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2011

조직을 개편하고 사람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처방은 조직을 새롭게 하고 적절한 사람들을 세워서 분주한 일들을 위임함으로 자신들은 본질적인 사역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구제의 일을 위임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사도들에게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내려놓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제하는 일에는 약간의 권력이 생길 수도 있고, 나누어 주는 것을 자기의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인간적인 유익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사도로서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였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한 믿음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끊임없는 문제해결의 연속입니다. 좋은 결단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좋은 결과를 주십니다(7절).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태를 파악케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본질적인 것의 훼손은 교회가 부흥하여 숫자가 많아져서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원망이 생긴 것과 지도자들이 분주하여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원망은 신령한 공동체의 공공의 적입니다. 사단은 원망을 시발점으로 하여 공동체 파괴공작을 실행합니다.

원망이 커지면 미움이 되고 미움은 더 큰 화를 불러옵니다. 원망으로 파당이 생겨나게 되면 공동체는 분열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분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소홀하게 만들어서 교회를 근본적으로 병들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단은 지도자들을 분주하게 만들어 본질적인 사역을 못하게 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태를 파악하게 하셨고 사도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원인을 발견하였습니다(2절). 문제의 원인은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섣부른 처방보다는 올바른 진단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처방에 앞서 올바른 진단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자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에덴 동산을 거닐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그 영이 죽었으므로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정*의를 소유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만물을 아시고 슬퍼하시고 분노하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영이 살아났고 이제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 대화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논리를 세워 정연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리있게 하나님께 구하면 먼저 우리 자신에게도 확신이 오고 은혜가 되면 하나님께서도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기준을 삼아야 하나님 앞에 질서 정연하며 논리가 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재판관과 변호사가 헌법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듯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 축복을 기도할 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8:9)는 말씀을 들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가 있습니다.

또 병든 사람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라는 말씀을 들어 병 낫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감으로 넘치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생활의 터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중언부언한다든가 인간의 생각을 내세워 억지를 부린다면 그것은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누는 대화는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복이 나의 복이 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부족함과 행복함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연설을 듣고도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늘 없는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분들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8/30/2011

사랑은 행복입니다

사랑은 열중에 아홉을 다 주고도 나머지 하나를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내 뜻이 아닌 하늘의 뜻이며 헛되이 주고 받을 수 없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렵고 힘들게 하는 보잘 것 없는 이 세상을 새삼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픔에 쓴잔을 마실지라도 웃음으로 그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를 위해 그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며 사랑은 받는 것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라

얼마 전 어느 가정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녔고 가장인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습니다. 단지 저희 일행을 초대한 그 집의 아내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요.

드디어, 저녁이 준비되고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은 채 그 집 어머니가 감사 기도를 드렸지만 기도 중에도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장난을 계속합니다. 타이르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분노가 폭발했지요.
“이 못된 자식들아! 엄만 너희들 때문에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어. 너희 같은 녀석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았을거야!” 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아이들도 아이들 아버지도 어디론가 나가버립니다.

혼자 남은 어머니의 하소연입니다.
“저는 도저히 못 살겠어요. 남편은 무능해서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이들은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아요.”

이 가정의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가장이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권위를 무시하는 아이로 자라게 되고,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 채 더욱 무능하게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부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 주세요. 남편이 잘하고 못하고와 관계없이 가장이라는 신분으로서의 권위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그들의 아버지를 높여 주세요. 그러면 뭔가가 달라질 겁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은 가정에 세워주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출처/갓패밀리

고난 속에 흘린 순교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합니다.


사도행전 7 : 54 ~ 8 : 3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무리들은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회개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는 쪽으로 반응합니다. 말씀 앞에서 스데반과 이스라엘의 모습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는 스데반의 설교는 같은 동포로서 무한한 애정과 겸손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뻐기거나 정죄하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지 이스라엘이 불신앙의 죄악을 깨닫고,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돕고자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랑과 진심이 담긴 스데반의 설교는 백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됨을 깨달았지만 오히려 분노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스데반을 돌로 치려 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너무나 아프게 자신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찔렀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그들에 의해 순교하고 맙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더욱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훗날 극적인 회심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고난이 있지만, 복음때문에 받는 고난은 신앙과 교회성장의 핵심 열쇠입니다.

안티 기독교의 시대를 살고있지만 불신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사각오의 자세로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핍박받고 순교하면 영광이요, 영접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이라야만 진정한 하늘 위로를 받습니다. 
말씀은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가고자 하는 층의 층수를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목적하는 층에 도달하게 됩니다. 층수를 누르지 않고 있으면 아무리 엘리베이터 안에 오래 있어도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무리들은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았지만 오히려 설교자를 향해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 커녕 스데반을 죽이고, 나아가 살기가 등등하여 온 교회를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어둡고 음습한 곳에 갑자기 빛이 비췰 때, 그 곳에서 살던 벌레들이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숨을 곳을 찾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복음을 향해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둠 속에 살지 말고, 회개와 순종으로 말씀의 빛 앞에 나아갑시다.

찔리고 아프더라도 말씀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시간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고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 주시며, 하늘의 위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지금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와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

8/28/2011

♥영원한 죽음과 멸망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가 젊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가 품행이 나쁜 친구에게 유혹되어 술을 마시러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떠올라 친구에게 핑계를 댔습니다. 모처럼 만났는데 일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었네.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겠네.

그는 자칫 친구의 집요한 유혹에 넘어갈 뻔했으나 지금이 생을 결정짓는 순간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라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클리블랜드는 고학 끝에 감옥의 간수장에서 시장, 그리고 지사가 되었고, 드디어는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가 미국 전역에 전해지자 감옥에 갇혀 있던 한 죄수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죄수는 바로 젊었을 때 클리블랜드에게 술을 마시러 가자고 유혹했던 친구였습니다.

지혜의 초청과 음녀의 유혹은 인생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부름에 응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권한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지혜의 초청에 응한 사람은 선택하는 권한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지혜의 초청에 응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영광 가운데 들어가지만, 음녀의 유혹에 응한 사람은 영원한 죽음과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웃음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웃음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입니다.
이 웃음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웃음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웃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니 만큼 기쁘고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있고, 또 부끄러움을 당해 겸연쩍게 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처구니 없어서 웃는 웃음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아브라함의 웃음이 바로 어처구니 없어 웃었던 웃음인 것입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엎드려 웃었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상식으로 생각해 보아도 백 세 된 아브라함과 구십 세 된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상상한다 하더라도 웃을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가 막히는 웃음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의 날이 되어 아들 이삭이 태어나자 아브라함의 기가 막히는 웃음은 즐겁고 기쁜 웃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쓰디쓴 웃음이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기까지의 과정을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즉 "정녕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새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우리에게 불치의 병이나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실패의 곤경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기억하면 곧 기쁨의 웃음을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믿어지게 되는 것은 말씀이 심어진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김을 매어주고 비료를 공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헌신과 기도로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이름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름을 고쳤다는 것은 자기의 이미지를 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성공하려면 '나는 할 수 없다'의 무능력적인 이미지를 '할 수 있다'라는 창조적인 이미지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창세기 17:17)

자아가 깨어진 사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위대한 종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자아가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특별히 택하여 세우셨지만 25년 동안 그는 자아를 죽여야 했습니다. 기근을 당하여 애굽에 내려가고, 거기서 아내를 팔아먹는 수치를 당하고, 조카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래서 그가 얼마나 깨뜨려졌던지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고 바칠 정도로 자아가 죽었습니다.

야곱도 20여 년 동안 자아를 죽였습니다. 그는 외삼촌 집에서 품삯을 착취당하고, 거기서 도망쳐 나오다가 라반의 군대에게 잡혀 죽을 뻔하고, 마지막에 얍복 강 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진 다음에야 완전히 자아가 죽었습니다. 야곱의 자아가 죽자 하나님께서 형의 군대를 막아 주시고, 그를 위대한 축복의 조장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하시기 위해 13년 동안 흙구덩이에서 종으로, 종에서 감옥으로 옮기면서 자아를 깨뜨려 나중에는 자기를 판 형들을 만날 때 사랑과 눈물로 맞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아를 깨뜨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했던 모세가 나중에는 깨어지고 깨어진 나머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아가 깨어진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어떤 문제로든지 얻어맞고 자아가 깨어져서 앉아 있는 성도님들은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지금 실패해 있는 것이 아니고 성공의 문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죽고 그 자리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지렁이 같은 여러분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때, 그때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타작 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깨뜨리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를 통해 돌이 날아올 때에는 감사하십시오. 사업이나 생활을 통해 돌이 날아온 때도 환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돌을 허락하셨습니다. 돌이 날아올 때에는 피하지 말고 맞아서 여러분을 깨뜨리십시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말씀은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8/27/2011

예수님께서 최후에 말씀하신 '땅끝'은 어디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끝'은 막연(漠然)하게 추상적(抽象的)이거나 관념적(觀念的), 또는 영적(靈的)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실적(寫實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바르게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지켜질 수 있다. 모든 '시작'이나 '처음'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끝'을 막연한 이해로 간과(看過)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뜻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땅끝'은 어디인가?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의 땅을 어디가 '시작'과 '처음'이고, 어디가 '끝'이라고 할 수 있으랴. 자칫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 끝'의 사실적 이해가 무척 난해(難解)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단순하게 바꾸면 결코 난해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둥근 것에도 '시작'이나 '처음', 그리고 '끝'이 분명히 있고, 그것은 '같은 곳'이 되기 때문이다. 마차가지다. 지구는 둥글기에 '시작'이나 '처음', 그리고 '끝'은 '같은 곳'이다. 이것은 애매(曖昧)한 궤변(詭辯)이 아니라 진실(眞實)이다.

그렇다. 예루살렘이 복음이 전파된 '시작'이요 '처음'이라면, 복음이 마지막으로 전파되어야 할 곳도 '예루살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意圖)는 무엇이었을까? 이동성(移動性)을 마음에 두신 까닭이다. 복음을 전파하려면 한 곳에 머물러 정착(定着)하지 않고, 자꾸만 움직여 사방(四方)으로 흩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전파는 역동적(力動的)으로 이동하면서 일어나야 한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기 시작한 예루살렘에 안주(安住)하여 정착되지 않고, 온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와 온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으로 흩어져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 전파가 처음 시작한 곳인 예루살렘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글/ 불꽃 石一進

아빠의 마음.


“그리하여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58:8)

브랜든이라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빠가 거실에서 초콜릿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브랜든은 '아빠는 초콜릿을 우유와 함께 드시는 것을 좋아해. 우유 한 잔을 아빠에게 갖다 드릴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의자에 올라가 찬장 문을 끌어당겼습니다.

"와장창~" 찬장 문이 열리며 다른 쪽 찬장을 쳐서 손잡이에 흠 자국을 냈고, 유리잔을 꺼내다가 옆 잔을 건드리는 바람에 잔 두 개가 떨어져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브랜든의 눈에는 그것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생각하는 것은 아빠에게 우유 한 잔을 갖다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브랜든의 아빠는 아들을 막아야 되나 어쩌나를 생각하다가 좀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브랜든은 의자에서 내려와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는 우유통을 꺼냈습니다.
그는 뚜껑을 벗겨내고 유리잔 주변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잔에도 얼마는 들어갔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마룻바닥에 쏟아졌습니다. 드디어 잔이 차자 브랜든은 우유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습니다.

"아빠, 나 아빠께 드릴 것이 있어요."

그는 뛰어 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우유를 마루와 소파에, 심지어 아빠에게까지 엎질렀습니다. 브랜든은 그렇게 하고 나서야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깨어진 유리, 온 마루에 엎지른 우유, 열린 찬장들, 그리고 우유를 뒤집어 쓴 아빠를 보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젖은 눈물 사이로 아빠를 바라보았는데 아빠는 곧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빠는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꼬마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랑하는 예쁜 꼬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브랜든의 아빠는 팔을 펴서 그의 어린 꼬마를 꼭 껴안고 말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야." -화끈한 예화 / 웨인 라이스 (2002/10/14)

8/25/2011

향기로운 제물로 인한 풍성한 열매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시41:3)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형식주의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형식주의와 형식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형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형식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의 형식주의는 자신의 영성을 갉아먹는 요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헌금을 할 때에도 내가 교회를 다닌게 얼마인지, 내가 직분이 이런데 헌금을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의 모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에 조금더 보탬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업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개업했으니 예배를 드려야 잘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 중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쓰러져 있었다면 어쩌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돕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형식주의며 알맹이가 없는 신앙의 형식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고 나아가야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형식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빌립보 교회가 바로 사도바울에게 그런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사도바울을 돕는 형식이 아닌 은혜를 바탕으로 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7절 말씀을 보면 감옥에 갇힌 어려운 상태 속에 있는 사도바울이지만 사도바울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4절 말씀을 보면 괴로움에 참여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는데,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잘못 없이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의 사역에 물질적 필요를 도운 교회가 빌립보교회 외에 아무도 없었음을 의미하며 빌립보 교회는 계속해서 사도바울을 후원하고 도왔음을 의미합니다. 이 세 구절에서 반복되는 참여한다는 말은 함께 교제한다는 말로 함께 기쁨과 즐거움과 아픔을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기도함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둘째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해 사도바울이 풍족함을 누렸듯이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8/24/2011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는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나라)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heavenly kingdom)이다. 이 세 왕국은 서로 비슷해 보이고, 또 사람들에 따라서 같은 나라라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없다.

1. 천국(The Kingdom of Heaven)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 이 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천국"을 피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천국은 구약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다.

천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제시된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들 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천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천국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생각되기가 힘들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 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왕국으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되는 나라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다루는 부분은 주로 "예표"로서 등장하지만, 그분의 통치와 왕국을 다루는 부분은 직접적인 서술로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어떻게 이 땅을 다스리기 원하셨는지, 노아를 통해 어떻게 다스리기 원하셨는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신정국가로 삼아" 통치하기 원하셨는지, 그리고 메시야를 통해 어떻게 이 지구를 다스리기 원하시는지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는 특별한 용어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가 아니라 실제적인 나라이며, 눈에 볼 수 있게 이 땅에 세워질 정치적인 나라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신정통치의 왕국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 왕국(천국)을 완성하시는 분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천국이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다.

이 나라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라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나라는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나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나라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3.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
이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하늘 나라는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나라는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이 나라가 천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나라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 천국은 이 땅에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나라를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나라"(heavenly kingdom)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천국"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천국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구령할 때에도 "예수 믿고 천국가십시오"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오히려 "천당 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2에서 우리를 위해 처소(저택들)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천당"(天堂)이라는 말은 성경 용어는 아니지만 "하늘에 있는 집"을 말하므로 요한복음 14장에 따라서 옳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수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틀리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출처: 내 사랑 중국

큰 능력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제가 죽은 것이라”(약2:15~17)

처음 예수를 믿고서는 누구나 으레 인생을 완전주의로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후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합니다.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의롭지 못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걱정하지 않고 매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지만 조그마한 벽에 부딪히기만 해도 환멸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밝히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죄악 세상에 살 때에는 하수구 곁에 있던 냄새 나는 그릇이었다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청결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질그릇은 질그릇입니다. 10년 20년 믿었다고 이 질그릇이 사기 그릇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그릇은 먹지 아니하면 배고프고, 입지 아니하면 춥고, 마시지 아니하면 갈증을 느낍니다. 이 질그릇은 언제나 육신의 정육,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려고 하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변화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 속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지면 그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외형적인 질그릇만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담겨 있는 질그릇을 보십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성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는가 하면 살아나고, 없는가 하면 풍족하고, 쓰러지는가 하면 다시 일어나며, 패배하는가 하면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질그릇 속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께서 계셔서 질그릇이 깨이질 것 같으면 보배가 붙들어 주고, 낙심할 것 같으면 보배가 이를 붙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어떤 때는 천사가 된 것도 같고 어떤 때는 마귀가 된 것도 같은 경험을 하고 낙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아무래도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보배를 모시고 있으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꽉 들어차고 성령 충만하며 여러분은 승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의 연약함을 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바라보며 모십시오. 질그릇의 약점을 보배가 책임져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4:7)

일어서는 모습이 예쁘구나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출23:25)
 
1984년 미국 LA 올림픽에서 중국 여자 선수가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신은 동양 여자로 몸집도 아주 왜소한데, 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운 동작과 침착한 모습으로 고공에서 아름답게 다이빙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 선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100미터 경주를 좋아했습니다. 근데 경주에 나가면 자주 엎어지고 넘어졌죠. 그래서 항상 거의 맨 뒤로 들어오던 제게 어머니는 늘 이렇게 얘기해 주셨어요.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1등 하는 것보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어. 나는 네가 일어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견딜 수가 없단다. 너는 아름다운 내 딸이야.’

”다이빙을 시작하면서 실수도 하고 사고도 났지만 그때마다 저의 어머니는 동일하게 말씀해주셨어요.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이빙 스탠드에서도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저는 그녀의 인터뷰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맞아! 내 하나님도 그러실 거야. 내가 넘어졌을 때, 내가 쓰러졌을 때, 내가 죄 속에 빠졌을 때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가 일어날 때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 ‘그래, 내게는 네가 일어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1등 하지 못해도, 내 인생이 화려한 스타 인생이 아니어도 주님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존재하는 것이 내게는 기쁨이란다.”

<회개행전 / 이동원> ⌜더 깊은 묵상⌟ 제공

8/23/2011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하라

최근 나는, 어떤 기다림으로 인한 설레임과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교차되는 삶을 살고 있다. 지구촌 처처에서 들여오는 난리와 전쟁, 기상이변으로 인한 홍수와 가뭄의 지진, 화산폭발 등의 소문들이 끊임없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는 예고라고 여겨지기에 그러하다.

세상의 종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웬지 자꾸만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그 예수님은 지금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신 분이시다. 이로서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나를 구원을 확증해주신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벅차게 기다려지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또 다른 마음 한 구석에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 예수님께서 내게 그동안 당신이 주신 사명에 대하여 결산을 요구하실 때, '정말 당당하게 충성하였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라고 자책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웬지 '주님의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예수님을 뵙기에 염치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때때로 20 수년전에 별세하신 외조모님을 생각한다. 외조모님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외조모님은 그 말씀을 그냥 해보는 말씀이 아니셨다. 당신은 정말로 '살아서 주님을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셨다. 그런 말씀을 하시던 외조모님은 언제나 참 진지하셨다. 그런 외조모님의 믿음이 오늘은 나의 믿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죽기 전에 오신다. 그냥 '그럴 것이다'가 아니다. 분명히 '오신다'고 믿는다. 지금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문과 소문들이 '이것을 증명한다'고 믿는다. 정말이지 남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61세의 나이 결코 적다 할 수 없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분명히 살아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기다림으로 설레이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교차되고 있다.

일찍이 저명한 의사로부터 '5년밖에 못 살 것'이라는 오진(?)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비록 남들처럼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 병약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지도 않는다. 지체적인 장애로 어려움은 겪고 있지만, 그것이 생명을 위태로운 빠지게 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주 건강하다. 노아 홍수 이후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명을 120으로 제한하신 만년을 충분히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이 넘쳐난다.

지금까지 120년 중 꼭 절반의 생애를 살았다. 지난 해부터 '남은 절반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 때는 다소 방자하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에 찼던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그런 무모한(?) 자신감이 서서히 사라진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애의 정점에 오르며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큰 고민으로 작용했다.

올해부터 절반의 후반부 생애가 시작되었다. 이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난 해에는 장기금식을 한 바 있다. 금식할 때, 주님은 내게 새로운 깨달음과 청년의 비전을 주셨다. 이제부터 그 일을 향하여 앞으로 전진하려 한다. 결코 뒤를 돌아보거나 중지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속담에 이르기를 '시작이 반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올해는 내게 있어 아주 중요한 해다.

예수님은 500여명의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 예고되었다. 이제 그 때가 곧 가깝게 이르렀다. 바짝 긴장하여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중에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했던 다섯 처녀들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 설레이는 마음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하라. 이를 위해 깨어라. 세상의 잠에 취하여 졸거나 정신없이 잠자는 자가 되지 말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으라. 다가 올 미래에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막연한 준비가 아니다. 관념과 이상도 아니다. 실제적인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엎드려 기도하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으며, 그 말씀에 근거하여 엎드려 기도하는 자가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세상의 징조를 깨닫는 지혜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 세상의 징조를 깨닫는 지혜만이 예수님이 오실 날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코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날 여러 가지 징조들을 통해 그날이 임박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예고해 주신다는 사실을 유의하라. 그러므로 징조를 깨닫는 지혜를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것이 곧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요, 다가 올 미래가 준비된 자만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정녕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하였는가? 그래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 없다.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곧 오신다. 경성하여 깨어 있으라. 다기 올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하라. 미래를 준비한 자만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알리는 세상의 징조를 깨달을 수 있다. 징조를 깨닫는 자만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징조를 결코 무시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종말의 경고다. 징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가 복이 있다. 그것이 곧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다. 그것이 곧 경성하여 깨어 있는 일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처럼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사도 요한처럼 크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입술로만 외치는 소리가 아니다. 마음 깊이 부르짖는 외침이어야 한다. 이런 외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종말을 진심으로 깨닫고,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한 자가 외칠 수 있는 외침이다. 다시 오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자가 외칠 수 있는 외침이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2011. 2. 10 (목)
글/ 불꽃 石一進

기도의 30가지 교훈!

1. 기도 없는 경건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다.
2.
교만 중에 가장 무서운 교만은 기도하지 않는 교만이다.
3.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낮은 포복이다.
4.
기도 자가 피해야 교만은 기도 많이 한다는 교만이다.
5.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 사상,  그리고 사역에 감화되어 하나님께 설득되는 것이다.

6.
기도를 통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7.
기도 자는 바른 기도를 통하여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점점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바뀐다.
8.
기도는 자기의 욕심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인생 청사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9.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집을 짓는 벽돌이다.
10.
기도는 소리를 내기 위해 악기를 조율하는 것과 같다

11. 기도는 세상적인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소방서이다.
12.
기도가 없을 때에 마음은 세상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마음은 성령과 하늘의 것으로 충만하다.
13.
기도는 언뜻 보면 좁은 길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넓은 길이다.
14.
기도는 우회도로처럼 보이나 실상은 지름길이다. (요령, 약삭빠름, 잘남보다 빠르다).
15.
세상에서 가장 줄을 서는 방법은 기도이다.  

16.
세상의 성공에는 후유증이 있으나 기도에는 후유증도 뒤탈도 전혀 없다.
17.
세상의 모든 후원에는 용수철처럼 조건이 달려있지만(string-attached),
기도에는 기도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 매어다는 용수철이 달려있다(God-attached).
18.
기도 자체는 무능이나 하나님은 기도의 무능을 통해 전능전지의 역사를 하신다.
19.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20.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나님이 일한다.

21.
기도는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22.
기도가 없는 곳은 사탄의 잔칫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사탄의 초상집이다.
23.
기도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리는 것이다.
24.
기도는 예수님을 닮는 최상의 방편이다.
25.
기도 여행의 목적지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26.
기도는 성공적인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다.
27.
기도는 노동절약 장치가 아니라, 삶의 본질이다.
28.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삶과 기도의 내용은 같다.
29.
하나님께 감동되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감동 시키려고 기도는 중언부언이 된다.
30.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고, 기도 자는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출처:임마누엘>

어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닌 것 같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불러내셨다. 하나님 말씀만 믿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먼 약속의 땅으로 왔는데, 그 땅에 기근이 덮쳤다. 그것도 아주 심한 기근이었다.(창12:10)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오히려 전보다 더 힘든 상황에 봉착했으니, 아브람은 따르는 가족과 부하들을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그런 경우가 없었는가?
마음을 잡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사업이 더 힘들어지고, 부부싸움은 더 심해지고,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오히려 더 큰 고통이 온다. 이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근은 우연히 온 게 아니다. 천지를 주관하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이다. 하나님은 왜 약속의 땅에 막 도착한 아브함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아브람의 믿음을 강하게 다지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시고 축복을 주신다. 그러나 먼저 축복을 담을만한 그릇으로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우리 믿음을 깊고 단단하게 만들기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어려운 상황을 주시는 것이다.

단련되지 않은 믿음은 강해지지 않는다. 조금만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져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일련의 고난을 허락하셔서, 믿음을 단단하게 하시고 순결하게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어려워지면 '어?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닌가보다'라고 단정 지으며 다른 길로 피하려 한다. 그래서 아브람도 애굽으로 피했다. 애굽은 나일강 유역에 형성된 비옥한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건설된 국가여서 당시 주변 지역의 유목민들을 기근이 일어나면 발 빠르게 그곳으로 피난을 가곤했다.

믿음의 시련이 올 때 우리의 반은은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상황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신가?'를 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접어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서 하나님이 움직이라 하실 때까지는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약속의 땅을 쉽게 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길 원하시며, 비전을 주시고 새로운 약속의 땅을 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의 인생은 우리를 흥분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풍성하게 하며, 깊은 만족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흔들고, 아프게 하며, 어떨 때는 답답하고 힘든 어둠의 골짜기를 거쳐 가게 하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 포기하고 싶게도 만든다.

그러나 이때 절망하고 포기해선 안 된다. 초기의 모진 비바람은 나무의 뿌리를 더 싶고 단단하게 만들어서 장차 아름으리 나무가 될 준비를 하게 하니까.
<다시가슴이뛴자중에서...>

8/22/2011

세상교회로부터 나오라!(1)


이 글은 세상교회에서 허덕이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방황하던 중 종교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쓴 글이다. 여기서 세상교회란 타락한 라오디게아를 말하며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으나 소경된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소경이 되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보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
하나님은 바벨론을 떠나 하란 땅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그리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그의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가나안 즉 그리스도를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다. 하란은 육신적인 세상을 말한다. 육신적인 삶을 살아온 아브라함에게 사람은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삶이 필요함을 알게 하여 주셨다. 

그러나 야곱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육신의 배고픔으로 애굽으로 들어갔다. 애굽은 세상을 말한다. 하란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세상을 말한다면 애굽은 먹고사는 세상, 세상 명예와 지위까지를 포함한 세상을 말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러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고 세상 속에 있는 약속의 자손을 하나님 안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 심판을 당하게 되며 약속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겪었다. 바벨론에서 70년간 바벨론 왕을 섬겼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교훈이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세상, 즉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영 안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갔음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함은 함은 육과 혼으로부터 나와 영 안으로 들어간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하나님 나라에 산다고 할지라도 합당한 신앙생활과 삶이 없다면 바벨론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바벨론으로 끌려가도록 하게 하셨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타락한 세상종교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교회 안에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세상종교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빌라델비아 교회일지라도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는 것이다. 거창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한낱 세상종교에 불과하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곧 바벨론이다. 타락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본래부터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니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스스로 빌라델비아라고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고 부족할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계3장).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의 종살이를 해야 했는가. 왜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로 타락하는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각 이전의 과거는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 시간이 중요하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 험악한 강도였다고 하여도 지금 이 순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신다. 십자가 위의 강도가 그랬다. 그가 과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지만 회개했을 때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지난 2천년 역사에 나타난 교회들 중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교회들은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그들에게도 회개할 기회와 말씀을 주셨다. 언제든 회개하고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누구든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다(계 3:20). 주님을 찬양한다. 과거에 아무리 말씀에 충실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교회였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 교회가 주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면 그들은 타락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주님 앞에 신실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타락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근본 이유 
그러면 왜 빌라델비아가 라오디게아로 전락하는가? 근본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기업이 되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으셨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왕으로 달라고 외쳤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앉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그를 섬기기를 원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는 근본 원인은 사람이 왕노릇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곳이라고 생각지 말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람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 생긴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그곳은 라오디게아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빌라델비아가 어떻게 라오디게아가 되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한 때 말씀이 충만했던 신실한 교회였을지라도 순식간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즉시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달라고 요구하여 세운 것이 사울이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면서 겉으로는 그 위세가 크게 떨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된 이후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다윗과 솔로몬이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이스라엘은 타락해 갔다. 겨우 1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라가 분열되고 왕과 백성들은 타락의 길로 전락하였다.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세움을 받은 이후 얼마는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교회가 크게 번성하고 성장한다. 사람의 속성이 교만 아닌가. 교만이 드러나고 다윗의 아들들이 다투듯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지듯 교회 안에서도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건축하시고자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란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면 그는 반드시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사람이 왕을 세움으로서 교회가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말씀)을 잃어 버리는 즉시 사람을 잃어 버린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게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말씀이신 하나님대신 사람을 왕으로 삼는 즉시 이런 일이 잉태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 상 8장 4절부터 5절까지 보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 빠졌고 타락하였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도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아부 당연한 것이다. 

사무엘은 이미 늙었고 그의 아들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믿고 기대할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왕(사람)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을 부르는 곳은 이미 하나님을 잃어 버린 교회인 것이다. 사람을 쳐다보고 높이는 신앙생활은 사단(왕)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고 만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지 못하고 사람의 말이나 계획이 앞서게 되면 인생들은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발언권이 높은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발언권이 없는 하나님이 떠난 곳이다. 때로는 이러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지 못하는 일이 많다.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한다. 평생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두고도 새로운 옷을 사기 위하여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을 버릴 수가 없다. 

때문에 장래가 보장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거나 소속되고 싶은 것이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뛰어다니며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모두 이를 위한 것이다. 세상에는 큰 사업체를 벌여 이러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 큰소리치고 사는 곳이다. 이것이 세상이며 세상은 사람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받드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른다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저들이 이를 더욱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늘 먹을 것과 입을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하나님도 믿고 세상도 믿는 혼혈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먹이고 대신 앞서 싸우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 줄 왕을 주소서라고 했다. 세상사는 방법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씀이 인도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말씀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면 누구나 이럴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이런 요구를 한다. 이것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것은 말씀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런 세상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교회 스스로가 세상과 짝하는 일을 벌이는 것이다. 사단은 결코 기회를 잃지 않는다. 능력을 가장한 왕을 세우고 백부장과 천부장을 세워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세상=바벨탑)에 열심을 내게 만든다. 창세기 11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자! 무엇을 하자"라는 식의 구호가 들어온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2-4) 

사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만든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그리고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의 시험이 6천년 전 하와가 당한 일이라고 생각지 말라. 바로 이 시대에 있는 일이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하지만 이미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조직이고 인간적인 열심이 있을 뿐이다. 인간조직은 경쟁을 조장하며 필연적으로 시기와 질투가 따른다.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과거 2000년 교회사가 그랬다. 

이스라엘이 왕과 나라를 세운 것은 사람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이름으로 세운 사람의 나라이다. 나라에는 많은 계급이 있고 심지어 노예도 있다. 사업이 있고 열심이 있다. 그로 이름을 내고 흩어지기를 면하고자 하는 바벨탑을 세운 것이다. 바벨탑은 육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쌓아올린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흙덩어리(육체)이다. 

장래가 보장될 것 같은, 보이는 사업체나 거창한 교회건물일 수 있다. 바벨탑은 노아의 심판을 면한 사람들의 후손이 쌓은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였지만 죄 가운데 타락한 사람들이 바벨탑을쌓는 것이다. 그 바벨탑은 흩어짐을 면하고자 쌓은 탑이다. 타락한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 보라. 바벨탑을 쌓을 때 들어간 자기 공력(물질)은 다음 이야기이다. 타락한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심판을 면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케 하는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교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타락하여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대신 앉아서 바벨탑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락한 교회는 반드시 바벨탑을 쌓게 되어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게서 바베론 땅으로 끌어다가 바벨론성을 쌓게 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바벨론성이 타락한 교회가 세우고 벌리는 인간들의 사업들이다. 거창한 예배당 건물을 세우거나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들이 타락한 교회가 세우는 바벨론성이다. 바벨론성을 짓는데 엄청난 노력과 힘을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바벨탑을 쌓기위해 헌물한 그것들이 얼마나 부정한 것이었는가를 알면 그곳에서 쉽게 나오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들이 쌓은 바벨탑이 바벨탑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묶여 있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날(숫자로 70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70년간 종살이를 했다)까지 즉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르시는 날까지 그들은 그곳에서 바벨탑을 쌓으며 그곳의 왕을 섬기며 살 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만 그러나 바벨탑은 흩어지지 못하게 한다. 교회가 타락의 길에서 쌓은 바벨탑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사무엘 상 8장 6-7절을 보자.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6-7)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저들이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으셨던 것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가운데 섬기는 그들의 왕이 되시고 싶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즉시 세상 왕을 섬기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그리스도)에서 쫓아 바벨론(세상교회)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벨탑은 진흙과 역청이 많이 있는 바벨론에 가서 쌓을 수 있는 일이다. 바벨탑은 육체적인 타락과 사람이 왕노릇하는 흙과 변질된 더러운 기름(악령)이 많은 바벨론 땅에서 쌓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간 원인이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는 힘들다. 내게 당장 유익하고 좋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기대를 한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왕을 섬기는데 마음이 있을 뿐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사단이 교회를 부패하게 하는 가장 간교한 방법은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곳을 떠나셨기 때문에 사단이 들어와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사단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간교한 자들을 왕의 주변에 끌어들인다. 교회 안에 인간왕국이 금새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왕국이 세워졌으니 장관도 차관도 있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세상 직책이 들어온다. 형제라는 호칭이 사라진다. 하나님 말씀대신 사업이야기가 관심거리이다. 왕의 집이 성전이 되고 주님의 성전은 제사장들이나 머무는 곳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인지 사람을 섬기는 교회인지 세상사업을 하는 교회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미 바벨론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진정 섬기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다. 사람을 섬기고 교회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왕의 나라 일에 충성하는 일은 사단에게 부역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는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말씀한다. 사무엘 상 8장 1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이다.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삼상8:10-18)   

타락한 교회의 실상
이 말씀이 사무엘 선지자 자신의 얘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왕이 너희를 다스릴 때 이러할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들어 보라. 어디 조금이라도 틀린 구석이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한 것은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대신 싸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삼상 8:20). 하나님이 언제나 이스라엘의 앞에 서서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들어보자. 

10절에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라고 하셨다. 너희 아들들을 대신하여 싸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아들들로 자기 병거와 말을 끌게 하고 왕의 병거보다 앞에 나가서 싸우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왕의 말을 끌며 왕의 앞서 나가 세상일을 대신하느라 정신이 없다. 왕은 제 손가락조차도 꼼짝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왕노릇 하는 사람들의 자동차를 끌어주고 그들을 대신하여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까지 교회가 도맡아 하는 것이다. 교회안의 일을 왕의 이름으로 그들의 아들들이 하고 있다.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라 했다. 교회와 교회의 사업에 얼마나 많은 직위와 직책이 있는가 보라. 교회 안에는 형제만 있으며 어떤 차별도 없다. 그러나 세상 교회 안에는 많은 직위와 직책으로 형제를 가르고 차별하며 계급이 있다. 

목사, 부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가 있다. 천주교는 한술 더 뜬다. 교회 안에 종이 생겼으며 명령하는 자들이 있다. 무엇이 세상과 다른가. 회장, 사장, 부사장, 이사, 부장, 차장, 과장, 대리, 도대체 몇 계급인가. 이것이 바벨론이며 세상교회이다.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종교이다. 하나님 안에는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다는 성경말씀(골 3:11)은 예배당 안에나 있는 말씀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말씀은 내 것이고 불리한 것은 남의 말이다. 

또 보자.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왕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취하여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한다. 세상 교회의 왕들은 교인들에게 자기 사업을 돕게 하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추수와 그리고 자기가 손수 쓸 일용품까지 모두 교인들에게 하게 한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불러 자기 사업을 돕게 하고 심지어 교회의 돈을 가져다가 그의 이름으로 사업체를 벌려 그 이익을 갈취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라고 말씀하신다. 또 딸들까지도 취하여 자기와 자기 집을 아름답게 꾸미게 만들고, 자기 음식을 만들게 하며 자기 집에 오는 손을 대접하게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돈을 내어 교회의 왕과 왕의 집을 꾸미며 음식을 해 먹이고 가정부처럼 일하고 있는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가 이들의 먹을 것을 해결하고 담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경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봉사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 봉사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라는 말씀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교인들의 소유와 돈을 취하여 자기 수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 위치와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얼마나 얘를 쓰고 있는가. 이런 일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걷은 돈들을 수족들에게 자기 것과 같이 준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벨론 교회, 즉 세상종교가 하는 일이다. 이들이 십일조를 취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하면 종교가 된다. 교회는 하늘나라에 속하며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나 종교는 세상에 속하며 그 주인은 사람인 것이다.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왕들의 곁에는 언제나 미인 궁녀가 있다. 미인이 아니면 왕을 수종들 자격도 없다. 세상종교는 우리의 아름다운 형제 자매들을 종같이 부리고 그들의 십일조까지 취하는 염치없는 일을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가당한 일인가 생각해 보라. 이것은 세상 시장바닥에서조차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18절에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왕을 택한 교회의 백성들이 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있으나 그 때는 하나님이 응답치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곳에는 언젠가 그 날이 있기 마련이다. 왕의 부정한 것이 드러나는 그 날이 있다. 분란이 생기는 그 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분란과 부르짖음에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분란을 일으켜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날이 될 때까지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한다. 징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응답치 않으시겠다고 하시지 않는가. 유야무야 되고 만다. 이것이 바벨론, 세상종교의 모습이다. 세상 임금은 사단이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종교에 빠지면 필경 이런 비참한 과정과 삶을 살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종교인 것이다. 비참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곳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시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주님이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소경이라고 말한 것을 모르고 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눈먼 소경을 가리켜 소경이라고 불렀는가. 아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가 설혹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합당한 신앙생활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바벨론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참으로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하나 덧붙인다면, 전쟁에서 포로로 한 두 사람이 잡혀가는 경우가 많은가. 단체로, 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과 같이 단체적인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다. 한번 끌려가면 쉽게 나오지 못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한다. 

그러나 그 탈출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땅에서 70년을 포로생활을 했다. 사람이 세상종교의 포로가 되면 상당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세상종교에 빠져있는 친지를 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애태우는 것을 본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다. 쉽지 않다. 그들 스스로 종교의 포로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단체적인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 주신다. 단지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전체가 포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했다면 결코 바벨론과 같은 세상종교에 빠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앞에 그래도 신실한 남부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가증스런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리아에 일찍 멸망을 당했지만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신실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약속의 말씀(성전)이 없는 교회는 포로가 될 수도 없다. 그래도 말씀이 있다고 자부하는 교회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말씀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흩어질 수 없다는 자만(自滿)이 하늘 꼭대기에 이르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말씀의 반대편에 있다.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세상으로 들어가는지 주안에 있는지 분별하지 못한다. 세상은 육이며 흑암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곳이다. 빛이 없기 때문이다. 분별하지 못한다. 스스로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벨론은 육신을 가르키기도 한다. 육신가운데 빠지는 것이 바벨론이다. 영이 더러워진 곳이다. 그래서 바벨론으 흙과 역청기름이 많은 곳이다. 자기 생각과 육신의 안일함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는 것 또한 바벨론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합당한 신앙생활 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육신을 좇는다면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으로부터 나올 때 볼 수 있는 비밀이다.    

세상교회의 포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사람을 왕으로 택하였다(삼상 8:19-20).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일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겠는가. 사람의 근본이 죄 덩어리이며 종국은 멸망으로 가는 길에 있다. 멸망으로 가는 길에서 넘어지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사울의 궁전은 뻔질나게 들랑거려도 성전의 제사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일이 먼저이고 교회는 나중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제사가 폐지되는 위험에 처하였다. 

구원받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생활에서 멀어지면 사단의 꼬임에 넘어지기 쉽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기와 방패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어두움에 빠지고 범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은 사람을 세상의 종이 되도록 버려 둔다. 

바벨론의 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붙들고 있지 않고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허전하다.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얼마나 충만한 감이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방황하게 된다. 어두움 가운데서 더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안심이다. 그러나 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라오디게아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라오디게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이 사람을 왕으로 선택했을 때 그 신실한 사람 또한 이스라엘 왕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리가 유다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과 같이 자기도 모르게 타락한 라오디게아의 충복이 되는 것이다. 열왕기, 역대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잃고 죄와 우상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세상종교에 빠진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여 종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세상종교의 종이 되는 것이다. 약속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종이 된 것과 같이 구원받은 우리 또한 세상 종교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며 불러도 응답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이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바벨론 우상의 전에 드리는 예배일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 39장을 보자. 이사야 39장은 이스라엘이 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는가 그 원인을 말씀하고 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1-7) 

성경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스라엘 히스기야 왕이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는 얘기를 듣고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글과 예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 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다.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이 보여준 것 가운데는 은 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이 들어있다. 여기 성전을 보여 주었다는 말은 없으나 이들 물건은 성전 안에 있는 기명들이다. 성전을 거명하지 않은 것은 성전은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기를 통해 여러 왕들이 우상으로 성전을 더럽혔고 퇴락하여도 수축하지 않았다. 겉모양은 있어도 실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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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현장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유대교라는 종교의 권력에 의해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역사는 유대교의 큰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직접 개입하셨거나( 3:2, 4, 7) 하나님을 대신한 천사들이 이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어째든 사도들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고난의 현장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파격적인 개입을 하시는 이유는 고난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비록 어떤 상황 속에서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그것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감당치 못할 시련은 없습니다(고전 10:13). 오히려 고난의 현장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소가 됩니다.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풀어주시면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결국은 다시 체포되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공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 고난을 피해 멀리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당했습니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비적인 소극적 신앙생활은 고난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에 역부족일 때가 있습니다. 공세적인 적극적 신앙생활, 적극적인 사명 감당이 고난을 극복하는 최고의 힘이요, 최상의 방법이 됩니다.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며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감당해 보는 기회로 삼아 보십시오. 사명을 잊었거나 사명 감당을 포기한 것은 사단에게 진 것입니다.

8/20/2011

당신의 손을 비워라

주님과 손 잡고 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손을 비워라. 손에 움켜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손 펴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왜 손을 펴지 못하고 있는가? 당신의 손을 펴라. 당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말고 포기하라. 그리고 그것을 내려 놓고 손을 비워라. 그래야 당신은 주님과 손을 잡을 수 있다.

지금 손에 움켜쥔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권력은 아닌가? 권력을 손에서 내려 놓으라. 권불십년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금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랜 권력의 아성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지지 않는가? 권력은 허망한 것이다. 권력은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더불어 망하게 하는 속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

지금 손에 움켜쥔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명예는 아닌가? 명예를 손에서 내려 놓으라. 명예는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요,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들을 경계한다. 높아지고자 하면 먼저 자신이 낮아지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대로 먼저 남을 섬기라고 명령하신다. 세상의 명예는 결코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침륜에 빠뜨리게 하는 속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

지금 손에 움켜쥔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물질은 아닌가? 물질을 손에서 내려 놓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물질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는 원흉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로 인하여 패망하였는가? 물질이 쌓여 있는 곳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게 된다고 예수님도 경고하셨다.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을 구하면서 가지고 있는 물질이 너무 많아 그 길을 포기하고 돌아간 젊은 청년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다. 물질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걸림이 되게 하는 속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

지금 손에 움켜쥔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세상적인 욕정은 아닌가? 세상적인 욕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는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유일한 치욕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였다. 그것은 다윗에게 옥의 티였다. 또한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인 솔로몬도 이방의 여인들과의 욕정을 내려 놓지 못해 자기 이름을 부끄럽게 했다.

이제 세상적인 욕정을 내려 놓으라. 주님 앞에서 정결함을 유지하라.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어야 했던지를 기억하라.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어야 했던 이유도 기억하라. 세상적인 욕정이었다. 지금도 세상적인 욕정이 하나님이 심판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아직도 내려놓음을 망설이는가? 무엇이 포기하지 못한채 두 손을 꼭 움켜쥐게 하고 있는가? 지금이라도 손을 활짝 펴라. 움켜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아낌없이 놓아 버려라. 움켜쥔 것을 내려놓고 활짝 펴진 손으로 주님을 향하여 내밀어라. 주님은 그 손을 잡아주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손에 잡힌 자들을 붙들어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신다.

참으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가? 손을 비워둔 자와 함께 일하심을 기억하라.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이 빨리 움켜쥔 손에 활짝 펴기만을 기다리신다. 당신을 끝없이 바라보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시게 하지 말라. 손을 활짝 펴 빈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라. 주님과 더불어 손잡고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자가 되라.

이제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는 징조들이 지구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오늘엘른지, 내일일런지 아무도 모른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주님은 당신의 손을 잡고 일할 자를 찾으신다. 손에 무엇인가를 움켜쥔채 펴지 못하는 자를 주님은 잡으실 수 없다. 빨리 손에 움켜쥔 것을 포기하고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빈손이 되어야 한다.

경성하여 깨어라. 빨리 손을 활짝펴 움켜쥔 것을 내려 놓고 비워 주님의 손을 잡으라. 더 이상은 세상의 권력과 명예, 물질과 세상적인 욕정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당신을 영원한 파멸로 안내하는 인도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내려 놓지 않는 한, 당신의 손을 비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진심으로 주님의 손에 사로잡혀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하기를 원하는가? 지금이 바로 당신의 손을 활짝 펼 때임을 잊지 말라. 지금이 아니면 당신에게 손을 비울 기회가 다시는 없게될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지금이다. 두 손을 활짝펴고, 팔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손을 내어밀라. 주님은 당신의 손을 기쁨으로 잡아주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글/ 불꽃 石一進


삶의 잔잔한 행복

마음이 맞는 사람과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할 수 있다면 손을 잡지 않아도 따스한 온기가 가슴으로 느껴져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면 욕심없는 행복에 만족하겠다.

마음이 닮은 사람과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다면 눈빛이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 가슴으로 포근하게 슬픔을 안아줄 수 있다면 이름없이 소박한 삶에도 만족하겠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벗이 되어 동행할 수 있다면 꼭 옆에 같이 살지 않아도  가끔씩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들뜬 가슴 열어 세상을 헤쳐나간다면 때때로 지치고 힘들다 해도 손해보는 삶이라도 후회는 없겠다.

세상에 빛나는 이름 남기지 못한다 해도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알았다면 명예가 사랑보다 귀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면 앞에 놓인 빵의 소중함을 경험했다면 진실을 위해 소중한 어떤 것을 희생했었다면

먼 훗날 어둠이 조용히 나리울 때 삶의 잔잔한 행복을 차지 했었노라 말할 수 있겠다.

- 좋은 글 중에서 -

행복과 청렴은 지금 우리곁에 있습니다

추구하는 범위와 이상의 끝을 정해 놓지 않고 우리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행복해 하고 싶은 자가 가만히 있으면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만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추구하면서 삶의 의미와 만족을 가진자 만이 진정한 행복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또한 행복은 멀리 있지도 않고 높고 어두운 곳에 있지도 않으며 깊은 곳에 있지도 않다. 항상 가장 가까운 우리 곁에 있으면서 내 삶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과연 나는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행복 추구는 우리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모든 국민이 추구하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고 의무이다.

권력과 명예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부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그리고 능력을 가진 자와 같지 못한 자!
행복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무소유의 개념에서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
바로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행복의 양과 질의 기준이 정해졌다면 경쟁과 만족의 척도가 달라져 한마디로 무미건조해 질 것이며 현대 문명 생활속에 예속되어 미래와 이상과 만족이라는 용어를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
엄마의 자장가 소리를 듣고 입가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는 천진난만스러운 아이의 웃는 모습!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장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잠자는 숨소리!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금 가장 행복하고 청렴한 사람입니다.

광주소방안전본부 지방소방경 김재오

8/19/2011

'허드슨 테일러'의 비젼 선언문 ... 문지기(김창환목사)드림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
 중국 내지 선교의 선봉자

♣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향하면 하나님이 공급하심이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아닌, 커다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실패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쪽과 인간을 향한 쪽으로 양면성을 가진다. 즉 신실하신 하난님을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이룰 것을신뢰하는 것이다.

희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드린 모든 것은 얻은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모든 것은 잃은 것이다.
*성도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시간이 지난다고 더 편안해지지 않는다. 단지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기를 원 한다.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가 성도의 모든 영역에 주가 되지 않으면, 어는 영역에서도 주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오직 순종만 필요하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선교 
*선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만약 흠잡을 데 없이 정직하게 행할 의향이 없다면, 선교사가 되지 않는 것이 좋다.
*선교사가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선교사가 될 시도를 해보라.
*선교사는 으레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상 명령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중국에서는 양복보다 중국옷이 편하다.

하나님의 인도 
*오직 기도로써, 즉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은 기도가 먼저고 그 다음은 상식, 그다음은 어린 아이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시지  는다. 또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고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만 한다.
*시련과 역경은 항상 비전의 확장과 축복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은 깊은 고난을 통해서 경험하기도 한다.

거룩한 생활 
*성도들은 결코 불순한 생각들을 용납하면 안 된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해야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은 죄 없는 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죄와 공존하자  않는 것이다.

성도의 삶
*하나님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물질보다 귀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 다음 그분의 광대하심을 보여 주신다.
*열매와 비전은 다르다. 비전은 노력의 결과이고 열매는 삶의 결과다.

리더쉽 
*작은 것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큰 것이다.
*영적 비저너리는 양 무리를 도와야지 지배해선 안 된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요 21:15-17).

8/18/2011

끝없는 소망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제2차 세계대전중에 유태인들은 그들 동족의 절반에 가까운 6백만명이 유럽 지역에서 히틀러의 발굽에 밟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60명도 아닌 6백만 명을 일시에 잃어버린 유대 민족은 재기 불능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기적적으로 옛 땅을 다시 찾고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중동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처참하게 파탄된 유대 민족을 재기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깊은 감격을 심어 주었던, 유럽의 어느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벽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죽으러 가는 마당에서,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던 것입니다.

"나는 믿노라 해가 비치지 않더라도 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노라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라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지라도 여전히 침묵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학대와 멸시 속에 비참히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께 끝없이 부르짖었을 때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실지라도 반드시 그들을 구출해 주실 하나님을 믿는, 꺾어질 수 없고 굴복할 수 없는 소망을 가졌었기 때문에 유태인이 그 절망에서 재기하여 역사의 고아가 되지 않고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을 뛰어넘어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우리 앞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저버리면 인간의 모든 것이 허탈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잔이 넘치는 생활로 인도하시기 전에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이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혼을 깨뜨리시고 정욕을 죽이십니다. 믿음의 조장 아브라함도 골짜기를 지났고 야곱과 요셉과 모세도 이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러나 사망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눈부신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단되지 않는 소망, 그것만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빠져 나와 승리하게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고, 또 채움 받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제대로 된 건물이나 조직, 교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필요를 돌볼 줄 알고, 채워줄 줄 아는 헌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마 초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루살렘 본토박이보다는 명절에 예루살렘 순례를 왔다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눌러 앉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행이 장기화됨으로 삶의 제반 여건이 열악해지는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생활비도 부족했을 것이고, 숙소나 식사, 의복 등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들을 보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기쁨으로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일일이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섬김 속에서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이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도 성도들을 칭송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나의 채움이 필요한 이웃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첫 번째 반응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메시아적 관점에서 구약을 탁월하게 해석해 낸 베드로 사도를 통해 구약 성경을 새롭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그 생애,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샅샅이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말씀을 따라서 실제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런 말씀을 배우기 힘쓰는 공동체의 영향 가운데서 훗날 스데반과 같은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성경 선생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 기쁨이 충만한 신자가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말씀의 옹달샘에 두레박을 내리고, 과연 이 말씀이 그러한가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다 지켜 행하려 노력한 만큼 삶에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8/16/2011

예수라는 이름의 위대한 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상속으로 주셨습니다.
이 이름의 배후에 있는 위대한 힘과 능력은 우리가 그 이름만으로도 먹고 입고 모든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이름은 창조자의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2절과 3절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왜 위대합니까? 그 이름 배후에 저 하늘과 땅, 아름다운 꽃과 나무, 그리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으면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창조해 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이름은 보존자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브리서 1: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도 잘 보존하지 않으면 쉽게 낡아집니다.
그런데 끝이 없는 저 우주를 하루도 변함없이 정연하게 보존하시는 그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 것이겠습니까? 누가 저 별들을 질서 있게 보호하며 누가 지구를 자전하고 공전케 하며 달로 지구를 돌게 할 수 있을까요? 누가 4계절을 통하여 꽃 피고 열매 맺고 낙엽 지는 일을 계속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이름은 주권자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인류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세상의 주권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이름은 완성자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니라"(요한계시록 22: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성공에 이르게 하시고 아름답게 끝마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며 이 세계와 우주를 완성시키고 심판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뒤에는 창조자의 능력과 주권자의 능력, 그리고 완성자의 능력이 감싸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비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출처: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성공과 실패의 원인

새해 벽두에 파산을 한 사람과 크게 성공한 기업가가 함께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파산한 사람에게 기자가
"실패의 요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낭비였습니다. 사업이 한창 잘 될 때 돈을 종이처럼 썼죠."

이번엔 성공한 재벌에게 기자가
"기업이 일어선 요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절제였습니다.사업이 한창 잘 될 때 종이를 금처럼 썼죠."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먹는 것도 절제, 잠자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술, 담배, 오락도 절제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욕심과 분노 등의 감정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매일매일의 하나님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 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2:38)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가 그의 양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목자는 양을 하루하루 인도하여 그 날에 필요한 만큼만 먹여줍니다. 하루에 일주일치나 한 달치를 먹이는 목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하루하루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년을 잘 믿어도 오늘 하루 잘못 믿으면 결과적으로 불신앙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루하루 먹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하루를 먹여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지 아니하고 일 주일 분을, 한 달 분을 한꺼번에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루하루를 관계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에 양식을 떨어지자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고 하루하루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욕심 많은 사람이 이틀 분을 거두면 다음 날 벌레가 먹어서 못 먹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6:34)고 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11)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 날 하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때 우리는 매일 매일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영국의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요, 기도의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 68:5)는 말씀에 이끌려 빈손으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한 뒤로 날마다 성경말씀에 의지하고 엎드려 기도하면서 2천여명의 고아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기는 하셨지만 한번도 이틀 분이나 사흘분이 넘쳐나도록 공급해 주시지는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돌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위의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만유보다 크십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걱정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자라게 할 수 없는 양떼에 불과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부를 노래는 "여호와(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기도를 통한 자아계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잠11:24~25)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가장 위대한 선물 중에 하나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넘쳐 나오는 생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무한한 창조적 근원이 되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 근원적인 힘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집중시킬 때 얻어지는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주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할 때 눈이 떠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믿음을 계발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골방을 한 번 두드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 문을 열어보니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술병들이 널려 있으며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골방 문을 열어보니 음란한 그림과 음악과 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문을 열어보니 훌쩍 훌쩍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염려와 근심과 절망이 도사리고 앉아서 '이젠 죽었다'고 울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불안과 절망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차 있으면 결단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골방문을 열어보지 아니하고 팔자와 신세를 한탄하며 조상과 이웃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의 더러운 찌꺼기들을 쓸어내고 정화시키지 않으면 여러분의 환경과 운명에 아무런 변화가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무엇으로 정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기도하고 주 예수를 마음 속에 모셔 들여 보혈로 씻기 시작하면 마음 속에 있는 음란, 방탕, 술취함, 염려와 불안, 공포와 절망이 다 쫒겨 나가고 마음은 맑은 호수와 같이 됩니다. 그때 믿음이 자라나서 마침내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6)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8/15/2011

탁월한 사람들의 다섯가지 특징

1. 열정을 품고 일한다.
에머슨(Emerson)은 "어떠한 일도 열정없이 성취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는 일의 규모가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연주가는 청중이 몇 명이든 개의치 않고 열정을 다해 연주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장23절).

2. 열심으로 기술을 연마한다.
이들은 개발하고, 성장하고, 배우고, 향상하는데 있어 결코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전도서 10장10절).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나길 소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무딘 연장을 연마하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진다. 
그들은 그들이 하겠다고 말한 것을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는 성실한 사람이 희박하기 때문에 이들은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됩니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잠언 20장6절).

긴 안목으로보면 신뢰성이 재능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4.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 
이들은 심지어 압박감이나 변화 또는 비현실적인 요청하에서 조차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 외에는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 (빌립보서 2장14-15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恭順)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전도서 10장4절).

5. 기대 이상의 것을 해낸다. 
이것은 모든 성공한 사람에게 찾아볼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요구되어진 것만 하는 사람, 그것도 가까스로 최소한의 일만 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마태복음 5장41절)

오스카 헤머스타인은 헬리콥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의 머리 꼭대기를 본 감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여신상을 조각한 예술가는 아무도 여신상의 머리 꼭대기까지 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텐데도 매우 꼼꼼하게 조각한 것을 보고 그는 감동을 금치 못했습니다. 여신상을 조각한 예술가는 누군가가 비행기를 타고 꼭대기에서 여신상을 내려다 볼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안이한 방법을 취하고 싶은 유혹과 "아무도 모를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걱정을 버리는 여섯가지 전략

1.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
문제를 두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 아니라,  나쁜 습관에 불과하다. 걱정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내게 생긴 문제들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점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힘을 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자.

2. 기분 좋은 잠, 상쾌한 아침을!
매일 잠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날의 걱정거리들을 되뇌이는 것은 내일까지 걱정하는 하루로 만들어 버린다. 잠자리에 들 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자.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어제의 문제들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오늘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쌓인 일과 문제들을 헤아려 보느라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라.

4. 긍정적인 말을 하라
생각을 말로 하지만, 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난 못해", "큰일이야!",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부정적인 말들을 모두 버리자.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들로 생활을 채우라. 말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

5. 도움을 주는 글귀들을 외우자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말들을 외워 두자.  마음에 와 닿는 구절, 명언, 책에서 읽은 아름다운 말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런 말들이 무의식중에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뀌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6.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라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고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 모습을 반성해 보고,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약한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성경공부 모임이나,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다.

기름부음 안에서 영광과 심판이 결정이 됩니다.

[엡1:11-14]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1. 더 큰 영광의 은혜를 받을 때 신앙이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 성령님은 구원과 영광의 보증이신데 영광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 영광중에 주님을 뵙게 됩니다.

3. 큰 영광의 은혜는 깨어지고 낮아지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종의 자세가 될 때 주어집니다.

4. 기름부음이 없는 말씀이나 기도는 열매가 안되고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5. 죄가 있으면 어둠의 영이 머물러 있고 동시에 심판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6. 이 시대를 보면서 주님오심을 볼 수 있고 동시에 환난을 보며 영혼들을 위해 중보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7. 먼저는 깨어나야 하는데 깨어남이 인정받으면 기름부음을 주십니다.

8. 성령님의 은혜만큼 변화되고 존귀하게 되고 귀히 쓰여지니 관건은 영광의 기름부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자

인도에 재색을 겸비한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그녀는 왕과 결혼해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그러나 결혼한 지 1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왕은 그 슬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왕비의 무덤 동쪽에 자신의 모습을 조각한 동상을 세웠습니다그리고 1년 후무덤 서쪽에 왕가를 상징하는 호랑이 동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1년 후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호화로운 별장과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성을 건립했습니다.

왕은 맞은 편 동상에 올라가 왕비의 무덤을 내려다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그런데 웅장한 성과 별장정교한 동상들의 중심에 위치한 무덤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불러 명령했습니다. “저 무덤을 당장 치워버려라.
웰스의 단편소설 ‘무덤의 스토리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다가 권력사랑이 생기면 하나님을 중심에서 치워버리는 우를 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봄으로 그만 유혹에 빠져 그 실과를 따 먹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그럴 때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누리고 주님의 온전하신 형상을 닮아 가게 됩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도 고난이 있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음도 좋고,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나사로 가족을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나사로가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오라버니를 위해 두 누이는 신속하게 예수님께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원래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확고한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우리가 다 해석하기는 힘들지만, 그 고난이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본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5). 따라서 우리는 고난이나 지체되는 기도응답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선하신 주님의 응답을 기대해야 합니다.

8/13/2011

기대가 없는 신앙의 비극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6)

탕자의 비유에서 외면적으로 볼 때 맏아들은 효성스런 아들이요, 성실한 사람이요, 부지런한 사람이요, 의분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는 그와 같이 착한 맏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첫째로, 그는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보지 않고 아버지는 명을 내리고 자식은 그 명을 받아 지키는 율법적인 관계로만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율법적 관계는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 자기를 내세웠고, 피와 살을 나눈 동생이 죽을 뻔하다가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불법적으로 죄를 지었음을 내세워 환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율법적으로 죄 지은 일이 없다면서 위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자와 위선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게 된 의인을 찾지 아니하시고 죄인임을 고백하여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맏아들은 부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부요하고 풍성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염소 새끼 한마리도 아버지께 받을 수 없다는 맏아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명령만 내리시는 존재요, 염소새끼 한마리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메말랐고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기대를 저버린 인생은 절망뿐입니다. 한 가정에서도 부부가 내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서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면 사랑이 식어지고 잘잘못만 따지는 율법적인 관계가 되어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맙니다.

젊은 사람이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다면 탕남탕녀가 되고 맙니다. 청소년들이 장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불량 청소년들이 됩니다. 한 교회가 발전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불량 청소년들이 됩니다. 한 교회가 발전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그 교회는 그때로부터 파멸되고 맙니다. 한 민족이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망하고 맙니다.

기대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풀어 놓을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대가 없는 신앙이 열매 없는 나무와 같다면 기대있는 신앙은 사시사철 푸르고 열매가 주렁주렁한 강변에 심기운 나무와 같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누가복음 15:29)

8/12/2011

인간심리 25가지 법칙

1. 우연의 법칙(The Law of Accident)
실천에 실패한 것은 실패하도록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2. 축적의 법칙(The Law of Accumulation)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축적된다. 모든 것이 해당된다.

3. 인력의 법칙(The Law of Attraction)
나는 살아있는 자석이다. 그래서 내가 주로 하는 생각과 조화를 이루는 환경과 사람들을 내 인생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4. 신념의 법칙(The Law of Belief)
내가 감정을 가지고 무엇을 믿든 그것은 나의 현실로 된다. 나는 항상 내 신념과 일치하게 행동한다.

5. 인과의 법칙(The Law of Cause and Effect)
내 인생의 모든 결과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실패는 우연히 발생 하지 않는다. 성공 역시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6. 보상의 법칙(The Law of Compensation)
항상 내가 하는 일과 똑같은 방법으로 보상받는다.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받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할 것이다.

7. 집중의 법칙(The Law of Concentration)
내가 무엇이든 자꾸 생각하면 그것은 현실로 자란다

8. 통제의 법칙(The Law of Control)
내가 내 삶을 통제하는 정도에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느낀다.

9. 상응의 법칙(The Law of Correspondence) 안에 있는 대로 밖으로 표현된다. 나의 외부세계는 나의 내부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10. 창의성의 법칙(The Law of Creativity)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 나의 아이디어가 계속되는 이상 나의 잠재능력도 한계가 없다.

11. 감정의 법칙(The Law of Emotion) 
모든 결정은 감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의 강한 감정은 약한 감정을 지배하고 내가 하는 일을 결정한다. 

12. 기대의 법칙(The Law of Expectations) 
기대한 만큼 얻는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것을 얻는다.

13. 표현의 법칙(The Law of Expression!!!!!!) 무엇이든 감동을 받은 만큼 표현된다.

14. 용서의 법칙(The Law of Forgiveness)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나는 남을 용서할 수도 있고 나에 대한 불평쯤은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15. 습관의 법칙(The Law of Habit) 
특별히 바꾸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전에 가려는 방 향으로 계속 가려는 경향이 있다. 95%의 일이 습관적으로 행해진다.

16. 우회노력의 법칙(The Law of Indirect Effort)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직접적으로 빨리 가기보다는 간접 적으로 옆으로 돌아가서 뭔가를 이루려는 경향이 있다.

17. 보상 이상의 법칙(The Law of Overcompensation) 
항상 당신이 받을 것보다 더 많이 하라.

18. 반복의 법칙(The Law of Practice) 
무엇이든 계속 반복하다 보면 이것은 새로운 습관이 된다. 새로운 습관은 개발되기 위해 약 21일이 걸린다.

19. 보답의 법칙(The Law of Return) 
봉사를 통해 뭔가를 준 만큼 보답이 있다.

20. 전환의 법칙(The Law of Reversibility) 
객관적인 현실이 주관적인 감정상태를 만든다.

21. 봉사의 법칙(The Law of Service) 
내가 봉사한 일정한 가치만큼 정확하게 내 인생에서 보상을 받는다.

22. 인과응보의 법칙(The Law of Sowing and Reaping) 
항상 내가 한 일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상 받는다.

23. 잠재의식 운동법칙(The Law of Subconscious activity) 
잠재의식은 나의 말과 행동을 나의 자아개념과 일치하도록 만든다.

24. 대체의 법칙(The Law of Substitution) 
우리는 하나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 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번에 한가지만 담아둘 수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으로, 원하지 않는 것들에서 원하는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다.

25. 용불용설의 법칙(The Law of Use) 
나의 재능, 능력등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고 개발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