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2010

제7강 신앙의 본질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마15:7-9절입니다.“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6주간에 걸쳐서 예배회복의 필요성 중요성 우리 현실 등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거짓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3개월에 걸쳐서 타락한 예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타락한 예배는 하나님이 전혀 받지 않으시는 헛된 예배입니다. 문제는 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참된 예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비추어보고 조정되어야 할 것이 있으며 조정해야 하고. 또 다른 이유는 오늘날 적지 않는 성도들이 실제로는 타락한 예배를 드리면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신앙의 타락과 예배의 타락
우리의 신앙과 예배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도 타락하고 신앙이 올바르면 예배도 올바르게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되려면 예배가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신앙이 타락했는데 바로 예배가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사29:13절입니다.“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렘12:2절입니다.“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마15:7-9절입니다.“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위 세 구절을 보면 타락한 예배에 대해서 특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그 예배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가 마음이 없는 예배를 드리거나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전혀 받지 않으시는 타락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2.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
1)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는 정성이나 종교적인 헌신이 부족한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예배만 해도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타락한 예배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예배가 정성이 없는 예배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종교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제가 과일도매상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과일 도매상하는 분들의 가장 큰 고백이 누구냐면 무당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릴 때는 가장 좋은 과일들도 드리기 때문입니다. 돈이 얼마나 들든지 제일 좋은 것을 사서 드립니다.

제가 이번에 다른 분이 강의하는 것을 듣는 것도 귀한 시간이었어요. 힌두교도 간지스강 근처에 제사드리는 장소가 쭉 즐비해 있다고 해요. 부라만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하루에 세 차례씩 한번도 빼먹지 않고 성대하게 제사드립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천물 한 그릇 떠 놓고 빌더라도 그 추운 겨울에 찬물로 목욕재개하고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정성을 더해서 빌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자기의 소원이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세상의 종교적인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마음이 없는 입술뿐인 예배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믿는 사람들도 정성이 없는 예배를 입술뿐인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를 든다면 예배 시간에 허겁지겁 달려와서 설교 시간 내에 옆사람과 잡담이나 하나가 돌아가는 분들이 있어요. 복장도 반바지에 쓰리퍼를 끌고 와가지고 예배 시간에 껌이나 씹다가 돌아가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예배를 입술 뿐인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 예배에서 마음의 자세와 헌신은 하나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 입술 뿐인 예배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단정한 정장을 입고 와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면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마음이 없고 입술 뿐인 예배는 그런 외부적인 것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입술 뿐인 예배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봅시다. 이사야 시대의 예배입니다. 오늘 설교할 내용은 포도나무 교회들은 여러분 들었습니다. 복습하는 마음으로 들으세요.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자세로 들으세요. 똑같은 설교를 수많이 들었어도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나는 전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이사야서 1장 10-15절을 보면, 이사야 시대에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예배, 기도, 제사를 드렸는지 보세요.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그들의 예배가 얼마나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까? 그들은 성경대로 안식일을 철저하게 드렸어요. 월삭의 예배를 드렸고 모든 절기를 지켰어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수송아지 수염소 등 흠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을 무수히 드렸어요. 그리고 많이 기도했어요. 여러분 이 정도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정도면 본인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줄 알면서 이처럼 모든 절기들을 엄청난 희생과 함께 지킬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본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예배라고 확신하며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1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12절은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예배라고 합니다. 아까 사29장에서는 입술로는 예배하되 마음으로는 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당만 밟고 가는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예배가 정성이 부족한 예배가 아닙니다. 13절은 헛된 예배, 가증이 여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견디지 못해 하셨다고 합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싫어하셨다고 14절에서는 합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평가가 얼마나 달랐습니까? 본인들은 철저하게 타락한 심지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말하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본인들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아시지요. 이들은 이사야서를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시대의 예배가 타락한 예배였다고 보았을 때 인정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예배가 타락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의 예배가 조상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한 예배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이사야 시대 백성들처럼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2)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이며, 또 하나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사실 신앙의 본질과 삶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3.우리 신앙의 본질과 의식
남은 시간은 타락한 예배의 한 가지 특징이 입술 뿐인 예배인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오늘 남은 시간에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없는 입술뿐인 예배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된 예배를 위해서 뿐아니라 우리 신앙 전반을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1)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인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하지 않는 것은 제사와 번제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진짜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성경을 항상 문맥을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원래 번제와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리고 말라기 시대를 보면, 번제와 제사를 드리지 않자 하나님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번제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핵심적인 것 중심적인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요17장 3절에서 영생을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을 뭐라고 하셨느냐면 너희는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서 7장 21절을 봅니다.“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너희 희생제물에다가 번제물을 더하라고 영어성경은 되어 있습니다. 고기는 너희가 먹어라 하나님이 안받으시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 희생제물과 번제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레위기서나 신명기서나 출애굽기 민수기를 보세요. 아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는 말씀하셔놓고 이제 와서는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 말은 말씀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건질 때 그들에게 명령한 핵심적인 것이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령한 중심적인 것이 무엇이냐면,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신30장도 보세요.“”
그래서 우리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는 도표를 보세요.
첫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라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전적인 순종과 전적인 믿음이 필수입니다.

제가 이번에 러시아 코스타를 가서 한 가지 좋았던 점이 있었어요. 강사로 오신 분들을 만나 교제했는데 좋았어요. 부활절에 그분을 초청했는데 그분이 누구냐면 플루티스트여요. 세계적인 플르티스트에서 사사를 받은 그러면서 쥴리아대를 졸업했고 실력도 뛰어나요.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연주할 때도 풀룻 연주가 그렇게 좋은 줄 예전에 몰랐어요. 저와 제 아내가 그것을 보면서 너무나 기뻤어요.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음악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그 일이 더 이상 그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어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 연예인은 연예인 사업가는 사업가 정치가는 정치가 다 신앙의 본질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사업이 더 이상 자기 사업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앞서 가시면서 주님이 주님의 목적을 위해 인도해 가지요. 정치면 정치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사업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거기서 헌금 일부 떼어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 잘되게 해 달라고 교회에 와서 헌금하고 금식하고 성경 어디에 그렇게 나와 있는가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야 라고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는 당연히 아버지 일이 내 일이 되어야 하지요. 아버지가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 일을 보면 자기 일처럼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하는 출발도 물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의식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소중한 것들입니다.
제가 본질을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를 오해합니다. 의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제가 이 부분을 꼭 집어 넣습니다. 성경에 의한 의식들도 하나님이 명하신 중요한 것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수주일, 십일조와 헌금, 성경공부와 묵상, 기도와 헌신 모두가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왜 의식들이 중요한가? 그 의식들은 한편으로는 본질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본질이 의식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말라기 1:6-8절입니다.“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여 주인이여. 그런데 그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8절에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제사드릴 때 그들이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것으로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태워드리는 것인데 병든 것이나 눈먼 것이나 저는 것이 상관있느냐? 어차피 죽여서 태워드리는 것인데라고.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은 내가 갖고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요. 소위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는 수천만원을 아깝지 않게 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아세요. 그러면서 주여라고 잘만 부릅니다.

여러분 아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세주일 뿐아니라 주인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물질까지 포함됩니다. 우리의 물질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워지지 않으면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접하신 다음으로 가장 많이 설교하신 주제가 돈에 대한 것입니다. 


물질에 주님이 주권이 세워지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자기 소유에서 하나님의 실질적인 주권이 세워진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수천만원 수억원을 아깝지 않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인색합니다. 말라기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권이 세워져 있다면 당연히 십일조를 드리겠지요. 저의 경우에 하나님이 제게 십일조를 점검해보라는 감동을 주셨어요. 세 번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구제헌금으로 많이 드렸어요. 그런데도 십일조 하지 않는 것은 겨우 몇 만원이었는데도 하나님이 점검하도록 말씀하셨어요. 그때 저는 알았어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구나라고요. 2만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중요한 것들입니다.

3)의식들은 신앙의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의식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오늘날 예배 시도 성경공부 묵상 이런 의식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열방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며 날마다 기도하면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해요. 주님 저는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듯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말하면서 성경공부 묵상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전혀 찾지 않아요.그것은 구호 뿐입니다.

의식들 수단입니다.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래요. 사실 주일 예배하면 순서가 예배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관점은 이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하는 예배행위가 예배입니다. 예배의식이 본질이 아닙니다. 예배의식 잘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식은 하나님과 만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예배 통해서 마음껏 찬사하고 감사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그분을 추구하고 목적을 추구하고 길을 추구하며 그분을 찾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주일날 빠지지 않고 왔지만 종교적인 의무를 하는 차원에서 습관적으로 와서 시간만 보내고 돌아가고 하나님의 만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마당만 밟는 예배입니다. 의식이 중요하나 수단입니다.

4)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그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의식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중요한 것이나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고 수단이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을 많이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이것이 이사야 시대의 예배였습니다. 이사야 시대는 수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기도 그 많은 금식 그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호세아 4장 1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와 호세아 시대는 동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그 많은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혼반지의 예를 봅시다. 돈많은 신랑이 있어요. 당신 없이는 못살아. 당신은 나의 산소야 당신은 나의 태양이냐 밤하늘의 별이고... 그래서 신랑이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하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폐물 값으며 수억원을 썼는데 신부에게는 18케이 반지 하나 달랑 주었어요.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말라기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는 어떤 시대이냐. 신랑이 신부를 위해서 수억원을 썼어요. 신부는 너무나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바람을 피워요.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폐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것이 이사야 시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이사야 시대는 의식은 많았어요. 그런데 본질에서는 떠나 있었어요. 말라기 시대에는 본질에서 떠나있었을 뿐아니라 의식마져도 없었어요. 우리 한국교회는 이사야 시대에서 말라기 시대로 가는 중간에 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5)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에서 떠난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한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의식에서 떠난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삶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보세요. 그많은 의식들이 있었어요. 본인들은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1장 4절입니다.“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렘6장 20절입니다. “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와 원방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먼 거리까지 가서 형품을 사서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저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두고 성경이 어떻게 말합니까? 렘 2장 13절입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본인들을 꿈에도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인데.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그럽니다. 그 많은 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니까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제사와 번제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6장입니다. 호6장 1절을 보면,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고 하면서 그 말이 3절을 보면 여호와를 알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도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셔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6)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심판이 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입니다.“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망하는도다 심판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어요. IMF 때에도 오히려 나에게는 축복이었어 하면서 물질적이고 외적인 형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눈 앞에 까지 다가왔습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심판이 눈 앞에 까지 다가왔는데도 그들 중 상당수는 세상적으로 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가장 핵심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를 버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실재가 걷히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실재였습니다. 그를 지도하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계획을 알리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셨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사무엘도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도 베드로 바울 스데반 빌립 등등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인 것은 다 믿어요. 그러나 실재는 삶에서 걷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 여부는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이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실제적으로 임하셔서 지도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고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실질적인 이끄심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삶에 하나님의 실질적인 함께하심이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회개하면 주님이 실질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회개에 대해서도 언급안하고 넘어갔는데 회개도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보세요. 남편이 있어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요. 그러면서 자기 집에 들어오는데 술을 많이 먹고 와서 밤새도록 아내를 괴롭혔어요. 그래서 다음날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한 행동이 너무나 미안해서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람을 여전히 피고 있어요.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 한 두가지 고백한 것이 회개 아닙니다. 회개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온전히 돌이켜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나님의 생명이 회복됩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내가 신앙의 본질에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여러분의 삶을 보세요.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해요. 아 그거야 목사님처럼 몇몇 사람들이야 그렇게 살지 우리같은 평신도들이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그런데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안나왔어요. 모두가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해 세웠다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모릅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나라가 망하는 심판, 악한 자의 압제를 받게 되든지. 영적인 억압 가운데 시달리든지 하겠지요.

사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출19장3절 이하를 보면,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호세아서 4장을 보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거두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중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하면 약속이 이루어지나 본질을 떠나면 약속도 떠납니다.

7)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가 입술 뿐인 예배입니다.
그토록 많은 희생과 정성으로 가득한 예배를 이사야 시대의 예배를 마당만 밟는 예배 입술 뿐인 예배라고 말씀하셨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식이 많을지 몰라도 삶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떠나 있으면 그 의식은 단순한 의식에 불과합니다. 껍데기 뿐입니다. 잘 이해가 안될 수 있어요. 다음주에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성경을 믿을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버릴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내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법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주여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 따위 하나님의 법 따위 그것은 성경이고 그런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로드십 주권된 삶에서 떠나고 타락한 자기의 원하는대로 살아갑니다.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런 의식을 행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 채워주실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으니까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을 많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본질이 없는 예배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입술 뿐인 예배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는 우리 신앙의 전반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펴보시기 다시 한번 주님을 알기를 구하고 존재를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6강 하나님의 길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출29:42-46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우리가 예배회복에 대해서 쭉 살펴보고 있습니다. 먼저 예배회복의 중요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타락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오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길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시기 위해서 예배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중요한 구절임을 볼 수있습니다.

과거에도 여러번 보았지만 출19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내게로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출29:46절입니다.“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아까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시고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지도하사 그들을 인도하시는 그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회복과 예배회복의 절실한 필요를 볼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 그것은 성전된 삶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는 교회회복과 예배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전에 관한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성전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1)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은 신구약 여러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역대하 6장 18-19절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고 봉헌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18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19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이 성전은 근본적으로는 기도하는 집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 예배하는 곳임을 볼 수 있습니다. 사66:1-2절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마가복음 11:17절입니다.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행7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핍박합니다. 너희 두목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멸시했다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면서 성전에 관해서 말하는 말씀이 46절부터 나옵니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의 의도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이스라엘을 다녀왔는데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지을 것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솔로몬과 이사야의 관점과 예수님과 스데반의 관점은 똑같은데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2)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부터 그럽니다. 출15:17-19절입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여기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배하셨다 사람의 손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다.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주의 성소는 하나님이 친히 자기 손으로 세우신 성소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는 주의 기업의 산 앞으로 시온산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소는 완료형으로 이미 세웠음을 말하며, 따라서 여기 성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114편 1-2절에서 말합니다. “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소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만 해도 성전을 지으라고 할 때 회막을 지으라고 할 때 회막이 어디에 있었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회막에 대한 약속입니다. 너희는 대대로 회막의 문앞에 서서 거기 서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경우 회막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막의 회막이 있었고 따로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인 회막은 진 밖에 세웠고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그런데 성막으로 불려진 회막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 있었어요. 그리고 동서남북으로 세지파씩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그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 가운데 두루 행하시고 지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영원히 통치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기를 열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약에 와서 더욱 명맥해집니다. 여러분 신약을 토대로 구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명확한 법칙입니다.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성전만 해도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시는 성전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개인의 성도이고 또 하나는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고전 3장과 고후 6장입니다.


고후6:16-18절입니다.“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구약에서 성전에 대해서 예언하신대로 성취되어서 우리가 교회가 개개인의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성전에 대한 비전은 오늘날 완성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더 나아가 성전의 최종적인 완성은 하늘나라입니다. 계시22장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매 라고 말함으로 최종적인 완성은 하늘나라에서 완성됨을 말합니다. 신약성경도 우리가 성전이 되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간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를 향한 그림자이며 최종적인 완성은 하늘나라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궁극적인 실제적인 완성이고 실제입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읽은 고린도후서 6장을 보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관주를 보면, 구약의 레위기 26:12, 렘32:38절, 겔37:27 등을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구절만 살펴봅시다.


레위기 26:12절입니다.“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얼핏보면 이 성막이 앞으로 세워질 성막 회막 성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에 대한 성취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고후6장은 말합니다. 이 약속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37:26-27절입니다.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일부에서는 이 에스겔서를 토대로 해서 제3성전이 세워질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성전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다시 짐승의 제사가 드려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이것에 대한 성취가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회막에 대한 혹은 회막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비전입니다. 즉 하나님이 영광중에 거하시는 그들 가운데 영광중에 거하시고 그들 가운데 운행하시고 지도하시고 통치하신다는 비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전과 오늘날 교회인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우리 개인과 교회를 성전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고 부활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성전 삼으셨는데,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하나님의 의중과 계획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고 계시는데 지금 그것이 우리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고 잇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리적으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교리적으로만 고백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도가 교회회복인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의도가 실현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까지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추어보고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2.오늘 본문은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도 담고 있습니다.
성막은 교회의 그림자이며 동시에 예배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당시 성막은 예배드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출29:42절입니다.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4절입니다.“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이라고요? 회막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노력으로 하면 바리새인들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하면 교만에 빠집니다. 


우월한 마음이 생깁니다. 누구보다 타락하게 됩니다. 거룩함은 주님의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서 통치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시기를 열망하십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 가운데 운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를 통해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셔서 그들을 지도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예배를 향한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 부분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고 목표인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과연 여러분의 예배는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드려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교회예배의 회복은 일단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가 회복되면 모임 공동체인 교회의 예배는 당연히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예배회복 추구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여러분의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꽝입니다.

이 기준에 비추어진 여러분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보기 위해서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 백성의 예배에 대해서 말하면서 내가 너희를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되고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할 것이고 아론과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레위기 9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속죄제와 화목제를 가져오게 한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6절입니다.“모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23-24절입니다.“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보십시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봉헌할 때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대하5장 13-14절입니다.“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14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것 하나만 해도 그럽니다. 우리의 예배는 과연 하나님이 영광중에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예배입니까? 그것이 우리 개인의 예배입니까? 우리는 그저 주일이 되어서 시간 맞추어 왔다가 졸다가 왜 이렇게 예배가 끝나지 않는가? 하면서 습관적으로 예하지는 않습니까? 종교적인 의무를 하려고 오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배회복 교회회복을 운운하는지 아세요? 구약성경만 해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는데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떠났을 때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보내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을 떠나 심판이 코 앞에 까지 닥쳐왔는데도 그들은 교리적인 것만 붙잡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리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그런 안일함 가운데 있어요. 자신들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도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셨는데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서 우리가 얼마나 떠나있는가를 인식하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어떤 예배가 되기 위해서 목마르며 배고프며 갈망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은 부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흥을 위해서도 우리는 교회회복과 예배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교회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 부분은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을 보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으로 이해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지가 20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것으로 이해합니다. 성전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가운데 넘쳐서 그들이 진정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아도 다니엘이 간절히 기도하는데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17-19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폐허 가운데 있었는데 구하는 내용은 자기 의를 의지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구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폐허 가운데 있으니까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멸시를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들로 인해서 온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어요.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을 위해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영광의 임재로 오시옵소서 합니다. 왜냐하면 오셔야 그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80편입니다. 1-7절입니다.“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19절입니다.“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7절과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가 비추어야 우리가 회복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아론에게 하시는 축복의 기도입니다.민6:22-27절입니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축복하도록 기도하라고 하면서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 빛을 저들에게 비추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토록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추어달라고 갈망하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복된 예배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예배 가운데 친히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22편 3절에서 말합니다.“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3)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 가운데 두루 행하십니다.
성전된 삶의 핵심은 그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며 운행하시며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시고 억압을 파하시고 위로하시고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사 두루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을 만나러 나와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종교적인 의무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예배입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사모함으로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운행하시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행해주시도록 기대하고 사모하고 열망하며 나와야 합니다.

4)하나님은 하나님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도하십니다.
본문을 보세요.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을 지도하십니다. 사실 예배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를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고 중보기도 또한 회복된 예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나갈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중에 하나가 거기에서 우리를 만나고 말씀해주시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새물결선교회가 태동하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하루는 중보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감동하셨어요. 그전 까지는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말세지말에 이 나랄 비켜가지 마세요. 말세지말에 온 세계의 부흥이 예언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부흥으로 임하실 때 우리나라를 비켜가지 마세요. 


하나님 우리나라 산간벽지에 있는 교회까지 모든 교회 가운데 부흥을 보내주세요 였어요.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렇게 감동하시는 것 같았어요. 내가 이 나라에 하나님의 부흥을 담을 수 있는 전초적인 역사를 이미 시작하였다.너는 기도만 하지 말고 찾아가보아라. 그래서 몇주 동안 알아보고 찾아보던 중에 국민일보를 보다가 집회광고를 보는 순간 여기니까 가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한국에 있는 집회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에 대한 놀라운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집회를 개최했던 단체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셨고 성도들도 몇 명 안되는데 그 단체로 수도권 정기집회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얼마 안되서 그 리더가 그 단체의 이름으로 우리 모임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새벽기도를 마쳤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제가 곧바로 전화를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모임만 시작되고 동떨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때는 찬양과 경배를 인도할 사람도 없어서 제가 인도하려고 하면 시작할 때는 반주자와 저 뿐이었습니다. 시작하고 있으면 나중에 사람들이 오기도 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주도권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 집회가 가서 계가 되어 이길수 목사님 김정길 목사님을 거기서 만났어요. 그러면서 일년쯤 후에 이길수목사님 저 몇 분이 연합해서 집회를 하는데 둘째날인가 셋째날 말씀을 전하고 기도사역시간인데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했어요.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나중에 알고 보니 이길수 목사님도 나가 떨어졌고 동일한 감동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렇게 감동하시는 것 같았어요. 우리나라에 하나님께서 첫 번째 유업을 주셨다. 그러니까 짧은 100년 동안에 기독교가 이렇게 세워진 것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지 전에 이렇게 부자된 나라로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탕자가 유업을 탕진한 것처럼 탕진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IMF 시대였어요.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걷히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거의 걷힌 시대였어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감동하시는데 우리나라에 두 번째 유업을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경제적인 회복도 말씀하셨어요. 그 증표로 새물결선교회를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증표라는 말은 새로운 유업은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토대 위에서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러면서 사업만 해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따라가라고 했어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선교관 건립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보기도 하는 중에 한 분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주셨어요. 큰 천사가 보이는데 그런데 날개가 부러져 있고 그 앞에 제가 날개를 고친다고 서 있는데 너무나 작아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날개가 부러진 천사를 보시며 너무나 안타까워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환상이 너무나 또렷해서 가슴이 뛰어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래서 제게 이야기할 때도 가슴이 뛰어서 잘 말하지 못하더라고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천사는 교희 리더십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리더십이 날개가 부러진 상태에 있습니다. 필요는 너무나 큰데 우리가 그것을 치유하는 것은 너무나 작은 그래서 지금 현재만 해도 지난 주일에 광고를 드린 것처럼 일본에 교회 팀장이 와서 열흘 있다가 갔어요. 어떻게 짧은 기간 동안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지 놀랐다고 전화하고 그랬어요. 


똑같은 일이 지난번에 카나다에서 왔다 갔는데 모든 지체들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 바뀔 수 있느냐고 야단이었어요. 영국에 있는 선교사님도 오셔서 여기에 있으면서 가족 중에 아홉명이 구원받고 동생이 놀랍게 치유되고 본인이 놀랍게 회복되어서 천국에 있다 온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이것은 큰 필요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그래서 하나님이 선교관을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하나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더 보여진 것이 새물견선교회 연합하는 교회 뿐만아니라 모든 교회에 예배가 회복되는 것 동시에 중보기도가 회복되어야 하겠더라고요. 그래야 뭐가 되냐?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교회를 인도하시는 것이 되어집니다. 대만만 해도 그럽니다. 하나님이 2년 전에 전국컨퍼런스의 주제가 중보기도였어요. 대만에서 선교사님이 오셔서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시는데 부흥이 곧 올 것처럼 생각될 만큼 그래서 이길수 목사님이 가시게 된 것입니다. 지금 거기에서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고요. 다윗의 장막이 이루어지고 있고요. 화요정기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습니다. 제가 아까 내 예배를 살펴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도 보면 나사로 이야기를 하면 아 그 나사로 우리 옆집에 살았는데. 삭개로 그 사람 내 친구인데. 친구 가운데 행해졌을 만큼 그 당시에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실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전혀 동참하지 못했어요.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속했다고 저절로 예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 자신의 예배를 살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되는지 자신의 예배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회복 내려놓으세요. 포도나무 교회의 회복, 포도나무 교회의 예배회복도 내려놓으세요. 여러분 자신의 예배를 회복하세요.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비전에 비추어서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은 예배에 영광으로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요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요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두루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지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그런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배에 비추어 여러분의 예배를 살펴볼 때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멀리 떠나있다면 여러분이 애통함으로 주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 설 때가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흉을 구하고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긍휼을 구하여 주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예배는 더 회복되고 우리 가운데 주님이 예배를 통해서 역사하는 일이 더 나타날 것입니다.

3.이 모든 것들을 위해 예배회복이 필수입니다.
성전만 해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식양대로 지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식양대로 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교회를 가르치는데 교회회복도 식양대로 되어야 합니다.

예배도 하나님의 기준대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될 것입니다. 출40장에 성막을 세우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되었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19, 20, 23, 25, 29, 32절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배가 모든 교회의 요소가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새워질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33-36절을 보면, “33 그가 또 성막과 단 사면 뜰에 포장을 치고 뜰문의 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더라 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이처럼 회복되어지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 가운데서 두루 행하시며 그들 앞에서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삶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우리 개개인의 삶에서 이런 예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제5강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시편 22편 3절입니다."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예P배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가장 절실한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1.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출33장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출32장에서는 금송아지를 섬기고 잇습니다. 여호와의 절일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금송아지에게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교도들이 제사하는 방식으로 뛰놉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합니다. 모세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돌이킵니다. 출33장을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합니다. 천사들을 보내서 일곱 족속을 멸하고 너희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3절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올라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14절입니다.“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그러자 내가 친히 가리라고 하십니다. 안가신다고 했다가 지금은 가시겠다고 합니다. 친히 가리라는 말은 히브리어는 내 얼굴이 너희 앞에 행하리라는 말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안에 있는 모든 영어성경을 검색해보았더니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두 개를 대조해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온 우중 한번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재하심으로 그들과 실질적으로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성전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 가운데서 돌아온지가 20년이 지났는데로 성전은 아직 폐허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걷혀있는 상태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해하십니까? 성전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두루 행하실 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넘칩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출14장 23-24절입니다. “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여기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로 구름기둥 불기둥 가운데 거하심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두루 행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고유한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나라와 구별하신 고유의 표시가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출33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올라가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내가 친히 가리라 내 임재가 너희와 함께 가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16절에서 말합니다.“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나라와 구별하신 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면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가장 고유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함께하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요. 바로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성령강림사건입니다.

2.하나님의 임재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질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는 그저 교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교리의 고백에 불과해요. 무슨 말입니까?

마18장 20절입니다.“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약속했다. 우리가 두 세사람이 모였으니까 주님이 여기에 계신 줄 믿습니다. 이처럼 교리의 고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한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예배가 올바르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인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부흥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진실로 첫 번째 요점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고 자기들 가운데 그 능력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략 능력과 임재를 의식하는 일이 있습니다. 중략 그들이 언제나 의식하는 것은 자기들 가운데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갑작스럽게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흥 때 뿐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 삶 가운데서 우리 예배가 운데서 당연히 의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에이든 토저 아시지요. 예배회복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 계신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받은 자녀들이 그분의 임재를 명확히 인식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순히 이론으로만 안다. 따라서 그분의 임재가 현재 신자들에게서 실현될 수 있다는 그들만의 특권을 강조하지도 않고 우리의 영적 지위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고 말로만 가르칠 뿐 그분의 임재를 체험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3.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가 아무리 세상적인 부와 명예와 안락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넘친다 해도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어도 하나님의 임재를 잃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이 개념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서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건물이나 프로그램과 같은 외형적인 것만 남습니다. 다시 말하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1)하나님의 임재가 걷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걷힙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은 의식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거하며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삶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실제 우리 삶으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리고 기도해도.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모두에서 이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는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 10장과 11장을 집에 가서 보세요. 지성소 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지성소를 떠나 성전문지방으로 성전문지방에서 예루살렘 동문으로 예루살렘 동문에서 성읍 동쪽 산으로 떠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성전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 시대의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성대한 제사를 드리러오는 유대인들 많은 제물을 드린 많이 기도하는 유대인들 그들이 예배하러 왔을 때 하나님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신뢰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쳤는데도 그들은 외부적인 종교의식에만 집착해서 그것 잘하면 예배 잘 드리고 안식일날 제사 잘 드리면 그 대가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습니다.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예입니다.

신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운행하셔야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 임재가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신약적인 대표적인 예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디 계셔요? 교회 문 밖에 있습니다.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구절은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하지만 원래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수님을 문밖에 세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교리적으로 이해합니다. 두 세사람이 모였으니까 주님이 여기에 계심을 믿습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주님이 계실 것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역이 사업이 발달해서 지역사회도 부요했고 당연히 교회도 부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부자이고 교회도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랬다고 생각하며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후하십니다. 같은 공의를 가지고 보아도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후하십니다. 하나님이 후한 눈으로 우리를 보십시다. 그런 눈으로 보아도 칭찬할 것이 없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니 하나님의 생명이 걷힌 것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약간 언급했는데 누가 보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교계의 리더중에 한 분입니다. 지금은 원로 목사님입니다. 모 기독교 잡지 인터뷰한 내용을 보내주어서 보았는데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을 목회해왔는데 그 교회는 큰 교회입니다. 자신이 목회를 떠나서 돌아보니까 우리 상태가 더욱 보이더라고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을 가지고는 대안이 없다고 말했어요. 


비정상적인 낙관주의가 판치는 상황이라 걷잡지 못할 것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기독교 스타가 나올 것이다. 긍정의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의 글이 아무런 비판없이 나오는 것도 문제다. 그 흐름이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분별력을 잃었다. 이런 시대를 구원하려면 나부터 지도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정도를 걷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데 나부터 용기가 없다. 그러면서 교회가 형식만 남았고 프로그램만 남았지 사실은 생명력이 떨어져 있다. 떨어진 정도가 아니다. 자녀들에게까지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서 어느날은 되겠지 한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에게 주신 고유한 특권이 하나님의 임재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고로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걷혀 있습니다.

3)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면 우리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모양만 남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33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자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함께 가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로 함께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15절을 보면 모세가 말합니다.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주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아니하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사역의 성공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도 천사의 능력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서도 능력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지금 광야 사막생활은 너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꿈에도 소원하고 목표했던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거기가면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물도 마시고 몸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루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엄청난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땅 나중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포도 한 송이를 두 장정이 들을 정도로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를 그냥 광야에 두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안타까운 사실이 무엇입니까? 에이든 토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고유한 특권인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의 용어도 모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데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할 뿐아니라 라오디게아처럼 나는 부자라고 하면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4)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개인의 삶과 예배와 교회 가운데 함께할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우리는 출33장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안가시겠다고 하자 모세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전에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름으로 알고 은총을 입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구하오니 주를 알려주시고 주의 은총을 입게하소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필요와 처지와 목표를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의 손길만 구했어요. 그리고 능력으로 하나님이 역사해서 자기 필요가 채우지만 족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어요. 모세는 하나님 자신과 의중과 의도를 소중히 여겼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기를 원했어요. 하나님의 길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기를 원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그분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단순히 자기 필요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그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분의 의중과 길을 알고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이 바울이 그랬어요.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고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반석이며 보화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이 임재로 함께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가운데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걷힌 줄은 압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새로운 예배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은 프로그램 도입으로 새로운 예배형식 도입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교회 같아요. 에베소 교회가 오늘날 한국에 있다면 진짜 좋은 교회로 소문난 교회일 것입니다. 제가 한국의 모든 교회를 다 가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어느 교회보다도 비교가 안될만큼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고 주님을 보화로 알아서 부활하신 주님을 소유하기 원하고 주님의 길을 알라 그 가운데 행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 가운데서 오셔서 운행하시니까 이런 생명들이 넘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생명이 넘치니까 그랬는지 몰라도. 그래서 주님을 집중적으로 구하고 찾는 첫 사랑에서 떠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할 필요를 발견합니다.

5.참된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수입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에이든 토저의 글을 읽었어요.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한 가지 필수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셔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예배 성령이 주도하시는 예배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예배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보이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일들일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이런 일을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봅니까? 우리의 예배가 회복 되기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기를 위해서 그럽니다.

회개만 해도 그래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져야 중심의 회개가 일어납니다. 다윗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어요. 선지자를 보내서 기름부었고 그날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했어요. 그날부터 그에게 찾아온 것은 시기와 질투였어요. 사울이 죽이려고 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오히려 섬기고 잘해주었고 치유했는데.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굴 속에 숨어있는데 사울이 잡으려고 왔다 대변보려 들어와서 죽일 절호의 기회였지요. 그러나 죽이지 않고 옷깃을 잘랐지요. 그가 자르자 마자 곧바로 깨듣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에게 손을 댄 것을 회개했어요.

오늘날은 이런 정도는 죄로도 여기지 않습니다. 그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관계, 사람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것 뿐아니라 관계적인 면에서 불순종의 차원에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배하러 나오면서도 왜 회개가 안되는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있고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는 없습니다. 입술로만의 회개 표면적인 회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처럼 중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해야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러니까 선순환 악순환입니다. 
본문말씀 시편 22:3절입니다.“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즉 예배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더 회복되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더 함께함으로 마음껏 하나님이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열망해야 합니다.

6.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성도들은 교회 가운데 그리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도록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일이 없으면 그 예배는 껍데기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모든 성도들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임재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면 절대로 안됩니다. 애통해하며 갈망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실 때까지 갈망해야 합니다. 이론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안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를 각오로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교회성장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더 많은 돈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직장에서 승진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자신의 안락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더 우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저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심으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는 5년마다 특별한 일을 하셨어요.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이지 기대가 됩니다. 15년이 오도록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거둘 때가 있어요.

저는 예배 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가. 또 찬양팀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가. 그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가 화려하고 사람들이 많아도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 하나님이 임재를 거둘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절박합니다. 집중적으로 제가 하나님을 구합니다. 그러면 저부터 돌아옵니다.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왜 그럽니까? 하고 지속적으로 찾습니다. 또렷하게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께 물으며 찾습니다. 먼저 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응답하지 않으면 그러면 찬양팀의 문제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찾습니다. 그들을 축복하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며 묻습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하나님 그러면 우리 교회가 문제이니까? 하고 묻습니다. 


왜 우리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까? 한번 임재가 걷혔다고 예배를 중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낮예배에도 임재가 걷혔는데 저녁예배 때도 임재가 걷히면 저는 더 이상 예배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오ㅔ냐하면 그냥 예배를 지속하면 순서만 떼우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마당만 밟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를 중단하고 모두가 주님의 임재를 구하며 그 문제를 찾습니다. 그랬을 때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교회에 안좋을 영향을 미칠 요소들을 드러내서 제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과 모든 지체들이 우리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우리 신앙과 예배를 점검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테스트는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예배 속에 하나님이 임재로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임재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주일날이 되어서 교회오고 예배 마치고 돌아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직장과 예배 가운데 회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찾고 어떻게 삶을 조정해야 할지를 찾으십니다. 그러면서 삶을 돌이키고 삶을 조정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원인을 제거하시고 임재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점진적으로 더욱 충만하게 임하고 열방 가운데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