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世界) 2차 대전(大戰)때에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집단(集團) 수용소(收容所)에서 지냈다.
1944년의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建物의 한 구석으로 갔다.
아버지는 어렵게 구한‘버터’한 조각을 진흙으로 만든 주발(周鉢)에 넣고 거기에 심지(心地)를 꽂은 뒤 불을 붙였다. 촛불을 구할 수 없어‘버터’불을 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희망(希望)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어둠을 밝히는 이 불이 곧 희망(希望)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여호와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랍어의‘안드로 포스'는 사람이란 뜻인데 본래(本來) 의미(意味)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存在)를 말한다.
인간(人間)이 인간됨은 희망을 가짐에 있다.
진정(眞情)한 희망은 예수를 바라봄에 있다.
절망(切望)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믿음은 새 생명(生命)을 얻는 희망이다.
출처:복있는 그리스도인
3/28/2011
질그릇이 되지 말라 - 케네스 코플랜드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디모데후서 2:20)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일을 하기로 예정되었는가?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에게 이렇게 질문하면 그들은 겸손하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금그릇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성경말씀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작은 질그릇으로 지어졌으니까요."
감사하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물론 하늘 나라에는 금그릇도 은그릇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릇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따르면 "누구든지 이런 것 (불의)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더럽고 부패한 것들을 접촉하지 않고 분리되면, 확장번역본)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다.
금그릇이 되느냐, 질그릇이 되느냐,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그렇다면 왜 많은 믿는 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대수롭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가?
왜 질그릇이 되는 것에 만족하는가?
왜 질그릇이 되는 것에 만족하는가?
그들은 금그릇이 되기에 필요한 한가지, 곧 헌신된 삶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각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부터 돌아서서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하나님의 길로 기꺼이 가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이여, 하나님은 지금 이 지구상에서 신나는 일을 벌이고 계시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예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계시다. 이렇게 흥분된 세대에 질그릇으로 남아 있지 말라! 아직 금그릇이 되겠다는 헌신된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당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바란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당신이 세상의 방법들을 기꺼이 버리고 더 높은 차원의 방법, 곧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도록 당신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지금 결단하라. 때는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의 마지막 찬란한 물결이 온 세상에 넘쳐 흐르고 있다. 질그릇에서 한방울씩 떨어뜨릴 때가 아니다. 금그릇에서 넘치게 부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성경본문: 디모데후서 2:15-26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용서받는 자의 삶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헤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죄를 용서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이면 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용서해 주지 못할 처지에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남편의 부정을, 아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웃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입니다. 부흥사인 코리텐 붐 여사가 독일에 와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패전에 완전히 짓눌려 침울해지고 죄책으로 말미암아 몸둘 곳을 몰라하던 독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듣고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여사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자 줄을 서서 여사와 악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던 여사는 손을 내밀며 다가가서는 한 남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수용소에 있을 때 여사를 벌거벗기고 학대하던 병사였습니다. 전쟁중에 여사의 가족은 유대인을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죽고 여사만 겨우 살아 남아 고국인 환란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여사는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 가족을 죽게 한 장본인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사가 “주님, 나는 이 남자를 용서할 수 없으니 나를 도와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자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여사가 천근같이 무거운 팔을 내밀어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사에게로 쏟아졋습니다.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으로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받은 우리들은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녀를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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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성령-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선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신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완성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선교의 영되신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하고 하늘나라를 확장하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선교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기도 -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님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죄를 용서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이면 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용서해 주지 못할 처지에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남편의 부정을, 아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웃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입니다. 부흥사인 코리텐 붐 여사가 독일에 와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패전에 완전히 짓눌려 침울해지고 죄책으로 말미암아 몸둘 곳을 몰라하던 독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듣고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여사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자 줄을 서서 여사와 악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던 여사는 손을 내밀며 다가가서는 한 남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수용소에 있을 때 여사를 벌거벗기고 학대하던 병사였습니다. 전쟁중에 여사의 가족은 유대인을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죽고 여사만 겨우 살아 남아 고국인 환란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여사는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 가족을 죽게 한 장본인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사가 “주님, 나는 이 남자를 용서할 수 없으니 나를 도와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자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여사가 천근같이 무거운 팔을 내밀어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사에게로 쏟아졋습니다.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으로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받은 우리들은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녀를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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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성령-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선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신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완성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선교의 영되신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하고 하늘나라를 확장하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선교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기도 -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님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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