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기름부음은 단지 우리를 흥분되고 기분좋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더 큰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한복음14:12).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권능 가운데 행할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하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단지 머리로 지적인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으로 그분과 동행하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로 “예, 저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권능 가운데 역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기름부음을 주지 않고는 그 어떤 임무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절대로 임무를 완수할 능력을 부어 주지 않으신 채 어떤 일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주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하려 한다면 그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몇 가지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자, 귀신 들린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태복음 4:23-24).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일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르침 *설교 *치유 *축사.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계속 연약함 가운데 사는 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그들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약하고 권능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려는, 사단의 계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계속 고백해야 합니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찌어다”(요엘 3:10).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채움을 얻고...”(미가3:8). 스스로를 무능하고 연약하게 본다면 사단도 여러분을 바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수기13:33).
성령님은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사실 성령님과 하나님의 권능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갖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을 받지 않고 권능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단순히 어떤 부드러운 분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성령님은 실제로 권능과 권세로 가득한 분입니다. 교회가 강력한 표적과 기사 가운데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확증하기 위한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마가복음16:15-20)
신약의 설교의 원형은 강력한 표적과 기사가 동반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로마서15:18-19).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고전11:1). ‘본받다 (follow)’라는 말은 영어 단어 ‘따라하다(mime)’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어 ‘흉내내다 (mimic)’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을 드린 위대한 모델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바울이 그의 메시지와 사역에 대해 어떻게 말씀했는지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길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진도전서 2:1-5).
‘나타남(demonstration)’은 전시하거나 실제로 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젊은 세대가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복음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시편110:3).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나타남’이 나타나야 합니다. 단지 혼에 영향을 주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영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을 움직이셔야 합니다. 실질적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담대한 설교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의 첫 번째 오순절 설교를 했는지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전2:37-4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의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죄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구하게 되었습니다. 회개할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설교의 원형입니다. 회개를 촉구한 그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해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꾜 하거늘”(사도행전2:22-37).
베드로는 그 시대의 종교적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사랑과 담대함을 통한 설교로 선포되어 질때에만 사람들이 심령은 회개를 갈망하도록 찔림 받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는 사단의 심각한 덫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29:25). 바울 역시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이에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1:6-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죄의 유혹에 대해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이사야55:7). 많은 설교자들이 두 가지의 악한 영, 즉 ‘정치적인 영(political spirit)’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영(man-pleasing spirit)’ 때문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 조롱하는 회의적인 세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세례 요한과 같은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으니라.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이 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그는 성경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사’(마태복음3:1-12).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 중에서 성령님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불의 세례에 관한 부분은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불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역자주: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세상의 쓰레기를 불태우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단지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로운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너그러운 자비의 하나님은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거룩한 말씀에 계시된 대로 담대히 주님을 전할 때에만 우리의 설교에서 성령의 증거를 나타내어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나.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브리서2:1-4).
이 말씀은 신약 교회에 처음 선포된 설교의 원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한 목사인 친구가 이런 근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않고, 단지 성령님이 예배 가운데 자연스럽게 역사하시도록 허락한 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결코 예상할 수 없을 걸세.” 저는 단도직업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아 적정 말게나. 한 가지 확실히 일어날 일이 있네. 주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걸세!”
<전진하라/바비 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