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2010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 - 앤드류 머레이

피 안에 있는 생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6:53-5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이 말씀들은 주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물이 이중적인 효과를 내듯이 이 거룩한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세탁하는데 사용하면 그것이 깨끗이 씻어주는 역할을 합니다만 물을 마시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는 효과가 납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충만히 알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피를 마시는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씻는 것과 마시는 것이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물로 씻는일도 필요하고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고 또 생명을 유지케 하는 일입니다.

물로 깨끗이 씻지 않으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만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아예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물을 마심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의 충만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 즉 그 피의 효과를 마음을 다하여 누리지 않고서는 - 영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라는 말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그 말이 더더욱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피를 마시는 일은 모세의 율법으로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를 마시면 극심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마시는 일을 거론하셨을 때에 그들로서는 자연히 혐오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말은 그들의 종교적 감정을 말할 수 없이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지극히 깊고 영광스러운 진리들을 분명히 전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있으셨다면 아마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라는 표현으로 말씀하는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이해 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1."그피를 마신다"라는 표현은 어떠한 축복을 묘사하는가?
2. 이 축복이 어떻게 우리 속에 역사하는가?
3. 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그 피를 마시다는 표현은 어떠한 축복을 묘사하는가
물로 씻는 것보다 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친밀하고 더 강력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바로 앞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나누는 교제 속에는 깨끗이 씻음이나 거룩하게 함보다 훨씬 더 깊은 축복이 있습니다.

아니 이 "그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시사하는 축복의 영향력이 얼마나 널리 미치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행할 뿐아니라 우리 속에서 무언가를 행합니다.

곧 우리의 속을 전연 새롭게 하는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을 두종류로 구분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와 영혼의 자연적인 생명을 지녔습니다.

그들 가운데 경건하고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주님은 그들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한 그들 속에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하늘의 생명 그리스도 자신이 소유하셨고 그가 친히 베푸시는 생명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그 외부로 부터 영양분을 받아야만 합니다. 자연의 생명은 빵과 물로써 자연적으로 영양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은 예수님 자신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과 음료로 영양분을 받아야 하는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바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돠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그가 인자로서 이땅에서 사셨던 그 생명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속에서 우리 주님은 그생명의 본질을 설명하시면서 더욱더 강력하게 이 점을 강조하십니다. "내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임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육체가운데 있는 영생을 드러내며 육체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이 신적인 능력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육체적인 몸 안에 그 생명이 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자기의 살을 먹고 자기의 피를 마시는 자들은 곧 그의 몸을 그들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삼아 거기애 참여하는자들은 그들의 몸안에서도 영생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그들을 다시살리리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인간의 몸안에 있는 영생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그 몸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에 비로소 우리의 몸도 그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료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참된"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하실때에 사용하셨던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주님은 이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그저 상징에 불과한 것과 실질적인 실체인 것 사이의 차이를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땅의 양식은 참된 양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을 가져다 주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참된 양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져다 주고 유지시켜주며 더구나 그림자처럼이나 그저 상징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그렇게 자주 반복하신다는 것은 곧 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충만 하고도 참된 의미에서 영생이 우리 속에서 영양분을 받고 유지되는 참된 양식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료다" 이 양식의 실재와 능력을 지적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내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안에 거하나니"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은 주님과의 지극히 완전한 연합의 효과를 이루어 냅니다. 그의 살과 피가 그런 영생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우리 주님은 여기서 그를 믿는 자들은 그저 그에게서 마음에 이런 저런 영향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지극히 친말하고 또한 영구히 지속되는 연합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러므로 인자의 피를 마시는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곧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요 그와 함께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이냐 하는것을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6:57)

우리 주님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주님과 우리의 연합의 모형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뉠 수 없는 신적인 본성에 있어서 두 위격이 참으로 하나이신 것처럼 그렇게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연합이 두분 하나님 사이의 연합과 마찬가지로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본성은 몸을 떠나서는 존재 할수 없기 때문에 이 연합에 몸도 포함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인간의 몸을 취하실 그 몸을 스스로 준비하셨습니다. 이 몸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나누는 존재가 되었고 우리 주님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축복을 충만히 받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라는 거룩하고도 신비한 표현을 통해서 성경이 베풀어 주는 모든것들을 조심스럽게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2. 이 축복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가? 혹은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여기서 나타나는 첫번째 사상은 "마신다"는 것은 그피의 능력에 관하여 우리가 깨닫는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으로 깊이 진정으로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사의 말에 흠뻑 빠져서 그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경우에 그 사람의 말을 "마신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의 보배로움과 능력에 대한 감각으로 가득 채워질 경우 그가 그피에 대한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기뻐할 경우 그 사람이 전심의 믿음으로 그피를 스스로 취하고 그의 속마음으로 그 피의 생명을 주는 능력을 납득하려 힘쓰는 경우에 우리는 그사람이 "예수의 피를 마신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피로 말미암는 구속과 깨끗이 씻음과 거룩하게 함에 대해서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모든 내용을 그의영혼 깊은 곳으로 흡수해 들이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는 아주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피로 말미암는 충만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이 표현이 아주 영광스럽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을 거듭거듭 사용하심으로써 이보다 더한것을 의도하신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그더 깊은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것은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가버나움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실제로 성찬을 다루고 계셨던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훗날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에는 성찬에 대하여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개혁자 츠빙글리의 이름을 따라서 불리는 한가지 견해에 따르면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저 영적진리의 증표 혹은 상징물로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에 영양을 주고 새힘을 주는것과 똑같이 그만큼 확실하게 - 오히려 그보다 더 확실하게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닫고 우리의 것으로 삼은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영혼에 영양을 주고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름이 붙어있는 또 다른견해에 다르면 성찬에 참여하는 일에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모종의 감추어진 방식으로 사람이 깨달을 수 없는 빙식으로 그러나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영양을 받아서 심지어 우리의 몸조차도 주님의 몸의 능력을 통하여 영생의 능력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몸의 부활과 성찬 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일과 연관을 짓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성찬이 요구하는 육체적 임재는 여기서(성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이 우리의 영에게 영생에 대한 의심할바 없는 확신이 될 뿐 아니라 육체의, 불멸까지도 확신하게 해준다.

이것이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부끄럼없이 그것은 너무나 높은 신비여서 나의 영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고 나의 말로써 표현할수가 없더고 시인할 것이다.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 이상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살이 그렇게도 무한히 먼거리에서 우리에게 도달하여 우라의 양식이 된다는 것이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 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우리의 감각을 초원하는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력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것을 믿음으로 포용하여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과 피를 신성하게 전달하셔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심어주시며 그것이 마치 우리의 뼈와 골수를 찔러 관통하듯 한다는 사실말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전달받는 일은영생을 유업으로 받기를 사모하는 모든이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1:23)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력하고 상합하여 각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몸을 자라게 하느니라"(4:15,16)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고전6:15.16) 그리스도께서 몸과 영으로 우리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아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우리는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쳬라"는 영광스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주님의 살과 피 안에서 하나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것입니다.

사도는 그 하나됨의 역사가 너무나도 높고 귀하여 그것을 해명하기 보다는 그저 그것에 대하여 놀라워하는 것입니다. 성찬에는 그저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누리는 것보다 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 제76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가 흘린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그 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을 포용하여 죄사함과 영생을 받는다는 뜻임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 또한 동시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성한 몸과 점점 더 연합되어 우리가 -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위에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의 살 중의 살이 되며 그의 뼈 중의 뼈가 되어 영원토록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에 표현된 사상은 성경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실때에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들과 사람을 구분지어주고 사람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가 흙으로 지음받은 몸으로 영적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몸을 통하여 욕심과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몸을 구원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기 위하여 충만한 구속이 계획된 것입니다.

구속이 완전히 이루어질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육체로 임하신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주님 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가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지신것이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영은 물론 육체까지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구속의 첫 열매들로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이며 한 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몸에 그의 살에 그의 뼈에 속 한자들입니다.

성찬을 지키는 가운데 주께서 몸에도 임하셔서 그것을 소유하시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그의 성령으로 우리의 영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몸으로 부활 시에 있는 구속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이미 이 땅에서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어서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역사가 더욱 영광스럽게 진행될 것입니다.

몸을 포함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거기에 참여하는 정도만큼 그 역사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그리스도의 진정한 피"를 의도적으로 먹고 마십니다.

루터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있기 때문에 불신자가 그 떡을 먹어도 결국 거룩한 몸을 먹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떡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방식으로 정말로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몸과 피의 능력을 양식과 음료로 받아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가 영생에 참여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찬에 대해서 말씀한 모든 내용이 "예수의 피를 마시는 일"에 충만히 적용됩니다.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과연 지극히 친말하고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발효되는 그러한 깊고 깊은 영적 신비인 것입니다.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의 연합을 충만히 누리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실 때에 드러내 보이신 바로 그 기질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자가 될 때에 그것이 바로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피는 몸에 생명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를 바라면 거기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인간적인 강력한 방식으로 그 피가 하늘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강건케 할 것입니다. 피 속에서 부으바 된 생명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옛사람의 생명이 죽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일이 어떻게 해서 주님의 하늘의 생명에 고귀하게 참여하는 것이 되는자를 깨닫는 데서 믿음의 가장 고상하고 영광된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의 내용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3.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가장 깊은 신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앞에서 이미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주 예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 주시기를 구할 때에 깊고 깊은 경외심을 갖고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충만한 연합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올바로 배우게 됩니다.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

그저 죄 용서함으로만 만족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풍성히 마시게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자는 영혼과 육체의 구속의 그 충만한 능력을 체험하여 예수님께 있었던 것과 동일한 기질을 그 자신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되기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이 "피를 마시는 일"에 그저작은 부분만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에수님의 목표와 동일한 목표 -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 - 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아서 힘쓰는 사람은 영생의 능력이 자기 몸에서 역사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이 말씀들이 너무 높다거나 너무 비밀스럽다거나 하는 선입관 때문에 두려워하고 뒤로 물로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사고방식을 갖기를 사모합니다. 그가 하늘에 속해 있고 또한 그리로 향하여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서 오는 양식과 음료를 얻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갈증이 없이는 음료를 마시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와의 완전한 교제를 갈망하는 것이 바로 갈증이요 그것이야말로 피를 마시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인 것입니다. 갈증 있는 영혼이 이 생명을 주는 음료를 마셔 하늘로부터 말미암아 새로워지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시는 일이 하늘의 신비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만유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계신 하늘에는 또한 "뿌린피"도 있습니다.(12:23,24)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실때에 - 말하자면 손으로 붙잡고 가실때에 -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력의 범위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나 그의 생명에 대하여 그피 가운데 우리의 몫에 대하여 그리고 그 피의 살아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들은 그가 - 성령께서 -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그 영광스러운 현실의 그저 희미하고 가느다란 빛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피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말 그대로 그피를 마시는 증거를 과연 우리의 몸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몸의 각 지체가 하나씩 정맥을 통해서 심장에서 계속해서 새로이 흘러 나오는 피를 받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몸은 각 지체마다 끊임없이 풍성하게 피를 빋아 마시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예수와 연합시키시는 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께서 이처럼 피를 마시는 역사를 내적 삶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하신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어려운 말"이라고 하며 불평하자 주님께서는 "살리는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신적인 신비를 우리속에서 생명과 능력으로 그 신비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참된 살아 있는 체험으로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에게 베풀어 지리라는 고요하며 강하고 확정된 믿음의 기대가 반드시 우리 편에서 있어야 합니다.

그 보배로운 피가 할수 있고 또한 베풀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정말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주께서 친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의 피를 마시고 생명을 얻도록 하시리라는것을 믿읍시다.

이제 우리는 그피의 화목하게 하고 깨끗이 씻고 거룩하게 하는 효과들을 더 잘 깨닫게 되었으니 그피의 그런 효과들을 믿고 마음을다하여 계속 해서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극한 확신과 기쁨으로 주님께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 주님 주의피가 제게 생명을 주는 음료입니다. 저를 그피에 씻으시고깨끗하게 하신 주께서 날마다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기를"가르치사 제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제안에 거하시도록 만드시옵소서." 주께서 반드시 구하는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 / 앤드류 머레이/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원을 선포하는 아름다운 교회" (사52:1-12)


이 땅에는 아름다운 교회 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형적인 건물보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
"시온이여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1). 하나님은 시온 즉 이스라엘이 포로생활로 지치고 좌절과 절망에 잠자고 있는 것에서 깨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고 힘을 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절망과 고난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다면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옷은 비싼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회개와 거룩함을 말합니다.

날마다 삶을 회개하고,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사단과 죄와 사망에 노예 되었던 삶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회개와 거룩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믿음의 자유를 누리는 교회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2.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에 목마른 자들은 공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좋은 소식, 평화의 소식, 복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전도입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일까? 건물이 아름다운 교회일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일까?

아닙니다. 거룩함의 옷을 입은 자들, 복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교회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게 하는 그런 교회, 바로 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52: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죄악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도 이런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앉고 서 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내 자신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거룩함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추하고, 부끄럽고 더럽히는 자리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또한 떠나야할 자리에서 과감하게 떠날 때 당당하게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성도들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거룩함의 옷을 입고, 예배하며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2010. 09. 12.
나눔의 교회
최영호 목사님 말씀

교만한 자들은 거절, 겸손한 자들은 은혜

성경은 『높은 눈과 교만한 마음과 악인의 쟁기질은 죄니라.』고 말씀한다( 21:4). 이는높은 눈교만한 마음악인의 쟁기질은 열매를 볼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죄라는 말씀이다.

도대체 높은 눈과 교만한 마음과 악인의 쟁기질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모든 죄와 거짓의 아비가 사탄이듯이, 교만의 아비도 사탄이다.

이는 사탄의 죄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자신을 높이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12-14).

따라서 욥기 41:34에서는 사탄에 대해 『그가 모든 높은 것들을 바라보니 그는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고 말씀한다(욥기 41:15 참조).

그러므로 모든 교만은 사탄적인 것이며, 사탄과 하나되는 지름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을 하는데(고후 4:4),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이다.

교만의 아비로서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모두자신을 높이는 자이며, 자신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이고, 또 자신의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다( 10: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듯이 교만을 미워하시며( 6:17; 8:13), 교만에 대해 벌하신다( 31:23). 자신을 높인 교만의 아비 사탄은 끝없이 깊은 구렁까지 낮아지며( 14:15) 그의 교만한 자식들도 결코 벌을 면치 못하여( 16:5) 그와 함께 가장 낮은 불못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교만이라는 돌에 걸려 넘어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고 교만의 아비의 종으로서 행하게 된다는 심각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멸망하기에 앞서 교만해지며( 18:12), 또한 몰락하기에 앞서 그 영이 거만해진다고 말씀한다( 16:18).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그리스도인도교만의 문제에서 결코 예외가 되지 않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밥 존스 목사님은교만은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다”(Pride is the stone over which many people stumble)라는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는 교만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늘 자신을 살펴보고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교만했을지라도 이제는 히스기야가 그의 마음의 교만에 대하여 겸손해지고 그와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겸손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노를 내리지 않으셨던 것에서(대하 32:26) 교훈을 얻어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 먼저 자신을 낮추셨던 것처럼( 2:8) 우리 스스로도 낮아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거절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4:6)는 말씀 앞에 엎드려 은혜를 받는 사람들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조승규 / 킹제임스 성경신학대학 교수 (바이블 파워)

진정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가?

창세기 6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무엇이 은혜이며 여호와께 입은 은혜는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들이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 은혜를 받았다 하거나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진정 은혜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베노아흐 마차이 헨 베에이네이 예흐봐”(`hw"hygt; ynEy[eB. !xe ac'm' x;nOwgt;)라는 히브리 문장에서는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노아라는 이름은 단순히 안식이라고 가르쳐 왔는데 하나님의 생명으로 울타리를 치게 하는 존재가 바로 노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땅에 최초로 배를 즉, 방주를 만든 인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노아(x;nO)는 이름 속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울타리를 치게 하는 존재로 방주를 만든 기술자이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사명을 갖고 사역을 감당한 존재다. “마차이”(ac'm)라는 단어는 도달하다, 배워서 책임 있는 사역을 감당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노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철저하게 배웠으며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사명과 사역을 감당한 존재다.

 “헨”(!xe)이란 단어는 은혜라고 해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은혜보다는 남과 달리 생활 속에서 무엇이 나아지거나 달라지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언행이 옛날과 달리 변화하게 되면 은혜로운 현상이라고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녀의 성적이 올라가거나 남편의 직장에서 진급이나 월급이 나아지게 되면 은혜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아파트를 구입하게 되거나 부동산의 가격이 올라가게 되어 은혜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느 재난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짐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위와 같은 내용을 은혜로 여길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와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게 된 것을 은혜로 말하지 않을 위인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단순히 내 생활에 변화에만 초점을 맞춰서 표현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은혜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베이네이”(ynEy[eB.)라는 단어는 ‘눈의 쌍, 마음에 들다. 닮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문장을 서로 연결해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도달하여 책임 있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닮음”이란 단어는 누구의 모습을 흉내 내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느 아이가 그 부모를 닮거나 그의 친 가족 중에 누구를 닮은 모습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혈통이나 유전에 의한 생명의 전통 속에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나 친척들의 혈통에 의해 빼 닮아서 나오지만 그들의 생명들이 다양성에 의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다양성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이 달라 보이더라도 한 줄기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사상과 생명의 고유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신학이 다르고 교리가 다르며 전통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일까?

말씀 속에 숨겨진 원형과 본질은 일맥상통하여 있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주장하고 있는 신학사상들과 교리의 차이점이 생긴 원인이 무엇인가? 분명히 말씀의 원형과 본질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를 담은 사상을 덧칠하여 엉뚱한 방향을 흘러가게 한 신학과 교리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인간들이 조작한 기독교의 하나님과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데 여기서 분별해야만 된다. 이것이 영분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에 의한 은혜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고 있는지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께서 쳐 주신 울타리 안에 내가 있는지 기독교 하나님께서 쳐 주신 울타리 안에 내가 있는지부터 인식하지 못하면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기관에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성경의 하나님에게 속해서 내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 익히며 그의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도달해 있는지 발견해야 한다.

내가 지금 현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현재 누구와 함께 어디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면 나의 앞길은 암흑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으로 인한 법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성령보다는 자신의 이성과 생각과 판단과 의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성령의 도움 없이 목회해라”는 말이 목사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는 표현을 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목회하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혼적인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목회하다가 심한 병에 걸리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나기도 하여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고통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

진정 은혜로운 목회를 할 수 없는가? 또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가? 본인도 이런 깊은 내용을 알기 전까지 얼마나 혼적인 설교와 목회를 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는 착각 속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것이 마귀사탄의 전략임을 모르고 살아왔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그 은혜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이상한 교리에 빠져 거듭나고 계속 거듭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는 은혜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 요한복음 1 16절에 은혜 위에 은혜더라는 말씀이 은혜 더하기 은혜, 은혜 곱하기 은혜라는 계산만 하고 풀기 때문이다.

은혜를 한 번만 옳게 받으면 은혜가 무수한 은혜가 계속 내게 임한다는 놀라운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본인이 원어성경을 처음 접하면서 일주일 만에 깨달았지만 그 은혜를 체험하여 장성한 분량에 도달했다고 느껴진 것이 20년 이상이나 걸렸다. 아직도 너무나 미흡하며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하는데도 글을 쓰고 가르치고 있다.

본인에게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질문하면 한 번도 다 못 읽었다고 하면 어떻게 성경을 다 읽지도 그리고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현재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들 중에 성경 전체를 다 알고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이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을 깨달은 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 뿐이다. 최근 산본에 있는 목사님을 만나 뵙고 들은 얘기가 자신이 겨우 거듭나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군부대에서 자신에게 군종을 맡기는 바람에 맡게 되었다고 한다. 성경도 찾지 못하고 기도 한 줄도 하지 못한다고 말했더니 군목이 올 때마다 성경 찾는 법,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군종생활을 감당했다고 한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군종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독실한 유교 집안이라 목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간증을 들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그 어느 누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편에서 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쳐 주신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져 가는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면서 완전히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바로 도달했다는 의미다.

비록 한 명을 놓고 목회하는 분이나 수천 명 수만 명을 앉혀 놓고 목회하는 분과 비교하지 마라. 초라한 목회와 신앙생활, 화려한 목회와 신앙생활,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것이다. 얼마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생명에 도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깨닫게 하고 있는지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루아침에 닮아지는 것이 아니다. 배 속에 아기가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닮아진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12번이나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몸이 되어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감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원형과 본질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닮아가는 은혜를 늘 항상 체험하기를 바란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당신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David Wilkerson

구원받은 지 몇 년 된 사람이 있고, 일 년 된 사람도 있고,몇 개월 또는 몇 주 된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은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참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휘하의 훌륭한 군병이되려면 단지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이상의많은 것들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으로세례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 시대에 어떤 믿는 이들은 성령이 계신 것조차 알지못했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못하였노라”(사도행전 19:2). 

이 사람들은 구원받았지만성령 충만이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리가 성령의 권능과 사역을 통하여 구원받았다고믿습니다. 그러나 이 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례를주시고, 충만케 하시고 , 소유하신다고 성경이 말씀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 전까지는세상으로 파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순전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내쫓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이미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개종하는 사람들이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이상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자원하여 죽고자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위해서세상으로 파송하는 데 그분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중의 어떤 것도 충분치 못했습니다.분명히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니라”(행 1:8).

진실로 성령을 원하십니까? 
당신에게 성령이 임하여 불로세례를 주시기 원합니까? 
이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확신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가진 것이 없으며 성령의 권능과 인도함이 없이는 아무것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분이 지금도 세례를 베푸시고, 지금도 그들의 몸을소유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강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만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저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것이라”(사도행전 2:38-39).

매일 매 시각, 전 세계의 많은 무리들이 성령으로 세례를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이 약속을 읽었거나설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청구하며부르짖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특별히 말세에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그 때에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행2:17-18). 

구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 하늘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하나님은 당신이 성령 안에서 살고 행하기 원하십니다.필요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찾으러 뛰어다녀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전하고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귀신을쫓아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과 권능으로충만한 증인들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어두운 의식이 삶을 피곤하게 한다.

어두운 의식이 삶을 피곤하게 한다.
오늘날 많은 왜곡된 생각들이
신자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곡되고 어두운 많은 의식들이
신자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시며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알면
모두가 다 도망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피곤한 것이며 세상은 사악하고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고 못된 사람들이라고 여깁니다.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인생과 신앙이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의식들은 바뀌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인생은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천국을 위한 아름다운 여정이며
십자가의 삶은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정화의 과정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르치는 학교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람과 관계들은 다 가르침을 위하여,
깨달음을 위하여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행복한 것입니다.
천로역정은 험난하지만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모든 관계들은 다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의식을 바꾸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어릴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계획과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을 통하여
아름다운 신부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많이 부족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배려 가운데 있습니다.
깨달을수록 우리는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깨달을수록 우리는 기뻐하며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믿고 감사하며 순종하며 나아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믿음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헌신과 희생과 섬김에 대하여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눈이 열릴수록, 성장해갈수록 우리는 더 깊은 사랑과
헌신과 겸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은 감격으로 감사하며 고백하며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항상 균형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 본 글을 게재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사랑하는 하나님 - 묵상말씀 – 삼상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22:1-2

기브아에서 칭송을 받고 높아진 이후에, 다윗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사울의 은총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3천 명의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뒤쫓게 했습니다. 때때로 이렇게 급격한 반전이 삶 가운데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도망친 다윗은 광야에 위치한 어둡고 축축한 아둘람 굴을 본거지로 삼습니다. 적어도 초반에는, 혼란스럽고 분했을 것입니다기브아가 그를 높이고 성공을 안겨주며 그를 시험했다면, 아둘람은 그를 역경으로 시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정체성이 오직 자기 안에서 깊이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서, 그를7년 동안 아둘람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이러한 계절을 겪으면서 깨닫고 얻은 교훈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그를 지켜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기름부음 받은 것으로나 성공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의 연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역경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자입니다. 이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주신 유업입니다.

나의 기도
아버지, 광야에서도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성숙하게 하시고, 더욱 친밀하게 이끄셨던 것을 제가 항상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갑자기 아둘람의 계절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고자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출처:사랑하는하나님/ 마이크 비클의 365일 묵상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