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초자연적 능력을 소유하지 않으셨다. 그가 선보였던 모든 기적은, 사실 인간으로서 행하신 것이다. 다만 성령님께 온전히 의지한 상태에서 행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셨다.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5:19).
그는 100% 하나님 이셨으나, 인간이 경험하는 동일한 제약과 환경적 조건을 체휼하며 살기로 결정하셨다. 예수님은 이 점 또한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하셨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신분을 이용하려 모든 기적을 행하셨다면(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놀라워했겠지만) “나희 행한 일을 저희도 할 것이요”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다지 따르고 싶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례가 경이롭긴 하지만 도무지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하셨던 일은 물론 그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었고 의도하신 바다.(요14:12)
하지만 그가 인간으로서 이 모든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나는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선례를 따라야 할 책임이 있다. 또한 우리에게 하락하신다고 약속해주신 영적인 일들을 추구해야만 한다(고전14:1).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불가능한 일들을 능수능란하게 행하게 될 미래의 제자들에게, 본(선례)이 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적을, 표적을, 기사를 행하셨다. 바로 이 단순한 진리를 되찾는 다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 – 자신의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성령을 필요로 하셨다(주님의 임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그토록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존해야 하셨다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겠는가? 예수님의 행동에서 이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초자연적인 사역을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옷 입어야 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일부는 이것이다. 우리는 불가능하지 않은 임무만을 수행해 왔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나타나시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계속해서 우리를 궁지로 몰고 간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향한 진정한 부르심을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지 않으면 도저히 완수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순종하여 들어가, 누가 참 하나님인지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이러한 능력의 현현은 초대교회의 핵심 가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증인으로 변화되기 위해선 엄청난 능력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엄청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행1:4-5). 이 능력은 ‘성령 세례’라 불리는 방법을 통해, 예수님과 친밀함을 유지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임했다(행2:4). 이 체험은 일회성 사건으로 끝날 성질이 아니었다. 모든 세대 크리스천들의 삶 가운데 항상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체험이어야 했다(엡5:18 ‘성령 충만하라’).
체험의 중요성 –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비극 중 하나는 위대한 ‘진리’가 ‘교리’로 전락해버렸고, 진리를 체험하는 일이 ‘거리끼는 일’로 둔갑해버렸다는 것이다(서구 교회가 빠져있는 속임중 가장 큰 것은 체험보다 지식을 앞세운 것이다).거리낌 받는 체험 목록 중,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실로 놀라운 선언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을 것이며…. ”(엡1:3)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 것을 체험하기를 꺼린다는 이야기이다. 안타깝게도 이 말씀은 모든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유업에 대한 계시로 이해되는 대신, 이 땅에서 어려운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저 위로가 되는 말씀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사실 이경험은 3층천의 경험이다. 교리로는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현실의 원인에 대해서도 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경험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쳐주는 ‘도구적’ 경험인 것이다. 그 친밀함의 장소(3층 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현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독특한 자리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층천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 모든 사람은 하늘의 관점을 가지고 이 땅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하늘에서의 삶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만일 성령께서 자유롭게 우리 삶 속에서, 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드리면, 우리는 계속해서 불가능한 일들을 침노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영역은 성령님께 ‘자연스러운’ 영역이다. 우리 삶 가운데 성령님의 비중이 점점 커진다면, 성령님을 ‘소멸’하거나(살전5:19) ‘근심’시키는(엡4:30)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목적 달성을 위해 초자연적인 능력 안에서 행하는 것은, 곧 우리의 갈망하는 바가 될 것이다. 증가 될 능력에 대해 준비하려면, 우리는 이 중요한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성령님께 의존하기 원하는가?”
능력과 목적 –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류 역사의 진행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자신이 하셨던 일보다 거 큰일을, 우리가 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단순한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않고,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며 지금까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범접할 수 없는 역사’라고 설명하며 존경이 아닌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불신’이 낳아 기른 ‘종교성’일 뿐이다(나는 ‘종교’를 ‘힘없는 양식form’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무제한으로’ 소유한(성령님을 제한하지 않을 때) 한 사람이 능히 해낼 수 있는 일들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성령을 소유한 한 명이 그 정도라면, 수백만의 사람이 성령님을 제한하지 않고 사역할 때 얼마나 큰 일을 해내겠는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이보다 더 큰 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비전을 붙잡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 비전을 통해 실현 가능한 일들에 대해서 들어봐야 한다. 우리는 열방이 하나님께 나오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하루에 한 나라씩,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올 세대에 대해 예언하셨다. 그 세다는 가장 약한 사람도 다윗과 같이 강할 것이요, 가장 강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강할 것이다(슥12:8). 우리의 과제는 세상의 불가능한 모든 영역을 침노하는 것이다.
천국의 능력이 가진 목적은 그 능력을 가장 필요로하는 사회에 능력을 전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이르기전, 천국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거의 매순간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왕국:Kingdo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단어는 ‘능력’을 표현한다. 능력이 발현될 때, 사람들은 고통에서 해방되고, 질병으로부터 치유되고, 모든 종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셨던 바로 그 일을 동일하게 행하는 것이다.
천국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일이 언제든지 가능하다.” 모두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고 체계 앞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변할 때는, 하나님의 생각(상상력)을 듣고 그것에 ‘아멘’할 때이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새롭게 변화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불가능해 보지고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은 일이 ‘말이 되는’ 이야기처럼, 논리적인 일처럼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천국의 누룩’(마13:33)으로 가득 차길 소망한다. 천국의 누룩, 곧 천국의 영향력 아래 사는 삶!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 온전한 영향력을 보일 수 있기를, 또한 그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가 보고 듣는 방법, 행동하는 방법이 변화되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일이 교회건물이나 조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다. 사업가, 교육가, 정치가 등 모든 사람이 그 영향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제 천국의 왕은 모든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영향력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 주변, 내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실 것이다. 지금은 ‘영향력’을 회복할 때이며,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으로 세속적 사회에 영향을 행사할 때이다. 교회가 침묵할 때, 세상은 한 가지 음성만 듣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리고 천국의 메시지가 아니라면 우리가 전할 수 있는 말 역시 없다는 사실도 기억하길 바란다.
예수는 ‘열방의 소망’(학2:7)이다. 열방은 다만, 이 사실을 모를 뿐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성읍을 찾는 것 같아 보인다(히11:10).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왕(하나님)을 원하고 왕의 통치를 갈망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유업을 받기, 그리고 풀어내기 – 수십 년 동안 영적 유업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또 무시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윗세대들이 마지막 날에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남겨둔 영적 보고(寶庫)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동안 영적 보물의 도움 없이 일했던 것이다. 우리의 유업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배우고 또 윗세대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우리의 디딤판으로 삼아 전진하는 것은, 마지막 때 우리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열쇠이다.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부흥은 시작된 후 3-4년간 지속되다가 시들어버리는 패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형 때문에 부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입장이 발전되었다. “부흥은 가끔씩, 혹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열정, 새로운 에너지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마치 “부흥”이 일반적 기독교와 다른, 이례적 요소인 것처럼 말하는 입장이고, 교회(기독교)의 표준을 ‘비실한’ 상태로 간주하는 멸시적 태도이다.
부흥은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다. 부흥은 평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호흡하는 것이 당신에게 일상이고 표준인 것처럼, 표적과 기사와 이적은 ‘복음’의 일상이다. 부흥은 크리스천의 삶이다. 그 누구도 이 둘을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 없는 ‘건기’를 살아가도록 인도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고후3:18). 하나님은 당신께서 역사하시는 매순간 전진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이것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리라!’(사9:7)
인류 역사의 비극은 지속적인 진보(전진) 없이 부흥이 왔다가 그냥 떠나버린 데에 있다. 뒤 세대는 앞 세대가 이룩한 업적 위에서 사역을 쌓아가야 한다. 그러나 앞 세대의 영적 유산을 온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앞 세대의 ‘업적 위’가 아니라 그 ‘근처’에 사역을 쌓고 있다. 영적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 영적 능력이 증가되는 것을 목격해본 적이 없다. 뒷 세대가 앞 세대보다 더 큰 능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부흥을 위해 앞 세다가 지불했던 동일한 대가를, 뒷 세대가 지불할 용의가 없어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존’은 부흥이 아니다. 부흥은 불과 같다. 화력이 세가지나 불꽃이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유럽(부흥)을 받는 것은 공짜다. 그러나 화력을 세게 하기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업으로 물려받은 토지는 반드시 확장되어야만 한다. 확장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그 토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가서 배우라. 그는 주인에게서 받은 것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오케이” 싸인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 지켜낸 것을 빼앗겨버렸다(마25:25).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만 안다. “확장!”
지금 이 사실에 대해 설명하겠다. 만일 놀라운 기적과 표적 가운데 치유사역을 펼쳤던 사람이 있고, 그를 선조로 둔 가정이나 교회를 알고 있다면 내게 알려 달라. 나는 그 가정 혹은 교회의 후손들이 이 영적 유업을 지켜내지 못하고 확장시키지 못할 때 큰 병에 시달리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겠다! 마귀는 한때, 우리 선조가 싸워 흭득했던 영역 중 소유권이 박탈 될 법한 장소로 침투할 기회만을 시사탐탐 노리고 있다.
이전 세대의 승리로 획득한 땅에 ‘지주 불명’이라는 팻말이 꽂힐 때, 그 땅은 마귀의 소유지가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마귀는 이전 세대의 승리를 조롱할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지주 불명의 땅이 마귀의 군사 요층지로 변모하여, 이제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공격을 가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유업으로 물려받았던 승리에 대간 기억도 잊어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준으로부터 물러선다면, 말 그대로 포식자를 초청하여 우리 스스로를 먹잇감으로 대접하는 것과 같다.
존 레이크(John Lake), 스미스 위글스위스(Smith Wigglesworth), 에이미 샘풀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과 같은 사람들이 다져놓은 기초위에 건물을 축조하는 대신,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기념비를 세운다. 그들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유업에 대해선 잊고 있다. 우리는 다시 우물을 파야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의 주권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는 계획을 부인하는 모든 인본주의적, 이성적 입장을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이것은 기초적 원칙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수용하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건물을 쌍아 올려야 한다.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다가올 세대가 경험할 수 있도록.
아비 없는 부흥 운동자 – 성령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는 과정 가운데, 각 세대의 부흥가들은 실로 ‘아비 없는’ 자들과 같았다.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는지, 이런 일들을 위해 어떤 대가를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지 전수받지 못했으므로,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적 유산을 회복(상속)하면 해결되는 것들이었다.
유산상속이란 다른 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른 것(물건)을 거져 받는 행위이다. 만일 우리가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가 공짜로 상속받은 유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남겨줄 무언가’를 준비해둘 수 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을 진지하게 갈망하신다. 자기를 섬기는 열방에 대해 깊이 권고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열방이란 모든 방언과 부족의 대표자들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나라 모든 백성과 민족을 말한다. 우리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열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열방’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 세대를 한 주길 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세대가 이전 세대의 종착점으로부터 시작해 더 높은 단계로 전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물려받은 유산을 증대시키는 일에 헌신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의 선조들이 이룬 업적에 대해 온전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는다. 결국 부흥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희생한 대가를 모욕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영적 유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가? 존경하라!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면 그들은 ‘장수’를 약속받는다. 공경 안에서 생명이 연장된다. 우리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들을 공경하면 우리는 선지자의 상을 받게 된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은사를 지키고 은사대로 행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천국에서 ‘공경’은 아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단지 선지자들을 ‘공경’함으로써 그들의 상급을 받을 수 있다.
이 놀라운 열쇠는 과거 잃어버려진 ‘망토’(선지자의 외투)를 되찾는 방법이다. 공경을 통하여 우리는 예전의 위인들이 삶 가운데 받아 누렸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공경하는 만큼, 그 만큼의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더 많은 지혜를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받은 유산, 또 성도의 공동체로서 받은 유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선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것,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것(즉, 새로운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이처럼 교훈에 교훈을 덧대어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새로운 영역 안에 진입하는 방법이다.
진리는 진보적이며 다양한 차원의 개념이다. 물론 진리의 근본은 흔들림이 없고 그 근본과 대립되는 방향으로 진보하는 일은 없지만, 우리가 성장해감에 따라 진리 역시 변화하고 발전한다. 기름부음의 양과 단계에 따라, 성경의 실재(實在)는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도록(우리를 위해 변화되도록) 변화하고 발전한다.
이제껏 인류-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포함하여-가 경험해보지 못한 기름부음을 가지고 진일보를 할 새로운 세대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초자연적)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자연적’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영적 영역을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견줄 수 없는 천국의 계시와 경험을 우리에게 베풀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마저 아직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일들을 너무도 말씀하고 싶어하셨다.
측량할 수 없는 – 예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의 기름부음 안에서 행하셨다. 꾸준히 자연계의 테두리 넘나드시며 자연계보다 상위에 있는 진리를 보여주셨다. 당신과 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삶은 물리법칙을 더 많이 거스를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영적 현상들을 즐기게 될 것이다.
이제 성장 속도가 가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 시작 단계에 서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아래, 우리는 지난 몇 백년간 저질러왔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기초를 놓을 수 있으며 우리의 천정을 그들의 마루가 되도록 만들 수 있다. 다음 세대는 우리가 쌓은 업적 위에 자신들의 공력을 쌓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누구도 닿지 못한 곳까지 나아갈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은 성령의 은사가 지니는 기능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설명만은 아니다. 진정한 복음에 필수적이랄 수 있는 성령, 그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현현은 그들이 갈고 있는 곳에(거리에도) 나타난다. 성도들의 능력이 최대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거리이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어디서든, 천국의 영향력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 직장, 거리 혹은 상가이더라도, 이것이야말로 평범한 크리스천의 삶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선, 시민들이 성도들이 성도들의 영향력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들고 거리에 나아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들은 즉시 치유 받고 또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기적과 표적, 치유와 권능, 그리고 능력대결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성도들을 통해 공공장소에서 치유받은 사람만 해도 수백에 달한다.
우리는 ‘필사적인’ 시간에 살고 있다. 필사적인 갈망이 성숙의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갈급한 사람이야말로 미래에 예비 된 것을 지금 ‘이때’로 끌어당기는 사람이다.
능력의 새 날 – 이 세대에겐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선지자로 만드소서!”라는 모세의 부르짖음이 성취될 기회를 바라보고 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기름부음을 가지고 주님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켰던 것처럼, 주님의 재림을 위해 우리 역시 엘리야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 삶 속 능력의 증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의 마음이 천국의 생각 주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 약속된 ‘하늘의 침노’를 경험하기 위해선 우리가 반드시 감내해야 할 위험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천국의 생각 구조로 바뀔 때 이 위험을 감당해 낼 수 있다.
더 많이 성령을 갈구해야 한다. 갈급한 심령에게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개인의 변화와 성숙되는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현명한 사람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이러한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가 어디에 있든지 찾아가라.
그리스도의 은사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엡4:7-13). 그 은사가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당신이 속해있는 영적 흐름 혹은 그룹 너머에 있는 영적 지도자들을 주시하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선,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도 당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나는 심지어 부흥운동가의 자손들까지도 존경하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과 은사의 전이를 받고자 그들에게 축복기도를 부탁하곤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접할 수 있는 장소로 가라. 성령께서 능력으로 당신의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허락해두리라. 당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꿈꾸는 자가 될 때까지, 하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가능성과 그 현실성을 믿게 되기까지, 당신의 생각이 변화되도록 성령을 허락해드리라.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당신의 삶이 먼저 부흥되는, 새로운 삶의 패턴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일단 그러한 삶이 먼저 부흥되는, 새로운 삶의 패턴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일단 그러한 삶의 스타일이 자리 잡으면, 우리는 부흥을 담아내는 ‘신(新)문화’를 창조해낼 것이다. 그 문화는 아래에 기술된 내용과 같다.
겸손의 문화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게다가 오직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내는 문화이다. 능력을 보지 못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능력을 행치 않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앗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바로 그 만남을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 그의 성품과 약속을 나타내주는 문화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것이다. 과거에 행하셨던 일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은사를 인정해주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존경’의 문화이다.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기 때문에 지속되는 기세로 부흥이 증가할 것이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다음 세대는 더 큰 영광의 부흥을 경험할 것이다.
경쟁하기보다 서로에게 맡기고 인정해주는, 소심함과 질투심 때문에 서로를 파괴하기보다는 축복해주는, 비판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문화이다. 교회 밖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긍휼의 마음을 갖는 문화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거두는 대신 밖으로 흘려 보낼 줄 아는 문화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더욱 크게 이뤄지는 문화이다. 영과(요17:22)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어디를 가든지 천국을 풀어놓는 사명!
바로 이 시대의 과업이다. 나는 기쁨으로 더 많은 성령의 현현을 환영한다. 과거 예수님께서 온전한 복음을 전하실 때 함께 했던 바로 그 성령의 나타나심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죽은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던 바로 그 동일한 성령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호수와 같지 않다. 그는 ‘흘러야만’하는 강물처럼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7:38-39). 우리 주변 세계의 영적 지형을 바꾸는 것이 바로 이 성령의 ‘강물’이다.
<초자연적 능력의 회전하는 그림자/줄리아 로렌/빌 존슨/마하쉬 차브다/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