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2010

제7강 신앙의 본질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마15:7-9절입니다.“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6주간에 걸쳐서 예배회복의 필요성 중요성 우리 현실 등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거짓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3개월에 걸쳐서 타락한 예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타락한 예배는 하나님이 전혀 받지 않으시는 헛된 예배입니다. 문제는 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참된 예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비추어보고 조정되어야 할 것이 있으며 조정해야 하고. 또 다른 이유는 오늘날 적지 않는 성도들이 실제로는 타락한 예배를 드리면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신앙의 타락과 예배의 타락
우리의 신앙과 예배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도 타락하고 신앙이 올바르면 예배도 올바르게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되려면 예배가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신앙이 타락했는데 바로 예배가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사29:13절입니다.“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렘12:2절입니다.“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마15:7-9절입니다.“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위 세 구절을 보면 타락한 예배에 대해서 특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그 예배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가 마음이 없는 예배를 드리거나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전혀 받지 않으시는 타락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2.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
1)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는 정성이나 종교적인 헌신이 부족한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예배만 해도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타락한 예배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예배가 정성이 없는 예배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종교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제가 과일도매상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과일 도매상하는 분들의 가장 큰 고백이 누구냐면 무당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릴 때는 가장 좋은 과일들도 드리기 때문입니다. 돈이 얼마나 들든지 제일 좋은 것을 사서 드립니다.

제가 이번에 다른 분이 강의하는 것을 듣는 것도 귀한 시간이었어요. 힌두교도 간지스강 근처에 제사드리는 장소가 쭉 즐비해 있다고 해요. 부라만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하루에 세 차례씩 한번도 빼먹지 않고 성대하게 제사드립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천물 한 그릇 떠 놓고 빌더라도 그 추운 겨울에 찬물로 목욕재개하고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정성을 더해서 빌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자기의 소원이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세상의 종교적인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마음이 없는 입술뿐인 예배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믿는 사람들도 정성이 없는 예배를 입술뿐인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를 든다면 예배 시간에 허겁지겁 달려와서 설교 시간 내에 옆사람과 잡담이나 하나가 돌아가는 분들이 있어요. 복장도 반바지에 쓰리퍼를 끌고 와가지고 예배 시간에 껌이나 씹다가 돌아가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예배를 입술 뿐인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 예배에서 마음의 자세와 헌신은 하나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 입술 뿐인 예배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단정한 정장을 입고 와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면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마음이 없고 입술 뿐인 예배는 그런 외부적인 것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입술 뿐인 예배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봅시다. 이사야 시대의 예배입니다. 오늘 설교할 내용은 포도나무 교회들은 여러분 들었습니다. 복습하는 마음으로 들으세요.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자세로 들으세요. 똑같은 설교를 수많이 들었어도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나는 전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이사야서 1장 10-15절을 보면, 이사야 시대에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예배, 기도, 제사를 드렸는지 보세요.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그들의 예배가 얼마나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까? 그들은 성경대로 안식일을 철저하게 드렸어요. 월삭의 예배를 드렸고 모든 절기를 지켰어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수송아지 수염소 등 흠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을 무수히 드렸어요. 그리고 많이 기도했어요. 여러분 이 정도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정도면 본인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줄 알면서 이처럼 모든 절기들을 엄청난 희생과 함께 지킬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본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예배라고 확신하며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1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12절은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예배라고 합니다. 아까 사29장에서는 입술로는 예배하되 마음으로는 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당만 밟고 가는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예배가 정성이 부족한 예배가 아닙니다. 13절은 헛된 예배, 가증이 여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견디지 못해 하셨다고 합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싫어하셨다고 14절에서는 합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평가가 얼마나 달랐습니까? 본인들은 철저하게 타락한 심지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말하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본인들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아시지요. 이들은 이사야서를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시대의 예배가 타락한 예배였다고 보았을 때 인정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예배가 타락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의 예배가 조상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한 예배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이사야 시대 백성들처럼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2)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이며, 또 하나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사실 신앙의 본질과 삶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3.우리 신앙의 본질과 의식
남은 시간은 타락한 예배의 한 가지 특징이 입술 뿐인 예배인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오늘 남은 시간에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없는 입술뿐인 예배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된 예배를 위해서 뿐아니라 우리 신앙 전반을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1)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인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하지 않는 것은 제사와 번제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진짜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성경을 항상 문맥을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원래 번제와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리고 말라기 시대를 보면, 번제와 제사를 드리지 않자 하나님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번제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핵심적인 것 중심적인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요17장 3절에서 영생을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을 뭐라고 하셨느냐면 너희는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서 7장 21절을 봅니다.“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너희 희생제물에다가 번제물을 더하라고 영어성경은 되어 있습니다. 고기는 너희가 먹어라 하나님이 안받으시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 희생제물과 번제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레위기서나 신명기서나 출애굽기 민수기를 보세요. 아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는 말씀하셔놓고 이제 와서는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 말은 말씀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건질 때 그들에게 명령한 핵심적인 것이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령한 중심적인 것이 무엇이냐면,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신30장도 보세요.“”
그래서 우리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는 도표를 보세요.
첫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라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전적인 순종과 전적인 믿음이 필수입니다.

제가 이번에 러시아 코스타를 가서 한 가지 좋았던 점이 있었어요. 강사로 오신 분들을 만나 교제했는데 좋았어요. 부활절에 그분을 초청했는데 그분이 누구냐면 플루티스트여요. 세계적인 플르티스트에서 사사를 받은 그러면서 쥴리아대를 졸업했고 실력도 뛰어나요.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연주할 때도 풀룻 연주가 그렇게 좋은 줄 예전에 몰랐어요. 저와 제 아내가 그것을 보면서 너무나 기뻤어요.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음악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그 일이 더 이상 그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어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 연예인은 연예인 사업가는 사업가 정치가는 정치가 다 신앙의 본질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사업이 더 이상 자기 사업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앞서 가시면서 주님이 주님의 목적을 위해 인도해 가지요. 정치면 정치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사업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거기서 헌금 일부 떼어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 잘되게 해 달라고 교회에 와서 헌금하고 금식하고 성경 어디에 그렇게 나와 있는가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야 라고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는 당연히 아버지 일이 내 일이 되어야 하지요. 아버지가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 일을 보면 자기 일처럼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하는 출발도 물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의식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소중한 것들입니다.
제가 본질을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를 오해합니다. 의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제가 이 부분을 꼭 집어 넣습니다. 성경에 의한 의식들도 하나님이 명하신 중요한 것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수주일, 십일조와 헌금, 성경공부와 묵상, 기도와 헌신 모두가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왜 의식들이 중요한가? 그 의식들은 한편으로는 본질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본질이 의식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말라기 1:6-8절입니다.“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여 주인이여. 그런데 그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8절에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제사드릴 때 그들이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것으로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태워드리는 것인데 병든 것이나 눈먼 것이나 저는 것이 상관있느냐? 어차피 죽여서 태워드리는 것인데라고.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은 내가 갖고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요. 소위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는 수천만원을 아깝지 않게 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아세요. 그러면서 주여라고 잘만 부릅니다.

여러분 아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세주일 뿐아니라 주인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물질까지 포함됩니다. 우리의 물질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워지지 않으면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접하신 다음으로 가장 많이 설교하신 주제가 돈에 대한 것입니다. 


물질에 주님이 주권이 세워지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자기 소유에서 하나님의 실질적인 주권이 세워진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수천만원 수억원을 아깝지 않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인색합니다. 말라기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권이 세워져 있다면 당연히 십일조를 드리겠지요. 저의 경우에 하나님이 제게 십일조를 점검해보라는 감동을 주셨어요. 세 번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구제헌금으로 많이 드렸어요. 그런데도 십일조 하지 않는 것은 겨우 몇 만원이었는데도 하나님이 점검하도록 말씀하셨어요. 그때 저는 알았어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구나라고요. 2만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중요한 것들입니다.

3)의식들은 신앙의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의식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오늘날 예배 시도 성경공부 묵상 이런 의식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열방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며 날마다 기도하면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해요. 주님 저는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듯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말하면서 성경공부 묵상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전혀 찾지 않아요.그것은 구호 뿐입니다.

의식들 수단입니다.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래요. 사실 주일 예배하면 순서가 예배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관점은 이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하는 예배행위가 예배입니다. 예배의식이 본질이 아닙니다. 예배의식 잘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식은 하나님과 만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예배 통해서 마음껏 찬사하고 감사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그분을 추구하고 목적을 추구하고 길을 추구하며 그분을 찾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주일날 빠지지 않고 왔지만 종교적인 의무를 하는 차원에서 습관적으로 와서 시간만 보내고 돌아가고 하나님의 만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마당만 밟는 예배입니다. 의식이 중요하나 수단입니다.

4)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그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의식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중요한 것이나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고 수단이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을 많이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이것이 이사야 시대의 예배였습니다. 이사야 시대는 수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기도 그 많은 금식 그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호세아 4장 1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와 호세아 시대는 동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그 많은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혼반지의 예를 봅시다. 돈많은 신랑이 있어요. 당신 없이는 못살아. 당신은 나의 산소야 당신은 나의 태양이냐 밤하늘의 별이고... 그래서 신랑이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하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폐물 값으며 수억원을 썼는데 신부에게는 18케이 반지 하나 달랑 주었어요.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말라기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는 어떤 시대이냐. 신랑이 신부를 위해서 수억원을 썼어요. 신부는 너무나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바람을 피워요.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폐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것이 이사야 시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이사야 시대는 의식은 많았어요. 그런데 본질에서는 떠나 있었어요. 말라기 시대에는 본질에서 떠나있었을 뿐아니라 의식마져도 없었어요. 우리 한국교회는 이사야 시대에서 말라기 시대로 가는 중간에 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5)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에서 떠난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한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의식에서 떠난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삶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보세요. 그많은 의식들이 있었어요. 본인들은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1장 4절입니다.“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렘6장 20절입니다. “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와 원방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먼 거리까지 가서 형품을 사서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저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두고 성경이 어떻게 말합니까? 렘 2장 13절입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본인들을 꿈에도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인데.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그럽니다. 그 많은 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니까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제사와 번제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6장입니다. 호6장 1절을 보면,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고 하면서 그 말이 3절을 보면 여호와를 알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도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셔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6)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심판이 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입니다.“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망하는도다 심판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어요. IMF 때에도 오히려 나에게는 축복이었어 하면서 물질적이고 외적인 형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눈 앞에 까지 다가왔습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심판이 눈 앞에 까지 다가왔는데도 그들 중 상당수는 세상적으로 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가장 핵심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를 버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실재가 걷히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실재였습니다. 그를 지도하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계획을 알리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셨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사무엘도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도 베드로 바울 스데반 빌립 등등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인 것은 다 믿어요. 그러나 실재는 삶에서 걷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 여부는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이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실제적으로 임하셔서 지도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고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실질적인 이끄심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삶에 하나님의 실질적인 함께하심이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회개하면 주님이 실질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회개에 대해서도 언급안하고 넘어갔는데 회개도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보세요. 남편이 있어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요. 그러면서 자기 집에 들어오는데 술을 많이 먹고 와서 밤새도록 아내를 괴롭혔어요. 그래서 다음날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한 행동이 너무나 미안해서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람을 여전히 피고 있어요.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 한 두가지 고백한 것이 회개 아닙니다. 회개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온전히 돌이켜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나님의 생명이 회복됩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내가 신앙의 본질에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여러분의 삶을 보세요.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해요. 아 그거야 목사님처럼 몇몇 사람들이야 그렇게 살지 우리같은 평신도들이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그런데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안나왔어요. 모두가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해 세웠다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모릅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나라가 망하는 심판, 악한 자의 압제를 받게 되든지. 영적인 억압 가운데 시달리든지 하겠지요.

사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출19장3절 이하를 보면,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호세아서 4장을 보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거두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중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하면 약속이 이루어지나 본질을 떠나면 약속도 떠납니다.

7)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가 입술 뿐인 예배입니다.
그토록 많은 희생과 정성으로 가득한 예배를 이사야 시대의 예배를 마당만 밟는 예배 입술 뿐인 예배라고 말씀하셨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식이 많을지 몰라도 삶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떠나 있으면 그 의식은 단순한 의식에 불과합니다. 껍데기 뿐입니다. 잘 이해가 안될 수 있어요. 다음주에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성경을 믿을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버릴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내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법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주여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 따위 하나님의 법 따위 그것은 성경이고 그런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로드십 주권된 삶에서 떠나고 타락한 자기의 원하는대로 살아갑니다.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런 의식을 행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 채워주실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으니까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을 많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본질이 없는 예배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입술 뿐인 예배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는 우리 신앙의 전반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펴보시기 다시 한번 주님을 알기를 구하고 존재를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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