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2010

그대 선 자리는...


주인님의 사랑받는 아들 이삭을 위해, 가나안 땅에서, 주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가야만 하는 그 광야 길은 멀고도 험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광야, 불 붙듯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의 햇볕은 모래를 핥으며 그 열기를 더해 마치 찜통처럼 후끈거린다.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가려 줄 것 하나 없는데, 낙타 등에 뎅그러니 올라앉은 늙은 종의 얼굴은 쏟아지는 불볕에 벌겋게 타들어가고 덴 자국은 화끈거리다 못해 쓰리고 따겁다. (그 옛날 무슨 썬스크린이나 챙 달린모자가  있었으랴.)

집을 나설 때 가지고 온 몇 통의 물마저도 그 많은 날을 광야에서 지나는 동안 약대 열 필과 함께 모두 마셔버리고 바닥이 난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햇볕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건만, 물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언제쯤이면 만나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늙은 종은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터벅거리는 낙타 등에 올라앉아 꾸벅거리는데, 어느 듯, 광야의 붉은 바위산이 더욱 붉어진다 싶더니, 휘몰아치는 모랫바람이 해를 서산으로 폴작 밀어붙인 듯, 갑자기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털석 잠겨버린다.

광야의 밤기온은 낮과는 달리 무섭도록 춥다. 들판에 돌을 베개 삼고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주머니에는 주인의 집 재산 중, 제일 좋은 것들, 금 은보화가 그득하다. 이것만 가지면 어디에 가서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 보석을 가지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면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주인의 그 신임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천신만고 끝에 주인님의 고향인 나홀 성에 닿았다. 나홀 성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제 어딜 가야 주인님의 친척을 만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막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를 꿇어 앉혀놓고 맥없이 앉았자니 주인님이 다급할 때면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그리고 여차여차히 해주십사 빌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 기도대로 한 소녀가 물을 길으려 동이를 들고 나오는데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소녀가 그의 기도 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주인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란 것이다. 그 소녀에게 건넨, 금고리와 금손목고리를 증표로 보게 된 소녀의 가족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그 늙은 종을 믿고 맡긴다. 늙은 종은, 엄청나게 많은 보석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낙타 열 필과 함께 광야 길을 지나 주인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 길, 천하절색(天下絶色)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모든 금은보화를 훔쳐서 달아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충성했고, 수많은 날들과 밤을 광야에서 그토록 아릿따운 소녀와 함께 지내야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눈동자처럼 잘 지키고 보호하여 끝내 주인 집 아들 이삭에게 정결한 신부로서 무사히 넘겨주었다. 이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창 24장,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의 이야기이다.

이쯤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느낌이 오지 않는가? 이 정도에서 우리는 그 어떤 느낌이 와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주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는 분명히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주인의 진실한 종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거나, 자기 눈에 보기 좋다 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고 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주인 아들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야하는 사명이 종에게 주어졌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영적으로 현대 우리들,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행하여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모두 자기가 설 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자기가 설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겨진 양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 내기도 하고, 그 양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에도 한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당한 불이익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는 많은 독자들의 의견이 설왕설래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리다. 누가 저토록 순수한 한 젊은 목사님을 저렇게까지 몰아갔다는 말인가? 그 원인제공자가 미워지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된데는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 제공자들끼리 믿음으로, 기도로, 사랑으로, 대화로, 서로 아름다운 해결을 보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 “너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절 말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절 말씀).”말씀하고 계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실천실행해야 할 때이다. 선(善)은 무엇을 상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움을 상대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빛은 빛의 선 자리를 굳게 지키기만 하면, 어둠은 그 빛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상대해서 싸우지 않는다. 사랑은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힘이 없어서 잠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기 원하셔서 오래도록 참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벧후 3:10절 하 참조)
그대가 선 자리는 만왕의 왕을 대신하는 자리다.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예절과 품위로 그 이름을 명예롭게 빛내야 하리라.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왕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실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왕께 부끄러움을 끼칠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 비록, 조금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신임하여 내게 직분을 맡기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인지…되돌아 보아야 한다.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 그대 선 자리는 왕을 대신한 거룩한 자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아무 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7-21절 말씀)."


별똥별/최송연

지식 속에 갇힌 믿음


인도의 성자라 불리우며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였고,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그는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 수양, 무저항, 이 세 가지를 가르치며 진리 구현을 평생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인도의 문호 ‘타고르’는 그런 그를 가리켜서 ‘마하트마’라 불렀습니다. ‘마하트마’란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서 간디의 호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아는 간디입니다.

이런 그가 매일의 일상에서 예수님의 산상 보훈을 읽고 묵상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간디가 그렇게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란 칭호를 들을 만큼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게 된 동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인 산상 보훈을 매일 같이 읽고 그의 삶에 적용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한 기자가 찾아가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 만난 크리스쳔들의 행위가 그 말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위선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우리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만약 진정한 크리스쳔으로 개종 되었더라면, 지금의 인도는 그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영어에서 말하는 know 와 knowledge의 차이를 잠시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know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 하며 knowledge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요17: 3절 말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know’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뜻은 하나로 합해진다 그런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영생을 얻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이 막연한 어떤 추상적 개념이나, 지식적(Knowledge)으로,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 이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속에서 만나고 체험으로 아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똑같이 사도 바울처럼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1: 1). 이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실히 알고(know), 가슴으로부터 확실히 믿어져야 합니다.

지식(knowledge)은 벽(wall)과 같습니다. 벽이란 적당히 높으면 자기 방어에도 도움되고, 바깥세상도 내다볼 수 있어 좋지만, 그 벽이 너무 높으면 역으로 자신이 그 벽 속에 갇혀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종교적 지식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벽 속에 갇혀 버리게 되고, 그런 사람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게 되는 우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몰라서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성경 지식(knowledge)은 가졌으나 그 말씀(율법)도, 그 하나님도 가슴으로 알지(know)도, 믿지도 않았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막7:6절 참조). 사도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적으로 알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미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자리에 기꺼이 합류했던 것입니다. 체험 없이 지식으로만 아는 종교인은 최악의 경우 살인까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무서운 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벽 속에 갇힌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지식 속에 갇힌 믿음이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주위는 더 황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성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많고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 가슴 속에 참 빛을 품지 않은 상태에서 빛의 아들의 삶을 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종교적 열심은 자칫 위선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그만큼 문제가 더 커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 자처하기 전에,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는(know)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Arthur Burns라는 경제학자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워싱턴 DC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었고,1970년대에는Fed Chairman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유태인이었던 그에게어느 정치인들의 모임에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그 자리에 앉은 참석자들을 엄청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Lord, I pray that Jew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유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I pray that Buddhist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불교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I pray that Muslim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Lord, I pray that Christian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그리고 주님,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번역/최송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절 말씀).”

별똥별/최송연 

죄책감․마귀․우리2

적자 마귀는 우리를 정죄한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過去)에 사로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린다.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근거는 예수님으로 인해 무너졌다.
마귀는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모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낸다.
마귀는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도록 온갖 궤계를 부리고 있다.
마귀는 비난과 정죄를 통해서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든다.
마귀는 쉬지 않고 우리를 욕하고 참소한다.
마귀는 양심의 소리를 가장한 참소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착각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게 만든다.
마귀는 예수님의 피로 해방된 우리를 죄의 쇠사슬 아래로 끌고 가서 묶어놓고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 속에 시달리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가 범한 죄를 들추어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한 모든 죄(罪)를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거나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 계속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열등의식, 좌절감, 죄책감을 갖게 한다.
마귀는 우리를 불구로 만들기 위해 즐겨 쓰는 무기는 고소(告訴)와 정죄와 수치감, 질병과 자포자기이다.
마귀는 우리를 비방하고, 중상하고, 헐뜯는다.
마귀는 우리를 속여서 죄악과 가책 속에 빠뜨린다.
마귀는 우리를 죄짓게 하며, 또 우리를 정죄한다. 이러한 정죄(定罪)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믿음으로 극복 할 수 있다.
마귀는 우리를 중상모략하고 헐뜯는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상상하게 하며, 우리로 마귀와 전쟁할 위치를 상실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한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한다. 우리를 참소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滅亡)시킬 뿐 아니라, 좌절케 하고 파멸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실패를 기억하게 하고,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정죄의식과 불안과 근심을 준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지적한다. 우리를 조롱하고 참소하며 정죄한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을 계속 기억나도록 하여 송사하고 참소한다.
마귀는 우리의 못난 것, 우리가 회개(悔改)한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정죄(定罪)하고 참소하여 비참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의 죄를 일깨움으로 우리를 무기력(無氣力)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참소함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한다.
마귀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 참소하고 음해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며 거짓말을 만들어서 우리를 죽이고 매장시키는 일을 한다.
마귀는 죄 지은 우리를 고소하여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하며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비방한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우리 속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유혹하고 죄짓고 넘어지게 만든다.
마귀로부터 오는 죄책감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사악함과 부족함을 고백할 때 주변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침침해진다.
마귀의 참소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마귀의 궤계와 참소를 격파시키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
마귀의 참소는 모든 거짓말을 동원하여 우리를 헐뜯고 용서받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처럼 꾸며 우리를 망하게 만든다.
참소는 마귀의 가장 흉악하고 효력 있는 무기이다. 우리가 마귀의 참소(讒訴)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넘어진다.

제공 : 김광선
2010년 10월 18일

12/25/2010

주님은 이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과학적 설명)

[이 자료는 "의학박사 트루만 데이비스(TrumanDavis)", "알렉산더 메드럴 박사(Alexander Metherell)"를 참고로 활용하여 구성한 자료 입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예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렇게 까지 하셨구나!! 라는 것을 더 깊히 깨닫고 더욱더 실질적으로, 과학을 토대로 묶어 봤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더 알아서 깊은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1. 십자가 달리기 전의 고통
1)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기도 상황에 의한 땀방울이 핏방울 되다. 너무 열심히 기도하신 나머지 땀샘에서 땀과 피가 섞여 나옵니다. 의학적 용어로 "혈한증(血汗症, hematidrosis)"라고 합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땀샘에 있는 모세혈관을 파괴하는 화학성분이 나옵니다. 그래서 소량의 피가 땀샘에 들어오게되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예수님의 심리와 육체는 극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14:34)"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는 그러한 열심의 기도 였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나, 나를 위해서 그러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피곤에 겨워 잤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배우는 제자들도 피곤해서 기도하다가 자는데 예수님이라고 안 피곤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기도로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신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에 겁이 나셨습니다.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순종 하셨습니다.그것은 나,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2) 희롱과 몰매를 맞으심.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27:30)""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19:3)"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몰매와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자신이 창조한 창조물에게 말입니다.

3) 태형.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기 전에 태형을 당하셨습니다."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19:1)"

(1) 채찍의 구조 : 39개의 가닥으로 되어있습니다. 병사의 기분에 따라 가닥수가 많을수도 있었습니다. 땋은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쇠구슬과 뼛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1> 쇠구슬 : 살을 멍들게 했고, 찢어진 근육조직을 더욱 크게 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2> 뼛조각 : 뼛조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살을 찢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영화처럼 그러한 채찍으로 맞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칼보다도 더 무서운, 한번 스치면 사망할수 있는 그러한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2) 때린 부위 어깨부터 등 그리고 엉덩이 정강이 를 때렸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린거죠.

(3) 몸 상태 골격 근육이 찢어지고 피범벅이 되었으며 살점은 리본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예수님은 영화에서 본것처럼 그렇게 죽지 않으셨습니다. 더욱더 극심한 모양이셨습니다.
위의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말처럼 예수님도 정맥이 드러나고 근육과 근골과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을 것입니다.많은 사람은 태형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그 원인은 고통도 고통이겠지만 더 확실한 것은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상태 였기 때문입니다. 피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피를 많이 흘리셨습니다.

3) 저혈량성 쇼크상태.
(1) 증세 : <1>심장이 더이상 피를 못 퍼올림. <2>혈압저하,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기절. <3>신장에 남아있는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의 역할이 중지. <4>몸에서 액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목이 아주마름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 달리기 전의 상태는 매우 유독한 상태셨습니다.
  
2. 십자가의 고통.
1) 십자가 묘사 가로들보(Cross bar)즉 패티블룸(patibulum)이라 불리우는 것과 수직기둥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수직기둥은 땅에 고정되어있고 가로들보는 땅에 놓인채 예수를 못을 박았죠. 그리고 못 박은후 수직기둥에 올려져 고정되었습니다.

2) 못 묘사 약 18Cm 의 대못입니다.(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인 요한난 벤하콜의 십자가 처형당시의 못발견)

3) 박힌 부위 다수의 의견과 성경적 측면에서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손목에 못이 밖혔습니다. 당시 손이라는 언어는 손목과 구별되어있지 않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손에 못이 밖혔다면 찢어져 땅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못 밖힌 곳은 "중추신경" 이 지나는 위치입니다. 못으로 큰 신경이 파괴가 된것이죠. 고통을 예로 들자면...우리 팔굽을 때리면 아픈 느낌이 나죠? 그곳의 척골신경을 펜치로 비틀어 으깨는 느낌과 비슷 하다고 합니다.

4) 매달린 상황묘사.
1>팔이 6인치 정도 늘어남.
2>어깨 탈골.
예수님의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팔은 6인치정도 늘어났을 것이고, 어깨도 탈골이 되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볼수 없는 극형이었습니다.

5) 죽음 원인. 십자가는 질식해서 죽이는 사형틀입니다.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횡경막" 이 가슴의 상태를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고정시킵니다. 그래서 질식하게 됩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의 몸을 90도 비틀어 나무에 묶고,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팔목과 복숭아 뼈 바로 아래에 쇠못을 박아 처형하는 극형이며, 사형수에게 호흡곤란을 가져다 줍니다. 이 때, 나무망치로 쳐서 무릎뼈를 부러뜨리게 되면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게 되고, 결국 숨이 막혀 죽게 됩니다.

다음은 의학박사 트루만 데이비스(Truman Davis)의 진술입니다. 팔에 힘이 빠지고, 근육에 엄청난 경련이 일어나면서, 깊고, 가혹하고, 지근거리는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이 고통이 근육을 굳게 만듭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몸을 위로 밀어 올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몸이 팔에 매달려 있게 되면, 가슴근육이 마비되고, 늑간근육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공기가 폐로 유입은 될 수 있지만, 밖으로 뿜어내 질 수 없게 됩니다. 예수는 단 한번의 짧은 숨을 쉬어보려고 몸을 위로 밀어 올리기 위한 사투를 하셨습니다.

결국, 이산화탄소가 폐와 혈류에 쌓이게 되고, 경련이 부분적으로 진정을 시킵니다. 격한 경련으로 몸을 위로 밀어 올려, 숨을 내뿜고, 생명을 주는 산소를 마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매달려 있다보면, 뇌와 가슴에 피가 공급되지를 않게 되고,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발에 힘을 주어 몸의 윗부분으로 피가 돌게 하는 것입니다.

당국자가 급히 죽이기를 원하거나 고통을 멈추게 하려 할 때에는 사형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데, 무릎아래를 곤봉(나무 망치)으로 타격하였습니다. 다리를 부러뜨리는 이유는 죄수가 몸을 위로 밀어 올려서 가슴근육의 긴장을 풀어주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급속한 숨막힘이나 관상동맥무력이 따르게 됩니다. 다른 두 죄수들의 다리는 꺾었지만, 예수의 경우, 이미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이지 않았습니다.

6) 숨을 쉬려면? 숨을 쉬려면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로 발을 반복적으로 세웠다가 내렸다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근육이 이완되어 횡경막에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으로 못이 밖힌 발을 움직여야 하죠. 예수님은 숨을 쉬기 위해 못이 밖힌 발을 들었다가 놨다가 했을 것입니다.못이 밖혀 발도 움직일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러했습니다.

7) 죽음. 결국 숨을 쉬기 위해 발을 움직이다가 발의 뼈가 못에 고정되고 ... 서서히 질식을 하게됩니다. 호흡량이 줄어들면 "호흡 산독증(酸毒症)"에 걸리게 됩니다. 이것은 혈액속에 이산화 탄소가 탄산으로 분해죄면서 혈액이 산성으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되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형수들은 다수 질식으로 죽습니다. 십자가 사형 자체가 질식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극심하게 돌아 가셨습니다. 태형으로 인해 물과 피를 많이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얼마 되지 않아 돌아 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피는 죽어서 다 흘리시고 다리는 꺾이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죽으셨기 때문이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이렇게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보이셨습니다.지금도 예수님을 희롱하고 다시 못밖으려 하는 대적자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불신자들은 연합하여 기독교를 몰아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대화를 해보면 [교만]합니다. 자기가 신이랍니다. 자기는 이러한 증명도 불가한 미신을 믿지 않는 다고 합니다. 자기 머리만 믿는다고 합니다.그래서 이들은 인터넷상으로 많은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지옥중에도 더 극심한 지옥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저는 공정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에 관한 질문
질문1] 두 강도는 죽지 않아서 다리를 꺽었는데 왜 예수는 다리를 꺽지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나요?

1] 다리를 꺽는 이유는 아까도 말했던것과 같이 질식으로 죽게 하려고 한것입니다. 그 상황에는 다가올 안식일과 유월절로인해 빨리 사형을 종결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사형이 종결된 곳이지요. 로마 군인들은 자신이 소지한 단검의 손잡이로, 또는 망치로 다리뼈 아랫부분을 꺽었습니다. 그러면 더이상 발을 들지 못하고 호흡 산독증으로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것은 로마 군인은 사형의 전문가였습니다. 사형장에서 제비뽑기하며 노는것 보면 더 확실히 알수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죄수가 탈출하면 군인들이 대신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실정이었기에 정밀히 시체를 검사했고 확인도 했습니다. 예수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군인은 더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다량의 피와 물(19:34)이 나옴으로 인해 확인이 되었습니다.

질문2] 죽은 사람은 피가 응고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많은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왜그렇지요?

2] 많은 피와 물이 나온 이유. 저혈량성 쇼크로 인해 심장 박동이 증가합니다. 이것이 심장 정지의 원인이지요. 증세는 이렇습니다.

1>심낭삼출 : 심장 주위에 있는 막 조직에 액체가 고임.
2>늑막삼출 : 폐 주위에 액체가 고임.
로마병정은 사형의 전문가였고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창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나를 위하여 이렇게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이 그저 돌아 가셨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피조물들을 위하여 창조자이신 위대하신 신께서 이렇게 죽으셨던 것입니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선 하나님보단 경제학자들을 경청해야한다 ?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4).

오늘 본문을 통하여 몇 사람을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이다.
축산업에 종사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농업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의 머리로는 하나님은 축산업의 신이었고, 현지 농사를 위해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리고 풍작을 주는 바알 신과 아세라 여신을 셤겨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경제적 성공을 위해선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선 어렵고 이 세상 경제학자들의 말을 잘 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대동소이하다 하겠다.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 왕과 왕비일 때 풍요의 신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노하게 만들었다. 이 때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왕 앞에 보내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린 형벌로 수년 동안 우로(雨露)가 없을 것을 예언을 한다. 이는 우로를 주관하는 신이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증면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전이다.

왕과 왕후는 회개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한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매일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 등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바알과 아세라가 주관하는 줄 믿었던 우로가 하나님의 예언대로 내리지 않고 강물이 말라 버리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왕과 왕비는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 세계의 top 경제학자들이 주관하던 세계 경제가 바싹 말라도 회개할 줄 모르는 현대인과 대동소이하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보내시고 마지막 얼마 안 되는 가루로 떡으로 하나님의 종을 섬기게하신다. 이를 순종한 과부는 비가 올 때까지 집에 가루와 기름을 제공받게되고, 또 병들어 죽은 아들을 엘리야의 기도로 다시 사는 축복을 받는다(왕상 17:1- 24, 눅4:24- 26). 이와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종과 백성을 축복하시고 책임지신다.

가뭄 3년 후, 엘리야를 아합 왕 앞에 보내시고(왕상 18:1, 눅 4:25, 약5:17) 아합 왕과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그리고 이스라엘백성을 갈멜 산에 모이게 한 후, 바알과 하나님 중 불로 응답하는 신을 하나님으로 하자고 백성에게 호소하신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제단에 바치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춤추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로서 물과 불을 주관 하는 분이 바알이 아님을 드러내신다.

그 다음 엘리야를 통하여 먼저 이스라엘백성들로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판 다음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송아지의 각을 떠서 올려 놓고 물을 통 넷으로 세 번 붓게하셨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하신 후,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셔서 번제물˙나무˙돌˙흙 등 모두를 태우시고 또 물까지 말리셨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엘리야가 드린 이런 기도이다.

이것을 본 온 백성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엎디어 부르짖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죽었다(왕상 18:1- 40; → 신 17:25, 13:13- 16). 그 후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큰 비를 내리셨다. 이쯤 되면 왕과 왕후도 회개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왕후 이세벨은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했다.

둘째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다.
엘리야는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는데,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하다. 이유는 사역에 성공을 하여도 성공이나 사역에 초점을 마추면 안된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마추어야한다. 오늘날 목사/선교사님들도 사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사역의 성공에 초점을 마추다가 악령의 공격을 경험하게된다.   

죽음의 손길을 피해 기진맥진한 몸으로 브엘세바에서 다시 하룻 길을 광야로 걸어 가 나무 아래 앉아서 우울증에 결려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는 기도까지 한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를 꾸중하시기보다 엘리야가 잘 때에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어루만지며 `먹으라' 깨워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신다. 그것을 먹고 마시고 40주 40야를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렇게 이세벨의 독수에서 보호하시고, 낙심하고 실의에 찬 엘리야를 호렙 산에서 여호와의 위광(威光)을 보임으로 새로운 용기를 회복시키시고 바알을 철저히 멸절시키는 세 가지 사역을 주시듯이 당신의 종들을 다시 세우시고 다음 단계의 사역을 주셨다. 

즉 아람 왕 하사엘을 통하여 우상숭배하는 아합의 왕조를 진멸하고, 예후를 통하여 종교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우상들을 진멸하며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아 종교 부흥을 시키는 계획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예언대로 계속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는 예언대로 계속되고 있다. 경제학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승리하는 삶은 경제학자들의 이론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길이 곧 풍성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여 한다 (요10:10).

작성: Paul Yoo 

[특별기고-종교 다원주의 비판] 하나님의 존재와 그 증거(2) 종교 다원주의 비판 (8)

나는 지난번 글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믿기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을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자연계와 인간의 경험 안에 다양하게 제시하고 준비해 놓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하나님 존재의 증명은 20여종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몇개는 이론이 복잡하고 난해하여, 전문학자가 아닌 일반인은 이해 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 한 증명만은 이론이 매우 간단 하므로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증명은 <설계의 증거에 의한 증명> (design argument) 이라고 불리는데, 이 증명은 단순하므로 이 이론을 독자적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아마 그 수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Socrates) 다.

나는 20여종의 증명 가운데서 <설계의 증거에 의한 증명> 하나만을 여기에 소개 하겠다. 그 것은 소크라테스가 시도한 증명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 (Plato) 의 저서 안에도 언급되어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동 시대인 쿠세노폰 (Xenophon)이 전하는 이론을 여기에 소개한다.

소크라테스는 서론에 이은 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맨 먼저 인간을 창조하신 이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눈과 귀와 같은 감각 기관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눈은 보기 위해서, 귀는 듣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코가 없다면, 여러가지 냄새가 있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만일 맛을 알 수 있는 혀가 없다면, 음식물의 단 맛과 쓴 맛은 어떻게 맛 볼 수 있습니까?. 사람이 잘 때는 눈을 감고 있다가, 필요할 때는 뜰 수 있고, 또 피곤 해지면 문이 닫히듯이 눈꺼풀이 감기는 현상은, 사람의 활동을 미리 예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람이 불 때, 먼지와 같은 물질이 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마치 체와 같이 속눈썹이 붙어 있으며, 또 이마의 땀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눈 위에는 눈썹이 있어서 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를 말하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아무리 소리가 많아도 귀에 넘쳐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식물을 물어 뜯기 위해서 날카로운 앞니가 있고, 맷돌 같이 갈기 위한 어금니가 있습니다. 음식을 몸 안으로 들여 보내기 위한 입의 위치는 (눈이 잘 볼 수 있게) 눈과 코 옆에 있으며, 배설을 하는 항문과 요도는 구토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얼굴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생각하고 궁리해서 만들어져 있는 사실을 보고, ‘이것들이 우연히 생겼을까?’ 또는 ‘어떤 정신 (mind) 이 그 창조에 참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습니까?. 이와 같은 현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피조물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창조주가 존재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인간의 내적인 경험과 주위 환경에서 생기고 있는 것들을 관찰 함으로써 창조주의 흔적을 인식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먼데 있는 것 보다는 각 사람에게 가장 가깝고, 또 각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즉 인체의 각 기관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 봄으로써, 거기서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인체의 기관은 마치 어느 지성있는 존재가 머리를 써서 생각하고 설계(design) 한 것 같이 보이므로, 이 증명은 <설계의 증거에 의한 증명>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인간과 동물들의 신체만이 아니라, 자연계 안에 허다하게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관찰 한다면, 이런 현상은 자연계 (우주) 안에서 무수히 볼 수 있고, 또 그 하나 하나가 어느 목적을 위해서 궁리를 한 것 같이 보이므로, 이와 같은 합리적인 작품이 우연이나 무작위 (마구잡이, random) 로 생겼다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특히 미래에 필요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 하는 것, 예를 들면,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유방과 모유를 준비하는 것은, 생각하고 설계(design) 해서 일을 수행하며, 목적을 달성하는 지성 (intelligence) 의 참여의 증거가 더욱 분명하다.

다소 상황과 형태가 다를지 모르나, 기본 원리만은 꼭 같은 현상이 동물, 물고기, 새, 그리고 식물의 세계 안에 무수히 그리고 편만(遍滿:널리 가득참) 하게 존재 한다.
 
이 모든 경우에 공통된 기본 원리는, 미래에 필요할 것을 예상 하여 미리 설계하고 준비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말 한다면, 미래 또는 먼 미래에 필요한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은 지성 있는 정신(intelligent mind) 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대한 자연계(우주) 안에는 이런 놀라운 현상들이 편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우주 배후에는 위대한 정신이 존재 한다고 추리하고, 이 정신을 하나님(God) 이라고 부른다.

12/23/2010

케이프타운 서약, 로잔정신에의 헌신 강조

서문과 제1부 전문 공개… 신앙고백도 포함
▲이번 제3차 로잔대회 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의 초안 작성자인 영국의 크리스 라이트(Wright) 박사. ⓒ로잔운동
지난 17일부터 24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서 도출된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의 서문과 제1부가 로잔운동 사이트를 통해 공개됐다. 문서의 나머지 부분인 제2부는 대회 기간 현장과 온라인에서 논의에 참여한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작업을 거쳐 11월 말 발표될 예정이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신앙의 선언과 행동에의 요청(A Declaration of Belief and a Call to Action)’이란 부제로 발표됐다. 부제가 말해주듯 이 서약은 제1부에서 로잔운동의 신앙 고백을 정리하고, 제2부에서는 이같은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세계 복음화 사역에 있어 고려되어야 할 구체적인 문제들과 이에 대한 교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서문을 통해서는 1974년 제1차 대회의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과 1989년 제2차 대회의 ‘마닐라 선언문(The Manila Manifesto)’으로 정리되어 있는 로잔정신에 대한 변함 없는 지지와 세계 복음화에 대한 헌신을 재선언하고 있다.
서문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헌신과 이를 위한 로잔운동에의 헌신”을 약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일에 계속해서 헌신하는 것, 둘째, “성경적 복음의 핵심 진리를 명확히 보여 주고 이를 선교 현장에 적용하는” 로잔 문서의 정신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서문은 밝히고 있다. 특히 “두 문서에서 이뤄진 약속들에 충실하지 못해 왔다”는 반성 어린 고백과 함께, 격변하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전파하고 복음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있어 두 문서가 근거가 되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서문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정황을 세계화, 디지털 혁명, 경제적·정치적 균형 변화, 빈곤, 전쟁, 질병, 생태 위기, 기후 변화 등 바뀌어가는 것과,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죄악된 인간이라는 바뀌지 않는 것의 공존으로 제시하고, 로잔정신이 추구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에, 온전한 복음 전하기(the whole church taking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라는 의미에서의 세계 복음화로의 헌신을 재선언했다.
이어 제1부에서는 로잔운동이 믿는 바, 즉 로잔운동의 신앙 고백을 분명하게 정의하는 작업이 이뤄져, 로잔운동이 근거하고 있는 복음주의 신앙의 기반이 총 10개 항목으로 나뉘어져 서술됐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사랑한다(WE LOVE BECAUSE GOD FIRST LOVED US)
서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이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은혜에 응답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THE LIVING GOD)
성경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영원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서약은 강조한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시자, 또한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며, 당신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며, 그 정의로우심을 기뻐하며,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서약은 말하고 있다.
셋째,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GOD THE FATHER)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됐다고 서약은 밝힌다. 예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증명됐으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통로가 되어 상호적인 사랑의 주고 받음을 가능케 했다.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깊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서약은 설명한다.
넷째, 우리는 성자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GOD THE SON)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라 하셨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에게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구세주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서약은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권능으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역사를 지배하시며, 모든 열방을 심판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섯째,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GOD THE HOLY SPIRIT)
서약은 또한 삼위일체의 연합 안에서 성령 하나님을 사랑함을 밝히며, 성경의 증거 없는 우리의 믿음, 기도, 선교는 인간의 노력에 지나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 없이 우리의 삶은 복음의 아름다움을 반영할 수 없다”고 서약은 확신하고 있다.
여섯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WE LOVE GOD’S WORD)
한편, 서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뤄진 성경이 영감에 의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임을 믿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생각으로 더하거나 뺄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일곱째,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한다(WE LOVE GOD’S WORLD)
하나님이 만드시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쁘게 즐겨야 한다고 서약은 밝힌다. 서술에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이 항목은 이번 문서에서 특별히 눈여겨 볼 만한 점으로, 환경 문제를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서약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열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책무임을 일깨우고 있다.
여덟째,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랑한다(WE LOVE THE GOSPEL OF GOD)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복음의 사람들이며,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고 서약은 말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 안에서의 은혜이며, 이 복음의 은혜를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한 열정이다.
아홉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한다(WE LOVE THE PEOPLE OF GOD)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사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서약은 강조한다. 또한 이는 바람직한 선택 정도가 아닌 반드시 따라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가 복음에 순종한다는 증거가 된다고 서약은 밝힌다.
열째,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WE LOVE THE MISSION OF GOD)
서약은 끝으로 세계 선교는 “하나님과 성경, 교회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핵심되는 이해”라고 설명하며, 세계 선교에 헌신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것을 연합시키고 화해시키는 것임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인해 분열된 세상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서약은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에 드러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다는 점을 천명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로잔 언약과 마닐라 선언의 초안을 작성한 존 스토트 목사가 설립한 국제랭햄파트너십(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국제총재인 크리스 라이트(Wright) 박사가 작성했다. 구약학자이자 선교학자인 라이트 박사는 전 로잔신학위원회 의장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미국/영국 싱클레어 퍼거슨, 영국 로즈 도우셋, 스리랑카 아지스 페르난도, 이집트 아테프 젠디, 브라질 만프레드 그렐러트, 미국/크로아티아 피터 쿠즈믹, 호주 피터 젠슨, 케냐 에스터 몸보, 짐바브웨 빅터 나카, 자메이카 라스 뉴맨, 미국 존 파이퍼, 아니지리아 유수푸 투라키, 홍콩 카버 유 박사가 이번 문서에 참여했다.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 서문, 제1부 영어 원문 보기:
conversation.lausanne.org/en/conversations/detail/11544

마틴 루터의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95개조 반박문

마틴 루터의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95개조 반박문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믿는 자의 전생애가 회개 과정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2. 이 말씀의 뜻은 신부가 집행하는 죄자복과 죄사면에 관한 속죄 성례의 뜻과 전연 다른 것이다. 
3. 그러나 회개는 다만 심적 참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는 외적표현으로 드러나야 한다. 
4. 참된 심적 참회는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해야 할 것이다. 
5. 교황은 자기와 자기교회가 만든 법을 범한 죄 외에는 아무의 죄도 사면할 의지도 없고 권한도 없다. 
6. 교황은 아무의 죄도 사면할 권한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면하심을 공포하거나 보증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의 사면권에 속한 것일지라도 만일 당사자가 거부한다면 교황의 사면은 무가치한 것이다.
반박문 일부 보기
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복종하더라도 모든 일에 겸손치 않는 자의 죄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생존자에게만 적용하고 사망자에게는 적용치 말 것이다. 
9. 성령께서는 (살아있는) 우리를 위하여 교황을 인도하시므로 교황의 반포 법령에서 사망자와 그 필요에 관한 조항은 늘 제외하여야 한다. 
10.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교회법에 의한 참회를 연옥(煉獄)에까지 유보시키는 사제들은 무지하며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11. 성경적인 죄의 적용을 연옥의 죄로 변질시킨 가라지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주교들이 잠든 사이에 뿌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12. 전례에 따르면 교회법에 의한 벌은 사면 전에 선고해서 참된 통회를 하게하였다. 
13.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것이며, 교회법규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로서 그러한 법에서 당연히 해방되어 있다. 
14. 회개치 않은 죄인이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의 심령상태는 오직 공포를 초래할 것이며 그 불완전이 크면 클수록 공포도 또한 클 것이다. 
15. 각설하고, 이 공포만으로도 죄인들에게는 소위 연옥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다. 이 공포는 절망의 공포다. 
16.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차이점은, 구원의 확실성(평강)과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절망의 상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17. 연옥설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선이 증가되어야 공포가 감소될 것이다. 
18. 이상의 지적들은 성경적 근거로서나 이성의 증거로서도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예정성에 대한 확실함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으나 연옥의 영혼들에 대하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죄를 사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기가 정한 죄의 사면에만 국한된 것이다. 
21. 그럼으로 누구든지 교황의 사면부가 사람을 그 받을 모든 형벌에서 석방구원 한다고 선전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의 영들의 죄를 사면할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성경적 방법으로 속죄 해야만 한다. 
23. 모든 죄를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은 가장 완전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세상에는 없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분별하고 허황한 약속에 의하여 버젓이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연옥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은 주교와 교구 신부들의 임지에서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26. 교황은 천국열쇠를 가졌다는 자기 직권으로서가 아니라 도고기도로서 영혼의 죄사함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옳다. 
27. 저들(면죄부 파는 자들)은 돈이 헌금궤에 쩔렁하고 떨어질 때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28. 돈이 그렇게 쩔렁하고 떨어질 때 탐욕과 이익은 늘어나겠지만 교회의 기도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 
29. 마치 성 세베린과 파스칼리스에 관한 전설의 기록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누가 알 것인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 할 수 없거늘 어찌 자기가 완전히 사죄함을 받았는지 알 수 있으랴 
31.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참으로 회개를 하고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거의 없다. 
32. 누구든지 면죄부를 받고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 저와 저의 선생은 다같이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33. 교황의 사죄가 곧 하나님의 지극히 귀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특히 경계해야만 한다. 
34. 그 이유는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 영혼을 연옥에서 사들이려 하거나 고해증(告解證)을 사려는 자에게 참회가 불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비(非)그리스도교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36.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참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가 없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하심을 얻는다. 
37. 참된 그리스도인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면죄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모든 은사를 다 받을 수 있다. 
38. 교황의 사면도 결코 무시할 것은 아니다. 이는 내가 이미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사죄하심을 공포함이 되는 까닭이다. 
39. 면죄부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유능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리라. 
40. 참다운 회개는 징계를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징계를 등한시하고 슬픔을 가지려하는 행위까지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41. 사도적 사죄(교황의 면죄부를 의미함)를 받게하는 행위를 선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알도록 설교해서는 안된다. 
42. 교황의 지도가 면죄부를 미끼로 해서 그것을 자선 사업인양 교훈한 것은 교황의 잘못된 의도임 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 보다 더 선한 일임을 배워야 한다. 
44. 면죄부로 인간은 선하게 되지 못하며 사랑의 선한 행위로만이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 이다. 
45. 오직 면죄부를 위하여서는 교황에게 돈을 바치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딤전 5장 8절의 교훈 같이 경제생활이 어려운 가족을 위하여서는 필요한 것을 저축할 수 있어도 결코 면죄부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부에 대한 판매 행위는 그 어떤 개인에게는 자유로운 행위일지 모르나 그것을 성도들에게 강요해서는 결단코 안된다. 
48. 경건의 신앙생활은 교황에게 면죄부를 사는 일보다 그 개인을 위해 훨씬 좋은 행위인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부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옳은 행위이다. 그러나 면죄부 문제로 하나님께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의 행상행위를 안다면 성 베드로 성당이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세워지기보다 차라리 불타서 재가 된 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려야만 한다. 
51. 교황은 면죄부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 라도 그 돈을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52. 교황 자신도 면죄증서로 영혼을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그 행위 자체도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3. 모든 교회에서 면죄부 문제가 묵인된다면 그렇게 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되는 것이리라. 
54. 말씀을 증거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부 문제를 더 깊게 다루는 행위는 부정을 행하 는 것이다. 
55. 교황의 생각에 사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사죄 축하에는 종 하나만 울리고 행렬도 한번만 할 것이다. 그 반면에 있어서 복음이 매우 중요하다면 복음은 종 백개로 울려 전하고 행렬을 백번하고 성례를 백번해서 전할 것이다. 
56. 교황은 면죄부 발행의 근거가 되는 교회의 보물에 대해 그리스도인에게 제대로 명시하거나 알리지 않았다. 
57. 그것은 현세적 보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렇게 손쉽게 쌓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성경적) 교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58. 그것은 속사람에게 은총으로, 겉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의 교훈으로 항상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덕과 성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교황의 독자적인 뜻을 위한 것일 뿐이다. 
59. 성 로렌티어스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St. Laurentius는 258년 순교했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1. 형벌의 면죄와 교황관리의 유보사건을 위해서는 교황의 권력만으로도 충분하다. 
62. 교회의 참 보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인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러나 참 보물은 먼저된 것을 나중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당연히 미움을 받을 것이다. 
64. 면죄부를 발행한 교회의 보물은 나중된 것을 먼저된 것으로 여기기에 당연히 가장 큰 환영을 받을 것이다. 
65. 복음의 보화는 예로부터 사람을 많이 낚는 그물이었다. 
66. 그러나 면죄부의 보화는 사람의 재산을 낚는 것이 되었다. 
67. 설교자들이 큰 소리로 최대의 은혜라고 외쳐대고 있는 면죄부는 이득이 증가하는 한, 최대의 은총이라고 해석된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면죄부)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69. 주교들과 신부들은 사도의 사면특사를 경건하게 영접할 것이다. 
70. 그러나 저희가 주의할 것은 이 특사들이 교황의 말을 전하는 대신 자기네들의 욕망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71. 사도 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 지어다. 
72. 그러나 누구든지 면죄부 설교자들의 잘못되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을 받을지어다. 
73. 교황은 어떤 방법이든지 면죄부 판매를 방해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분노로써 책망할 것은 당연하겠지만 
74. 그것을 구실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교황은 심한 의분을 나타내어야 하리라. 
75. 교황의 면죄부에 굉장한 능력이 있어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교황의 면죄부로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 죄책을 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77. 베드로가 지금의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면죄부와 같은 그 이상의 은총은 줄 수 없다고 하는 말은 베드로와 교황을 모독하는 것이다. 
78.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현 교황이나 혹은 다른 어느 교황이든지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수 있으니 곧 복음의 능력이요 병 고치는 은사이다. (고전 12:6,9~) 
79. 교황의 문장(紋章)을 붙이고 두드러지게 세워진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다.. 
80. 면죄부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묵인된다면 이것은 주교와 교구 신부들과 신학자들이 책임을 져야한다. 
81. 사죄에 대한 방종적 설교에 평교인으로부터 예민한 질문이 튀어 나오는데 아무리 유식한 학자라도 교황의 위신을 깎이지 않게 하고 대답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82. 예를 들어 말하면 아래와 같은 질문을 어떻게 답변한 것인가 “만일 교황이 지극히 거룩한 자선주의를 가지고 영혼들의 가장 큰 요구를 들어준다면 왜 연옥 전체를 비우지 못하나? 이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다.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하려고 썩어질 돈으로 성당을 건축한다면서 이것(연옥을 비우는 일)이 어찌 사소한 명분일 것인가? 
83. 영혼들이 연옥에서 벗어났다면 왜 그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장례미사나 추도미사를 계속드릴 것인가? 그런 미사를 위하여 기부된 돈은 그런 미사가 소용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84. 하나님을 공경치 않고 하나님의 원수 된 사람이라도 돈만 내면 연옥에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혼을 구출하는 은혜를 베풀진대 왜 돈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은혜로 그런 영혼을 구출하지 않는가? 이것이 하나님과 교황의 무슨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되었는데 왜 아직 돈으로 사는 면죄부로 구원받는 것 같이 인정해야만 하는가? 86. 제일 돈 많은 자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자들이 내는 돈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또한 참으로 회개하고 온전히 사죄함 받은 사람들의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함을 주려는가? 
88. 만일 교황이 하루 한번뿐 아니라 백번 씩이라도 진실한 신자들에게 사죄의 은전을 베풀진대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이 될까 
89. 교황의 목적이 영혼 구원하는 것이요. 돈을 받는 것이 아닐진대 전일에 내린 사죄장이 왜 무효가 되나 그것이 면죄부와 같이 동일하게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인데 
90. 평교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데 이론적으로 증명치 못하고 완력으로만 나아간다면 교회는 그 원수들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그리스도인으로 불결하게 할 것이다. 
91. 만일 면죄가 교황의 바른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설교된다면 오늘의 이러한 어려움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92.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할지어다 평안할지어다” 하고도 평안이 아닌 것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다 물러가라. 
93.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 십자가"하고 십자가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94. 그리스도인들은 저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고통과 죽음과 지옥을 통과해서라도 따를 것이다. 
95.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평안의 보장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고통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