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2011

세상교회로부터 나오라!(1)


이 글은 세상교회에서 허덕이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방황하던 중 종교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쓴 글이다. 여기서 세상교회란 타락한 라오디게아를 말하며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으나 소경된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소경이 되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보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
하나님은 바벨론을 떠나 하란 땅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그리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그의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가나안 즉 그리스도를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다. 하란은 육신적인 세상을 말한다. 육신적인 삶을 살아온 아브라함에게 사람은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삶이 필요함을 알게 하여 주셨다. 

그러나 야곱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육신의 배고픔으로 애굽으로 들어갔다. 애굽은 세상을 말한다. 하란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세상을 말한다면 애굽은 먹고사는 세상, 세상 명예와 지위까지를 포함한 세상을 말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러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고 세상 속에 있는 약속의 자손을 하나님 안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 심판을 당하게 되며 약속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겪었다. 바벨론에서 70년간 바벨론 왕을 섬겼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교훈이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세상, 즉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영 안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갔음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함은 함은 육과 혼으로부터 나와 영 안으로 들어간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하나님 나라에 산다고 할지라도 합당한 신앙생활과 삶이 없다면 바벨론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바벨론으로 끌려가도록 하게 하셨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타락한 세상종교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교회 안에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세상종교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빌라델비아 교회일지라도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는 것이다. 거창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한낱 세상종교에 불과하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곧 바벨론이다. 타락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본래부터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니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스스로 빌라델비아라고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고 부족할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계3장).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의 종살이를 해야 했는가. 왜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로 타락하는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각 이전의 과거는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 시간이 중요하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 험악한 강도였다고 하여도 지금 이 순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신다. 십자가 위의 강도가 그랬다. 그가 과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지만 회개했을 때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지난 2천년 역사에 나타난 교회들 중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교회들은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그들에게도 회개할 기회와 말씀을 주셨다. 언제든 회개하고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누구든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다(계 3:20). 주님을 찬양한다. 과거에 아무리 말씀에 충실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교회였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 교회가 주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면 그들은 타락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주님 앞에 신실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타락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근본 이유 
그러면 왜 빌라델비아가 라오디게아로 전락하는가? 근본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기업이 되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으셨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왕으로 달라고 외쳤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앉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그를 섬기기를 원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는 근본 원인은 사람이 왕노릇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곳이라고 생각지 말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람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 생긴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그곳은 라오디게아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빌라델비아가 어떻게 라오디게아가 되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한 때 말씀이 충만했던 신실한 교회였을지라도 순식간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즉시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달라고 요구하여 세운 것이 사울이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면서 겉으로는 그 위세가 크게 떨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된 이후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다윗과 솔로몬이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이스라엘은 타락해 갔다. 겨우 1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라가 분열되고 왕과 백성들은 타락의 길로 전락하였다.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세움을 받은 이후 얼마는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교회가 크게 번성하고 성장한다. 사람의 속성이 교만 아닌가. 교만이 드러나고 다윗의 아들들이 다투듯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지듯 교회 안에서도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건축하시고자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란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면 그는 반드시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사람이 왕을 세움으로서 교회가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말씀)을 잃어 버리는 즉시 사람을 잃어 버린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게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말씀이신 하나님대신 사람을 왕으로 삼는 즉시 이런 일이 잉태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 상 8장 4절부터 5절까지 보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 빠졌고 타락하였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도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아부 당연한 것이다. 

사무엘은 이미 늙었고 그의 아들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믿고 기대할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왕(사람)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을 부르는 곳은 이미 하나님을 잃어 버린 교회인 것이다. 사람을 쳐다보고 높이는 신앙생활은 사단(왕)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고 만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지 못하고 사람의 말이나 계획이 앞서게 되면 인생들은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발언권이 높은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발언권이 없는 하나님이 떠난 곳이다. 때로는 이러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지 못하는 일이 많다.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한다. 평생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두고도 새로운 옷을 사기 위하여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을 버릴 수가 없다. 

때문에 장래가 보장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거나 소속되고 싶은 것이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뛰어다니며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모두 이를 위한 것이다. 세상에는 큰 사업체를 벌여 이러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 큰소리치고 사는 곳이다. 이것이 세상이며 세상은 사람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받드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른다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저들이 이를 더욱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늘 먹을 것과 입을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하나님도 믿고 세상도 믿는 혼혈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먹이고 대신 앞서 싸우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 줄 왕을 주소서라고 했다. 세상사는 방법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씀이 인도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말씀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면 누구나 이럴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이런 요구를 한다. 이것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것은 말씀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런 세상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교회 스스로가 세상과 짝하는 일을 벌이는 것이다. 사단은 결코 기회를 잃지 않는다. 능력을 가장한 왕을 세우고 백부장과 천부장을 세워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세상=바벨탑)에 열심을 내게 만든다. 창세기 11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자! 무엇을 하자"라는 식의 구호가 들어온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2-4) 

사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만든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그리고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의 시험이 6천년 전 하와가 당한 일이라고 생각지 말라. 바로 이 시대에 있는 일이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하지만 이미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조직이고 인간적인 열심이 있을 뿐이다. 인간조직은 경쟁을 조장하며 필연적으로 시기와 질투가 따른다.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과거 2000년 교회사가 그랬다. 

이스라엘이 왕과 나라를 세운 것은 사람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이름으로 세운 사람의 나라이다. 나라에는 많은 계급이 있고 심지어 노예도 있다. 사업이 있고 열심이 있다. 그로 이름을 내고 흩어지기를 면하고자 하는 바벨탑을 세운 것이다. 바벨탑은 육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쌓아올린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흙덩어리(육체)이다. 

장래가 보장될 것 같은, 보이는 사업체나 거창한 교회건물일 수 있다. 바벨탑은 노아의 심판을 면한 사람들의 후손이 쌓은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였지만 죄 가운데 타락한 사람들이 바벨탑을쌓는 것이다. 그 바벨탑은 흩어짐을 면하고자 쌓은 탑이다. 타락한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 보라. 바벨탑을 쌓을 때 들어간 자기 공력(물질)은 다음 이야기이다. 타락한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심판을 면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케 하는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교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타락하여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대신 앉아서 바벨탑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락한 교회는 반드시 바벨탑을 쌓게 되어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게서 바베론 땅으로 끌어다가 바벨론성을 쌓게 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바벨론성이 타락한 교회가 세우고 벌리는 인간들의 사업들이다. 거창한 예배당 건물을 세우거나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들이 타락한 교회가 세우는 바벨론성이다. 바벨론성을 짓는데 엄청난 노력과 힘을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바벨탑을 쌓기위해 헌물한 그것들이 얼마나 부정한 것이었는가를 알면 그곳에서 쉽게 나오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들이 쌓은 바벨탑이 바벨탑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묶여 있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날(숫자로 70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70년간 종살이를 했다)까지 즉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르시는 날까지 그들은 그곳에서 바벨탑을 쌓으며 그곳의 왕을 섬기며 살 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만 그러나 바벨탑은 흩어지지 못하게 한다. 교회가 타락의 길에서 쌓은 바벨탑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사무엘 상 8장 6-7절을 보자.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6-7)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저들이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으셨던 것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가운데 섬기는 그들의 왕이 되시고 싶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즉시 세상 왕을 섬기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그리스도)에서 쫓아 바벨론(세상교회)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벨탑은 진흙과 역청이 많이 있는 바벨론에 가서 쌓을 수 있는 일이다. 바벨탑은 육체적인 타락과 사람이 왕노릇하는 흙과 변질된 더러운 기름(악령)이 많은 바벨론 땅에서 쌓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간 원인이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는 힘들다. 내게 당장 유익하고 좋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기대를 한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왕을 섬기는데 마음이 있을 뿐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사단이 교회를 부패하게 하는 가장 간교한 방법은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곳을 떠나셨기 때문에 사단이 들어와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사단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간교한 자들을 왕의 주변에 끌어들인다. 교회 안에 인간왕국이 금새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왕국이 세워졌으니 장관도 차관도 있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세상 직책이 들어온다. 형제라는 호칭이 사라진다. 하나님 말씀대신 사업이야기가 관심거리이다. 왕의 집이 성전이 되고 주님의 성전은 제사장들이나 머무는 곳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인지 사람을 섬기는 교회인지 세상사업을 하는 교회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미 바벨론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진정 섬기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다. 사람을 섬기고 교회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왕의 나라 일에 충성하는 일은 사단에게 부역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는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말씀한다. 사무엘 상 8장 1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이다.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삼상8:10-18)   

타락한 교회의 실상
이 말씀이 사무엘 선지자 자신의 얘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왕이 너희를 다스릴 때 이러할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들어 보라. 어디 조금이라도 틀린 구석이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한 것은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대신 싸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삼상 8:20). 하나님이 언제나 이스라엘의 앞에 서서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들어보자. 

10절에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라고 하셨다. 너희 아들들을 대신하여 싸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아들들로 자기 병거와 말을 끌게 하고 왕의 병거보다 앞에 나가서 싸우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왕의 말을 끌며 왕의 앞서 나가 세상일을 대신하느라 정신이 없다. 왕은 제 손가락조차도 꼼짝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왕노릇 하는 사람들의 자동차를 끌어주고 그들을 대신하여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까지 교회가 도맡아 하는 것이다. 교회안의 일을 왕의 이름으로 그들의 아들들이 하고 있다.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라 했다. 교회와 교회의 사업에 얼마나 많은 직위와 직책이 있는가 보라. 교회 안에는 형제만 있으며 어떤 차별도 없다. 그러나 세상 교회 안에는 많은 직위와 직책으로 형제를 가르고 차별하며 계급이 있다. 

목사, 부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가 있다. 천주교는 한술 더 뜬다. 교회 안에 종이 생겼으며 명령하는 자들이 있다. 무엇이 세상과 다른가. 회장, 사장, 부사장, 이사, 부장, 차장, 과장, 대리, 도대체 몇 계급인가. 이것이 바벨론이며 세상교회이다.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종교이다. 하나님 안에는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다는 성경말씀(골 3:11)은 예배당 안에나 있는 말씀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말씀은 내 것이고 불리한 것은 남의 말이다. 

또 보자.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왕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취하여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한다. 세상 교회의 왕들은 교인들에게 자기 사업을 돕게 하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추수와 그리고 자기가 손수 쓸 일용품까지 모두 교인들에게 하게 한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불러 자기 사업을 돕게 하고 심지어 교회의 돈을 가져다가 그의 이름으로 사업체를 벌려 그 이익을 갈취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라고 말씀하신다. 또 딸들까지도 취하여 자기와 자기 집을 아름답게 꾸미게 만들고, 자기 음식을 만들게 하며 자기 집에 오는 손을 대접하게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돈을 내어 교회의 왕과 왕의 집을 꾸미며 음식을 해 먹이고 가정부처럼 일하고 있는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가 이들의 먹을 것을 해결하고 담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경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봉사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 봉사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라는 말씀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교인들의 소유와 돈을 취하여 자기 수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 위치와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얼마나 얘를 쓰고 있는가. 이런 일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걷은 돈들을 수족들에게 자기 것과 같이 준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벨론 교회, 즉 세상종교가 하는 일이다. 이들이 십일조를 취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하면 종교가 된다. 교회는 하늘나라에 속하며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나 종교는 세상에 속하며 그 주인은 사람인 것이다.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왕들의 곁에는 언제나 미인 궁녀가 있다. 미인이 아니면 왕을 수종들 자격도 없다. 세상종교는 우리의 아름다운 형제 자매들을 종같이 부리고 그들의 십일조까지 취하는 염치없는 일을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가당한 일인가 생각해 보라. 이것은 세상 시장바닥에서조차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18절에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왕을 택한 교회의 백성들이 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있으나 그 때는 하나님이 응답치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곳에는 언젠가 그 날이 있기 마련이다. 왕의 부정한 것이 드러나는 그 날이 있다. 분란이 생기는 그 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분란과 부르짖음에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분란을 일으켜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날이 될 때까지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한다. 징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응답치 않으시겠다고 하시지 않는가. 유야무야 되고 만다. 이것이 바벨론, 세상종교의 모습이다. 세상 임금은 사단이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종교에 빠지면 필경 이런 비참한 과정과 삶을 살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종교인 것이다. 비참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곳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시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주님이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소경이라고 말한 것을 모르고 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눈먼 소경을 가리켜 소경이라고 불렀는가. 아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가 설혹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합당한 신앙생활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바벨론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참으로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하나 덧붙인다면, 전쟁에서 포로로 한 두 사람이 잡혀가는 경우가 많은가. 단체로, 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과 같이 단체적인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다. 한번 끌려가면 쉽게 나오지 못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한다. 

그러나 그 탈출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땅에서 70년을 포로생활을 했다. 사람이 세상종교의 포로가 되면 상당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세상종교에 빠져있는 친지를 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애태우는 것을 본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다. 쉽지 않다. 그들 스스로 종교의 포로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단체적인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 주신다. 단지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전체가 포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했다면 결코 바벨론과 같은 세상종교에 빠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앞에 그래도 신실한 남부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가증스런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리아에 일찍 멸망을 당했지만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신실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약속의 말씀(성전)이 없는 교회는 포로가 될 수도 없다. 그래도 말씀이 있다고 자부하는 교회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말씀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흩어질 수 없다는 자만(自滿)이 하늘 꼭대기에 이르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말씀의 반대편에 있다.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세상으로 들어가는지 주안에 있는지 분별하지 못한다. 세상은 육이며 흑암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곳이다. 빛이 없기 때문이다. 분별하지 못한다. 스스로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벨론은 육신을 가르키기도 한다. 육신가운데 빠지는 것이 바벨론이다. 영이 더러워진 곳이다. 그래서 바벨론으 흙과 역청기름이 많은 곳이다. 자기 생각과 육신의 안일함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는 것 또한 바벨론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합당한 신앙생활 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육신을 좇는다면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으로부터 나올 때 볼 수 있는 비밀이다.    

세상교회의 포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사람을 왕으로 택하였다(삼상 8:19-20).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일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겠는가. 사람의 근본이 죄 덩어리이며 종국은 멸망으로 가는 길에 있다. 멸망으로 가는 길에서 넘어지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사울의 궁전은 뻔질나게 들랑거려도 성전의 제사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일이 먼저이고 교회는 나중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제사가 폐지되는 위험에 처하였다. 

구원받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생활에서 멀어지면 사단의 꼬임에 넘어지기 쉽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기와 방패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어두움에 빠지고 범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은 사람을 세상의 종이 되도록 버려 둔다. 

바벨론의 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붙들고 있지 않고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허전하다.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얼마나 충만한 감이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방황하게 된다. 어두움 가운데서 더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안심이다. 그러나 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라오디게아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라오디게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이 사람을 왕으로 선택했을 때 그 신실한 사람 또한 이스라엘 왕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리가 유다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과 같이 자기도 모르게 타락한 라오디게아의 충복이 되는 것이다. 열왕기, 역대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잃고 죄와 우상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세상종교에 빠진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여 종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세상종교의 종이 되는 것이다. 약속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종이 된 것과 같이 구원받은 우리 또한 세상 종교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며 불러도 응답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이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바벨론 우상의 전에 드리는 예배일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 39장을 보자. 이사야 39장은 이스라엘이 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는가 그 원인을 말씀하고 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1-7) 

성경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스라엘 히스기야 왕이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는 얘기를 듣고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글과 예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 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다.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이 보여준 것 가운데는 은 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이 들어있다. 여기 성전을 보여 주었다는 말은 없으나 이들 물건은 성전 안에 있는 기명들이다. 성전을 거명하지 않은 것은 성전은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기를 통해 여러 왕들이 우상으로 성전을 더럽혔고 퇴락하여도 수축하지 않았다. 겉모양은 있어도 실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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