앉을 때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때를 알아야 하고, 나의 때를 알기 위해서는 나와 가까이 해야 한다."

"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고 나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은, 그들이 갈수록 더 나의 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일들을 하며, 잘못된 말씀을 전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들은 심어야 할때에 거두려 할 것이며 거둬야 할 때에 심으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다. "

" 내 이름은 ' 전에 있던' 이 아니고,  ' 앞으로 있을' 도 아닌  ' 지금 있는' 자이다. 진실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알아야 한다. 네가 매일 내게로 오지 않는 한 지금의 나를 알 길이 없다. 네가 내 안에 거하지 않는 한 지금의 나를 알 수 없다. "

" 이 곳에서 너는 나의 심판을 맛보았다. 너는 이제 다른 길을 통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는 영원 안에 들어와 살기 전에는 지금의 나를 충분히 알 수 없다. 이 곳에서는 나의 여러 다른 모습이 완전하게 하나로 맞추어지지만, 네가  시간 안에 있을 때에는 그런 모습들을 보기 어렵다. 이 심판대는 나의 한 부분의 모습만을 이 세상에 보일 것이다. 그 부분은 네가 전할 메시지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나 결코 메시지의 전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도시에는 내가 심판을 내리겠지만  다른 도시에는 자비를 베풀기도 할 것이다. 어떤 나라에는 기근을 주겠지만 다른 나라에는 풍요함을 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알기 위해서는 너는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의 임재의  실상으로부터 판단해야 한다. "

" 지금 다가오고 있는 시대에서는, 내게 대한 너의 사랑이 견고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식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곧 생명이다. 내게 가까이 있지 않으면, 너는 네 안에 있는 생명을 잃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빛이다. 내게 가까이 있지 않으면 네 마음은 어두워질 것이다. "

" 이 모든 것들은 네가 생각으로 알아 왔고 네가 가르쳐 왔다. 이제는 이것들을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알아야 하고, 삶으로 행해야 한다. 생명의 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 지혜는 네 생각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네 마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지혜는 생각과 마음의 완전한 하나가 됨이다. 사람이 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마음은 나를 떠나서는 결코 일치할 수가 없다. 내 생각과 마음이 일치할 때 내가 내 권세를 네게 줄 수 있게 된다. 그 때 너는 네가 행할 일을 구할 것이요, 네가 나와 하나이므로 내가 그 일을 행할 것이다. "

" 네가 부름 받은 시대가 어려운 때이므로, 네 지정된 심판의 때보다 앞서 내 심판의 보좌를 볼 수 있도록 네게 허락한 것이다. 이제 네 기도가 응답되었다. 네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네가 그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던 동안 나는 내가 네 삶 속에 일어나도록 한 모든 일을 통해 매일 네게 응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 나의 길과 나의 심판은 이곳에서 배우는 것보다 삶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낫다. 이런 체험을 네게 주는 이유는 네가 메신저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이곳에서 배운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네가 아는 것을 따라 살지 않았다. 나의 자비로 이 체험을 네게 주는 것이니, 너는 이를 따라 살아가려 힘써야 한다. "

" 나는 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할 때 내 백성들이 멸망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이 의로운 판단을 따라 살도록 많은 메신저들을 통해 가르치게 할 것이다. 이제 시간이 촉박하니 너는 내가 보내는 메신저들의 말을 듣고 지체없이 순종해야 한다. 듣고도 순종치 않으면 더 엄중한 심판을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의로운 심판이다. 나는 많이 받은 자로부터 많이 요구할 것이다."

" 이 시대는 지식이 늘어나는 때이다. 나의 길을 아는 내 백성들의 지식역시 늘어난다. 너의 세대는 그 어떤 세대보다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깨달음을 따라 사는 자는 거의 없다. 나를 믿는다 하면서도 나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내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때가 왔다. 미지근한 자들은 내 백성들 가운데서 제하여질 것이다. 나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진심으로 나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내게 불순종해도 괜찮다는 것을 자기들의 삶을 통해 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

"솔로몬이 기록했듯이, '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도서8:11) . 많은 내 백성들이 이로 인해 사랑이 식어져 가고 있다. 나는 내 백성들이 그 마음을 전부 악에게 내어주기 전에 나의 심판을 더 속히 임하도록 은혜를 베풀 것이다. 그들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여전히 죄를 가까이하고 있는 한, 더 이상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건져달라고 나를 부를 수 없다. 나는 네게 스스로를 심판할 시간을 조금 더 주어서 너를 심판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겠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다. "

"나는 네가 여기 왔기 때문에 네게 더 많이 요구할 것이다. 또 나는 네가 아는 진리를 따라 살도록 네게 더 많은 은혜를 나누어 주겠지만, 너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해 매일 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와야 한다. 다시 네게 말하건대, 매일 은혜의 보좌로 나아오지 않고는 누구도 진리 안에 설 수 없는 때가 이미 임하였다. 내가 네게 말하는 까닭은, 너와 및 너와 함께 한 자들을 단지 살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서서 이겨내게 하려는 것이다. 내 백성들이 다가오고 있는 어둠의 시대의 굴하지 않고 이겨낼 때, 빛이 어두움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모든 만물이 알게 될 것이다. "

"생명과 사망은 이미 땅에 심겨졌고 이제 거두어지려 하고 있다. 나는 내게 생명을 주려고 왔다. 사단은 사망을 주러 온다. 도래하는 시대에는 생명과 사망 모두가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래서 내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이제껏 땅에서 보지 못했던 충만한 생명을 줄 것이다. 내 백성들과 악한 자를 섬기는 자들과는 구별될 것이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여라. 내게 순종함으로 생명을 택하여라. 네가 나를 택하고 네 안에 있는 빛이 나의 참 빛이면, 그 빛을 날마다 더욱 밝아질 것이다. 이로써 너는 나의 빛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언제나 자라서 번성한다. 너는 네 열매로써 알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부르심/ 릭 조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